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예습
1920년 생, 99세의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인생의 의미를 묻는 당신에게
작가는
1.행복의 조건
2.일하는 기쁨
3.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가.
4.사랑했으므로 행복했노라
넉 장으로 크게 나누워 백년을 살아본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첫머리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머문다.
사랑의 척도가 그대로 행복의 기준이 되곤 했다.
그 사랑이 어려움을 동반했다고 해서 포기하면 사랑의 꿈은 사라진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더 큰 행복을 안겨준다. 쓰고 있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중학생 때 부친이 그에게 들려준 말은“네가 한평생을 사는 동안 너와 가정만을 걱정하면서 살면 가정만큼만 자란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동료들과 함께 일하면 직장과 공동체의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언제나 민족과 국가를 위하면서 살면 너 자신이 민족과 국가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이 말을 지금은 이해를 하신단다.
김 교수는 병약하여 건강에는 절대 무리를 하지 않았다. 피곤하거나 힘들면 무조건 휴식을 취한다. 늙으면 건장이 제일이란 말은 자주 듣는다. 장수하려면 40~50대부터 관심을 갖는다. 유전적 질환이 있다고 해도 그 때부터 치료하면 치료시기를 놓치지는 않는다. 김 교수는 건강의 표준은 “누가 같은 나이에 더 많은 일을 하느냐”로 삼고 있단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 짤막짤막한 낮잠이 도움이 된다. 나이가 들면 인간적인 욕망을 버린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도 못하며 장수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소유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언제나 정신적 여유를 갖는다. 지혜롭게 휴식을 즐기면서 독서, 예술 감상 등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워 얻으려는 정신적 기대를 갖고 사신단다.
카나다와 미국의 성장과 발전은 영국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영어 문화권은 세계에서 선진 사회의 위치에 있다. 그 배후에는 ‘경험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영국이 있다. 대륙 프랑스와 독일의 합리주의와 대조되는 사회이론이다. 합리주의는 수학 및 논리적 사고와 가치를 존중히 여긴다. 경험주의는 심리학과 현실주의적 가치를 믿어왔다. 대륙사회는 원칙을 정해 놓고 그에 따랐으나, 영국에서는 현실에서의 질서와 원칙을 발전시켰으며 그 가치를 소중히 여겨왔다. 경험주의 사회의 근본 가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를 추구하는데 있다.
책을 안 읽는다고 굶어 죽지는 않지만, 독서는 생활인의 정신적 양식이다. 음식을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독서는 정신적 양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독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체적으로 굶어 죽지는 않으나, 그러나 정신적인 양식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다. 유치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교육은 책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잘못되어 있다. 그래서 독서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구별하는 과오를 범한다. 고등학교 선생이 독서하는 학생에게 수능이 한 달 남았는데, 공부는 안하고 책을 읽으면 어떻게 하지? 나무라는 것을 어찌 생각하는가. 공부와 독서를 별개로 보는 시선의 예로 김 교수가 삼성 공체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데, 고전에 해당하는 책을 몇 권이나 읽었느냐 물음에 놀라울 정도로 읽은 사람이 없었단다. 당신들이 과장이 될 때까지는 일에 열중해 모를 것이나, 그 이상의 직책을 맡는 지도가가 되면 정신적 빈곤을 자인하게 될 것인데 어찌 할 것인가? 우려를 했단다. 기업은 이제 와서 인문학을 공부한 사원이 필요함을 느끼고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 인문학의 필요를 느낀 것은 고전적 내용을 갖춘 독서의 빈곤을 느낀 것이라는 증거다. 지금 세계를 문화적으로 이끄는 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이다. 왜 그 나라에 국한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다. 그 나라의 국민은 100년에 걸쳐 독서를 해왔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문예 부흥이후 문명적으로 앞선 나라들이었으나 국민이 독서를 안 해서 성장하지 못한 나라다. 러시아는 공산 국가가 되면서 자유로운 인문학을 포기 했고, 남미의 여러 나라나 아시아의 일본을 제외한 여러 나라를 여행해 봐라, 모두 책을 읽는 사회가 아니다.
