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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띵동. 나는 시청 아가씨
윤 0 미 생활지원사
“ 안녕하세요,”
현관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우후!! 시청 아가씨!!”
반가이 맞아 주시는 우리 어르신은 나를 시청 아가씨라 부르신다.
생활 지원사로 일하게 된 지 2020년. 1년이 채 안 된 나는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부는 2020년 겨울, 나의 경력보다 서비스를 오랫동안 받고, 타 기관에서 이관되어 오신 어르신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파트 입구 난간에 유리창 설치가 안 되어있어 더 추웠던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르신 댁 층수에 내리니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첫 방문이어서인지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선임 생활지원사에게 어르신의 인상과 상황을 약간은 듣고 온 터라 덤덤한 척 초인종을 눌렀다. 한번으론 잘 들리지 않으셨던지 몇 번 더 누르고,
“어르신~!”
하며 외치고 나서야 문을 열어주시며
“누구요??”
하신다. 허리가 살짝 굽은 어르신에게
“안녕하세요~~며칠 전 전화드렸던 생활지원사예요‘
라고 소개하며 안부 인사를 드리니 그때서야
“아~시청 아가씨!”
라며 얕은 미소를 지으신다. 들어서자 보이는 안방 이브자리는 칼 각을 잡은 듯 정갈하게 정돈돼 있었고 장식장 위 물건들은 일렬횡대로 옷걸이에는 금방 입을 옷만을 옷걸이에 걸어 깔끔함이 베인 듯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거실 탁자엔 전자피아노가 놓여있었고 베란다엔 분리수거 휴지통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어르신이 드실 생수도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국가유공자의 집 아니랄까 봐, 마치 집 자체가 ‘나 군인이었소’ 하는 것 같았다. 다만,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거실 벽에 놓인 TV에선 야간업소에 있을 법한 현란한 비디오 트로트 가요 메들리가 쾅쾅 울리고 있었고 현관 입구 귀퉁이엔 라디오를 크게 켜놓아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문을 늦게 열어주셨던 것도 비디오와 라디오 소리에 뒤섞여 벨 소리를 못 들은 것 같다. 그 후로도 이러한 상황은 일상으로 다가와 음악이 없을 때는 어르신에게 심경의 변화가 생겼나, 하며 어르신의 동태를 살피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어르신께서는 월남전에 해군 포병으로 파병되어 포를 쏘다가 난청이 생겼고 동료들이 피 흘리며 총 맞아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며 치를 떨어야 했던 그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곤 그 시절 이야기를 녹음이라도 한 듯 방문할 때마다 되풀이하여 들려주신다. 그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광장 공포증과 협심증이 생기고, 우울증세까지 겹쳐 약을 처방받고 계시며 음악도 크게 울려야만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신다. 음악 소리가 너무 울려 이웃 주민으로부터 여러 번 민원이 들어와 스피커를 많이 바꾸셨고 경찰들이 몇 번을 왔다 갔다며 지금은 이게 그나마 조용해진 편이라고 말씀하신다.
피아노도 잘 치는 멋지고 세련된 우리 어르신은 올해 78세, 김O남 어르신과 서로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 일주일에 한 번씩 몇 달을 방문하다 보니 자꾸 냄비가 바뀌어 어찌 된 일인지 여쭈어보았다.
“연기가 나기 전까지는 음식이 타는 줄도 모르고 TV에 빠져 냄비를 다 태웠어요” 며 “죽을 때가 다 된 거죠~” 라고 별거 아니라는 듯 말씀하시는 어르신,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손 씻고 나신 뒤 수돗물을 그대로 켜놓으시기도 하셔서 내가 “수도세가 우리 집보다 많이 나왔네요” 하면 “내가 원래 잘 씻어요!” 라며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관계형성이 되어 친해질 때쯤, 어르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재사정을 통해 ‘일반’ 어르신에서 ‘중점’ 어르신으로 변경되셨다. 어르신께 변경된 방문 계획을 말씀드리니 그렇게 좋으신지, 환호성을 지르신다. 그렇게 앞으로는 일주일에 2회씩, 어르신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날씨가 조금 풀려 봄에 다가설 때쯤 집에만 계시는 어르신을 밖으로 나가 걷자고 말씀드리니 너무 좋아하시며 “운동을 하고 싶어도 친구가 없어 못 했다 며 “시청 아가씨랑 걸으면 너무 좋지요~~” 하신다. 그 후로도 일주일에 두 번씩 방문할 때마다 동네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우리는 운동을 시작했다. 학교를 지나며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를 보면서는 어르신 어릴 적 얘기를 들려주기도 하시고, 식당을 지나가다 메뉴판을 보고 어떤 메뉴가 맛있을지 콕콕 짚어가며 “다음에 먹으러 와요~ 내가 사줄게요” 허세를 부리시며 웃으시는 어르신!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한참을 걸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시는 어르신에게 편의점의 커피 한 잔을 주문해 손에 들려드리면 “우리 동네가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 몰랐네요” 하시고, 가끔가다가 공원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면 “하늘이 이렇게 맑고 예쁜 줄 이제 알았네요” 하신다. 그러고 난 뒤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질 때가 되면 늘 “5분만 더 있다가요~~”, “1분만 더 있다가요” 하며, 내 발이 무거워질 만큼 아쉬움을 표현하신다.
