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諱)는 호인(好仁)이고, 자(字)는 극기(克己)이며, 고령(高靈) 사람이다. 선공(先公) 휘 음(蔭)은 호남(湖南)의 장수현(長水縣)에 거주하면서 함양(咸陽)에 사는 장사랑(將仕郞) 이절(李節)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집안 사정으로 인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정통(正統) 을축년(乙丑年, 1445년 세종 27년)에 공을 낳았다. 공의 나이 18세에 임오년(壬午年, 1462년 세조 8년)의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었을 때에 공이 제자(弟子)의 예(禮)를 행하기를 고집하였으나, 점필재공이 그를 친구로서 대접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474년 성종 5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공은 아직 과기(瓜期, 임기)가 차지 못하였는데, 이때가 성종 5년이었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으나 어버이를 위하여 거창현(居昌縣)의 감무(監務)를 자원하였다. 선대인(先大人)이 별세하자 3년을 마치고 다시 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와서 교리(校理)를 거쳐 의성 현령(義城縣令)을 자원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세초(歲抄, 6월과 12월에 도목 정사(都目政事)에 대비한 인사 관계 보고서)로써 관리들이 저술(著述)한 바를 기록하여 바치도록 하였는데, 친람(親覽)한 다음에 문득 공을 포상(褒賞)하고 그 어머니에게 음식물을 내려 주자, 공이 전문(箋文)을 올려서 사례(謝禮)를 드렸는데, 그 글이 지극히 빛나고 아름다웠다. (현령(縣令)의 임기인) 6기(六期)가 차서 돌아와서 본관(本館, 홍문관(弘文館))에 근무하였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발탁되었으나 또 고향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원하니, 임금이 조정(朝廷)의 신하들에게 이것을 물었는데, 모두 말하기를, “유호인(兪好仁)은 나이가 많고 덕이 많으니, 마땅히 좌우(左右)에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으로서는 그로 하여금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오게 하여서 병(病)을 치료하게 하고 싶지만, 강제로 할 수는 없다.”고 하고, 어찰(御札)로써 전조(銓曹)에 명하기를, “유호인은 어버이를 섬길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인근의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제수(除授)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나, 전조(銓曹)에서 사양(辭讓)하기를, “궐원(闕員)이 없어서 가볍게 교체할 수 없으며, 나라의 이루어진 법령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얻어서 부임한 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관(官)에서 졸(卒)하니, 그때 나이가 50세였고, 갑인년(甲寅年, 1494년 성종 25년) 4월이었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특별히 별도의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는데, 이에 장례(葬禮)를 잘 치렀다. 공은 이민도(李敏道)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유환(兪瑍)은 임자년(壬子年, 1492년 성종 23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다음 유계(兪)는 어려서 죽었다. 딸들은 첨사(僉使) 박총(朴叢), 수재(秀才) 양응린(梁應麟), 생원(生員) 박눌(朴訥)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충성스럽고 효성스럽고 청렴하고 검소하면서도 속이 깊고 무거웠으며, 분별력이 있고 엄격하였다. 시문(詩文)은 고상하고 옛 풍치가 있었으며 필력(筆力)이 매우 힘찼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이 ‘삼절(三絶, 세 가지 뛰어난 재주)’이라고 칭찬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청빈(淸貧)하였고, 또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않았다. 점필재공의 문학과 덕행이 일세(一世)의 으뜸이었으나, 공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아! 공의 덕망을 알아보신 성명(聖明, 성종(成宗)임)이 공의 온축(蘊蓄)한 바를 시험하니, 몸을 굽혀 관부(官府)에 벼슬하기도 하고 사직하고 부모를 봉양하기도 하였으며, 또 끝내 지천명(知天命, 50세)의 나이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고 하겠다. 공은 임종(臨終)할 때에 맏아들 유환(兪瑍)에게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모름지기 임금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네가 만약 일명(一名, 처음으로 벼슬하는 일)을 얻거든 마땅히 내 말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은 뇌계( 㵢溪)에 집을 짓고 인하여 이것으로 호(號)를 삼았다. 유고(遺稿)가 몇 권이 있는데, 진사(進士) (유환(兪瑍)이) 그 동년배 여러 공들의 힘을 얻어서 군(郡)에서 간행하였다. 나 어득강(魚得江)이 진사와 동갑내기로서 공의 때묻은 원고를 훔쳐보았는데, 진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선묘(先墓)에 묘갈(墓碣)이 없으니, 내가 그 힘이 없는 것을 슬프게 여긴다.”고 하였다. 지금 내가 다행히 합천(陜川)에서 대죄(待罪)하고 있는데, 진사가 재료로 이것을 주어서 비석(碑石)에 기록하게 하였으므로, 영화로운 비명(碑銘)이 되지는 못하나, 사양하지는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오래 되었구나! 누런 황토여. 여기 흰 회벽(灰壁)에 묻힌 지 40년이 지나도록 다만 한 조각의 표석(表石)뿐이로다. 청묘(淸廟)의 제기(祭器)는 푸른 풀밭에서 나뒹구는데, 한 무리의 화기(和氣)가 따뜻하지만 두려움도 있도다. 덕행(德行)은 이미 갖추어졌고, 문장(文章)은 여사(餘事)이었으니, 한(漢)나라의 곽 유도(郭有道, 곽태(郭泰))와 송(宋)나라의 진 처사(陳處士, 진양(陳亮))와 같았네. 비석(碑石)이 비록 썩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만고(萬古)에 향기로운 이름은 남으리니, 내가 무덤에 아첨하지 않더라도 비명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누가 쓴 글입니가
안녕하십니까 ? 이선생님 ! 건강하시죠 ?
위 글 묘갈명은 경남 진주 출신의 어득강魚得江 선생이지은 갈명입니다.
이 분의 문집을 찾을 수 없어서 부득이 국조 인물고에서 갈명을 찾았습니다.
아래 자료를 참고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추후에 원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본관은 함종(咸從). 자(字)는 자유(子游), 호는 관포(灌圃)·혼돈산인(渾沌山人). 아버지는 훈도(訓導)를 지낸 어문손(魚文孫)이다.
1470년(성종 1)에 태어났다. 149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95년(연산군 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곡강군수(曲江郡守) 등을 거쳐서
1510년(중종 5)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518년에는 헌납(獻納), 1521년에는 교리가 되었고 1529년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549년(명종 4)에 상호군(上護軍)으로 사직한 뒤 벼슬을 하지 않고 진주로 내려가 살다가 1550년에 죽었다. 문장을 잘한다는 평이 있었
으며, 특히 농담과 수수께끼를 잘하였다고 한다. 과거에 오른 후로 여러 번 외직을 청하고, 성품이 담백하여 물러가기를 좋아하였다.
저서로는 『동주집東洲集』이 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진주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