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나가는 문
변혜정
주인공 안드레스가 실망한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모든 것에 감쪽같이 속은 기분을 느낀 안드레스는 오랜 친구인 개 세레사에게 고통스러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세레사는 안드레스를 위해 ‘모든 것이 진실인 세상’에 사는 쿼어티 아저씨를 불러온다. 비가 오지 않는데도 우산을 쓴 아저씨는 안드레스에게 “거짓말을 하루 동안 한 번도 안 하면 파란 문 안으로 통하는 ‘모든 것이 진실인 세상’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진실인 세상으로 떠나버리고 싶었던 안드레스는 꿈속에서조차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어려운 미션을 성공하기 위해 하루 종일 진실만을 말하며 고군분투한다. 아무리 난처해지더라도 진실만을 말해야 하다 보니 읽는 나도 함께 진땀 나는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내가 쿼어티 아저씨에게 제안을 받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어린 마음에도 거짓이 진실을 이기기도 한다는 사실을 적잖이 느낄 때가 있었다. 인기 많고 유명한 사회자 풀기타의 말에 상처받은 안드레스처럼 상대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말하는 어른들이 무척이나 실망스러웠을 때도 있었다.
그날 하루도 그랬다.
어린 시절,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인 것 같다. 그토록 따라가고 싶어 했던 아빠가 일하시는 회사의 ‘가족 야유회 날’이었다. 숙제도 잔소리도 없던 설레였던 하루. 푸르른 5월 야외에서 새로 만난 또래들과 맘껏 뛰어다니며 보물찾기까지 완벽했었다. 행사의 막바지 경품 증정식에서 시종일관 즐거움을 주던 멋진 레크리에이션 사회자가 경품을 받으러 기뻐하며 신나게 뛰어나간 나에게 “야, 너는 더 안 먹어도 되겠다”... 그 순간 이후의 시간은 슬로우 비디오처럼 어찌나 느리게 지나가는지... 모든 사람들의 웃음과 박수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모두의 조롱을 받은 것처럼 뒷 모습까지 굳어진 채로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지도 못하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귀까지 빨개져서 도망치듯 내려왔다. 안드레스처럼 눈물을 삼키며 돗자리로 돌아올 때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집에 가버릴 수도 없는데, 슬픔인지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감정들로 얼굴도 들지 못했다. 땅이 꺼질 것 같은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우리 돗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엄마는 “회장님도 계신 데,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니?”하고 야단을 치시며 화를 내셨다. 내 마음을 헤아려 주실 줄 알았던 아빠도 아무런 표정도 말도 없으셨다.
그날 어른들에게 느꼈던 표현하기 어려운 실망감은 세상에 대한 순수한 기대감도 부서지게 한 것 같았다. 마치 ‘세상의 어느 조각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듯이 울어 대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이런 어른들과 완전히 떨어져 다른 세상에 가서 살고 싶었다.
그 때 안드레스처럼 쿼어티 아저씨를 만나 진실만을 말하는 미션을 받았다면 안드레스는 못 했어도 나는 성공하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성적표에도 여러 번 적혀있을 만큼 누구보다도 과묵하고 순수한 고집도 있었기에 진실만을 말하거나 혹은 끝없는 침묵의 수행으로 결국에는 성공하고 성큼성큼 파란 문의 문턱을 쉽게도 넘었을 것 같다.
진실에도 감당해야할 큰 댓가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과묵하지도 그리 순수하지도 않은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어이없이 미션을 실패한 안드레스가 내뱉은 ‘정말 다행이다’라는 말이 이해되어 웃음이 나왔다.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오늘도 난 현실과 타협하고 편하게 살아간다. 하루 중 몇 번의 거짓?말을 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p.s
신비롭고 환상적인 낯선 이야기
비둘기 깃털과 아옐렌의 엉킨 머리에는 우리나라 옛이야기처럼 아르헨티나식 교훈이 담겨있었다. 환상과 신비로움에 기괴와 공포도 담겨있고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낯선 음식처럼 버무려져 즐겁다가 흥분되다 슬프다 당황스럽기도 했다. 신비롭고 환상적이지만 때론 불편하기도 한 내 감정은 문화적 배경 지식이 없어서일까?
정령 두엔데를 찾아보고 이 나라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자 머나먼 신비로운 나라에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첫댓글 안드레스에게 파란문의 세계를 이야기한 쿼어티 아저씨의 말은 정말 사실일까?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았을때 문득 파란문이 생각날 때가 있을것같다~
말은 댓글을 기대했는데 기다리면 올라오는거쵸? 발제글이 참 좋네요 뒤에 더 쓰셔도 될것같아요. 저도 표제작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저 문에서 세상으로 들어온 것같은 기분예요. 요즘. 모든것을 돈으로 치환하는 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살기 하는 것 같은 일상입니다.
발제글 감동적이에요. 저도 책 대출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어른들의 무분별한 평가의 말이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을 것 같아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이라 주제가 참 좋은 것 같아요. 읽고 싶게 만드는 동기부여를 뿜뿜 주시네요^^ 가끔 논현도서관에 가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면서 책도 빌리는데 아직은 없는 책도 있어서 신청중인데... 이 책도 없어서 신청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