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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 성막울타리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지난 시간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마지막 열매인 절제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내 안에 이루기 위하여 세상이 가져다주는 유혹과 마귀의 죄로부터 이기는 것이 절제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경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는 성령의 나타나심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령의 열매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을 오늘 말씀에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님이 나의 신분을 이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교제의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간절한 기도를 드린 기도의 내용 중 요한복음 17:22에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게 주신 영광은 무엇을 말할까요? 분명히 예수님은 17장 5절에서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창세전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영광을 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광은 마태복음 3:16~17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변함없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영광이라 표현하였고 그 영광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녀들에게 주셔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부터 함께 나눌 성막에 대한 말씀은 성령 안에 거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지에 구체적인 모습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막’은 히브리말로 ‘미쉬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뜻은 ‘거처한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온전한 분이시며 또한 영이시기에 사람이 그 분께 나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살려내시고 그를 부르지 않으시면 아무라도 그에게 나갈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을 때에 하나님께 스스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창3:21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시고 만나 주셨습니다. 또 창4:1절에 보면 가인과 아벨은 제물을 통해서 만났는데 또 창8:20-22절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단(돌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성막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거주하였던 가운데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로 50규빗(약 25m) 세로 100규빗(약 45m) 직사각형 모양으로 테니스 코트의 크기와 비슷한 380평의 규모입니다.
성막을 밖에서 보면 울타리만 보이는데 동서에서 보면 각각 10개씩의 기둥이 보이고 남.북에서 보면 20개씩 보입니다. 그 기둥들은 총 60개의 기둥으로 약2.5m(5규빗) 높이로서 동쪽의 문외에는 모두 세마포로 둘러 쳐져 있습니다. 높이는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2.5m이기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막 울타리의 높이는 성막의 높이 반이기에 밖에서는 성막의 윗부분에 일부는 볼 수가 있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해달의 가죽으로 된 덮개가 보여 지므로 별로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도 밖에서 보면 별반입니다. 진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믿음의 세계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이사야 53:2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막은 안으로 들어와서 성소와 지성소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이 교제를 위해서 우리들이 기억하여야 할 것은 울타리가 가져 주는 영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울타리의 특질은 세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경계의 표식과 둘째는 보호의 기능 셋째는 성결의 본질입니다. 이 특질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모습으로 나가야 될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경계를 분명하게 하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밤과 낮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창세기 1:10에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경계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에 있어야 되는 물이 육지로 차고 넘치게 들어오는 현상을 쓰나미라고 하지 않습니까? 일본과 태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발생되었던 쓰나미의 위력을 뉴스를 통하여 보셨을 것입니다. 경계를 조금 허물고 바다 물이 육지로 쳐들어오니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남녀의 경계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자처럼 보이도록 꾸며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것 중에 하나가 동성연애입니다. 결혼은 이성(異性)간에 해야 되는데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끔찍한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도 동성애를 바탕으로 한 악한 죄들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27에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경계를 허물면 하나님의 진노는 자연을 통하여 경계를 허물어 나타내 보이십니다.
사람과의 경계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제 각기 분복이 있습니다.
시편 16:6에서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경계를 정하셔서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각 지파별로 경계를 정하여 토지를 분배했습니다. 이를 어기면 안 됩니다. 신명기 27:17에서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옳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는 분들은 언제든지 남의 것을 소중이 여겨야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 그리고 명예, 소유물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경계도 소홀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 돌려서는 안 됩니다. 재물도 시간도 만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셔서 이것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울타리는 보호의 기능이 있습니다.
성막 울타리는 이방인이나 짐승들이, 함부로 성막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또 성막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울타리는 직사각형 싯딤나무위에 놋을 입혀서 만들었습니다. 왜 기둥을 직사각으로 만들었을까 몇 년 전에 태국에 있는 선교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치앙마이에서 더 들어 가면 오지(奧地)마을이 나오는데 거기에 전봇대의 모든 것이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 원형인데 거기는 그렇지 않아서 선교사님께 여쭤봤더니 뱀들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 뱀들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 울타리 때문에 어떤 짐승도 그 안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놋으로 만든 받침은 땅 속 깊숙이 박혀있고 은고리에 연결된 줄은 땅 속에 깊이 박힌 놋 말뚝으로 연결되어 있어 광야의 어떤 비바람도 막아 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그 안에 품으셔서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시편 91: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라고 하였고 시편 121:4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시는 분은 내게 주어진 사람들을 이렇게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볼보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누가복음에 10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옷도 벗겨진 채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도록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이 약자를 보호하는 정신입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돌보는 마음 이 마음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품을 때 오늘 말씀에 기록된 대로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는 말씀이 이뤄집니다.
