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관리사무소로 내려선다.
▲망우리에 잠드신 순국선열비 앞 삼거리의 사진첩: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한용운과 오세창, 백치 아다다의 계용묵, 찔레꽃을 쓴 김말봉,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 방정환, 민족사학자 문일평, 종두법을 널리 보급한 지석영, 독립유공자 서동일, 오재영, 김정규, 유상규, 서광조, 장덕수와 독립유공자이면서 이승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된 진보당의 조봉암의 묘가 여기 있다. 또한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문인 박인환과 최학송, 작곡가 채동선의 묘도 여기에 있다. 도산 안창호의 묘도 처음에는 이곳에 있었으나 강남으로 이장되었다.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100여m 올라 우측 능선길로 올라간다.
▲조금 올라가면 Y자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올라간다.
▲묘지에 길이 보이지 않아 묘지사잇길로 희미한 발자국 흔적 따라 올라간다. ▲우측에 도봉산과 좌측에 북한산 인수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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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을 만나 좌츠으로 간다.
▲망우산 갈림길에서 좌측 전망대에 다녀오기로 한다.
▲망우리공동묘지에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독립애국지사를 비롯한 유명인사 17분이 잠들어 있 는 곳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한용운과 오세창,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민족사학자 문일평, 종두법을 널리 보급한 한글학자인 지석영, 독립유공자 서동일, 오재영, 김정규, 유상규, 서광조, 장덕수와 독립유공자이면서 이승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된 진보당의 조봉암 그리고 연세대 의대 전신인 세브란스 의 학전문학교 최초 한국인 교장을 역임한 오긍선,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문인 박인환과 최학 송 그리고 작곡가 채동선의 묘도 여기에 있다. 서울 사람들이 쉽게 구할 수 있던 묘 자리인 망우리공동묘지가 1973년 3월 25일에 2만8천 여기가 되면서부터 더 이상 이곳에 묻힐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1994년까지 주변의 산 자락을 잠식하며 계속 묘가 늘어나 약3만3천여기가 되자 서울시와 중랑구에서는 <망우묘지 공원 종합정비계획>을 발표하고 이장(移葬)과 납골(納骨)을 장려한 결과 2005년에는 1만7 천여기만 남게 되었고 해를 거듭할수록 그 수는 계속 줄고 있으며 지금도 이장을 하면 보조 금을 지급한다는 현수막이 입구에 걸려 있다.
▲역사의 전망대 (전망데크와 안내판)
▲우측 검단지맥 시종점인 검단산과 좌측은 천마지맥의 끝 예봉산 등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다시 망우산으로 간다.
▲이인성(1912,08.28~1950,11,04):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못한 가운데 정치가이자 화가였던 서동진(徐東辰)으로부터 수채화 지도를 받았 다. 1931년 일본에 건너가 1935년까지 머무르며 도쿄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 校)에서 데생과 그림 수업을 받았다. 대표작은〈경주의 산곡에서〉,〈가을의 어느날〉, 〈한 정〉 등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11살에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13살의 나이로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동진이 운영하던 대구미술사에서 대구미술사에서 일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대구의 미술가 단체 인 영과회, 향토회 등에도 참가했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이후 꾸준히 출품해 제10회부터는 연속 6회 특선을 받아 천재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제14 회에는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 제 16회부터 서양화부의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이 됐다. 1932년부터 일본의 다이헤이요(太平 洋)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일본의 최대 공모전인 제전 및 신문전에 입선했다. 추천작가가 된 이인성은 화단의 엘리트로서 지위를 굳혀갔다. 1940년에는 김인승, 심형구와 함께 추천작가 3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이화 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로 출강했으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을지 냈다. 6·25전쟁 당시 39세의 나이로 경찰관과 시비 끝에 총기사고로
사망했다.
▲ 망우리사잇길 소박한 안창호 묘터를 지나고
▲고개를 지나 소나무 숲 278.5m봉으로 올라간다.
▲우측 망우산3보루로 올라간다.
▲망우산3보루: 보루(堡壘)란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을 말한다. 고구려는 삼국중 가장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한 고구려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중국의 길림성과 요녕성을 포함하는 요동지방(요하의 동쪽)및 한반도중남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영토화함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가진 제국을 완성하였다. 영토 확장 과정 에서 고구려는 수, 당을 포함하는 중국의 여러 세력과 맞서 국토를 굳건히 지켜냄으로써 ' 한반도 고대사의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신라가 고대국 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고구려는 중국을 포함하여 멀리 서여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과 교류를 통하여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문화를 창 출하여,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호수'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호방한 고구려 문화는 백제와 신라에도 전해져 우리 문화의 원형을 이루었다. 고구려의 문화는 이웃 일본에도 전해졌으며 멸망 후 고구려의 문물과 제도는 한편으로 신라와 발해에 그대로 계승되었고, 다른 한편으 로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 말갈족의 여러 집단들에게도 전해져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호방한 문화를 창조하여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하여 민족의 위상을 뽐냈던 고구려는 고려로, 그리고 지금의 코리아로 이어져 왔다. 그 러나 고구려사는 주변국에 의해 왜곡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