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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람 축제 때 사용할 등을 나무에 걸어 놓고 팔고 있다. 터어키는 종교 공휴일로서 쉐케르 바이람(Seker Bayram : Sweet Festival)과 쿠르반 바이람(Kurban Bayram : Sacrifice Festival)이 있으며, 매년 날짜가 다르다. 바이람 전 한달동안은 라마단(Ramadan)으로 일출부터 일몰 시간까지 금식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유적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신전은 기둥 하나 바치는 처마도리 무게 만도 24t의 무게가 나가는데 그 당시의 장비로 어떻게 그러한 무게의 대리석을 기둥높이 17.65m까지 들어 올릴 수 있었을가? 이것이 불가사의로 남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것이다. 아르테미스 여신(로마인들은 Diana라고 불렀다.)은 본래 달의 여신이었으며 호머의 작품에는 사냥꾼 여신으로 등장한다. 아르테미스는 다산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에페소의 상징이었고 에페소 사람들은 스스로 "전각지기(temple keeper)" 라고 불렀고 아시아에서 많은 순례객들이 모여들었다. 에페소의 은장이들은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들어 순례객들에게 팔아서 짭잘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의 활발한 전도로 그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은장이들은 바울의 일행 가이오와 아리스타르코를 노천극장으로 끌고 가서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B.C. 356년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한 정신병자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바로 이때 마케도니아의 수도 Pella에서는 알렉산더가 출생하였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Pella로 가서 신전을 비웠기 때문에 자신의 신전이 불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패배시키고 에페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불타버린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을 재건시켜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때 에페소 시민들은 자력으로 신전을 복구하기를 원하였으며 알렉산더대왕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에페소 여자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귀금속을 다 바쳤다. 재건된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Pharthenon) 신전보다 4배가 큰 규모였다. 길이는 약 130m, 넓이는 약 70m, 높이 20m, 또한 20m에 달하는 127개의 석주(기둥)가 신전을 둘렀다. 석주 우측으로 보이는 구조물은 박해 시대에 박해가 끝나기를 바라며 돌을 쌓았던 것을 비잔틴 시대에 대리석으로 다시 만든 박해의 문이며, 석주 왼쪽으로 가운데 부분 산위에 보이는 건물이 요한 기념 교회이다 이 아르테미스 신전은 B.C. 7세기에 창건되고 B.C. 6세기, B.C. 4세기에 재건되었다. A.D. 265년에 또다시 재건된 신전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지위를 굳힘으로써 인기를 잃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에페소에 성 요한 성당을 짓고 또 콘스탄티노플에 성 소피아 성당을 지을 때,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헐어 건축자재로 사용함으로써 신전은 깡그리 파괴되고 말았다. 지금은 비가 오면 늪지대로 변하는 저지대에 돌 기둥 하나가 남아있을 뿐이다.
