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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인간 역사에서 암흑기인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으로 가는 시대의 흐름인
르네상스에 많은 영향을 미친" 메디치 가문"과
돈만 아는 유태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같이 알아보려했으나 너무 길면 ...
일단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자 한다.
로스차일드 가의 기원
로스차일드 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의 게토(ghetto ; 유대인 거주구역)에서 대대로 상업에 종사하던
독일-유대인 가문이었다. 18세기까지는 소규모 상인가문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로스차일드) 대에 이르러 헤센 선제후국의 재정관리를 맡으며 성장했다.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 (아버지) (1744~1812)
그의 다섯 아들
암셸 마이어 폰 로트실트 (1773~1855) : 프랑크푸르트 (독일) - 현재 지명으로
잘로몬 마이어 폰 로트실트 (1774~1855) : 빈 (오스트리아)
나탄 마이어 폰 로트실트 (1777~1836) : 런던 (영국)
카를 마이어 폰 로트실트 (1788~1855) : 나폴리 ( 양시칠리아 -이탈리아)
야콥 마이어 폰 로트실트 (1792~1868) : 파리 (프랑스)
의 대에 와서는 각각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오스트리아의 빈, 영국의 런던, 양시칠리아 왕국의 나폴리, 프랑스의 파리에
은행을 설립해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유럽 각국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금융재벌이 되었다.
로스차일드라는 명칭은 그들이 붉은 문패(roten schild)가 달린 집에서 살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은 법적으로 가문의 명칭을 지닐 수 없었으므로 로스차일드 가도 시대에 따라 ‘바우어(Bauer)’나 ‘한(Hahn)’ 등을
성처럼 사용해왔다. 하지만 1806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유대인에 대한 법적인 차별이 완화되면서 로스차일드를
공식적인 가문의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8세기 유대인은 기독교인들에게 천대와 멸시르 받았다. 또한 법적으로 농업, 제조업, 곡물 거래, 공무원, 변호사
그리고 군인을 직업으로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상인의 길을 택하거나 자본을 조금이라도 보유한 경우
고리대금업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조를 세우고 로스차일드 은행을 창업한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
(로드실트)는 떠돌이 상인으로 중소공국를 돌아다니며 왕실의 권력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귀족과의 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던 어느날 그는 삶을 바꿀 기회를 얻게 된다.
그것은 귀족들 사이에 기념 주화와 훈장 등의 골동품 사업이 유행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기회를 감지한 마이어는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탈영병이 버리고 간 군복에서 또는 전쟁텅 쓰러져 있는 부상병과 사망한 군인들의 군복을 뒤져 주화와 훈장을
수집했다.
수집한 주화와 훈장을 프랑크푸르크 주변 고관 대작들에게 판매하기 원했던 그는 고민 끝에 그들에게 편지를 써 자신이
보유한 주화와 훈장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다. 그리고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귀족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쌓아가게 된다. 마이어가 원했던 것은 주화와 훈장을 팔아 귀족들을 상대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중소공국 중 한 곳의 왕실과 지속적으로 연을 맺는 것이었다.
마이어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독일 전역을 누비며, 수집한 다양한 주화와 훈자의 가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때 프랑크푸르트 주변 헤센왕국의 윌리엄 4세가 주화에 관심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윌리엄 4세는 주화를
수집하기보다는 주화를 싼 값에 매입해 주변의 귀족들에게 비싸게 판매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던 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중소공국 제후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다른 공국의 왕족과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며 엄청난 부를 축적해 나가는 중이었다.
마이어는 윌리엄 4세와 연결되기 위해 주화와 훈장 등을 시장가격의 50% 수준으로 할인해 제공해 주었다.
