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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계림,양삭 여행기
한 시간 젊게 살다 온 삼일간의 여정
김영준
2013년 01월 30일 19시 10분 출국 수속을 마치고 21시 05분에 출항하기로 되어 있는 중국 동방항공기는 1시간 20분이 지연되어 22시 25분에야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하였다. 우리의 목적지인 계림(桂林)까지는 약 3시간 30분이 소요된다는 스튜어디스의 안내 방송후 11시가 넘어 기내식이 나왔으나 늦은 밤에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별로였다. 불편한 것은 스튜어디스에게 한국어로, 영어로 물어도 전혀 소통이 안되는 것이었다. 분명 한국말로 안내방송이 있었는데......할 수 없이 바디랭귀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국에서부터 속이 좋지 않아 약을 챙겼는데 물을 달라하여 약을 먹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했다. 자는둥 마는둥 새벽 02시에 계림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받고 짐을 찿는데 1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새벽 03시 15분에야 피켓을 든 가이드와 만나 버스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공항을 빠져나오자 계림이라고 크게 쓴 공항건물 위의 대형 조명 간판이 비와 안개에 젖어 희미하게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고국에서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 떨었는데 이곳은 비가 내리고 있다.영상 10도를 넘는다고 한다. 분명 우리의 시계는 03시 30분이 넘고 있는데 중국 계림의 시각은 02시 30분이었다. 고국과 중국 계림과의 시차가 1시간이어서 결국 우리는 중국까지 날아와 1시간 젊게 살고 있는 셈이 됐다. 숙소로 가는 차내에서 가이드의 간단한 소개와 일정 계획을 듣고 도착하니 주점(酒店)이라는 네온싸인이 밝게 빛나고 있어 의아했으나 “계림 위에나 호텔”이라고 써진 영어를 보고 그곳이 호텔인 줄 알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자기네의 특별한 날에 대형 숙박업소에 가족 친지들이 모두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밤이 새도록 놀다가 잠을 잔데서 유래되어 지금도 대형 숙박업소인 호텔을 주점이라고 한단다. 호텔은 5성(五星)급으로 2인 1실을 배정 받아 객실로 들어 가니 그런대로 깨끗하였다. 중국 시간으로 03시를 넘고 있었다. 09시 30분에 관광이 시작된다. 서둘러 잠을 청하며 비행기에서의 피로를 풀어야 했다.
정확히 08시에 모닝콜이 울렸다. 대충 씻고 식당으로 가니 향 및 기름기 음식이 나와 맞지 않아 그냥 나오려다가 쌀국수라고 한글로 써붙혀 있어 그것을 먹고 커피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떼우고 호텔 밖으로 나가 가까운 거리를 산책했다. 계림시는 우리나라의 중소도시에 해당하나 워낙 땅이 넓어서인지 제법 잘 꾸며진 도시 면모를 품고 있었다. 유독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오토바이와 자전거 행렬이었다. 자동차 수보다 수십배 많은 오토바이는 바로 중국인들의 생활이요 중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성 싶었다..호텔로 돌아 와서 옷을 가볍게 갈아 입고 프론트로 나가니 가이드가 와 있었다. 하루 밤을 이 호텔에서 더 묵기 때문에 짐은 객실에 두고 나왔다. 우리 일행은 16명으로 남자 8명, 여자 8명이다.
첫 관람지는 계림시 이강 서쪽 기슭에 있는 가정집 정원식으로 꾸며져 있는 우산공원으로 중국 역사의 전설적 황제인 우제가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산 밑에 우제사당을 지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기후가 온화하여 백매화와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공원 정문은 그리스의 신전 기둥을 본떠서 지었고 안으로 들어가니 수경재배와 조경이 잘 꾸려져 있고 맨 윗 부분에 대형 분수가 힘차게 솟고 있다. 분수대를 지나 조금 돌아가니 "ㄱ"자 벽을 이룬 곳에 좌측엔 남자 형상, 우측엔 여자 형상으로 두팔을 벌린 채 사람 모양 파져 있는데 그것은 궁인(宮人) 남여를 뽑을 때 키와 팔 길이가 그곳에 맞아야 뽑혔다고 한다. 목조로 지은 오층탑은 오복탑(五福塔)이라하여 한 층씩 오를 때마다 복이 들어오며 오층까지 걸어 올라가면 오복이 들어 온다고 한다. 구중천(九中天)은 하늘 높이 3개의 아치를 만들어 세우고 그 끝 안쪽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용(龍)의 머리를 새겨 그 입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빌면 재물이 쌓인다고 한다. 이는 용의 입 입구는 있으나 그 입으로 들어간 재물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기 때문에 재물이 새지않는다는 뜻이란다. 우제사당으로 들어가는 정문 바로 앞에 다리가 3개 놓여 있는데, 왼쪽 다리를 건너면 재산운이 있다는 재물교(財物橋), 가운데 다리는 명예와 운이 따른다는 관운교(官運橋), 우측 다리는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평안교(平安橋)라 하여 들어 갈 때는 평안교 위를 걸어 갔고 사당을 둘러보고 나올 때는 관운교로 걸어 나왔는데 나는 욕심을 부려 뒤돌아서 재물교도 건너 평안교로 다시 나왔다.우산공원의 마지막 코스인 동굴을 답사했는데 굴 안에는 돌부처, 돌거북 및 각종 돌물고기 등과 수석이 진열되어 있었다.
