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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스크랩 글로벌 마인드? 그리고 조기 유학 !
Daniel 추천 0 조회 88 11.02.17 12: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글로벌 마인드? 그리고 조기 유학 !

                    

                       이 덕영 (하양중앙내과의원)


 2008년 2월 5일 난 아이들 셋과 집사람을 데리고 세 아이의 유학을 위해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국제공항을 향했다.

 ‘1~2 년쯤은 아이들과 떨어져 생활할 수도 있으니 외국문화 많이 익히고 영어도 많이 배워서 와라’고 얘기할 수 있었던, 어떤 이들이 보면 ‘아이들을 너무 극성스럽게 키우려 한다.’ 고 말할 수도 있는 그런 용기(?)가 내게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의 가치관은 자기가 처한 삶의 환경이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깎이고 다듬어져 변화됨을 느끼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도 많이 변했다.

 예전의 내 모습이 생각난다. 10여 년 전 우리 큰아이 지원이가 세 살 때 쯤 이었던가? 그 때 난 레지던트 3년차였다. 레지던트 생활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서 슬하에 아이를 한 둘씩 둔 간호사들과 차라도 한 잔 나눌 때면 주로 육아에 관한 얘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그 당시에도 아이를 둔 간호사들은 두 살 에서부터 다섯 살 배기의 자녀들에 이르기까지 ‘어떤 유아용의 교재를 사서 무슨 공부를 시킬까?’ 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서로 간에 의견을 나누곤 하였다. 그럴 때면 난 옆에서 “그렇게 어린 나이에 무슨 공부를 벌써부터 시키느냐? 우리 중에 어떤 이들은 예전에 유치원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학원 한 번 안 가고도 그리고 과외 한 번 안 받았어도 대학도 가고 또 이렇게 어엿한 직장인들이 되었지 않느냐?”고 하면서 반대 의견을 피력하곤 했었다. 나 역시 시골 벽지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치원이 있다는 것을 중학생이 되어 읍내에 나왔을 때 처음 알았고, 과외 공부가 금지 되었던 80년대 군부독재시절에도 일부 극성스러운 부모 밑의 아이들은 몰래 과외 수업을 받는 경우도 있었으나 난 과외 수업이나 학원 같은 데는 관심을 가질 형편이 전혀 못되었다. 그러면서 어떤 환경에 속해 있든지 ‘다 자기 할 탓’이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고 그 생각의 일부분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어떤 이들이 볼 때는 젊은 시절 그런 나는 흔히 말하듯이 ‘쾌쾌 묵은 옛날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런 마인드는 그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양에서 개원한 다른 동료 선생님의 경우에 아이가 다섯 살 때부터 영어 유치원에 보내느라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멀리 떨어진 시지까지 매일 태워주곤 했는데 난 우리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 까지 계속 하양에 있는 교회 부설 선교원 과 유치원에 보냈다. 그 당시 나의 생각은 ‘아직 우리말도 모르는 아이에게 벌써 영어를 배우게 하겠다며 엄마랑 아이가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있을까? 먼저 우리말을 보다 많이 익히고 영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해도 되지 않나? 유치원에서는 그저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뛰어 놀고 봄가을에 소풍도 가고, 가을 단풍도 보고 하면 족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봄이면 들판에 지천으로 핀 예쁜 꽃들과 친해지고, 여름이면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흙 만지고 놀다가 그래도 더우면 언제라도 동네 연못에서 수영을 하거나 맑게 흐르는 도랑물 속에서 가재를  잡아 어머니께 매운탕을 주문했고, 가을이면 또 형형색색으로 무르익은 단풍을 보면서 내 마음도 함께 물들었고 떡 벌어진 밤송이에서 반질거리는 토실토실한 알밤을 발개 먹거나 빨갛게 익은 맛있는 홍시를 따먹으며 행복해 했고, 겨울이면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즐기고 논바닥에 얕게 물을 대어 스케이트를 즐기면서 보낼 수 있었고 수 십 년이 지나서 어른이 되었어도 자연 속에서 그렇게 보냈던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개원한 모든 의사 선생님들이 그러하듯 나도 평소 진료실에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 시간까지 바쁘게 생활하는 지라 여름 한 철 휴가시즌이 되면 진료실에서의 긴장의 끈을 내려놓고 나와 내 가족들을 위하여 일주일 드물게는 이주일 동안 가끔씩 해외로 여행을 나가 쌓인 피로를 풀곤 했다.  2002년 여름휴가는 인도네시아의 세계적인 휴양지 빈탄의 ‘클럽메드 리조트’에서 보냈다. 크리스탈처럼 맑고 깨끗한 바다를 만끽하며 만찬과도 같은 뷔페식사와 더불어 럭셔리하고 편안한 객실과 리조트 시설에서 수 십 가지에 달하는 스포츠 액티비티를 즐기며 일주일을 보냈는데 그 여름의 풍성한 기억은 나에게는 행복한 휴가의 전형이며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가 않는다. 2004년에는 남태평양의 미국령인 괌의 PIC 리조트에서 약 일주일간 머물렀는데 느낌이나 분위기는 빈탄에서와 비슷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여름 휴가기간에 우리 가족은 약 이주일 동안 미국을 여행하였다. 