트로이 목마 [Trojan horse] 기원전 1200년경에 일어 났던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이 트로이의 전쟁이다. 트로이의 현 지명은 트루바로 이스탄불 남쪽에 있는 차낙칼레에서 30여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고대 트로이의 수도는 일리오스였다. 1870~1890년 간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은 고대 그리스 최대의 서사시인인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고 전설과 같은 호메로스의 무대 트로이 유적지를 찾는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터키의 이즈미르(옛 이름 스미르나)에서 태어 난 호메로스는 영어로는 호머라고 부른다. 일리아드와와 오디세이 두 작품은 유럽 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일리아드는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 중 마지막 몇 십일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고, 오디세이 역시 10년에 걸친 영웅담을 마지막 몇 십일에 압축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리아드는 아킬레스의 분노를 주제로 한 트로이 전쟁을 다루고 있고 오디세이는 트로이가 그리스 군에 함락된 후 그리스로 돌아 가는 용사 오디세우스의 편력을 기록하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 라고 새겨진 황금사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황금 사과를 놓고 여신 헤라와 아티네, 아프로디테가 싸우고 있을 때, 제우스 신으로부터 그 심판을 부탁받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만약 자신을 선택해 준다면, 스파르타의 미인 왕비인 헬렌을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에게 그 황금 사과를 주었다. 아프로디테의 약속대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찾기 위해 스파르타로 간다. 스파르타에는 메넬라우스 왕이 가장 예쁜 여인인 헬렌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메넬라우스는 당시 그리스에서 위세를 떨치던 미케네 왕 아가멤논의 동생이었다. 그런데 메넬라우스가 잠시 크레타로 볼일을 보러 간 사이 파리스는 헬렌을 훔쳐 도망간다. 이에 격분한 메넬레우스가 그리스 왕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리스 왕들은 헬렌을 구하고 난공불락의 트로이를 잿더미로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아가멤논 왕이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에 원정을 가 10년간의 장기전이 전개된다. 그러나 트로이가 함락되지 않자, 오디세우스가 고안해 낸 목마(木馬) 작전으로 트로이가 함락된다. 그리스군은 대형 목마를 트로이 성 밖에 갖다 놓았다. 그리스군의 첩자 시논이 그리스인들이 목마를 만든 것은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기 위한 것이고, 이렇게 크게 만든 것은 트로이 인들이 목마를 성안에 끌고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짓으로 말한다. 이 말을 깜쪽 같이 믿은 트로이 군대는 목마를 성안에 끌어들이고 이제 전쟁이 끝난 것으로 믿었다. 평온에 빠져 있던 어느날 밤 목마가 열리면서 그리스 용사들이 성안에 불을 질러 파괴하여 난공불락이던 트로이가 함락된다.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해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트로이 목마 저 속에 올라 가 봤는데 다락방처럼 생겼더라 다들 창문 같은 곳으로 손을 흔들며 사진을 찍더라 찍어 봤자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을텐데 ^^ 저 목마는 관광 수입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세계 3대 썰렁 관광물 중의 하나라고... 나머지 2개는 인어 공주, 오줌 싸개 동상이라고 한다^^
트로이 유적층 1,2,3.....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나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로이 유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트로이 유적지... 우물터, 제단, 벽돌을 쌓은 후 대리석을 쌓은 것...이것이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가이드가 한참 설명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ㅠㅠ 보스포러스 해협 보스포러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보스포러스는 "암소가 지나가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길이가 약 30km, 넓은 곳의 폭이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터키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고대, 중세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 곳을 통과하고 있다 아래 4장의 사진은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를 할 때 배 위에서 찍었다. 간간히 비가 내리기도 하고 바람이 세어서 절경들을 다 찍지 못했다;;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두 육지가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곳이 보인다.
사관학교 오른쪽 거므스레한 부분만 옛날 건물이고 나머지는 새로 지었다고 한다. 현 대통령도 이 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궁전이었는데 요즈음은 외국 정상들이 방문시 투숙하는 호텔 '놈현'도 터키 방문 때 여기 묵었다고 한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배경으로... 크루즈를 새벽에 했기 때문에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나갈 때 어두워서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다. 크루즈를 끝내고 배에서 내려 멀리 보이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찍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두번째 왕궁으로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인 압둘마지드에 의해서 1843 ~ 1856년에 걸쳐 석조 궁전으로 재건 되었다.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헌상품과 선명한 색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방의 벽들을 보면 호화스런 생활과 화려함의 극치를 느길 수 있다. 궁은 세부분으로 나뉘는 데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졌던 공공빌딩과 왕좌가 있는 홀이 가운데 있고 홀 옆으로 하렘이 있다. 궁에는 대략 250개가 넘는 방과 43개의 홀이 있으며 각 방의 실내장식을 각각 다른 분위기로 꾸미는 화려함을 보인다. 탁트인 홀에 매달린 수정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받은 헌상품으로 무게는 4.5톤이며 750개의 촛불 챔프가 켜져 있다. 궁과 궁의 각방을 꾸미는데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사실 이 궁은 오스만제국의 약화가 가속화 되어가는 시점에 서구화를 지향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할 목적으로, 보스포러스 해변가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건립 되었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막대한 건축비는 왕궁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궁전 내의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공화제가 확립된 후 초대 대통령인 아타투르크도 이곳을 관저로 사용하다가 1938년 11월 10일 집무중에 죽었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이다.