마이어의 이런 노력으로 윌리엄 4세는 많은 수익을 남겼고, 결국 마이어는 유대인의 신분으로 왕실 공급상으로 임명된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로트실트)는 헤센 선제후국의 통치자인 빌헬름 9세의 신임을 얻으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마이어는 권력이 있는 사람들과 연을 맺고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는 권력자의 주변 인물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궁중의 재정을 담다하고 있던 브레르스라는 인물을 자신의
비밀 사업파트너로 만드록 철저히 관리했다. 그 결과 부레르스는 죽을 때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의 협력자로 남게된다.
1789년 빌헬름 4세에게 정식으로 대부업을 승인받은 로스차일드 가는 1792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과
1803년에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당시 유럽 전역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전쟁이 지속되었고, 유럽 각국의 봉건제도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귀족들은 줄어든 수입을 융자를 통해 채워나갈 수 밖에 없었다.
대부분 토지난 성을 담보로 잡고, 은행가나 돈이 많은 영주로부터 자금을 차입하는 일이 많았기에 은행가나 자본가들은
수익을 거둘수 있는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마이어는 윌리엄 4세의 부를 사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 윌리엄 4게는 유대인 출신의 마이어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기길 꺼렸다.
그러던 마이어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나폴레옹의 반대 편에 섰던 오스트리아군에 용병 2만 명을 빌려주었던 윌리엄 4세에게 격노한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한 후 헤센왕국을 침공한 것이다.
다급해진 윌리엄 4세는 재산의 모든 장부를 마이어게게 맡기고 도망쳤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움직임을 스파이를 통해
파악했고 마이어를 체포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고문과 구타를 통해 마이어에게 윌리엄 4세의 재산 장부를 받아내려 했다.
하지만 마이어는 끝까지 장부를 넘기지 않았다. 마이어의 위기는 길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떠나며 마이어 역시 폴려나게 된 것이다.
마이어가 장부를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재산을 지킬 수 있었던 윌리엄 4세는 마이어의 성품과 충성심에 감탄하여 그를
재무대관으로 임며한다.
당시 은행가는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자금 이동을 책임질 경우 자금의 10%를 수수료로 지급 받았다.
여기에 윌리엄 4세는 자신의 장부를 지켜준 마이어에게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도록 허락했다.
마이어는 이 업무를 다년 간 수행하면서 가문이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특히 셋째 아들인 네이션(나탄)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뛰어난 사업 수완과 총명만이 다섯 아들 중 단연 두드러졌다.
셋째 아들 네이션(나탄) 나폴레옹에 의해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영국에서 엄청난 수익의 기회를 만든다.
네이션(나탄)은 민첩한 분석능력과 감각으로 경제적 교류가 끊기면 영국의 수출품 가력이 급락할 것이고,
반면 대륙에서는 영국 제품의 가격은 급등할 것을 예상했다.
1798년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과 대륙간 밀수를 통해 200만 파운드라는 자산을 보유하게 되고, 영국의 신흥부호로
등극하게 된다. 돈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던 네이션은 영국 정부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위한 전비조달 때문에
엄청난 재정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금 또는 각국의 통화와 바꾸어 쓸수 있는 경화로 전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금값 폭등을 예측한다. 그는 지체없이 80만 파운드에 달하는 금화를 매입해 금값 폭등에 대비한다.
당시 영국은 포르투칼과 스페인에서 전쟁을 수행 중이었다.
머지 않아 군인들의 식대와 급여를 지불하기 위해 값을 불문하고 네이션에게 금을 매입한다.
