도협총설 陶峽叢說 12~ 18
12. 춘추 시대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고 간언(諫言)하고 진언(進言)한 말들은,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대체로 도리에 근거하고 실제가 없는 빈말이 아니며 분명하게 조리가 있어서 읽어보면 기뻐할 만하니, 성주(成周)의 문(文)을 숭상했던 정치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이르면 그 말들이 괴이하고 허탄하고 교묘히 속이며, 남을 기만함으로써 이기기를 힘썼다. 전국 시대가 춘추 시대와 시기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데도 습속(習俗)의 변천이 마침내 여기에 이른 것은, 주(周)나라 왕실이 장차 멸망하려 함에 문(文)이 도리어 폐해를 낳아서 형세가 자연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 개탄스러울 만하다.
13. 《주례(周禮)》에 〈동관(冬官)〉이 빠져 있었는데, 한(漢)나라가 건국되자 천금(千金)의 현상금을 내걸고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지금 보충된 〈고공기(考工記)〉는 한나라 유자(儒者)들이 지은 것인데, 그 문장은 사람을 고무(鼓舞)시켜서 글을 읽다보면 정신이 왕성해짐을 느끼게 된다. 대저 고문(古文)은 법도(法度)가 없는 듯하면서도 절로 법도에 맞아서 도끼질과 저울질한 흔적이 없으니, 후세에서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문장이 훌륭하긴 하지만 문장을 얽어내고 안배(安排)한 흔적을 많이 볼 수 있으니, 이는 시대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14. 십삼경(十三經)은 첫 번째가 《주례(周禮)》이니 한(漢)나라 정현(鄭玄)이 주(註)하였고, 두 번째가 《주역(周易)》이니 위(魏)나라 왕필(王弼)이 주하였고, 세 번째가 《모시(毛詩)》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네 번째가 《상서(尙書)》이니 한나라 공안국(孔安國)이 주하였고, 다섯 번째가 《논어》이니 위나라 하안(何晏)이 주하였고, 여섯 번째가 《맹자》이니 한나라 조기(趙岐)가 주하였고, 일곱 번째가 《춘추좌전(春秋左傳)》이니 진(晉)나라 두예(杜預)가 주하였고, 여덟 번째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니 한나라 하휴(何休)가 주하였고, 아홉 번째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니 진(晉)나라 범녕(范寗)이 주하였고, 열 번째가 《예기(禮記)》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열한 번째가 《의례(儀禮)》이니 정현이 주하였고, 열두 번째가 《이아(爾雅)》이니 진나라 곽박(郭璞)이 주하였고, 열세 번째가 《효경(孝經)》이니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주하였다.
주자(朱子)가 전주(傳註)를 지은 뒤로 여러 학설이 모두 폐기되었는데,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옛 주석들이 비록 엉성하고 잘못되고 뒤섞인 것들이 많지만 고대(古代)와 시간적으로 가깝고 해석한 바가 또한 자못 경전에 근거하였으니, 요컨대 전부 폐기해서는 안 된다.
내가 경서(經書)를 읽을 때에 집에 보관하고 있는 이러한 책들을 간혹 취하여 참고하여 증험해보니, 주자의 주설(註說)이 완벽하여 깨뜨릴 수 없는 것임을 더욱 믿게 되었고, 이들 주석서들 또한 다문(多聞)에 도움이 되어 이것들을 가지고 견해를 넓힐 수가 있었다.
15. 주자의 저술(著述)은 경서의 전주(箋註)를 제외하고는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이 가장 위대한 책이다. 《소학》은 명칭만 남고 책이 없어진 지 오래였는데, 주자가 고금의 여러 책들에서 채록하고 편마다 보충하여 절목(節目)이 모두 구비되고 규모가 광대하니, 비단 초학자들이 행하고 익힐 뿐 아니라 배우는 자들이 종신토록 체행하더라도 다할 수 없다.
《근사록》은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 정자(程子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장자(張子 장재(張載))의 아름다운 말씀과 격언을 모아 분류하고 번갈아 기재하여 체(體)와 용(用)이 서로 포함되고 조리(條理)가 관통하니, 실로 사자(四子 사서(四書))의 우익(羽翼)이요 도학(道學)의 중요한 열쇠이다. 아! 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위대한 편찬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내가 젊었을 적에 일찍이 《소학》을 배우고 익혔으나 힘써 익히지 못하였고,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또 읽어보았으나, 일이 촛불을 밝히는 것〔炳燭〕과 같아서 더더욱 말할 것이 없다.
《근사록》은 말년에 두세 번 읽어보았고 평상시에도 늘 보고 생각하였으나, 또한 입두처(入頭處)가 있지 않아 끝내 곤궁한 집에서 슬퍼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16. 《심경(心經)》은 진서산(眞西山)이 편집한 것인데, 이는 진서산이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을 적에 옛 성현들의 심학(心學)에 관한 문자를 모아 한 책을 만들어 스스로 살피면서 힘쓸 자료로 삼은 것이다. 진서산은 또 고인(古人)들이 백성을 기르고 정사를 베풀었던 일을 모아서 《정경(政經)》을 만들었다.
이 두 책은 당시에 처음부터 세상에 함께 전해졌는데, 《심경》은 이미 명(明)나라 정민정(程敏政)의 주석을 거친데 반해, 《정경》은 후세의 수령(守令)들이 고을을 다스린 행적을 넘지 못하여 그리 볼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결국 전해지지 못하고 《심경》만 전해졌으나, 또한 크게 유행되지는 못하였다.
퇴계(退溪) 선생께서 우연히 역려(逆旅 여관)에서 《심경》을 보고는, 기뻐하여 맨 먼저 이 책을 들어 표장(表章)하여 “사서(四書)와 《근사록》보다 못하지 않다.”라고 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근사록》과 함께 나란히 일컬어졌으니, 이것이 전후로 이 책이 유행하고 침체하였던 대략의 내용이다.
