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이야
늘 붙어다니던 쌍둥이 남매가 어느 날
조난을 당합니다. 서로의 생사도 모른 채 낯선 땅에
떨어지 두 사람, 그들은 과연 다시
만나게 될까요?
헤어진 쌍둥이 남매
메살린이라는 곳에 세바스찬과 바이올라라는 쌍둥이 남매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남자 여자 쌍둥이였지만 생김새가 정말
똑같았습니다. 옷차림을 같게 하면 누가 누군지 그 부모조차도
분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 두 사람은 항상 같이 붙어 다녔고
남들이 시샘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바스찬과 바이올라는 함께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배가 출항하던 날은 날씨가 무척 맑았습니다. 바람도
선선하고 부드럽게 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 여행길이
매우 쾌적하고 즐거운 시간이 될 거라고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세바스찬과 바이올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뱃전에
기대어 서서 차츰 멀어지는 메살인의 부두를 바라보았습니다.
"오빠, 난 자꾸만 가슴이 설레, 우리가 이렇게 배를 타고
멀리 가 보는 것은 처음이잖아."
바이올라가 세바스찬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세바스찬 역시 기분 좋은 얼굴로 맘껏 하늘을 보며 말했습니다.
'나도 이번 여행에 기대가 커, 바이올라,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보며 앞으로의 내 장래도 생각해 보고, 여러 가지 새로운 것도
배우고 싶어.'
처음 하룻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부터 갑자기 날이 흐려졌습니다. 그렇게 맑고 파랗던
하늘에 어느 새 몰려왔는지 검은 먹구름이 가득 드리워졌습니다.
상쾌하게 느껴지던 바랍도 차츰 매서워지고 파도도 높게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밤이 되자 드디어 세찬 비와 함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바람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에 따라 배도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쾅' 하는 엄청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배가 거대한 암초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입니다.
배에 탔던 사람 중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은 선장을 미롯해서
불과 몇 명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부서지자 배의 파편을
붙들고 끝까지 매달려 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폭풍우가
가라앉자 그들은 지나가던 배에 의해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 남은 사람 중에는 바이올라도 끼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이올라는 살아 남은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빠 세바스찬의 생사를 알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이올라는
배에서 내려서도 세바스찬 생각에 계속 슬픈 표정만 지었습니다.
이를 본 선장은 그녀가 매우 딱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바이올라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봐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사납던 폭풍우 속에서
이렇게 살아난 것도 모두 하늘의 축복이 아니겠소?
그런데 계속 울적해 있으면 되겠어요?"
"알아요. 하지만 오빠가 걱정이 돼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말아요. 그는 부러진 돛대에 몸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떠 있었어요. 나중에 멀어져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계속 바다에 따다녔다면 분명 목숨을 건졌을 거요."
그러자 바이올라의 두 눈이 갑자기 커다래졌습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 우리 오빠였어요?"
"분명해요.. 당신 둘은 꼭 닮은 쌍둥이잖아요. 그래서 배에
탈 때부터 얼굴을 확실히 봐 두었죠. 자, 그러니 이제 안심해요."
선장은 다정한 목소리로 바이올라를 안심시켰습니다. 바이올라는
선장의 말을 믿기로 했습니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오빠가
살아 있다는 확신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놓였습니다.
그런데 바이올라에게는 또 다른 근심이 생겼습니다. 지금 자기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곳에 있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을 비롯해 난파당한 사람들을 구조해 준 배는 일행을
일리리어라는 곳에 내려 주고 떠나 버렸습니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이 타향에서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이올라는 단 한 명 아는 사람인
선장에게 도움을 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선장님, 이 곳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으세요? 전 처음 와 보는
곳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세요? 전 이 고장에 대해서 잘 압니다. 여기서 세 시간도
안 걸리는 곳에서 태어났거든요."
선장이 이번에도 다정하게 대답했습니다. 바이올라는
한 가닥 희망을 걸며 계속 물었습니다.
"그럼, 누가 이곳을 다스리고 있나요?"
"오시노 공작이 다스리고 있죠. 공작님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마음씨가 착하고 아량이 넓어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답니다."
"어머, 저도 오시노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전에 아버님께서 그 공작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오시노 공작님은 사랑에 빠져 있답니다. 올리비아
아가씨를 좋아해서 청혼을 했는데 거절을 당했다는군요.
올리비아는 백작의 따님인데, 백작은 일 년 전에 돌아가시고
그 동안 오빠가 아가씨를 돌봐 주었죠. 그런데 그 오빠마저도
얼마 전에 그만 죽고 말았답니다. 올리비아 아가씨는 오빠를
잃은 슬픔 때문에 그 후 사람 만나기를 꺼리고 있대요."