약 일주간 워싱턴D.C. , 뉴욕주 , 뉴저지주 등 미국 동부지역을 여행하였고, 미국 중부지역인 인디애나 주의 친구 집에서 일주일간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일주일간 미국의 동부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우리나라의 모든 학생들이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아이비(IVY)리그 대학들을 방문 하였다.  세계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아이비리그 대학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청년들이 공부하고 있었으며 그 대학 견학을 위해 방문한 우리 관광객들에게 안내 도우미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들은 장차 아이비리그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면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세계의 각국에서 그들의 꿈을 펼치며 세계에 그들의 이름과 대한민국을 드높이는 훌륭한 인재들이 다 되리라 믿는다. 동부지역을 여행 중이던 어느 날 아침 우리 가족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 먹은 후 일곱 시에 투어용 버스를 타고 뉴욕주와의 접경지에 있던 뉴저지주의 한 모텔에서 출발해 관광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여기저기의 여행지를 둘러보며 오후 일곱 시쯤 도착한 곳이 나이아가라폭포였다. 그 때 나는 우리가 열 두 시간 이상을 달렸기 때문에 미국 전역을 일주한 줄로 생각했지만 가이드의 설명은 우리가 아침에 출발한 뉴욕 주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열 두 시간 이상을 달려도 미국 50 개 주 중 하나의 주 밖에 돌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에서 정말로 미국의 광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명절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열 두 시간을 차로 달리면 전국 일주가 가능하지 않은가? 미국에 도착해서 세계의 인종들이 다 모여 있던 뉴욕과 워싱턴D.C.를 보았고, 편도 10 차선의 뻥 뚤린 멘하탄 외곽의 고속도로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브랜드의 차들이 러시아워에 시속 100km이상으로 질주하던 모습은 어쩌면 지구촌의 한 귀퉁이에 붙은 시골에 속할지도 모르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40 년 가까이 이 땅에서만 생활하다가 광활한 미국 땅을 처음으로 밟고 짧은 시간이지만 미국을 둘러보았던 나에게는 몇 해가 지났지만 잊혀 지지 않는 장관이었다. 미국을 여행하는 동안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있는 동안은 별로 불편한 줄 몰랐다. 그런데 우리가 가이드와 만나기 전까지 미국 국내선을 이용해야 할 때와 여행이 끝날 무렵 가이드와 헤어지고 난 후 우리가 미국을 떠날 때는 공항에서 내가 직접 수속을 해야 했는데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꽤나 힘들었다. 그 때 느낀 것은 한국에서는 나 자신이 어디에 가더라도 남부럽지 않고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살고 있었는데 미국에 오니깐 영어로 적당한 의사 표현도 못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도 없어서 완전히 ‘시골 촌놈 같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거대한 땅덩어리의 미국! 작년부터 시작된 미국 발 금융 쓰나미에서 전 세계는 지금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서 보이듯이 세계 경제와 정치를 이끌어가는 부와 권력의 중심지 미국! 그 미국의 문화를 알고 미국인의 삶의 모습을 잘 이해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리나라가 많은 수혜를 받으려면 영어를 좀 더 적절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영어 때문에 불편한 점은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2006년 미국 여행 후에 아이들을 조기 유학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7년 지원이가 초등학교 5 학년, 혜원이가 3 학년 때 계성초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호주의 남부 태평양 해안가의 휴양지 고스포드에 있는 ‘세인트 필립스 크리스챤 스쿨’에 6개월 동안 교환학생으로 나가게 되었다. 고스포드에서는 호주 현지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댁에는 우리아이들과 동갑내기의 Jordan과 Taylar라는 두 딸들이 있어서 우리아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고 특히 Wendy 아주머니의 자상한 배려와 보살핌을 받으며 우리 아이들은 현지 생활에 너무나 잘 적응 하였다. 6 개월간 지원이, 혜원이가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되어서도 잘 적응하고 호주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면서 집사람과 나는 ‘아이들이 영어를 좀 더 자유롭게 구사하려면 6 개월의 해외 생활은 너무 짧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초등학교 5학년과 3학년인 딸 둘만 외국에 계속 두기엔 여러 가지로 불안하였다. 