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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남(Manifestation)
고린도후서 5장 9-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나타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두 번째 문장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라고 옮길 수 있는데, 그 “나타남"이란 단어가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단어입니다. 그 때는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이들이 그분 앞에 나타나고, 또 그분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후로 우리가 살아온 모든 길을 점검하시는 놀라운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그분이 자신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행해진 우리의 삶과 봉사의 모든 것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역사하신 결과로 이뤄진 모든 것을 하나 하나 셈하실 것이며, 그 모든 것에 대해 보상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 중 많은 이들을 특징지우는 이기심과 부주의함과 세속성과 영성의 결여를 다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어떻게 우리가 기회를 잃어버렸는지, 어떻게 우리가 좀더 충성치 못했는지, 어떻게 우리가 좀더 헌신적이지 못했는지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호소에 무관심했으며 그 모든 것으로 인해 그 날에 손실을 당할 것입니다.
이 주제를 생각나게 하는 여러 구절을 살펴보겠는데 먼저 위에 인용한 고린도후서 5장 9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에게는 목표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하든지 떠나든지", 즉 우리가 몸 안에 머물러 있든지 주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 본향에 가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쓴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에베소서 1장 6절의 유사한 표현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를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열납되게 하셨다"(우리말 성경에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라고 되어있음 - 역주)고 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실입니다. 아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세상 가운데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을 영접했습니다. 당신이 주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열납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이루신 사역을 근거로 당신을 영접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그분 안에서 열납되었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이런 뜻입니다. 즉 믿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에 주 예수님처럼 사랑스럽다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은 당신을 하나님께서 복스런 아들처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나는 성경에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성경에서 그것을 발견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나는 주 예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중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절)". 그것은 구주 자신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경험 여하와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요한일서에도 매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오래 전에 나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는 이 말씀을 읽고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어? 나는 아니야! 나는 거룩치 않아. 나는 주님처럼 의롭지 않아.
나는 주님처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사랑도 없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어." 나는 내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던 모습과 같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러하니라"고 했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날에는 그분처럼 될 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는 이 말씀은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했으며, 그 말씀은 나의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후에 하늘의 빛이 그 말씀에 비추어 그분이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개인적인 성장이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과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칭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의 열납됨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음을 깨달은 연후에야 비로소 이해가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그렇게 바라보십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러합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의 1절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 아들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온전한 신분을 소유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는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린도후서 5장 9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말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이제 바울은 우리의 행동, 우리의 실제 경험, 우리의 봉사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가 힘쓰고 있다. 우리가 지금 수고하고 있다.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한다. 우리가 날마다 주께 인정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주님의 인정을 원합니다. 당신은 안 그런가요?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원치 않는 그리스도인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우리가 다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산 자가 변화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그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교회의 휴거 바로 뒤에 올 줄 어떻게 알지요?" 라고 묻습니다. 계시록 마지막 장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22:12).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재림하실 때 상급을 갖고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우리가 우리의 상을 받기 위해 나타나는 장소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모든 믿는 자, 즉 죽었다가 부활한 자와 살아서 변화된 자를 다 일컫습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원문에 의하면 완전히 열려지다. 완전히 벗겨지다는 개념을 내포하며, 따라서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속 마음이 다 드러날 것이다"라고 옮겨질 수 있다고 제안한바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다 드러나기를 원합니까? 당신은 자신의 모든 생각이 다 밝혀지기를 원합니까? 모든 숨은 동기가 다 밝혀지기를 원합니까?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고개를 저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숨은 동기 내지 위선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안다면 더 이상 위선이 아닙니다. 지금은 뭔가 숨길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시기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인정받는 것을 원치 않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여기서 밝히 드러난다면 아마 엄청난 충격이 일어날 것입니다!