선장이 얘기를 듣는 동안 바이올라는 올리비아라는 아가씨를
만나 보고 싶어졌습니다. 자신도 오빠를 잃은 슬픈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아가씨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에게 자신을 올리비아에게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선장님, 수고스럽지만 올리비아 아가씨를 한 번 만나게
해 주세요. 올리비아 아가씨만 좋다면 계속 그 댁에 머물면서
아가씨 시중이나 들고 싶어요."
"글쎄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올리비아 아가씨는 오빠가 죽은
이후로 어떤 사람도 만나기를 꺼려해서 심지어는 공작님까지도
집 안에 들이지 않는대요."
"그래요?"
바이올라는 잠시 생각애 잠겼습니다.
"올리비아 아가씨의 하녀도 되지 못하게 생겼으니 어쩐담?
좋아, 그렇다면 오시노 공작의 하인으로 들어가자, 그럴려면
여자인 몸으로는 곤란하겠지. 그래, 남장을 하는 거야.
어차피 낯선 땅에서 살아가자면 여자보다는 남자가 편할 테니까
이번 기회에 남자 행세를 해야겠어.'
바이올라는 이런 계획을 선장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선장의 점잖고 친절한 행동으로 보아 그를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선장님, 한 번만 더 저를 도와 주세요. 저에게 남자 옷을 구해다
주세요. 그리고 절 오시노 공작님께 남자로 소개시켜 주세요."
선장은 기꺼이 바이올라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
공작과 만나게 된 바이올라는 남자처럼 씩씩하면서도
예의바르게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전 세자리오라고 합니다. 공작님의
명성을 듣고 가까이서 모시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공작은 바이올라의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태도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바이올라를 곁에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후 바이올라는 공작이 기대대로 자신이 맡은 바 일을 아주 잘
해내었습니다. 공작에게도 정성을 다해 그를 충실히 섬겼습니다.
공작은 점점 더 바이올라를 믿고 아끼게 디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자신의 속마음까지 바이올라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세자리오, 너와 같은 믿음직한 시종을 두게 되어 몹시 기쁘다.
어떤 때는 꼭 내 친구 같아, 앞으로도 계속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물론입니다. 공작님, 저도 공작님 곁에 있는 게 즐겁습니다.
그런데 공작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얼굴빛이 안 좋으신데요."
"휴우, 맞아. 세자리오. 난 요새 살맛이 없어. 너도 들어서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난 올리비아라는 아가씨를 사랑하고 있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올리비아는 계속 나를 거절했어. 또 요즘에는 아예
내 모습도 보기 싫어해서 만나 주지도 않아."
공작은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를 지켜보는
바이올라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공작은 사랑하는 올리비아가
자신에게 계속 냉담하게 대했기 때문에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던 운동이나 사냥도 그만둔 지
오래였습니다. 책도 많이 읽지 않았습니다. 현명하고 학식 있는
친구들과의 사귐도 소홀이 했습니다. 그저 하루 종일 감상적인
노래나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세자리오에게
자신의 답답한 심정과 올리비아에 대한 사랑를 호소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공작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그의
말상대가 되어 주는 동안에 바이올라는공작의 고통이 자기의
고통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차츰 오시노 공작이
올리비아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아픔을 바이올라 자신이
공작 때문에 겪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이올라는
혼자 있을 때면 항상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세상에 공작님만큼 멋있고 훌륭한 분은 없어. 그 누가 보다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데 왜 올리비아 아가씨는 공작님을
거절하는거지? 젊고 늠름한 기상과 위엄, 따뜻한 마음씨를 모두
갖춘 공작님에게 그처럼 오랫동안 무관심할 수 있을까? 공작님의
훌륭한 인격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가씨라면 아무리 공작님이
사랑하셔도 난 좋아할 수가 없어."
오늘도 공작은 바이올라를 붙들고 무심한 올리비아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바이올라는 이번에야말로 공작의 어리석은 사랑을
깨우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공작님, 훌륭한 남자의 정성과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여자는
똑똑한 여자가 아닙니다. 만일 어떤 여자가 공작님이 올리비아를
사랑하듯 공작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공작님이그 여자를사랑하실 수 없다고 하신다면
그 여자는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합니까?"
"세자리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어떤 여자라도 내가
올리비아를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할 수는 없을 거야.
왜냐하면 여자의 마음은 그렇게 젋고 깊은 사랑을 담을 수 있을
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지. 그러니 다시는 내사랑과
여자의 사랑을 비교하지 말게."
항상 공작의 말을 따르던 바이올라였지만 이번만은 잠자코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공작을사랑하는 마음은 공작이
올리비아를 사랑하는 마음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이올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공작의
말에 반박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 잘 알고 있습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공작이 의아하는 듯 바이올라를 보며 물었습니다.