어느 날, 아들에게 얘기해 가스 안전 타이머를 부착해서 5분이라는 숫자를 써드리고 시간에 맞추어 음식을 데워 드시라고 설명을 해드렸다. 그것도 몇 달간은 잘하시는가 싶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아 여전히 냄비를 태우기 일쑤여서, 불안한 마음에 응급장비를 신청해드렸다. 그 후로, 이런저런 이유로 어르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느끼고 어르신이 치매 검사를 받아보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이 강하신 어르신을 어떻게 치매 검사를 받게 할까 궁리하다가 기관에 계시는 모든 어르신께서 보건소에서 예방 차원으로 의뢰 적인 검사를 매년 시행 한다는 말씀을 드린 뒤 치매안심센터에 가서 검사를 받게 하였다. 그런데 치매 선별 검사지도 다 끝내지도 않고 나오신 어르신께서는 탁자와 의자를 밀치시며 화를 참는 듯 본인의 손에 주먹질하시며 "겨우겨우 사는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살고 있는데 이런데 데려와서 나를 더 죽게 만들어요" 라고 큰소리를 치는 게 아닌가. 어찌나 역정을 내시던지, 당황한 나는 재빨리 어르신 팔짱을 끼고 밖으로 모시고 나왔다. 같이 모시고 온 어르신도 계셨고 이 상황을 환기하기 위해 어르신과 잠깐 산책하면서 이해를 시키려고 이런저런 얘기로 화를 누그러뜨렸다. 담당 선생님께선 검사도 거부하시고 전쟁 트라우마로 후유증이 겹쳐서 그러시니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권유하셨다. 어르신을 위해 했던 검사인데, 내가 오지랖을 피웠나 되짚어보고,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어르신을 댁에 모셔드리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찝찝해 견딜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순 없어 어르신의 아들에게 전화하여 그동안 있었던 일들의 얘기를 나누었더니 “대전보훈병원에 모시고 가겠다” 며 고맙다고 한다. 어르신이 다니는 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다가 아들에게 전해주기로 하고 다음 방문 날이 되어 떨리는 마음을 달래며 벨을 눌렀다. “어르신~~” 하고 문을 두드리니 문을 열어주시는 어르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느 때와 같이 라디오는 365일 돌아가고 평소대로 켜져 있었지만, 오늘은 다른 때와 다르게 추억의 팝송을 듣고 계셔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저도 이 팝송 좋아하는데~" 하며 “take me home country road ~~” 흥얼흥얼 따라부르니 “아~그래요! 시청 아가씨도 이 팝송 좋아해요~?” 하시며 군시절에 불렀던 팝송에 대해 줄줄 설명하시며 눈동자가 커지셨다. 어르신께서는 지난주 치매 검사받을 때 화냈던 것이 미안하셨던지, 사과의 표현을 말없이, 자연스럽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찝찝함과 두려웠던 생각이 눈 녹듯 사라지고, 다시 한번 반성하며 어르신에 대해 더 섬세하게 살펴보리라는 마음을 되새기게 하는 날이었다.
며칠 후, 어르신께서는 아들과 같이 보훈병원에 가셔서 검사를 받고 오셨다. 뇌수막종 진단을 받았고 치매가 아니라 전쟁 트라우마가 겹쳐 생긴 후유증일 수도 있으니 약물치료를 받아보라고 했다며 약 처방을 받아 오셨다. 어르신께서는 약을 드시는 날보다 안 드시는 날이 더 많았다. 약봉지에 날짜를 써드리고 달력에 쓰여있는 날짜에 맞게 드시라고 방문할 때마다 말씀을 드려도 “아픈 데가 없어서 잘 안 먹게 되네요!” 라고 말씀하셔서 휴대폰에 직접 음성녹음을 해서 알람을 맞춰드렸다.