폭력은 정신적 빈곤의 결과다.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독서는 반쯤 성공한 나라다. 이제부터라도 독서 율이 높아지면 더 성장할 수 있다. 1차 책임은 교육 정책에 있고, 다음 책임은 5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 있다. 우리나라 중. 고등학교에서는 폭력을 걱정한다. 폭력을 멀리하는 데는 독서의 즐거움으로 이끌어야 한다. 폭력은 정신적 빈곤에서 오는 것이다. 봉사활동은 남을 돕지는 못해도 해치지는 않는다. 개인의 불행과 사회악은 정신적 가치의 빈곤에서 유발한다. 이는 교육계와 종교계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이기주의자는 사랑할 자격이 없다. 이기적 목적의 인간관계는 사랑이 못 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점이다. 쌍방이 다 이기주위자이면 서로 인격을 이용하는 큰 불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혼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본질적 차이는 이기적 목적의 유무에 있다. 이기주의자는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고 객관적 가치를 수용하지 못 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자는 합리적인 판단과 객관적 가치를 수용한다. 이기주의자는 전체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폐쇄적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자는 전체와, 관계와 질서를 위하기 때문에 사회에 도움을 준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개인주의 전통을 기우지 못했기 때문에 개인주의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개인주의 전통이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적 폐해를 주는 개인은 사회적 악인으로 취급한다.
수많은 이기주의자들이 빠지는 유혹의 대상은 돈과 재산이다. 다른 유혹은 명예욕이다. 최근에는 학문을 추구하는 학자나 교수가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 논문 저서 등을 표절하는 사례로 가짜 학위를 탐내 망신을 당하는 사례가 나온다. 목사가 자기를 목사라 부르지 말고 박사라 불러달라는 사람도 있다. 이 모두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들이다. 미국은 학문의 초장기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박사, 그 학문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은 교수,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는 교수는 제자들이 선생(Mr)으로 부른다. 대통령의 존칭도 미스터 프레지던트다.
인류의 큰 숙제로 남은 것이, 종교 간의 갈등과 괴리적인 신앙 이념으로 초래되는 인간성장의 후진성이다. 세계의 세 가지 문화권인 인도, 동양, 서구의 문화권 중에서 인도 문화권의 후진성은 그들의 종교 관념 때문이다. 동양의 윤리 문화와 서구가 과학문화권이라면 인도는 종교문화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슬람 문화권의 후진성과 사회적 발전의 지연성은 그들의 종교적 신앙과 가치관에 근거한다. 공산주의 이념은 100년을 지속할 수 없었으나,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에서 오는 불행은 200~300년에 해결하기 어려운 것으로 본다. 교육수준이 높은 지성사회일수록 전통적인 종교문화는 약화되고 있다. 이유는 종교문화를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교조적인 의식적인 행사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서구사회도 그렇다. 기독교과 휴머니즘과 연계되면서 사회발전과 성장을 도왔으나, 기독교 교회주의적인 인습은 그대로 수용되기 어려웠다. 지금도 이슬람교는 그 이슬람교의 신앙적 근본주의 때문에 이성적 판단과 자유로운 인격의 가치를 구속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아직 종교를 갖고 있는 국민이 많은 종교 국가다. 불교나 기독교가 점차 국민들 성장보다 뒤처지고 있다. 불교나 기독교가 신앙적 교리와 외형적 인습에만 안주한 채, 석가와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진리와 가치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간다면 인습적인 불교나 교리를 앞세우는 교회적인 기독교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힘들 것이다. 인간은 어떤 종교나 신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국민들의 인간다운 성장과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인문학운동이 중세기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뒤로하고 새로운 인생관을 탄생시켰듯이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시켰다. 그 산고로 가톨릭과 기독교가 재탄생된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를 위해 존재하지 사회가 기독교를 위해 존립해서는 안 된다는 방향전환인 셈이다. 