"여자가 얼마나 깊이 남자를 사랑할 수 있는지 저는 알고
있답니다. 여자도 남자처럼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요.
제가 아는 어떤 여자는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어요. 공작님께서
올리비아 아가씨는 어떻게 되었지?"
"아가씨는 그 사랑을 혼자만 간직했답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 남자한테도, 그렇게 마음 속으로만 애태우다 보니
자연히 병이 들었지요. 얼굴은 벌레가 장미를 갉아먹은 듯 상하게
되었고, 언제나 슬품에 젖어 기운 없이 한숨만 쉬며 지냈지요."
"그러다 죽기라도 했단 말이냐?"
바이올라는 차마 그 물음에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은 모두 자신의 심정을 빗대어 얘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공작이 올리비아에게 보냈던 심부름꾼이
돌아왔습니다. 공작은 그 신하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래, 갔던 일은 잘 되었느냐? 올리비아 아가씨가
뭐라고 하더냐?"
심부름 갔던 신하는 공작 앞에 정중히 머리를 조아리며
보고했습니다.
"저, 올리비아 아가씨는 만나 뵙지도 못했습니다. 단지 하녀가
나와서 전하는 말이, 올리비아 아가씨는 앞으로 칠 년 동안은
그 누구의 앞에도 나타나지 않으실 거랍니다. 수녀처럼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죽은 오빠만을 생각하실 작정이랍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작이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아, 죽은 오빠에 대한 애정이 그토록 깊다니!
참으로 훌륭한 아가씨야"
그러고 나서 공작은 바이올라를 쳐다보며 말을이었습니다.
"세자이로, 네게 부탁이 있다. 너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동안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으니까. 그러니 네가
직접 올리비아를 찾아가 내 대신 사랑을 전해 주렴. 만나 주지
않겠다고 해도 물러나지 말고 끝까지 버텨라.'
"만약 만나게 되면 뭐라고 합니까?"
"올리비아를 만나면 내 진실한 사랑을 열렬히 고백해 줘, 또 내가
올리비아 때문에 그 동안 얼마나 괴로워했으며 애타했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그런 말을 전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자네가 알맞아.'
바이올라는 내키지 않았지만 주인의 명령이라 하는 수 없이
올리비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면서 바이올라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딱한 신세구나. 공작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여자에게
공작의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부탁하러 가야 하다니.'
올리비아의 집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하인이 바이올라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우리 아가씨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아무도
만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이올라는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습니다.
"예, 저는 그런 줄 다 알고 왔습니다. 그러니
더욱 뵈어야겠습니다."
"글쎄, 안 된다니까요. 우리 아가씨께서는 지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시대요."
"저를 만나 주실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이 문간에 두 발이 뿌리가 내리는 한이 있어도
기다리겠다고요."
이렇게 한참을 옥신각신하다 결국 하인은 안으로 들어가
올리비아에게 고했습니다.
"아가씨, 밖에 오시노 공작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이 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아가씨를 만나뵐 수 없다고
말해도 끄떡하지 않고 끝까지 아가씨를 만나 뵙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인은 방금 전 문간에서 있었던 그와의 대화를
그대로 알렸습니다. 하인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올리비아는
그 심부름꾼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 누구나 두말 없이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온 사람은 사정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한
기세로 자기의 하인을 눌러 버린 것입니다. 올리비아는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나서 하인에게 말했습니다.
"좋다. 내가 그 사람을 한번 만나봐야겠다. 가서 오시노 공작의
심부름꾼을 들여보내라."
곧이어 바이올라가 나타났습니다. 바이올라는 남자다운 씩씩한
걸음걸이로 들어와서는 올리비아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공작의 심부름꾼답게 예의를 갖추고 말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운 아가씨? 저는 세자리오라고 하는데,
중대한 임무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가씨가 분명 이 댁의 주인
아가씨가 맞습니까? 제가 드릴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는 전할 수
없는 것이라서요."
올리비아는 바이올라의 정중한 말솜씨와 그의 잘생긴 외모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무척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예, 제가 이 집의 주인입니다. 도대체 무슨 용건이 있으시기에
내 하인을 그렇게 당황하게 만드셨나요?"
상대가 올리비아인 것을 확인하자 바이올라는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길래 공작이
그토록 애태우는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시
최고의 공손한 말투로 말했습니다.
"그러시다면 그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얼굴을
한번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 주인이 내 얼굴과 무슨 교섭을 하라던가요?"
오만하며 자존심 강한 올리비아는 얼굴을 보며 말리는 바이올라의
말에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올리비아는
첫 눈에 바이올라, 아니 세자리오에게 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올리비아 아가씨, 서로 얼굴을 마주 대고 얘기해야 진실된
마음이 통하는 법입니다.'
