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시골 알바의 현장
자연농 배우는 참참
홍천에 와서 먹고 살려니 그동안 이런저런 알바를 했다. 서울에서도 해본 적 없는 편의점 알바부터 농사일 품팔이, 진달래 따기 등. 짝꿍은 지금도 초등학교의 셔틀버스 동승보호자로 일하고 있다. 아직 못 해봤지만 적극 제안 받았던 것으로 옥수수 수확, 포장하는 일과, 잣 줍기, 인삼밭 품팔이 등도 있다. 이번엔 절임배추 알바를 제안 받았다. 사람이 모자라니 당장 내일부터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다음날 바로 갔다. 김장철에 약 2주에서 3주 정도 한살림생협에 납품할 절임배추를 만드는, 즉 배추를 소금에 절여서 포장하는 일이었다. 갔더니 커다란 통 여섯 개에 배추가 잔뜩 들어있었다. 그 전날 소금물에 담가놓은 배추들이다. 나는 초짜인 만큼 배추 나르는 일을 했다.
내가 본 절임배추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생산자회원들의 밭에서 배추를 차로 실어 온다. 그렇게 실어 온 배추들을 주로 할머님들께서 한번 다듬는다. 이 작업은 작업장 바깥에서 이루어져 자세히 못 봤다. 아마 겉에 망가진 잎 등을 떼어내고 눈에 띄게 상한 것을 골라내는 과정 같다. 이렇게 한번 다듬은 배추를 ‘이절기’라고 하는 기계로 반으로 쪼개어 통 안에 차곡차곡 쌓는다. 쌓을 때는 배추 하나 놓고 소금 뿌리고 그 위에 배추를 쌓고 다시 소금을 뿌린다. 그렇게 배추를 적절한 농도의 소금물에 하루 담가둔다.
다음날 그 배추들을 꺼내서 배추를 씻는 기계에 넣는다. 기계 뒤로는 물이 담긴 통 세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기계가 한번 씻은 것을 첫 번째 통에 떨어뜨리면 통마다 사람이 붙어서 다시 세 번을 깨끗이 씻고 헹구어낸다. 다 씻은 배추는 차곡차곡 쌓아놓고 물기를 뺀다. 물기가 빠지면 마지막으로 자세히 보면서 상태가 좋지 않은 잎 등을 칼로 베어내는 등의 마무리 손질을 한다. 마무리 손질까지 마친 배추를 비닐 안에 10킬로그램씩 담아 박스포장을 한다.
내가 맡아서 한 일은 주로 소금물에 절여져있는 배추를 꺼내어 배추 씻는 기계에다 가져다 넣는 일과 다음날 쓸 배추를 절일 때 이절기까지 배추를 나르는 일이었다. 그밖에도 배추를 담아 옮기는 플라스틱 박스를 깨끗하게 씻는 일, 바닥청소, 소금 나르기 등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했다. 기본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라고 듣고 갔는데, 첫날 일이 자정이 넘어 끝났다. 집에 오니 날짜가 바뀌어있었다. 그 주에 김장하는 사람이 많아 한살림에 주문 들어온 물량을 맞추자니 절여야할 배추가 엄청나게 많았던 거다. 야근수당까지 시간당 만원 쳐준다고 하니 겨울철 난방비 벌기엔 딱 좋았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일인데다 평소에 몸 쓰는 일을 그렇게 길게 하지 않는 내겐 첫날부터 자정까지 일하고 다음날 아침 8시에 다시 일을 나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째 날은 다행히 6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 그날도 마무리손질과 포장하시는 분들은 더 늦게까지 하셨지만.
일한지 하루 만에 식사량이 어마무시하게 늘었고, 밥맛도 좋아졌다. 춥다고 집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소화가 잘 안됐는데, 역시 몸을 좀 움직여야하나 싶다. 그러다 선약이 있어 이틀 쉬기로 한 날 일이 났다. 전북 완주의 ‘나는난로다’ 행사에 갔는데 한참을 차를 타고 가서는 맛있다고 일할 때 먹던 것처럼 이것저것 잔뜩 먹었더니 아주 심하게 체했다. 전에도 체하면 하루이틀 정도 굶다가 배가 고파지면 죽부터 먹고 회복하곤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여태 겪었던 것보다 훨씬 심해서 5일을 굶었는데도 계속 더부룩하고 배가 고파지질 않았다. 걱정이 되어 보건소에 가니 소화제 처방해주고 아주 묽은 미음부터 만들어서 천천히 먹어보라고 하셨다. 결국 미음부터 묽은 죽, 된 죽 순으로 조금씩 먹으면서 몸은 나았는데, 2주동안 하기로 한 절임배추 알바는 이틀하고 끝나버렸다. 돈을 못 벌게 된 것도 아쉽지만 도와드리기로 해놓고 못 도와드려서 참 죄송스러웠다.
모르던 동네 사람들과도 많이 알게 됐다. 늘 지나던 길의 풍경일 뿐이던 집들이 하나둘 누구네 집으로 바뀌어가는 건 신기한 기분이다. 우리 집에서 짝꿍이 일하는 학교와 반대쪽 방향으로도 초등학교가 하나 있는데 그 학교에 내년 입학 예정인 아이가 한 명도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이야기를 하시며 우리 보고 빨리 애 낳아서 학교 보내라신다. 주로 나한테 작업지시를 하며 같이 일하던 아저씨는 짝꿍이 셔틀버스 동승보호자로 일하고 있다고 하니 그 버스 운전기사님이 자신의 사촌동생이라고 하셨다. 버스기사님도 도시에서 돌아와서 중국집으로 돈을 벌었다고 알려주셨다. 아저씨도 도시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부모님이 계신 이곳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다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아서 지금은 이런저런 다른 일들을 하고 계신단다. 여기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어릴 때부터 계속 산 사람도 있지만 도시에 갔다가 ‘비밀’ 한 가지씩 간직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고 농담 반 진담 반 하시는 얘기가 재밌다.
젊은 사람이 시골로 이사를 왔다는 것만으로도 관심도 많이 가져주시고 예쁘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참 좋다. 일자리 소개도 많이 시켜주신다. 이번에도 겨우 이틀 일하면서 잠깐 이야기 나눈 것뿐인데, 지게차 운전하는 걸 조금만 배우면 농협에서 알바가 있는 계절이 있는데 그게 최고라면서 같이 하자는 분도 계셨고 농사를 배우고 싶으면 하우스 몇 동 놀고 있는 곳을 안다며 이야기해주겠다는 분도 계셨다.
12월에 들어서는 우리가 농사짓는 골짜기가 포함되어있는 마을에 계추라는 마을회의에서 정식으로 우리 부부를 소개했다. 아직 그 동네에 땅을 산 것도 집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회의에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개를 드리니 마을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동안 지나며 인사 나눈 분들도 많지만 처음 보는 얼굴도 많았다. 마을 사람들을 두루 알고 지내면서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게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더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