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장 설교문] 2021.2.28. 사순 제 2주일. 청주수동성당. 유낙준모세주교.
“나는 전능한 신이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없이 살아라(창세17:1). Obey me.”
어려울수록 꼭 필요한 것만 붙잡아야 하는데 더 두리번거리지 않게 살고자 합니다.
성령의 힘 안에서 성경읽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성공회 신앙!
교회의 삶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께서 청주 수동성공회 성도들에게 최고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나이다. 아멘.
‘제가 혼자 있을 때 도와주셔요.’라는 기도를 하는 제 말에 제가 놀랬습니다.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할 때는 제가 항상 혼자였을 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늘 제게 도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특히 혼자 있을 때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을 받은 이후에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은 항상 쉽지는 않습니다. 돕는 것은 참으로 깊은 존중감이 우러나는 표현이 담아있어야 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도와줄까요?” 도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고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늘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방식처럼요. 하느님은 늘 우리의 마음 하나 다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면 기도하자”라는 원로신부님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들립니다. 이것이 제게는 힘든 삶에서 일어서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도는 제게 힘을 주는 길이었고 뒤죽박죽된 혼돈된 생을 명료하게 보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어려울수록 기적을 바라게 되잖아요. 하느님께 기도하면 늘 기적이 일어나는 인생이 됩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러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면 어려움 중에도 기쁘게 살게 됩니다.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코로나-19인 바이러스로 인하여 지난 1년간 많은 이들이 죽었고 일자리를 잃었고 삶이 어려워졌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종이 호모 마스쿠스로 인류 전체가 마스크를 쓰는 종으로 변했습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여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혹독한 기간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클래식을 연주하는 이들은 악기를 매일 하루에 4시간 정도씩 연습을 해야 자신의 실력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운동선수들도 자신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서 그만큼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오랜 기간을 훈련하고 연습하고 연구하는 전문적인 재능으로 사는 이들이 파트타임으로 알바를 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간이 우리를 안락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백신이 왔기에 희망적으로 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세주 Christ 이십니다(마르코8:29)”라는 고백이 나온 직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난 받고 지배자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다시 살 것이다(마르코8:31)” 고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구세주로 예수님을 가지기를 원하는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고난과 버림과 죽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제안인 것입니다. 이분이 우리들을 구원하실 분임을 깨닫는 순간에 그분이 고통받고 죽는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합니다. 깨달았으니 이제 깨달은 단맛을 맛보는 허니문의 행복한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제자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안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였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베드로는 고통과 거절과 버림과 죽음의 필요성을 제안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도전한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 간의 갈등이 발생한 것입니다.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신 분이 스승이고 그 갈등으로 괴로움에 빠진 이가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인 거룩성과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과 욕정과의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마르코8:33 참조).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지키고자 예수님이 성령의 힘으로 운영되는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세속이 들어와 교회 안에서 늘 세속과 생명이 싸우는 중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살고자 교회에 참여하는데 매사에 성령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우리 성도들의 공동체이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는 이 어려움을 받아들이겠다.’ 또는 ‘나는 더 이상 어려움을 지고 갈 수 없다.’고 기도하는 소리로 자신의 시간을 채웁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요청하는 기도소리가 우리 성당에 넘치기를 빕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와중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강하게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떠날 상황일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헤어질 때가 있습니다. 서로 마음이 하나 되지 아니하고 스승이 제자를 몰라줄 때 대개 헤어집니다. 신도가 교회를 떠날 때가 바로 이러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때 포장되지 않은 맨살로 예수님의 속뜻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8:34). If any of you want to come with me, you must forget yourself, carry your cross, and follow me.” 만약 네가 나 예수와 함께 하려면, 너는 너 자신을 잊고 네 십자가를 운반하고 나를 따라와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스승 예수님은 제자에게, 우리들에게 ‘믿음의 순례여정인 인생에게 소통과 희생으로 견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에게 하시는 이 말씀은 짧지도 않고 적합하지도 않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받아들이기에 어렵고 힘든 말씀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스승과 헤어질 때입니다. 그러나 헤어졌다는 말씀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경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가 우리의 한계라는 경계선을 그어 놓은 선을 뛰어넘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8:34).”는 말씀을 우리는 조도와 감사성찬례 안에서 받기에 우리가 불편해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이고 친구로 만나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고백하고 배우고 성체를 받아 모시고 복을 받는 기도를 받고 우리의 믿음에 용기를 얻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여 세상에 나갑니다. 주교의 견진성사 시 12번의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신자들에게 묻습니다. “견진성사의 증인이 된 교우들은 서로 힘을 다하여 지금 견진을 받는 이들이 함께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도록 힘쓰겠습니까?”라며 한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선포합니다. 그러면 온 신도들은 이에 답을 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살기 위하여 12번의 질문에 다짐을 하는 답을 합니다. 사탄, 악마, 죄를 거절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으며, 이 여섯 가지 질문 이후에 이어서 7번과 8번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감사성찬례를 나누고, 교회의 삶에 참여하고, 충실하게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대한성공회의 7번과 8번에는 명료하게 이렇게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러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9번은 내면적인 회심을 10번은 몸으로의 말씀 실천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11번과 12번은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화해와 희망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욱과 공유하라는 것입니다. 주교는 모든 이들을 초대하는 자리로 교회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도들은 주교의 방문 시에 그간 아는 사람들에게 주교의 말씀선포를 듣게 하여 그렇게 살게 하려고 온 식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교는 모든 이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도들이 모든 이들을 존중하는 삶을 살게 다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기도하는 삶으로 신도들을 세우는 것이 주교의 방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당신의 인생이 바꾼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였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