바이올라가 다시 한 번 얼굴을 보여 달라고 원하자 올리비아는
천천히 베일을 걷어 올렸습니다.
칠 년 동안 베일을 쓰고 지내겠다고 결심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말입니다.
"자, 이제 됐나요? 제 얼굴을 보신 소감이 어때요?"
올리비아가 베일을 다 걷고 나서 말했습니다. 바이올라는
매우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조화된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맑고 커다란 두 눈,
오똑한 코, 붉은 입술, 세상의그 어떤 것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흉내내지 못할 것입니다."
"흥, 허풍이나 떨라고 공작님이 당신을 보냈나요?"
올리비아는 톡 쏘듯 말했지만 결코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바이올라가 계속 말했습니다.
"아가씨는 무척 아름다우시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하시군요.
그럼, 제가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오시노 공작님께서는
아가씨에 대한 사랑 때문에 눈물과 한숨의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다. 제발 그분의 사랑을 받아 주십시오."
이런 말을 해야 하는 바이올라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습니다.
올리비아는 바이올라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공작님의 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분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물론 공작님이 누구보다도 훌륭한 분이라는
것은 인정해요. 지체도 높으시고 성실하시며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분의 사랑에 대한 답은 이미 드린
거와 같아요. 그러니 더 이상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만일 아가씨께서 공작님을 사랑하실 수만 있다면 제가 이 집
문 앞에 버들로 움막을 짓고 살면서 매일 아가씨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시를 지어 한밤중에 노래로
부르겠습니다. 이 산 저 산으로 돌아다니며 아가씨의 이름을
외쳐 불러 온 세상에 메아리치도록 하겠습니다."
바이올라는 자신의 감정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직
공작을 위해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이 세자리오에게 기운 올리비아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달콤한 말로 절 설득해도 소용 없어요. 전 공작님에게는
동정심조차 없으니까요. 그것보다도 당신 얘기나 해 봐요.
당신은 어떤 집안의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드릴 말슴이 없군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아름답지만 잔인한 분이여!"
바이올라는 공작의 선물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주고는
그 집을 나왔습니다.
올리비아는 바이올라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붙잡아 둘 핑계거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그에게
이렇게 덧붙이기만 했습니다.
"돌아가서 공작님을 만나뵙거든 다시는 이런 심부름을 보내지
말라고해 주세요. 하지만 공작님의 반응을 알려 주러
당신이 온다면 환영이에요."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숨기며 바이올라를 보냈습니다.
바이올라가 돌아가고 나서도 올리비아는 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목소리, 당당한 행동 하나하나가 시간이
흐를수록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올리비아는세자리오를 생각하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의 말씨나 행동을 봐서 남의 시종이나 할 사람 같지는 않아.
분명 그는 신사였어. 아, 그가 공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올리비아는 어느 새 세자리오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 자신을 꾸짖었습니다.
'너는 어쩌면 한 번 본 남자에게 마음을 뺏길 수 있니? 게다가
그는 남의 시종이나 하는 하찮은 신분인걸. 그에 비해 나는 뼈대
있는 백작 가문의 딸이며 부자야, 우리 둘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대야.'
그러나 올리비아가 자신을 아무리 탓해도 제자리오를 그리는
마음은 점점 깊어 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올리비아는
세자리오에게 사랑을고백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는하인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는 어서 공작 댁으로가서 그의 시종인 세자리오에게 이것을
주고 오너라, 반드시 직접 건네 주되 공작은 모르게 해야 한다.'
올리비아는공작이 자신에게 선물로 준 다이아몬드 반지를
세자리오에게 갖다 주라고 시켰습니다.
그렇게 하면 세자리오가 자신이 마음을 눈치채리라 기대했기
대문입니다.
한편 공작의 집으로 돌아온 바이올라는 올리비아가 공작이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것을 짐작했습니다.
시종 쌀쌀한 체했지만 그녀의 얼굴빛이나 태도로 보아
그러한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이올라는
혼자 씁슬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올리비아 아가씨, 참 불상하게 되었군. 신기루나 꿈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내가 여자인 이상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이제 그 아가씨는 나 대문에 공연히 잠도 못 자고
쓸데없는 한숨만 내쉬겠지.'
그러고나서 바이올라는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공작한테
갔습니다. 이제나 저네나 바이올라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공작은 그를 반갑게 맞앗습니다.
"오, 세자리오, 이제야 오는 군 그래. 갓던 일은 어떻게 되었지?"
'공작님, 올리비아 아가씨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만 되풀이하셨습니다. 공작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통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바이올라의 이 말에 공작은 잠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곧 밝은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아마 처음이라서 그랬을 거야. 새자리오, 몇 번이고 계속
찾아가서 내 마음을 전해 다오. 올리비아를 설득하고 내 사랑을
올바로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야. 부탁한다.