“어르신 약 드세요~ 꼭 이요~!”
라고. 11시에 그 수제 알람이 울릴 때면 나에게 전화를 하셔서
“시청 아가씨가 약 먹으라고 해서 먹었어요~”
하며 웃으셨다. 알람 멈추는 것을 모르셔서 계속 울리도록 놔두실 때가 한두 번 이 아니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고는 가슴이 멍해져 왔다. 몇 주 후 아들이 어르신을 모시고 뇌수막종 상태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검사를 받고 치매약을 처방받아 왔다. 어르신께서는 날짜와 요일을 분간하지 못하시고 약도 한 달에 반 정도를 못 드시고 버리는 때가 많았다. 덥다고 에어컨을 안방과 거실에 밤새도록 켜놓고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춥다고 겨울 점퍼를 입고 있으신 때가 더러 있어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옷을 벗기고는 복도에 나가서 추운지 느껴보시라고 모시고 나가면
“이렇게 더웠어요?”
라고 하시고는 에어컨을 켜놓아 몰랐다고 변명하신다.
어느 날 어르신께서는 늘 애지중지 했던 승용차를 이젠 운전하기 힘들다고 자녀들이 걱정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시고 몇 달 뒤에는 운전면허증도 반납하셨다. 그 대가로 받아 오신 온누리상품권 20장. “이걸 어디서 쓰는 거래요?” 하는 나에게 꺼내어 보여주시며 씨∼익 웃으신다. 유일하게 장 보는 것을 좋아하시는 우리 어르신,
“롯데마트에서도 쓸 수 있나?”
하시며 봉투에 다시 밀어 넣으시는 어르신께
“시장에 가서 식사도 할 수 있고 반찬도 살 수 있어요~” 라고 하니
“그럼 언제 가서 맛있는 밥 한번 같이 먹으러 가요”
하신다. 그렇게 상품권은 맛있는 반찬으로 바뀌어 어르신에게 다른 위안이 되었다.
어르신은 이곳에 연고가 없는 분으로 직업군인으로 몇 년간 근무하시다가 전역 후 룸살롱 사업을 하셨다고 한다. 사업확장으로 사기를 당해 부도에 이르렀고 채권자에게 쫓겨 도망 다니시다가 우리 지역에 안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택에서 고양이를 키우며 사시다가 막내딸이 사업을 하다 빚을 져 주택도 팔고 형편에 맞게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어 나를 만나게 됐다고 하며 지금 살고 계시는 아파트도 대출을 받을 대로 받아 빈 깡통이라고 말씀하신다. 고양이를 키우며 적적함을 달랬던 어르신은 마당이 없는 아파트로의 이사와 적응하느라 힘이 드셨던 것 같다. 갈 곳이 없어진 어르신은 온종일 집안에 계시면서 고독함과 적막함을 트로트 가요 비디오와 라디오 소리로 채워가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계셨고 어쩌다가 한 번씩 전자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신다. 그래서 피아노 소곡집을 갖다 드렸더니 아쉽게도 악보는 못 보신다고 한다. 그래도 개인적으론, 아직 몇 곡을 기억하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르신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신 후 내가 방문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외출하여 들르는 곳, 어르신의 유일한 놀이터 이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 그곳은 바로 롯데마트이다. 인천에서 살다 오신 세련된 우리 어르신은 작은 마트는 살 것도 없고 구경할 것도 없다며 별게 다 있는 깨끗한 롯데마트가 좋다며 늘 그렇게 쇼핑으로 마음을 달래신다. 일주일에 두 번. 꼭 나와 데이트를 즐기는 곳, 롯데마트. 내가 오는 날이면 예쁜 핑크빛 꽃무늬가 있는, 얇은 옷을 차려입으시곤 맛있는 과자를 사러 가는 아이처럼
"밖에 안 추워요, 이 옷 입고 나가도 되겠어요"
하시며 함께 롯데마트로 산책을 떠난다. 들떠 있는 어르신을 모시고 카트를 밀고 다니며 이것저것 담으며 어르신과 이곳저곳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이제껏 담은 물건들을 계산할 차례가 다가온다. 내가 카트를 밀고 계산대로 향할 때면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짐을 짐작하시는지 카트 끝을 잡고 힘을 주며 못 끌고 가게 꽉 잡고 계신다.