상상도 못한 것들이 마음속에 숨겨진 것을 보고 다들 놀랄 것입니다. 언젠가 다 드러날 것이기에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날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무익한 말과 헛된 생각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세상 끝에 나타날 크고 흰 보좌의 심판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크고 흰 보좌 역시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요 5:22). 그러므로 죽은 악인이 세상 끝에 부활하여 크고 흰 보좌 앞에 설 때, 그 보좌에 앉아 계신 이가 누구겠습니까? 전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당하셨던 분, 그들이 돌이켜 외면했던 그 복스런 분입니다. 그들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아 계신 모습을 볼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계시록 20장에서 볼 수 있는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은 악인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그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들이 그리스도 앞에 이르러, 그분이 그들을 구원하신 이후로 그들이 살아온 것을 계산하기 위한 심판입니다. 그들이 그곳에 이르는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 씻음 받았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이르는 것은 그들의 봉사를 회계하기 위함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행한 모든 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성령으로 행한 것인지 육체를 따라 행한 것인지 판가름하실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 때는 우리가 영화롭게 된 몸으로 그곳에 서게 되는 매우 놀라운 날입니다. 그 날은 우리가 천국에 속한 자인지 여부가 판명되는 날이 아닙니다. 그 날에 우리는 부활한 몸으로 그곳에 설 것입니다. 그 날은 우리가 복스런 주님 앞에 서는 매우 놀라운 날입니다. “이제 너의 모든 행실이 내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보여주겠다"고 그분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오랫동안 수고해왔습니다. 때로 우리는 낙심에 빠져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열어 보이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몹시 낙심하던 때를 기억하는지? 그 때 너는 헛되이 수고했고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스스로 느꼈지. 그러나 바로 그때 이 소중한 영혼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단다." 그날 밤 당신이 몹시 낙심하던 때, 당신이 전도자로서 실패했다고 느끼던 때, 그리고 아무래도 말씀사역에 적격이 아니라고 주님께 아뢰던 그 때에 주님께서 그 메시지를 사용하여 어느 영혼을 그분께로 이끄셨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이르러 비로소 당신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종종 그런 일을 경험합니다. 나는 집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나는 그날 밤 메시지에서 내 마음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강단 아래로 내려가 청중하고 인사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아주 낙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뒷문으로 슬며시 빠져나가 집에 들어가서 무릎 꿇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나 자신이 완전히 실패했으며, 아무도 아무 축복을 받지 못해서 크게 상심했다고 토로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3개월이 지나서 9개월간의 사역을 마치고 그곳을 막 떠나려 하는데 한 젊은 여성에게서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그녀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형제님께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 형제님이 가시기 전에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정확한 날짜를 기억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생생한 날이라서 결코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날 밤 찬송을 했었습니다. 형제님도 알다시피 저는 독창을 했습니다. 저는 항상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하나님께서 제 마음상태를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자신이 회심한 적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님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분께 나아오라고 요청하셨을 때, 저는 앞으로 나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싶었지만 부끄러워 나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낙심하고 좌절한 모습으로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분 앞에 엎드렸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죄를 자백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형제님께 말씀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이제 형제님이 떠나시기 전에 꼭 말씀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난 자료를 들춰보고 그 때가 내가 몹시 좌절했던 그날 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 젊은 여성의 삶에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나타남 (manifestation)의 날에 그러한 일이 많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 때에 주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신 예를 그 날에 많은 이들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떤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자신의 삶에 열매를 맺게된 것을 증거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이렇게 증거할 것입니다. “저 남자, 저 여자를 알아요. 제가 곤경에 빠졌을 때 저 사람이 친절을 베풀어주었어요."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증거할 것입니다. “저 사람은 소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당황해할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아주 온유하고 인자하고 정말 그리스도인다웠어요. 저 사람은 '내게는 당신에게 줄 중요한 것이 있어요'라고 저에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 메시지가 저를 그리스도께 인도했지요. 저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이제야 밝히게 되었어요."
많은 일들이 그와 같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진 모든 일에 대해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상반되는 면도 있습니다. 나는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낙심할까 염려됩니다. 우리가 행한 봉사 중 많은 부분이 육신적으로 행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낙심할 것입니다. “너의 삶은 내가 볼 때 큰 가치가 없었다. 너는 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명성을 쌓고,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데 너무 관심이 많았다. 너는 이미 네 상을 받았으니 내가 줄 상이 없구나. 너는 모든
상을 저 아래서 다 받았으니 여기서는 아무 상도 못 받는 해를 당해야 한다. 너는 내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았고, 나를 증거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너는 자신의 명성에만 관심이 있었다.
너는 사람들이 너를 칭찬해주기를 기대했다. 너는 저 아래서는 성공을 거뒀으나, 그러나 여기서는 네게 줄 상이 없구나."
"그분이 오십니다! 얼마나 엄숙한 순간인지!
심판장의 음성이 들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실을 빛 가운데 드러내실 날이 옵니다!