이 책이 비록 늦게 나왔으나 심학공부(心學工夫)에 있어서 매우 요긴하니, 배우는 자가 어찌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은 바로 인(仁)과 의(義)를 배우다가 잘못된 자들이니 반드시 자신이 이단(異端)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로 인한 유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에 이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맹자(孟子)께서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계책을 세워서 온힘을 다하여 이들을 공격한 것이다.
정자(程子)가 “양주와 묵적은 본래 인의(仁義)를 배웠는데 후세 사람들은 인의를 배우지 않으니, 후세에 배우는 자들은 또 양주와 묵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양주와 묵적의 잘못은 맹자의 지적을 받았으나, 후세 사람들은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잘못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옳다.
후세에 학문을 하면서 문로(門路)가 잘못되고 편벽된 자를 또한 어찌 다 셀 수 있겠는가.
18. 사마공(司馬公)의 기국과 도량은 범 문정(范文正)과 한위공(韓魏公)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남의 말을 수용하는 도량은 또한 이들만큼 컸다.
정자(程子)가 범요부(范堯夫)와 말씀하게 되면 열 건 중에 다만 서너 건만을 의논할 수 있을 뿐이었는데, 사마공과 말씀하게 되면 번번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시고는, “군실(君實 사마광의 자)은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일 줄 알아 귀에 거슬려하지 않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온공(溫公)은 성실하여 자신과 남과의 간격이 없었으므로 능히 이와 같았으니, 요부는 참으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규모는 비록 좁았으나 요부 또한 자신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였다.
옛 장수가 막 별세하였는데, 요부가 새로 부임하여 풍악을 울리고 장교들에게 크게 연향을 베풀었다는 말을 듣고, 정자가 이 일의 불가함을 지적하여 말씀하자, 요부는 곧바로 감탄하며 말하기를,
“선생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이러한 말씀을 듣겠습니까?”
하였다. 이 일이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실려 있으니, 요부와 같은 사람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春秋之際。諸人論諫陳說之言。無論其言之是非。大抵根據道理。不爲無實之空言。粲然有倫。讀之可喜。成周尙文之治。於斯可見及至戰國之世。其言率多 譎詭變詐。務以誑人取勝。去春秋之時不甚遠。而習俗之遷流乃至於此。盖周室將蹶。文反生弊。其勢自不得不如此耳。可慨也夫。周禮冬官闕。漢興。以千金購求。不能得。今所補考工記者。漢儒作也。其文鼓舞。讀之。覺神王。大抵古文。如無法度。而自合法度。無斤錘之痕。非後世可及也。如韓,歐文章高矣。結構安排之跡。森然可見。此時代之辨也。十三經。一曰周禮。漢鄭玄註。二曰周易。魏王弼註。三曰毛詩。鄭玄註。四曰尙書。漢孔安國註。五曰論語。魏 何晏註。六曰孟子。漢趙岐註。七曰春秋左傳。晉杜預註。八曰春秋公羊傳。漢何休註。九曰春秋穀梁傳。晉范寗註。十曰禮記。鄭玄註。十一曰儀禮。鄭玄註。十二曰爾雅。晉郭璞註。十三曰孝經。唐玄宗註。自朱子作傳註以後。諸說盡廢。以今見之。舊註雖多疎謬踳駁。而去古爲近。其所解釋。亦頗有經據要。不可一切掃去之也。余家藏此書。讀經書時。間取而參驗之。益信朱子註說之攧撲不破。而亦可以資多聞而廣知見矣。朱子所著述經書箋註外。小學近思錄爲最大書。小 學有其名而無其書久矣。朱子乃採取古今諸書。逐篇補入。節目備具。規模廣大。非但初學之所服習。學者終身體行。亦有不能盡者。近思錄裒聚周,程,張子嘉言格論。分類互載。體用相涵。條理貫通。實四子之羽翼而道學之要鍵也。噫。非朱子。安得成出此大編纂哉。余少時。盖嘗學習小學而不能着力。在謫。又讀之而事同炳燭。尤無可言。近思錄晩讀數三過。尋常玩繹。而亦未有入頭處。終爲悲歎窮廬之人。負愧而已。心經眞西山所輯。而盖於從仕在朝時。輯古聖賢心學文字爲一書。以爲自省用力之地。又取古人牧民施政之事。爲政經兩書。當時固並傳。而心經則已經明人程敏政之註釋。政經不過後世守令理郡之蹟。無甚可觀。故仍遂不傳。心經獨傳而猶未大行。退溪先生偶見於逆旅而喜之。首起而表章之。以爲不在四子近思錄之下。由是世輒與近思錄並稱。此其前後此書顯晦之大端也。此書雖晩出。於心學工夫。甚爲要緊。學者其可不刳心於斯乎。楊墨是學仁義而差者。非必自身爲異端。其流弊當至於無父無君。故孟子爲拔本塞源計。攻之不遺餘 力耳。程子言楊墨本學仁義。後人乃不學仁義。後之學者。又不及楊墨。但楊墨之過。被孟子指出。後人。無人指出。故不見其過者誠是。後來爲學問而門路差偏者。亦何限也。司馬公器量。不及於范文正,韓魏公。然容受之量亦大。程子與范堯夫言十件。只爭三四件。與司馬公言。輒盡言之曰。只爲君實能受人言。不以爲忤。此最好處。盖溫公誠實無物我。故能如此。堯夫固不及也。堯夫規模雖狹。亦喜聞過。程子聞其張樂大饗將校於舊帥新亡時。斥言不可。便嗟歎曰。非先生。安得聞此 言。事載二程全書。亦不易得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