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아래 도로는 넓으나 차량 통행이 거의 없다.
▲동물이동통로 주위에는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고 산수유, 조팝나무, 벌개미취 등이 보이는 데 동물의 이동을 도와 주는게 아니라 사람들의 산책코스로 만들어 놓았다.
▲우측에 e편한세상 세교아파트 뒤 잘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진행한다.
▲노적봉갈림봉. 지맥은 좌측 희미한 등로로 꺾어지고 우측은 노적봉으로 가는 길이다. 좌측 왕림고개로 내려가야 하지만 우측 산책로 따라 노적봉 2.3km정도 왕복한다.
▲노적봉 오름길 묘역에서의 조망: 봉담동탄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우측이 지나온 여계산이고...동탄메타폴리스 주복이 우뚝 솟아 보이고 건물 뒤로 한남정맥 석성산...여계산 좌측 어깨 쪽은 부아산이고 좌측으로 석성산까지 한남정맥 마루금. 한남정맥 마루금과 좌측은 향린동산에서 가지를 친 검단지맥 법화산쯤 가늠이 된다.
▲노적봉(露積峰160.3m): 경기도 오산시 서랑동과 화성시 정남면 고지리의 경계지역에 있는 산이다. 산의 형태는 노적가리(한곳에 쌓아 둔 곡식더미)와 비슷하다 하여 노적봉(露積峰)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여인이 단정히 앉은 모양’이라 하여 옥녀봉이라고도 부른다. 북쪽 산기슭 아래에는 1955년 축조한 서랑저수지가 보인다. 정상은 숲속의 조그만 공터에 삼각점(표시없음)이 있으며, 벤취1개와 운동기구가 있고, 숲속에도 벤취 하나가 있고 능선을 따라 가보면 서쪽 끝이 삼각점 공터보다 높아 보인다.
▲노적봉에서 산책로 따라 앞쪽으로 30m정도 더 진행하면 노적봉(160.9m봉).여기에 반바지님의 산패
▲노적봉에서 다시 갈림봉으로 되돌아간다.
▲판독이 불가한 노적봉 삼각점(160.3m,
용인312)
▲노적봉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바라본 독산성과 세마대: 독산(禿山)은 벌거숭이산, 대머리산 이라는 뜻이며 이 산에 삼국시대에 쌓 았다는 독산성이 있고 성의 정상에 세마대(洗馬臺)가 있는 독산은 독산성·석대산·향로봉 등 으로도 불린다. 독산성은 산에 성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향로봉은 멀리서 보면 향로처 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에 삼국시대 백제가 독산책(禿山柵)을 세웠다는 기록과, 독산성 안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약2000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고 성 둘레3,240m, 석축 약400m와 4개의 성 문이 남아 있다. 백제시대에 축조하여 통일신라·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1593년(선조 26) 7월 전라도 관찰사겸 순변사 권율(權慄)이 2만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친 것으 로 유명하다. 1594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인근 백성들이 합심하여 허술한 성의 모양을 다시 갖추고 1602년 변응성(邊應星)의 지휘 아래 다시 수축하였으며 1796년(정조 20) 개축 하였고 이 당시 성의 둘레는 1,800보(步), 4개의 문이 있었다. 한편 1593년 권율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은 벌거숭이산[禿山]에 축조한 이 성에 물이 없을 것으로 짐작하고 물을 부어 조선군을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장군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려서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 을 하자 왜군은 이에 속아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이곳을 세마대(洗馬臺)라 불렀다하며, 1592년 여기에 세마대를 세우고 병기창을 두고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으며 1957년 세마대 를 옛 자리에 복원하였다.
▲노적봉갈림길 삼거리로 되돌아와 우측 희미한 산길로 내려간다.
▲지맥길이 뚜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