우리가 공로로 생각한 것을 그분이 죄로 드러내실 것이고 우리가 하찮게 생각한 것을 그분이 자신을 위해 행한 것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드러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자 매우 엄숙한 일입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3장을 열어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앞선 인도자들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그들 가운데 분파가 생겼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나는 바
울에게 속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런 이름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4장 6절로 보아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고전 4:6-7).
여기에 "내가...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들어서) 본을 보였으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당시 상황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바울 같이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가 좋아. 말씀을 그저 가볍게 다루는 자들에게서는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기록된 내용을 깊이 파헤쳐 무게 있는 교훈을 밝혀주는 사람이 좋아."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바울 같이 딱딱한 성경교사는 좀 부담스러워. 그는 나에게는 너무 어려워. 나는 구름 속으로 솟아오를 수 있는 사람이 좋아.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전할 수 있는 사람, 유창한 웅변가, 성경에 능한 사람이 좋아. 아볼로가 그런 사람이야! 나는 위대한 설교가의 설교를 듣고 싶어. 그냥 성경을 풀어 설명할 때는 교회 가고 싶지 않아. 나는 뭔가 감동적인 것을 원해."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직선적으로 찔러주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뭔가 실제적인 얘기로 우리 자신의 부족을 느끼게 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사람이 좋아. 나는 성경교사나 유창한 설교가에게는 관심이 없어. 나는 성실한 권면가가 좋아. 나는 게바가 좋아."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모두 주께 은사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 은사들은 온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을 낮추고 한 사람을 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모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교사가 필요한 때도 있고 유창한 설교가가 필요한 때도 있고 또 권면가가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그 모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5-7).
다시 말해서 도구를 너무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교사를 통해서 일하시든 설교가를 통해 일하시든 권면가를 통해 일하시든 우리는 그분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분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꾼에 대해서는 "심는 이나 물주는 이가 일반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8절). 그것이 당신이 받을 상급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받을 상급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위치에서 충성스레 일해야 합니다. 다른 이가 하는 일을 당신이 할 수 없다고 해서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시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다른 이가 당신보다 더 인정받는다고 시샘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일을 하십시오. 주님께 하듯 충성하십시오. 각 사람은 자신이 수고한대로 자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매..." (고전 3:9-10).
바울은 고린도에 들어가서 터를 닦음으로써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데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0-11절).
교회는 그리스도 위에 오직 그리스도 위에 서 있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그 터 위에 세울 경우, 그는 그 터 위에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12절)
이제 그는 건물을 세우고 있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것들은 그분 보시기에 귀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무가치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것들은 심판의 불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13절).
이것은 그 날에 모든 일이 밝혀질 것을 말합니다.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13절)
하나님의 거룩의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을 시험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표준에 맞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기대치에 맞을까요? 그분이 그것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내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은 "그 공력이 얼마나 많으냐?"고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가서 복음 전하고픈 곳도 많았고, 주님을 위해 성취하고픈 일도 많았지만, 그러나 시간과 정력이 딸려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 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를 얻습니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13절).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많은 일을 하지 못할지라도 올바른 일을 하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좋아 또한 성령께서 저의 마음을 다스리신 결과로 나타나는 합당한 일을 저에게 주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14절).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상급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상을 받기 위해 일합니까?" 하고 당신은 물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상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한번은 인근 교회의 헌당식에 초청을 받아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는데, 집회 후에 예배당 건축에 공헌이 큰 사람들을 소개하고 선물을 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연로한 형제님이 호명되어 앞으로 나갔습니다. 사회자가 이렇게 그의 수고를 격려했습니다. “이분은 연로한 몸에도 불구하고 건축일에 누구보다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조용히 앞으로 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한 것은 주님을 위해 한 것입니다. 저는 감사도, 선물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친절하게도 이렇게 선물을 주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주님께 아뢰어야 할 말이라 생각합니다. "네가 나를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했으니 이제 네게 상을 내리겠다. 의의 면류관이나 영광의 면류관을 주겠다." 아마 그 때 우리는 이렇게 아뢰고싶을 것입니다. "복스런 주님, 저는 상급을 바라고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풍성한 은혜로 상주고자 하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모든 것이 밝혀질 그 날에 만일 아무 상 받을 것이 없다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5)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말씀이 이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우리 모두 그 날을 바라보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고 섬긴 까닭에 그 날에 풍성한 상급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