구약을 신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복을 받는다는 폐쇄적인 민족 신앙을 극복하지 못했다. 기독교는 그 달걀을 깨트리고 태어난, 창조적인 희망의 종교였던 것이다. 그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현대인들은 운명적인 성격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행동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성격을 바꿔라, 성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습관을 고쳐라,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행동을 고쳐라, 행동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꿔라”라고 한다. 생각은 누구나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성격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게으른 성격을 가진 사람도 하루하루의 일과를 바꾸어나가면 그 행동의 반복이 습관을 고치게 되고 성격에도 변화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지능지수의 차이와 운동신경의 차이와 천성과 동기부여의 벽이다. 북한에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토지는 국가가 소유하고, 농민은 소작을 했다. 소출은 전부 정부에 공납하고 국민은 그 쌀을 배급받아 먹었다. 결과는 농산물의 감소로 이어진다. 땀 흘러 농사 져야 나라에 바치고 일에 대한 보상과 대가가 없어지니 누가 열심히 할까? 중국도 그랬다. 주택의 소유권은 국가가 갖고, 국민은 거주권만 주니, 누가 자기 돈으로 수리를 할까, 방치 한다 즉 일을 위한 동기 부여를 못 했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도 그렇다. 한때 사람들은 미국적 자본주의에는 종말이 온다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이 역사적 결정론에 속한다고 열을 올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반대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는 종말을 맞고, 자본주의자는 시장경제로 변신하면서 세계 각국이 그 길을 따르고 있다. 중국도 시장경제에 빠르게 뛰어 든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휴머니즘’이었다. 인간애 정신이다. 인간을 수단과 방편으로 삼는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 선은 목적과 방법이 모두 선해야 한다. 인간애를 거부한 선은 선이 아니고, 악의 방법에서 불선의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30년 뒤 자화상을 그리면 10대나 20대 젊은이들에게 앞으로 50대가 되면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사회생활을 하게 될지 스스로 반듯이 문제를 삼으라고 말한다. 목표의식이 있는 사람은 목표를 향해 직진하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방황하거나 친구들을 따라 가기도 한다. 그 나이는 공부보다 뚜렷한 목적과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이 성공도 빠르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런 인생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80대 즈음이 될 것이다. 그 이후의 세월은 노년기로 봐도 좋다. 누구나 노년기는 온다. 노년기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청년기에 용기와 노력이, 장년기에 가치관과 신념이 요청된다면, 노년기는 삶의 지혜와 모범이 필수적이다. 늙는다는 것은 성숙되어간다는 뜻이다. 열매는 익어서 버림받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열매로 남는다. 긴 세월에 경험을 쌓아 왔기 때문이다. 흔히 이 세대는 선배나 원로라는 말을 듣는다. 원로는 80대 이후의 인생이며 지혜를 갖추지 못한다면 인생의 결실기를 놓친 결과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네
행복은 생활 경험의 산물이기에 복합성을 갖는다. 희망을 상실하면 행복도 잃어버린다. 행복은 믿음과 공존한다. 행복은 평화의 밭에서 자란다. 증오와 투쟁을 계속하면 행복할 수가 없다. 선한 목적을 말하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위선이다. 행복은 생활 관념이기 때문에 존재하기는 하나, 어디에 무엇과 같이 있느냐의 해답을 얻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머문다. 그 사랑이 어려움을 동반한다고 해서 포기하면 사랑의 꿈은 사라진다. 인생은 고해와 같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고생은 더 큰 행복을 안겨준다’ 그리고 김 교수는 5년 전 잠을 못자고 정리한 말로 끝을 맺는 글이 있어 적는다.
나에게는 두 별이 있었다.
진리에 대한 그리움과
계례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 했다.
2019.03.13.
행복 예습
김형석 지음
Denstory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