영어는 좀 더 익힐 수 있겠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야 할 나이에 그렇지 못해서 생기는 ‘사랑과 애정의 결핍이나 정서적인 갈증은 어떻게 할 거냐 ?’는 의문 부호도 생겼다. 그래서 일 년 동안 와이프로 하여금 외국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난 기러기 아빠로 남기로 결심을 했고 유학을 위해서 정보를 모으던 중 눈 덮인 산, 황금빛의 모래 해변, 빛나는 호수 및 태고의 우림지대 등 가끔 엽서에서나 볼 수 있을 멋진 풍경과 더불어 남한의 세배가 되는 넓은 국토에 인구는 약 450 만 명 밖에 되지 않는, 나로서는 잘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지극히 조용하고 평온한 나라 뉴질랜드를 택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인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과 접할 수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소를 언제나 찾을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휴가 활동 중 하나는 캠핑이다. 숲속이나 해변, 또는 강 근처에서 텐트를 치거나 간이 오두막집에서 지내는 생활이다. 도시의 소음과 번잡을 떠나 낚시, 산책, 수영과 같은 야외 활동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갖춘 국립공원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으며 이곳은 누구에게나 대부분 무료로 개방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들 국립공원에는 야외 바비큐 파티를 위한 가스 및 상수도 시설을 국가에서 갖추어 놓아서 시민들이 무료로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우리 가족은 오클랜드에서 두시간거리에 있는 타우랑가 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하였다. 먼저 아담하지만 안전한 집을 렌트하였으며, 중고차 시장에서 차량을 구입하고, 각종 가전제품, 소파 및 식탁까지 새로이 장만하여 본격적인 뉴질랜드 생활을 시작하였다. 서구의 많은 나라에서 그러하듯이 핸들이 차량의 우측에 붙어있어서 차량들이 좌측통행을 하여야 했는데 처음에는 와이프가 적응하는데 상당히 힘들어 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여 현지의 많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서 즐겁게 한 주간을 보낼 수 있었고, 주말에는 가끔 현지의 교민 및 유학 온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야외공원이나 유명관광지에도 다니고, 주일에는 한인 교회에 모여 열심히 예배드리는 등의 생활로 이국생활의 힘든 순간들을 잘 이겨내었으며, 또한 와이프는 친절한 뉴질랜드 현지인들을 몇 몇 알게 되어 때때로 그들의 도움을 정말로 많이 받으면서 뉴질랜드 생활을 무사히 잘 마치고 지난 1월 둘째 주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이들 덕분에 난 지난 일 년 동안 약 두어 달마다 2 주 혹은 3 주씩 아이들이 있는 뉴질랜드를 다녀왔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들이 내겐 소중한 추억이었으며 편안한 휴식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가족은 뉴질랜드의 이곳저곳을 여행할 수 있었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이들의 영어실력도 늘어난 듯하다. 하지만 가족은 뉴질랜드에서 그리고 나는 한국에서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며 지내야 했던 약 일 년 동안의 시간들이 나의 세 딸들, 집사람 그리고 나에게는 너무나 힘든 시간들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아이들의 조기유학에 대해서 물어 올 경우 단지 영어를 배우기 위한 조기 유학이라면 반대하고 싶다. 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 학원 및 집에서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는 과도한 학습에서 벗어나서 초등학교 시절 한 때라도 천연 잔디가 깔린 수많은 공원과 축구장에서 사랑하는 아이들을 마음껏 뛰어 놀게 하고 싶고 좀 더 넓은 세상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나아가서 아이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아이의 장래에 대한 커다란 비젼을 품게 할 목적이라면 적극 권하고 싶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레지던트 할 때의 나의 마인드로는 지금 까지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그림을 그리게 할 것이라 전혀 짐작 하지 못했다. 지난 날 태평양과 대서양을 넘나드는 몇 번의 바깥세상으로의 여행들을 통해서 나의 마인드도 바뀌게 되었음을 느끼며 가끔은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글로벌 마인드’라는 어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토론해 보곤 한다.

 우리 아이들의 학교생활의 출발점이 시작되고 이제 겨우 초반을 열심히 달려온 것 같다.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의 앞날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모르지만 그 순간순간 열심히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윗 글은 2009년 2월 출판된 경상북도의사회지의 수필란에   실린 의사회원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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