수고스럽겠지만 나를 위해 다시 한 번만 더 갔다 오게.'
이번에도 바이올라는 공작이 명령을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올리비아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바이올라가 올리비아의 집에 도착하자 곧 문이 활짝 열리며
하인들이 나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바이올라는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첫 번째 방문처럼 문간에서 하인들과 실랑이를 벌이든가.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리비아의 집에서는 바이올라를 환영하는 태도가 영력했기때문입니다.
바이올라는 하인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올리비아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올리비아도 바이올라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어서 오세요, 세자리오."
'안녕하셨습니까? 전 공작님의 심부름으로 다시
아가씨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바이올라가 이렇게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올리비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공작님 얘기는 다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전 그분한테는 관심이 없어요.'
그러나 바이올라는자신의 임무만을 서둘러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괜한 소리인 줄 알면서도 공작 대신
구애를 하였습니다.
'제 주인이신 오시노 공작님께서는 올리비아 아가끼와 결혼하고
싶어하십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아가씨를사랑하고 계심은
물론이고요."
올리비아는 더 이상 듣지 않았습니다. 바이올라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말했습니다.
"세자리오, 지금의 그 말씀이 공작님아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었으면 좋겠군요.'
올리비아는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자 바이올라의 얼굴에 당황스런 빛이 떠올랐습니다.
올리비아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습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어 냈어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오빠만을 그리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을 거예요."
바이올라는 그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바이올라를
놔 주지 않았습니다. 바이올라가 물러설수록 올리비아는
더 매달렸습니다.
'세자리오, 제가 싫으신가요? 아니면 제가 숙녀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해도 이젠 어쩔 수가
없어요. 숙녀답게 자존심을 세우거나 부끄러움을 탈 여유가
사라졌으니까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이 사랑을 감추고
기다릴 분별력 또한 없어졌어요."
"전 단지 공작님의 사랑을 전하러 이 곳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전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바이올라는 올리비아에게 이렇게냉정하게 말하고 돌아서
가 버렸습니다. 올리비아는 그의 뒷보습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행복한 결말
"어서 칼을 뽑아라. 네게 결투를 신청하는 바이다.'
바이올라가 올리비아의 집을 나서는 순간 어떤 낯선 사내가
번적이는 칼을 들이대며 외쳤습니다.
바이올라는 너무나 갑자기 당한 일이라 숨이 멈출 듯
깜짝 놀랐습니다.
"도, 도대체 누구시기에 내게 칼을 드리대는 거요?"
바이올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 남자는 여전히
칼을 내밀고서 말했습니다.
"일개 심부름꾼 주제에 올리비아의 사랑을 차지하다니,
말도 안 돼! 난 남부럽지 않은 집안 출신이면서도 그녀에게서
거절 당했어, 이대로 가만 있지 못하겠단 말이다."
그제야 바이올라는 사정이 대충 이해되었습니다. 이 남자는
올리비아에게 거절을 당하고 그 화 풀이를 하려는것입니다.
지금 겉모습은 남장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자인 바이올라는
칼을 보자 겁이 덜컥 났습니다. 개다가 싸움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잔뜩 약이 오른 상대와 결투를 벌인다는 것은
곧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창피한 일이었지만 바이올라는 슬금슬금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도망치려 했습니다. 칼을 든 남자는 바싹 바이올라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때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달여들어 그 남자를
말렸습니다. 그러고는 친절하게 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자, 참으세요. 이 젊은이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내가 책임을
지겠소. 그러나 당신이 이 사람에게 잘못했다면 내가 대신
싸울 것이오.'
그러자 곧 칼로 덤벼들 듯하던 남자가 한풀 꺾여서는
뒤로 물러났습니다.
바이올라는 자기를 위기에서 구해 준 이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이올라가 입을 떼려고
하는 순간 순경이 나타나 그 남자를 붙잡았습니다. 남자는
오래 전부터 바이올라를 알고 있었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체포당하게 되는군. 자네를 찾으려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무사했을 텐데. 이봐, 아까 주었던 지갑은 다시 돌려
주어야겠어. 너무 그렇게 어리둥절한 표정은 짖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나저나 더 이상 자네를 도와 줄 수
없게 된게 가슴 아픈데."
바이올라는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난 당신을 방금 전에 처음 만났는걸요.
그런데 지갑을 내놓으라니요? 뭔가 착각을 하셨나 보군요. 어쨌든
절 도와 주셨으니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보상을 해 드리지요.'
그러면서 바이올라는 자신의 지갑을 꺼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펄펄 뛰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라고?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내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이제 와서 날 모른 척해?