이를 계기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왕실의 총리가 되는 웰링턴 장군과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셋째 아들인 나탄(네이션)은 금융명가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정보력"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유럽 전력에 있는 형제들과 가문을 위해 헌신하는 첩자망을 구축했다. 나아가 각 도시마다 정계 실세 및 측근들과
친분관계를 맺어 정치 및 군사 활동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여 이를 금융거래에 반영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정보망과 유통망을 배경으로 나폴레옹의 베를린칙령 이후 가격이 폭등한 영국의 면제품 등을
몰래 들여와 팔면서 큰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런던과 파리에 엔엠로스차일드앤선즈(N. M. Rothschild & Sons) 은행과
로쉴드 은행(Banque Rothschild)을 각각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업으로 진출해 상업어음의 발행과 대부업으로
큰 수익을 거두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영국 정부를 도와 동맹국들에 보내는 자금 운송과 대부 사업 등을 벌였으며, 영국 전시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한 뒤 큰 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로드실트(로스차일드) 가문에서는 전쟁이 발발할 때 산업 스파이를 보내어 프랑크푸르트-파리-런던-빈-나폴리로 이어지는
정보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정부의 정보 즉 워털루 전투가 영국군이 이겼다는 정보보다 1일이나 앞선 날에 사라믈을 향해
"영국군이 졋다"하며 소리쳐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덜 손해보기 위해 영국국채를 팔기 시작해
영국 국채가 이전의 5%밖에 안되는 상황이였을 때, 로트실트 가문은 그 즉시 모든 국채를 사들였고 프랑스 국채는 팔았다.
그 다음날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로트실트(로스차일드) 가문은 20배나 되는
2악 3천만 파운드라는 이득을 챙겼다. 이를 통해 로스차일들 가문은 세계 최고 부호의 반열에 올르게 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가진 정보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프랑스에 다시 왕정이 들어선 뒤에는 국내로 돌아온 귀족들의 재산 관리를 맡아 투자 사업을 벌이며 부를 쌓았다.
빈체제가 성립한 뒤에는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왕가들의 공채(公債) 발행과 재산 관리를 맡으면서 유럽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1818년 프랑스가 동맹국들에게 치를 전쟁 배상금을 놓고 열린 엑스라샤펠 회의
(Congress of Aix-la-Chapelle)를 계기로 로스차일드 가는 공채 발행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상이던 클레멘스 메테르니히와의 긴밀한 관계를 배경으로 유럽 주요 국가들의 공채 공모와
채권 발행을 맡으면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다. 1822년에는 마이어의 다섯 아들 모두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2세에게 남작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의 성장
마이어 암셸 로트실트(1744~1812)가 죽고 그의 다섯 아들들은 각각 프랑크푸르트·빈·런던·나폴리·파리에 은행을 설립해
공채 발행과 자금 대부 등으로 각국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이어는 죽기 전에 "형제들 간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일족 안에서의 혼인과 중요 직책의 계승을 유언으로 남겼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 자리 잡은 로스차일드 가의
다섯 분가(分家)는 친족 내의 혼인으로 서로의 결속을 다졌으며, 일가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구축해 다른 경쟁자들보다
우수한 정보력을 지닐 수 있었다.
재산을 지키는 것이 돈을 벌어들일 때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가문의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지금까지 영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로 통했기 때문이다.
가문의 구성원들이 하나의 뜻으로 협력할 때 정보력 향상은 물론이고 가문이 영속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가문은 구성원들이 화합하기 위해서는 가문의 목적과 비전, 가치관 등과 같은 가문 정보 공유가 중요하다.
가문에 비밀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구성원들에게 모두 알려야 하고, 외부로 노출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비밀을 숨기는 것은 빠르 속도로 가문을 붕괴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이다.
19세기에 로스차일드 가는 철도산업에 대한 투자로 큰 수익을 거두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가를 맡은 장남 암셸은 바이에른 동부철도와 라인강 철도 등을 개설했으며,
오스트리아 빈의 둘째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북부철도를 비롯해 중부유럽의 철도망을 잇달아 개설했다.
프랑스 파리의 막내 야콥은 1837년 파리-생제르망 철도를 시작으로, 1846년에는 프랑스 북부철도를 개설했다.
이처럼 로스차일드 가는 유럽의 주요 철도망을 지배하면서 유럽의 산업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 수에즈 운하, 이집트 철도의 개설 등과 같은 각국의 투자 사업에 자금을 조달하고, 직접 해운회사와 철강회사 등에
투자해 운영하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는 전시 공채의 발행으로 전쟁이나 식민지 침탈에 필요한 자금을 유럽 각국에 제공하기도 했다.