레위기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명하셨습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있게 만들고 강하게 만드신 것은 없는 자 약한 자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사인(Sign)입니다.
충북 음성에 자리 잡고 있는 꽃동네라는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오웅진 신부는 취지문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위에 불행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풍을 불어 먹을 것을 주시고 저들의 약함을 치료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하시지 않으시고 믿음의 성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배고픈 청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우리는 이 명령에 상당한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있으면 길은 열려집니다. 내가 가진 것을 보잘 것 없더라도 하나님께 내놓으면 주님이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리어지는, 루마니아의 리쳐드 범브란트 목사는 공산치하에서 극심한 감옥 생활을 14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의 죄명은 유대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2년간은 햇빛도 별빛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지내야 했는데 그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 그는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에게 제공되는 식사는 일주일에 빵 한 덩이와 매일 더러운 국 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그에게 제공되는 빵 중에서 열 번째의 것은 자기가 먹지 않고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며 옆의 어려운 동료들에게 제공하였습니다. 국도 열 번째 그릇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그의 날개 그늘 안에서 지키시기 위하여 생명까지 주셨다면 나 또한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이 복음의 핵심인데 이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께 이르게 됨을 받아 들였다면 나 또한 예수님 때문에 나의 생명을 내 놓고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막의 울타리는 성결의 본질이 있습니다.
울타리는 세마포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이 세마포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의 옷이기도 합니다. 결국 성막의 본질은 하나님의 성결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결함은 안과 밖이 똑 같아야 합니다. 겉보기만 깨끗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안도 때끗해야 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결에 대하여 어렵게 생각합니다. 성결의 과정은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나를 부르셔서 죄를 씻게 하시고 죄에서 해방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성결은 내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지요. 성결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얻어지는 성품입니다. 성결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그 뜻에 순종할 때 이뤄집니다.
출애굽기40:36-37절을 보면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를 때에는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이 말은 그들의 '행로'는 계획이나 회의에서 결정하거나 모세의 임의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막에서 떠오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움직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멈추어 있을 때는 모든 지파의 중심에 성막이 있었지만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모든 백성들은 언약궤를 선두에 두고 성막을 거두어 따라 나가야 했습니다. 울타리의 기둥은 놋 받침으로 땅에 묻혀있고 연결고리의 줄은 땅 박혀 있는 놋 말뚝에 의하여 견고히 서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진을 옮기라고 명하시면 지체 없이 그 명령에 순종하여 이 울타리 기둥들을 뽑아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뽑힐 때가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이 있습니다. 아무리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뽑아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의 삶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을 때 준비하는 삶을 살아갈 때 겸손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삼성의 회장 이건희씨도 그 많은 재산이 있는데도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하고 의식이 돌아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CJ그룹 회장인 이재현씨가 지난 12일 열린 선고공판에 등장했는데 키170cm에 49kg의 몸무게로 힘겨운 표정과 앙상해진 다리로 법원에 출두하는 모습을 뉴스를 통하여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그의 나이는 올해 55세인데 신장수술 후유증과 더불어 삼성가의 유전병으로 알려진 CMT(샤르코-마리-투스)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영혼의 마지막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위하여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이 그 날이 될지 내일이 그날이 될지 모릅니다.
전도서 12:6~7에서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고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적인 신앙입니다. 언제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그 분께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종말적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하고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도 내 말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마태복음 7:12에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응답받기를 사모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도 내 말에 귀를 기우리시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유대인들이 즐겨 읽는다는 지혜서인 '미드라쉬' 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반지가 하나 갖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반지 세공사를 불러 그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한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내가 승리를 거두고 너무 기쁠때에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절망에 빠지고 시련에 처했을 때엔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넣어라."고 명했습니다.
세공사는 그 명령을 받들고 멋진 반지를 만들었는데 반지를 만든 후 어떤 글귀를 넣을지
고민하다가 지혜자의 힘을 빌어 이렇게 글귀를 새겨 넣었답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이 글귀는 나치 학살 시에도 이 구절을 붙잡고 유태인들은 이겨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지나가도 변함이 없는 것을 잡아야 합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나의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의 영원까지 이르게 됨을 믿으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랑하기에도 부족합니다. 부지런히 사랑을 나누면서 영원한 그 나라를 소망 중에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