히포드럼 광장에 있는 기념물 히포드럼 광장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이 이때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곳에는 아주 귀중한 세 개의 기념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사한 사원에 세워졌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 있다.
블루모스크 구시가의 지역 이름이기도 한 술탄 아흐메트는 이스탄불 관광의 중심지이며 '블루 모스크'로 이름 난 모스크의 이름이기도 한다. 블루 모스크라고 불리는 이유는 내부가 푸른 Tile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블루모스크 술탄 아흐메트 1세가 1600년대 초에 세운 이슬람 사원으로 종교적으로 중요한 결정사항이나 축제, 집회와 같은 행사들이 치뤄졌다. 모스크 내부는 푸른 색이 도는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의 타일로 장식 되었으며 특히 200개가 넘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스텐드글래스와 어우러져 내는 빛이 환상적이다. 이 빛이 반사하고 산란해 아름다운 푸른 빛을 만들어 블로 모스크란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블루 모스크의 돔은 직경 27.5m, 높이 43m나 되고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도 볼거리다. 가지각색의 빛갈과 무늬가 정성스럽게 짜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터키어로는 아야 소피아)사원은 톱카프 궁전 앞에 있는 적갈색의 건물로 동로마 제국 시대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인 성당이었다. 그 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점령하여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 이들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사원의 내부에는 비잔틴 문화를 상징하는 다수의 모자이크 벽화가 남아 있는데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 벽화나 휴스티아누스 대제가 화려하게 묘사된 그리스도 좌상은 특히 유명하다.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벽화는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함락되면서 모두 옻칠로 가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첨탑과 미흐라브(Mihrab, 메카의 방향으로 움푹 패인 곳)가 더해져 이슬람교 사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1931년 미국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숨겨진 벽 안의 모자이크화가 발견된 후 성 소피아 사원은 비잔틴 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또 다시 각광으로 받고 있다.
성 소피아 사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성 소피아 성당은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다. 이 대성당의 규모는 높이가 56m, 동서의 폭은 31m, 남북의 폭은 33m로서 내부에 들어가 보면 이 건물의 중심이 되는 기둥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건물은 기둥이 떠받치는 구조로 되어있지만 이 건물만은 그렇지 않다. 천장에서부터 반구 형태의 지붕이 서로를 떠받치는 15층 높이의 거대한 둥근 돔(Dome)이 있고, 그 둘레에 40개의 창문이 있고, 아름다운 mosaic 성화들이 장식되고 있다. Byzantine 건축으로 가장 완벽하게 조화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이 건축양식은 현재의 건축기술로도 쉽게 흉내낼 수 없다한다. St. Sophia란 "하느님의 지혜(Divine Wisdom)"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지혜라는 뜻이다. St. Sophia대성당의 현재의 건물은 그 자리에 세워진 세 번째 건물이다