다 죽어 가는 놈을 살려 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데리고 왔는데..."
곁에 있던 순경들은 남자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를
끌고 가 벼렸습니다. 그 남자는 끌려가면서도 뒤를 둘아보며
바이올라를 향해 욕을 해 대었습니다.
그런데 바이올라는 그 남자가 말끝에 세바스찬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이올라는 그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다보았지만
이미 남자는 순경에게 끌려 사라진 뒤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바이올라는 세바스찬이라는 이름을
되세겨 보며 생각했습니다.
'분명 그 남자는 나를 세바스찬이라고 불렀어. 나를 그렇게
불렀다는 건 우리 오빠를 알고 있어서 서로 혼동했다는 증거야.
역시 오빠는 살아 있었나 봐, 그 남자가 구해 주었다는 건
틀림없이 세바스찬 오빠일 거야, 어서 서둘러 그 남자를
찾아봐야겠다.'
바이올라가 돌아간 뒤에 결투를 신청했던 남자가
또 나타났습니다. 아까는 말리는 사람이 있어서 엉겁결에
피했지만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이올라를 찾았습니다. 그 때 그의
눈앞으로 바이올라가 지나갔습니다. 사내는 다시 칼를 빼들고
그를 막아섰습니다.
"잘 만났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 주마, 자, 내 칼을 받아라."
그런데 여기 나타난 사람은 바이올라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바이올라의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이었습니다.
세바스찬은 집을 지나다 엉뚱한 변을 당하게 되엇지만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내의 칼을 멋지게 받아 내고는 자신의 칼을 뽑아
상대를 공격했습니다.
사내는 큰소리친 것에 비해 실력이 없었습니다. 몇 번 칼을
휘두르다가는 질 것 같으니까 얼른 도망을 쳐 버렸습니다.
새바스찬은 바이올라의 짐작대로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순경에게
끌려가던 남자가 바로 세바스찬을 구해 준 사람입니다.
배가 폭풍우를 만나 부서져 버렸을 때 세바스찬은 돛대에
몸을 묶고 얼마 동안을 그렇게 바다 위를 떠다녔습니다.
그러다 지나가던 배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 때의 선장이
바로 아까 바이올라에게 자신을 모른 척 한다고 소리치던
그 사람입니다.
선장의 이름은 안토니오였는데 그는 세바스찬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바스찬이 일리리어를 한 번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그와 함께 이 곳에 온 것입니다.
아까 안토니오가 순경에게 끌려간 이유는 옛날에 오시노 공작이
조카에게 큰 부상을 입힌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장은
잘못하다가는 잡혀 갈 줄 알면서도 세바스찬을 위해서
이 곳에 왔던 것입니다.
안토니오의 세바스찬은 두 시간 전에 이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안토니오는 세바스찬에게 자신의 지갑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자, 여기 돈이 있으니 구경하다가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사도록 해, 자네가 거리 구경을 하는 동안 난 여인숙에서
기다리고 있겠어."
"정말 고맙습니다. 한 시간 후엔 돌아오겠습니다."
세바스찬은 신이 나서 지갑을 받아 들고는 거리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약속한 한 시간이 지나도
세바스찬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안토니오는 세바스찬이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위기에 처한
바이올라를 만났습니다. 안토니오는 당연히 바이올라가
세바스찬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바스찬이 자기를모른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한편, 결투를 해서 상대를 멋지게 쫓아 보낸 세바스찬은
안토이오와 약속한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고 여인숙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인이 나와 그를 붙잡았습니다. 어리둥절해진
세바스찬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 여자에게 끌려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여자는 바로 올리비아였습니다. 올리비아는 자기 때문에
세자리오가 질투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왔던 것입니다.
올리비아는 물론 그가 세바스찬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세자리오라고만 생각하고 그에게
온갖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세바스찬은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자
어찌 된 까닭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기분이 좋았습니다.
올리비아도 자신을 쌀쌀맞게 대하던 세자리오가 선선이
자신의 호의를 받아 주는 것 같아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올리비아는 세자리오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몰라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세자리오님, 당신에 대한 제 마음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저는 당신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답니다. 그러니
다시는 제 곁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마침 집 안에 신부님이
와 계시니 당장이라도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이 말을 들은 세바스찬은 깜짝 놀랐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아가씨한테서 이렇게 친절한 대접을 받는 것도
황송한데다가 결혼을 해 달라니 ... 이 아가씨,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군, 아니면 머리가 돌아서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세바스찬은 잠시 이런 생각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올리비아는 더욱 애가 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습니다.
'제발 이 이상은 거절하지 마세요. 당신을 제 남편으로
성심 성의껏 섬길 테니까요. 저의 재산과 하인들, 그 밖의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당신 거예요."
