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과 이해
3218 최승주
<intro>
사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선과 관점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이 관점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관찰하며 생각하고 판단을 한다. 그러고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리고는 한다. 혐오심을 가질 수도 있고 애정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한 결론은 행동으로 표현되고 표출된다. 여기서 우리가 하는 생각과 판단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관점이 기반이 된다. 나도 나 자신의 관점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였다. 언제나 이해의 기준은 나였고 내 가치관이었다. 난 동성애를 혐오하며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차별하고 멀리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고와 행동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한 후에 나는 나 자신을 바꾸고 싶었지만 굳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와 같은 나를 혐오하였다. 이 글은 심각한 자기혐오에 빠져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이 싫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변화의 시작>
이해에 관한 생각이 천천히 피어난 계기는 <인간 실격>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이다. 아마도 이 책은 많은 사람이 읽어봤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요조는 사회성과 거리가 멀다. 그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을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들이 일반적이라고 부르는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요조는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였고 항상 자신을 숨겼다. 그렇게 그는 불행하고 암울한 삶을 살았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요조의 인생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중 어린 시절에 겪은 사람들이 그를 이해했다면 그를 숨길 필요도 그가 불행한 사람일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이 순간부터 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환점>
물론 나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누군가를 싫어했고 그런 내 생각들이 검게 물든 채로 나와서 누군가의 삶에 묻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내가 나무를 뽑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영화 <괴물>을 보았을 때이다. 이 영화는 나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이 영화에는 엄마, 선생님, 아이들이라는 3가지 관점에서 사건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인 아이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한다. 선생님은 매우 나쁘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관점이 바뀌면 또 다른 생각이 들게 된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결론에 도달했을 땐 영화가 나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나라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이 영화에 범인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난 1시간 동안 범인을 찾고 있었다. 아마 범인을 찾고 그 사람의 탓을 하면서 책임을 전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편안해했을 것이다. 아마도 진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내가 인간이란 이유로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 영화의 3가지의 관점 역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르게 보면 다르게 보였다. 관점이 바뀌면서 내가 몰랐던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나면 내 생각은 바뀌었다. 관점이 더해질수록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어떤 사람을 보는 관점이 넓어지면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 새로운 나무가 되어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본 것처럼>
보통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탓이었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며 사는 삶은 어려웠다. 나에게 보이는 것은 어떤 이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 사람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점들을 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싶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해하고 싶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나의 관점에서 나쁘게 보이거나 나를 힘들게 하거나 내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관점을 넓혀 보며 그저 이해하고 싶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그사람의 행동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은 싫어하고 혐오하며 낙인찍는 것은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난 그 사람의 절반도 알지 못하면서 어떤 이를 혐오하면서 뒤에서 험담하며 나쁘게 말하고 차별해서 상처를 주는 것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이런 행동이 하나의 인생 하나의 생명 하나의 인격을 파멸시킬 수도 있었다. 나는 나의 지난날의 과오들을 후회했다. 또 괴로워했다. 내 생각 나의 말 내 행동 나의 인생이 혐오스러웠다.
<자기혐오>
인간은 나에게 역겨운 존재였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어떤 이를 혐오하며 공격하고 상처를 주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행위를 통해서 소속감과 쾌락을 느낀다. 인터넷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의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 온갖 인신공격을 하는 수많은 인간을 쉽게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나도 인간이었다. 나 역시 저런 짓을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하였다. 옛날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마 아무런 죄책감이 없이 저런 혐오스러운 행위를 했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싫었고 혐오스러웠다. 또 내가 했던 짓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나는 변화하고 싶었다. 그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을 혐오하면서 반성하였다. 나는 가끔 내방 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해보고는 한다. 내가 편협한 관점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행동했는가?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올바르고 곧게 나아가고 싶다.
<미결>
나는 가끔 떠올리는 말이 있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나쁜 상황이 있을 뿐” 아마도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로 기억한다. 저 말은 틀릴 수도 있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나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과 상황이 사람을 다르게 만든다는 점은 분명히 고려되고 이해되어야 했다. 즉 나는 내가 그 사람의 모든 시공간적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넓게 바라보며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 난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 나는 “그럴 수도 있지.”, “사정이 있겠지.”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이런 나의 바람은 쉽게 불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동성애를 혐오하고 무지한 사람을 싫어한다. 아직도 나는 누군가가 혐오스러울 때가 있다. 아직도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가끔은 편협한 관점에 갇혀 사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미결 사건이라고 한다. 내가 사람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태도는 평생 미결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사건이 내게 온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건은 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해결하고 싶은 꼭 잡고 싶은 미결 사건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결말이 있을 것만같은 미결 사건이다.
<마치며>
여지까지 넓은 관점을 가지고 이해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위해서 글을 적어 내려왔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읽는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이런 생각을 하며 살라는 말을 하는 결말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신 이 말을 하고 싶다.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 나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사과하고 싶다. 정말 미안하다고
첫댓글 최승주라는 인간을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 그리고 사과 해줘서 감사합니다.
무슨 상처를 받았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