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던 러시아 제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1853년 크림 전쟁 때에는 러시아에 맞선 영국, 프랑스,
투르크 등의 연합국에 자금을 지원했다. 1904년 러일전쟁 때에도 일본의 전시공채 발행을 맡았다.
그러나 1883년에는 러시아 정부에 공채를 발행해주면서 그 대가로 카스피해 연안 바쿠유전의 채굴권을 얻어냈다.
이곳에서 로스차일드 가는 노벨 형제와 협력해 석유를 채굴한 뒤 유조선을 개발해 그것을 유럽 각지로 운송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로스차일드 가는 미국 록펠러 가의 스탠더스오일(Standard Oil Company)과 경쟁하기 위해
1914년에는 바쿠유전의 채굴권을 로열더치쉘(Royal Dutch Shell)에 매각하고 그 회사의 대주주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외국자산이 몰수되었을 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의 영향력 축소
금권을 배경으로 유럽을 지배하던 로스차일드 가의 영향력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각 나라들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면서
점차 위축되었다. 프랑크푸르트의 본가는 장남인 암셸이 아들이 없이 죽자 넷째인 카를의 아들들이 뒤를 이었으나,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중심지로 떠오른 베를린으로 옮기지 않고 프랑크푸르트를 고집하다가 점차 쇠퇴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분가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과 더불어 영향력이 쇠퇴했고, 나폴리의 분가는 이탈리아의 통일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런던과 파리의 분가는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력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크게 우위에 서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예전만은 못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상속세가 강화되는 등 조세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진 것도 영향을 끼쳤다.
로스차일드 가의 은행은 주식회사가 아니라 일족의 소유로 기업을 폐쇄적으로 운영해왔으므로 상속세가 크게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 시기에 로스차일드 가는 19세기에 구입했던 호화로운 대저택의 일부를 잇달아 매각해야 했다.
한편, 19세기 이후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 국제조직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반유대주의가 확산된 것도
로스차일드 가의 영향력 축소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유대인 음모설은 로스차일드 가를 겨낭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들어선 뒤에 로스차일드 가의 독일 내 재산은 차례로 정부에 몰수되었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된 뒤에는 빈 분가의 재산도 몰수되었으며,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해
파리가 점령된 뒤에는 파리 분가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나치가 침공한 뒤에 빈과 파리의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들은
미국과 영국으로 망명했다.
빈 분가는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에 로스차일드 가는 런던과 파리의 분가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로스차일드 가는 세계 곳곳에서 거대 금융재벌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로스차일드 가가 소유·운영하고 있는 금융그룹은 크게 3개의 분야로 나뉜다.
첫째는 스위스에 본사가 있는 에드몽 드 로쉴드 그룹(Edmond de Rothschild Group)으로, 부유층들의 자산 운용을
담당하는 에드몽 드 로쉴드 민간은행(Banque privée Edmond de Rothschild)과 와인 생산농장을 운영하는
에드몽 드 로쉴드 남작 양조회사(Compagnie Vinicole Baron Edmond de Rothschild) 등을 보유하고 있다.
둘째는 프랑스 파리에 본사가 있는 로스차일드 그룹(The Rothschild Group)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은행들인
로쉴드 은행(Rothschild & Cie Banque)과 엔엠로스차일드앤선즈(N. M. Rothschild & Sons) 은행, 부유층의 프라이빗 뱅킹과
기업의 인수·합병 등에 대한 자문 등을 담당하는 로스차일드 은행(Rothschild Bank) 등을 거느린 금융지주회사이다.
셋째는 투자신탁 업무를 담당하는 알아이티캐피털파트너스(RIT Capital Partners)이다.
한편, 로스차일드 가는 이스라엘의 건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시오니즘 운동에 자금을 지원해 1917년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발표한 밸푸어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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