세바스찬은 계속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렇게 훌륭하고 큰 저택의 주인이며, 하인들을 부리는 솜씨를
보면 미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또 저 아름다운 외모와 교양
있는 태도를 봐, 아마 갑자기 나를 사랑하게 된 것 말고는
제 정신인 게 분명해 그럼, 이것도 하늘이 정해 주신 인연일까?
그러고 나서 세바스찬은 명랑한 목소리로 올리비아에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아가씨, 우리 결혼합시다."
올리비아는 하늘에라도 뛰어오를 듯이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결혼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즉시 신부님을 모셔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부님과 올리비아의 하인들만이 지켜보는가운데
올리비아와 세바스찬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여전히 세바스찬이
세자리오라고 믿고 있는 올리비아는 마냥 행복했습니다.
세바스찬 역시 뜻하지 앟은 행운에 감격해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세바스찬은 여인숙에서 자신을기다리고 있을
안토니오 선장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올리비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토니오에게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보, 올리비아, 여기서 가까운 곳에서 내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소. 지금 가서 그 친구를 만나봐야겠어. 그 친구는 내 생명를
구해 준 은인이라오. 내가 당신과 결혼한 사실을 알면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나를 축하해 줄 거요.'
"그래요? 그렇다면 어서 가 보세요. 그러나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마세요. 전 한순간이라도 당신을 보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요. 아시겠죠?"
세바스찬이 막 집을 나서려는 순간 올리비아가 다시
그를 불러 세우며 말했습니다.
'여보, 그러지 말고 그 친구분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세요.
당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라면 내게도 그와 다를 바 없잖아요.
그러니 꼭 그분에게 대접을 하고 싶어요."
세바스찬은 그런 올리비아를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고서 집을 나갔습니다.
세바스찬이 안토니오를 만나러 나간 후 얼마 안 있어 올리비아의
집 앞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오시노 공작이 바이올라와 함께 올리비아의 집 앞에
막 도착하였을 때입니다.
순경들이 안토니오를 데리고 오시노 공작 댁으로 가던 길에
이 곳에서 두 사람과 마주친 것입니다. 순경들은 공작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말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마침 잘 되엇군요. 저희들은 지금
공작님을 뵈려고 가던 길입니다.'
"그래,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지?"
공작이 물었습니다. 순경은 곁에 있는 안토니오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공작님, 이 자의 얼굴을 잘 봐 주십시오. 바로 몇 년 전에
공작님의 조카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망친 자입니다."
안토니오의 얼굴을 보고 놀란 것은 공작이 아니라
바이올라였습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자신을
구해 주고는 알 수 없는 소리민 하다 붙들려 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오도 바이올라를 알아보고는
다시 소리소리 지르며 말했습니다.
"세바스찬, 이 나쁜 놈, 아직도 나를 모른다고 할 테냐?
은혜를 악으로 갚는 파렴치한 놈 같으니!"
이 말에는 공작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엇습니다. 죄인의 몸으로
자신의 앞에 섰으면서도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엉뚱한 소리를
외쳐 대니 말입니다. 그러나 공작은 침착하게 안토니오를
향해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는 여기 이 사람을 알고 있나 보지?"
"알다 뿐입니까? 저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저놈을 살려 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먹여 주고 입혀 주며 돌봐
주었는데, 글세 갑자기 나를 모른다고 딱 잡아떼잖아요. 또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지갑을 주었는데 그것까지 받은 일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니 이렇게 분통 터질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안토니오는 금방 폭발해 버릴 것 같은 화산처럼 씩씩댔습니다.
공작은 안토니오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습니다.
"자네가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이군. 이 사람은 최근 석 달 동안
내 곁에서 시중을 들었단 말이야.'
그러면서 공작은 순경더러 안토니오를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안토니오는 계속 그럴 리 없다며 버티엇습니다. 그 때 올리비아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집 밖이 하도 시끄러워서 나와 본 것입니다.
공작은 올리비아를 보자마자 안토니오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넋이 나간 듯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오, 올리비아, 참으로 오래간만이군요. 그대는 여전히
천사처럼 아름답고 누부시구려."
그러나 올리비아는 공작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이올라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의 세자리오, 이제 오셨군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시간은
너무 지루하고 의미가 없어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공작은 이러한 올리비아의 말과 태도에 기절할 듯 놀랐습니다.
분명 올리비아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시종인 세자리오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공작은 세자리오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공작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세자리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네가 이렇 수 있느냐?
널 가만 두지 않겠다. 어서 나를 따라오너라 혼을 내 줄 테니.'
질투심에 사로잡힌 공작은 당장이라도 세자리오를 죽일 듯한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바이올라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죽어 공작님의 마음이풀어지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바이올라는 공작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순간 올리비아가 바이올라에게 매달리며 울부짖었습니다.