“어르신 카트가 안 나가요” 라고 말하면
“조금만 천천히 가요”
라며 의도가 빤히 보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신다. 힘겹게 계산을 끝내고, 장 봐온 물건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드리고 돌아서 나올 때면 어르신께서는 1분만 더 있다가요, 1초만 더 있다가요, 하시며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 나오시며 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들어가신다. 언제나 반복되는 이 시간을 뒤로하고 나오면 어린아이 떼놓고 출근하는 엄마처럼, 복잡한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얼마 전, 어르신께서 식사를 여러 날 못하셨는지 문도 못 열어주시고 현관 입구에 한참을 앉아 계시다가 문을 겨우 열어주신 적이 있었다. 깜짝 놀라 어르신의 동태를 살펴보니 식사하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며칠을 굶으신 것 같았다. 얼른 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누렇게 변해 있었고 51H라는 빨간 불빛을 보고 식겁하며 며칠이 지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냉장고를 보니 냉장고 바깥쪽 반찬통은 거의 다 드시고 빈 통으로 국물만 남아 있었고, 눈에 보이는 것만 드셨는지 야채칸이나 냉장고 안쪽에 반찬통이 있는 것도 모르고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나오셨는지 등이 훤하게 켜져 있고, 변기통에 화장지를 뜯어서 버려놓아 변기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무엇보다 눈동자는 흐리멍덩해지고, 걷는 두 다리도 힘이 없으신지 잰걸음을 하시며
“배가 너무너무 고파요~!”
하시며 소파에 앉으신다. 얼른 밥상을 차려 식사를 챙겨드리고는 어르신 기분을 살피며 말을 건네니 점점 제정신을 찾으시는 것 같았다. 냉장고에 반찬을 꺼내서 정리해드리고, 잘 챙겨 드시라고 신신당부하고 나오며 어르신의 아들에게 그날의 일을 전화 너머로 설명해드렸다. 아들은 안심이 덜됐는지 다음날 새벽에 내려와 어르신을 모시고 올라가며 전화를 했다며 어르신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영양 섭취 잘해서 며칠간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다음날, 잇따라 나도 안심이 안 되어 안부 전화를 드리니 어르신께서 아침에 일어나 소변 실수를 하시고 아들이 출근하는데
“오빠 어디가”
를 반복하시며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드시는 약이 떨어져 어르신 약을 처방받아 빠른 등기로 보내드리고는 열흘쯤 지났을 때 밤늦게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어르신의 성화에 못 이겨 내려오고 있다며, 다행히도 어르신의 몸 상태는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다고 한다.
방문 날이 되어 전화를 드리고 찾아뵈니 어르신께서 해맑게 맞아 주신다. ‘마치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처럼, 환하게,
“시청 아가씨 보고 싶어 내려가자고 했지요”
라며 웃으시는 어르신. 이후로 방문하는 날마다 점심을 어르신과 같이 먹게 되었다. 어르신을 살펴보기 위해 식사를 같이해보기로 했는데 어느 날 식사를 하시며 TV 속의 아나운서를 가리키며
“우리가 같이 식사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이 우릴 보고 웃겠지요!”
하신다. 현실과 TV속을 가끔 혼동하시는 어르신을 보며 어르신의 건강이 차라리 이대로 멈춰있기를 바랬다.
그 후로도 우리 일상은 음악을 듣고, 피아노 연주를 하고, 롯데마트에 산책도 하러 다녔다. 한 번은 청춘지 워크북을 하자고 하니 수준에 안 맞는다며 눈살을 찌푸리셔서 그 대신 가끔 나오는 개인 활동 프로그램을 시작하셨다. 한지를 색칠하고 오리고 조립하여 3단 서랍장이나, 전등을 표현한 한지 공예도 하고, 수경 식물도 손수 만들어 재배하셨다. 얼마 전엔 약을 잘 잊고 안 드셔서 디지털시계를 주문해드리고 알람 시간도 오후 1시로 맞춰 하루 한 번 처방으로 약을 드실 수 있게 해드렸다. 이제는 예전과 다르게 약을 잘 찾아서 드시고 방문할 때마다
“나 약 잘 먹었죠! 시청 아가씨 오래 보려면 잘 먹어야죠”
라며 웃으신다.
항상 내가 방문할 때면 모든 것이 척척 해결된다며 마음이 안심되고 편안해진다고 하신다. 나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 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질 것은 분명하지만, 이 상태 그대로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어르신 댁을 방문한다.
‘띵동, 띵동’ 나는 시청 아가씨.
“안녕하세요~”
현관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우후! 시청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