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 피천득(1910-2007)
억압의 울분을 풀길이 없거든
드높은 창공을 바라보라던 그대여
나는 보았다
사흘 동안 품겼던 달걀 속에서
티끌 같은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을
실연을 하였거든
통계학을 공부하라던 그대여
나는 보았다
시계의 초침같이 움직거리는
또렷한 또렷한 생명을
살기에 싫증이 나거든
남대문 시장을 가보라던 그대여
나는 보았다
사흘 동안 품겼던 달걀 속에서
지구의 윤회와 같이 확실한
生의 生의 약동을!
통치자의 실정으로 온 나라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성탄절을 보냈다. 신으로 숭배 받는 황제였으며, ‘로마의 평화’를 실현한 가이사 아구스도가 통치하던 로마제국 시대에 개방된 하나님의 평화(눅 2:14)로 예수는 오셨다. 여리고 순한 생명을 보내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더하셨으나, 우리는 사악한 권력 앞에서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영적 의미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껏 공간신학과 신앙에 길들여지거나 갇힌 채 성서를 대하고 살아왔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무수히 추구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진리를 애써 외면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란 구절처럼 시간의 영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로 인해 순수한 생명의 시학에 눈을 뜨고 세상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순수하고 우아한 자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피천득 시인의 시를 통해 ‘생명에 대한 성찰’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어미 닭이 “사흘 동안 품겼던 달걀”이란 취소성就巢性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이지만 살아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채지 못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분해서 미칠 지경일 때, 실연당했을 때, 살기가 짜증날 때 “드높은 창공을 바라보라”고, “통계학을 공부하라”고, “남대문 시장을 가보라”는 일반적인 조언에 대하여 시인은 “생명”의 약동을 “달걀”이라는 작은 것에서 살아 있음의 의미를 깨닫는 자기 성찰(존재의 시간)을 보이고 있으니 놀랍기만 하다.
이렇듯 시인의 시는 성찰의 산물로써 누구나 쉽게 무릎을 치도록 만들어 내고 있다. “그대”가 권하는 말보다는 “나는 보았다”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경험적 존재이다. “또렷한 생명”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달걀” 속에 “심장이 뛰고 있는” “초침같이 움직거리는” 지구가 돌고 있는 “확실한/생의 약동을” 보았다는 우주적 존재에서 나를 찾는다.
어떤 생명이든 하찮게 대해서는 안 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명령’을 부여하셨다. 이 생명의 명령을 함석헌은 ‘지독한 생명의 명령’이라 했다. 이 지독한 생명의 명령을 스스로 부인하거나, 타자의 생명을 유린해서도 안 된다. 엘리엇 묘비명에 “내 끝에 내 시초가 있다”고 썼듯이 존재의 깊은 깨달음으로 2025년 희망의 새해가 밝아오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