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崔氏上系世譜(경주최씨상계세보)」의 기록으로는 소벌도리 24세손 최치원의 윗대에서 分派(분파)된 本貫(본관)으로 開城(개성)·朔寧(삭녕)·東州(동주:철원)·全州(전주:군옥派)가 있고 최치원의 後代(후대)에서 咸陽(함양)·淸州(청주)·永興(영흥)·忠州(충주)·龍崗(용강)·水原(수원)·扶安(부안)·江陵(강릉)·江華(강화)·和順(화순)·通川(통천)·陽川(양천)·原州(원주)·海州(해주)·晋州(진주)·耽津(탐진)·全州(전주:순작, 균)가 分派(분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蘇伐都利(소벌도리)의 후손으로 慶州 崔氏(경주최씨)를 元祖(원조)로 하여 소벌도리와 崔致遠(최치원)을 잇는 같은 後裔(후예)임은 틀임 없다고 본다.
이렇게 新羅(신라)시대에 雄起(웅기)한 최씨는 신라에서 崔致遠(최치원)·崔承祐(최승우)·최언위(崔彦●) 등 세 사람이 똑같이 唐(당)나라에 유학하여 科擧(과거)에 급제하고 그 명성을 날림으로써 1代(대)3崔(최)라 불리웠으며 특히 文昌侯(문창후) 崔致遠(최치원)과 같은 大文章家(대문장가)는 우리 나라는 물론 東洋(동양)의 어느 역사 속에서도 그 由來(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名賢(명현)으로 그가 남긴 道學(도학)과 文章(문장)은 東洋最高(동양최고)의 至聖(지성)이고 漢文學(한문학)의 祖宗(조종)으로 追仰(추앙)받고 있으며 고려 때 와서는 역사상 最高(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高麗史(고려사)를 보면 수많은 崔氏(최씨)들이 역사를 繡(수) 놓았으며 서기 1196년(명종26)∼1258년(고종45)까지 60여 년 간 군벌정치로 한때 崔氏王國(최씨왕국)을 방불케 했다.
忠節(충절)의 名將(명장) 崔瑩(최영)은 수많은 국내외 침입과 반란이 있을 때마다 격퇴, 평정하여 고려의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貢獻(공헌)했으며, 죽음에 임했어도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우리 民族(민족)의 얼이요, 최씨의 特性(특성)이다.
그외 고려 때 文臣(문신) 崔惟淸(최유청)·崔允儀(최윤의)·최유엄(崔有●)·崔宰(최재)·崔沆(최항)·최충(崔●) 등이 유명했으며 武臣(무신)으로는 崔忠獻(최충헌)이 있다.
朝鮮(조선) 때 와서 名臣(명신) 崔鳴吉(최명길), 陽明學(양명학)의 대가 崔錫鼎(최석정), 學者(학자) 최수성(崔壽●), 문신 崔應賢(최응현)·崔恒(최항)·崔萬理(최만리)·崔益鉉(최익현), 東學(동학)의 창시자 崔濟愚(최제우), 신문학 운동과 국학의 개척자 崔南善(최남선), 항일투사 崔在亨(최재형), 동학의 제2교주 崔時亨(최시형) 등 많은 최씨들이 역사의 흐름속에서 국가에 공헌했다.
한 氏族(씨족)의 家門(가문)을 가늠하는데는 흔히 文科(문과) 급제자 수를 따지고 명문의 척도를 정치적 세력의 성장과 관련시키는 관료적인 朝鮮社會(조선사회)에서 당시 과거제도가 권세가의 농락을 받은 일이 많아 견식과 人格(인격)을 겸비하고 不義(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최씨들에게는 벼슬이 그다지 중요시 되지 않았으므로 신라와 고려에서 名聲(명성)을 날린 최씨가 朝鮮(조선) 때 와서 의외로 벼슬에 나가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최부자집(崔富者家)」은 12代(대) 萬石(만석)과 10代(대) 進士(진사)로 유명하여 문공부가 1969년에 「신라의 집」으로 선정하고 길이 보전하기로 했다.
朝鮮(조선) 때 明宗(명종)·宣祖(선조)·仁祖(인조) 임금은 "先賢(선현) 文昌侯(문창후) 崔致遠(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理學始祖(이학시조)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嫡庶(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軍役(군역)에 동원하지 마라"고 傳敎(전교) 하였으며, 定宗(정종)은 "태강(汰講:서원을 도퇴시킴. 즉 파면)의 例(예)에 넣지 말고 범하는 수령은 처벌하라"고 전교하였다.
이렇게 新羅(신라)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국난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崔氏(최씨)들이 등장하여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求國(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던 抗日鬪士(항일투사)와 義兵(의병) 및 근대사회 발전에 공헌한 많은 崔氏(최씨)들의 거룩한 발자취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名門(명문)인 최씨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