"안 돼요. 절 두고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어요."
올리비아는이번에는 공작에게 애원했습니다.
"공작님, 부탁이에요. 세자리오를 살려 주세요. 우리는 오늘
아침에 결혼했어요. 그런 부부를 갈라 놓는다는 것은
아무리 공작님이라 해도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요?"
"뭐라고요. 결혼?"
공작은 도저히 믿기지 않느다는 표정으로 바이올라를
쳐다보았습니다. 바이올라 역시 몹시 놀랐습니다.
그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결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올리비아 아가씨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그러자 올리비아는 자신들의 주례를 서주었던
신부님을 모셔 왔습니다.
'신부님, 우리가 결혼했다는 증인이 돼 주세요."
신부는 올리비아의 부탁대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저 두사람은 분명 부부입니다. 제 앞에서
하늘에 대고 맹세헸습니다."
공작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을 도둑맞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돌아킬 수 없는 일입니다.
공작은 멍청히 서 있는 바이올라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세자리오, 그 동안 나는 너를 친구처럼 믿고 좋아해 왔다.
그래서 올리비아에게도 보냈던 것이고 하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됐구나. 시종에게 애인을 빼앗기다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공작은 괴로운 심정으로 돌아섰습니다. 그 때입니다.
"여보, 올리비아, 나 돌아왔소."
또 한 사람의 세자리오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물로 세바스찬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이올라와
세바스찬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놀란 것은 바이올라와
세바스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바스찬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젊은이를 보고는 쌍둥이 여동생 바이올라가
생각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물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보시오, 젊으니. 댁은 분명 남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남일 터인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닮았군요.
사실 내게는 쌍둥이 여동생이 있거든요. 그 애와 나는 당신과
나처럼 꼭같이생겻죠.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며 부모님조차도
우리 분간하기 어려웠다니까요."
세바스찬은 잠시 한숨을 섞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애는 바다에 빠져 죽었을 거요.
같이 배를 타고 여행을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흩어진
이후 소식을 알 길이 없다오."
"오빠!"
바이올라는 더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이올라가 남자인 줄 아는 세바스찬은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오빠라니요?"
"오빠, 제가 바로 바이올라예요."
바이올라는 목이 메어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애써
진정하며 차근차근 그 동안의 일을 털어놓았습니다.
세바스찬뿐만 아니라 곁에서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도
세자리오가 여자라는사실에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공작과 올리비아만큼 놀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잠시 후 공작은 놀라움이 가라앉자 허허 웃으며
바이올라에게 말했습니다.
"세자리오, 어쩌면 그렇게 멋지게 나를 속였지? 네 생각에
곱상하고 얼굴이 하얘서 여장을 하면 아름다운 숙녀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진짜
여자라고는 짐작도 못 했어. 그 동안 여자의 몸으로
내게 남자 못지않은 충성을 보여 주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그러자 바이올라는수줍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공작님을 속인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남장을 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가까이서 공작님을
모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올리비아는 자신이 여자에게 반해 버린 사실을 알고
창피해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하인들도 재미있다는 듯이
그런 주인 아가씨를 쳐다보며 웃었습니다.
그러나 올리비아는 이미 자신의 남편이 된 세바스찬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따라서 올리비아와 세바스찬의 결혼에는
아무 문제도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 죽은 줄로만 알고 있다가 전혀 뜻하지 않게 다시 만나게 된
두 남매는 한참 동안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지난 얘기들을 나누던 중에 그들은 안토니오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공작에게 부탁해 안토니오를 불러 왔습니다.
안토니오도 처음에는 두 명의 세바스찬을 보고 기절할 듯
놀랐습니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오해가 다 풀려
껄껄 웃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쌍둥이 남매로 인한
소동은 진정되었습니다.
공작은 올리비아가 세바스찬과 결혼했기 때문에
깨끗이 그녀를 단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름다운 아가씨로 변한 바이올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공작은 오래 전부터 바이올라가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충성스런 신하가 주인을
섬기듯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여자로서 자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공작은 그 동안 자신이 어리석은 사랑에 빠져 진정한
사랑을 몰라 봤다는 것을 깨닫고 바이올라를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작은 바이올라를 정답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바이올라, 그대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소.
바로 오시노 공작의 부인이 되라는 것이오.'
바이올라는 너무나 기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서만 애태워 왔던 사랑을 드디어 이루게
되엇으니까요. 세바스찬과 올리비아도 이들의 결혼을
진정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뒤 엄청난 운명의 고비를 만났던 바이올라와
세바스찬은 그 위기를 잘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첫댓글 지기님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잘 읽었습니다. 오타는 안 보이니 다행인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