톱카프 궁전 17세기 천하의 강대한 힘을 과시하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세계 곳곳에서 거둬들인 진기한 보물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헌상품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이 궁전에는 세계에서 5번째로 큰 "86"캐럿 짜리 다이아몬드 (!)가 있었다. 골든혼, 보스포러스, 다다넬스의 3면의 바다가 만나는 성터에 위치 고전적인 오스만풍의 건축양식을 가진 궁전으로서 15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강대한 권력을 가졌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거주하던 성이다. 500여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던 36명의 술탄 중에서 반 정도가 톱카프 궁전을 사용 했다고 한다. 궁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다. 의사당이나 술탄의 거실은 물론 왕실의 여인들이 거처했던 하렘은 더욱 흥미롭다. 제 2정원의 오른쪽에는 굴뚝이 딸린 큰 부엌이 자리잡고 있는데 천장이 돔으로 된 10개의 큰 방과 28개의 굴뚝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 했음을 알수 있다. 골든 혼에서 바라보는 톱카프 궁전은 마치 한폭의 그림이다. 그러나 그 장엄한 아름다움 외에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군사상 최적의 요새임을 알수 있다. 이곳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언덕 끝에 동서교역의 접점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포진해 놓았던 군사요지이다. 이때문에 "Top대포, Kap문, Palace 궁전"에서 톱카프 궁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최고 전성기에는 4~6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생활했던 만큼 궁전 자체가 하나의 마을 이었을 정도로 궁전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아직도 궁전을 복구중으로 미공개된 부분이 많다. 현재 각종 유물과 보물은 4개의 방으로 나뉘어 전시 되고 있다. 총 몇점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 궁전에만 하루 정도 투자하는 것이 좋다. 소피아 성당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곧게 뻗은 길 끝에 있는 궁전 입구인 '제국의 문'의 웅대함이 멀리서도 느껴진다. 제국의 문을 들어서면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이는 제 1정원이 나온다. 우측의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입해 들어가면 바로 제 2정원의 잘 다듬어진 화단과 푸른 잔디가 있다. 정원을 에워 싼 궁전 내부의 건물들은 각기 독특하고 오른쪽 끝에 또 다른 매표소가 있는 곳이 바로 하렘이다. 하렘은 독립된 박물관으로 취급되고 있으므로 별도의 티켓을 구입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보스포러스
보스포러스 해협
그랜드 바자르 시장 입구 맞은 편에 이스탄불 대학이 있었다. 그랜드 바자르는15세기에 처음 나무로 지어진 이후 화재등으로 인해 소실되었지만 이후 재건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의 건물 형식을 띠게 되었다. 그랜드 바자르는 한마디로 이스탄불의 큰 시장으로 터키의 민족적 향기가 감도는 토산물 가게로 가득찬 쇼핑의 천국이다. 출입구만 해도 20개가 넘고 상점은 5천개가 넘는다고 한다. 남쪽은 베야짓, 서쪽은 이스탄불 대학, 동쪽은 술탄아흐메트와 접해 있고, 일단 들어가면 좀처럼 같은 출입구로 나오기 힘들다.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과 비슷하다. 굉장히 작은 상점들이 무수하게 들어차 있지만 대부분 같은 품목끼리 몰려 있기 때문에 손쉽게 쇼핑할 수 있다. 나는 군밤 한봉지 사서 들고 아이쇼핑만 했다. 옛부터 시장이었던 이곳은 내력있는 골동품 가게나 금은 세공점이 많다. 보석상마다 금 세공품이 가득하고 특히 파란색의 터키석이 눈길을 끌었다.그랜드 바자르 시장 내에 있는 상점 그랜드 바자르 관광을 끝으로 터키 여행을 끝내고 이스탄불 공항으로 갔다. 쮜리히를 경유하여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KAL 기내식으로 나온 비빔밥, 참 맛있게 먹었다. 이번 이집트, 그리스, 터키 여행은 시행착오 없이 즐거웠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집트에서 아부심벨 신전을 못 본 것, 터키에서 파묵칼레와 카파도키아를 못 본 것이다. 그러나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다음을 위해 남겨두는 것도 괜찮겠지... 별 내용도 없는 글, 읽느라 수고하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대단합니다.. 마치 내가 여행을 다녀온 느낌입니다.
수진씨 혹 여행중 짝을 잃어버렸는지요?, 이렇게 기나긴 밤을 혼자 외롭게 보내게 하진 않을 것 같은데 . .아님 그림이라도 보여주었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