두번째는 복파산이었다. 복파산은 계림시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복파산 동쪽에는 이강(漓江)이 인접하여 흐르고 있다. 복파산 입구에 기마를 타고 활을 쏘는 동상이 먼저 눈에 띄는데, 그 기마의 주인은 복파장군으로서 그는 후한 광무제 때의 유명한 장군인 마원(馬援 BC14~AD49)이란 사람이다. AD41년에 복파장군으로 임명되어 남방의 교지(지금의 베트남)를 평정하였다고 한다. 계림에 있는 이 산이 복파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복파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산 위에 있는 바위를 칼로 잘랐다 해서 붙여진 것이며 그 후로 사람들은 갈라진 이 바위를 시검석(試劍石)이라 부르게 됐다 한다. 또한 베트남이 침공해 왔을 때 복파장군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 베트남 장군에게 활쏘기 시합을 해서 지는 쪽은 물러가기로 하여 복파장군이 인근에 있는 천산을 활로 쏘자 화살은 천산을 뚫고 베트남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물론 베트남 장군은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갔다고 하니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잘 꾸며내는 중국인들의 속성이 엿보이기도 했다. 복파산에는 환주동(還珠洞), 천불암(千佛岩), 시검석(試劍石), 산호암(珊瑚岩), 청도각(聽濤閣), 대철종(大鐵鍾) 등의 명소로도 유명하다. 복파산을 오르는데는 나선형 계단(복파회랑)을 약 20여분 올라가면 3평 남짓한 정상에 서게 되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계림 시내의 정경은 가히 일품이다.
세번째는 요산(堯山)이었다. 요산은 계림에서 동쪽으로 약 7km인 곳에 위치하며 계림의 최고봉(最高峰)으로 909.3m이며 계림의 대부분 산들이 돌산(石山)인데 요산만이 흙산이라 한다. 정상까지 길이가1,416.18m의 리프트카가 설치되어 25~30분이면 정상에 오른다. 비가 내렸지만 거세지 않아 비를 맞으며 리프트카를 타고 올라가는 기분은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중간쯤 올라가자 비상 정류장인 듯한 곳에서 웬 젊은이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다. 정상에 올라가 리프트카에서 내리자마자 한 아가씨가 사진을 들고 손가락 두 개를 펴보이며 "이천원"하고 외친다. 웬일인가 싶어 사진을 봤더니 리프트카를 타고 올라오는 나와 친구의 모습이 아닌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중간 지점에서 사진을 찍어 바로 정상으로 송출하여 사진을 뽑아 판매하는 상술이었다. 한국말은 겨우 "이천원!"하는 소리뿐이었다.요산은 당조시대에 요임금묘(堯帝廟)를 세웠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계림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요산 정상에서 계림의 여러 봉우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며 정상에는 요제의 석상과 그 앞에 요제를 따르는 이들인 여덟개의 좌상이 설치되어 있다. 요산의 산등성이는 기복이 있고, 기세가 드높으면서 초목이 무성하며 매년 3월이면 두견화가 가득 산을 덮어 아름다우며 풍경명승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어 정상에서의 구경은 가이드의 설명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음은 발맛사지 체험이었다. 애족탕(愛足湯)이라 간판이 붙은 곳에 들어가 1실에 4사람씩 발 맛사지를 받는다. 발 맛사지 요금은 20$/인이었고 전신 맛사지는 30$/인이었다. 물론 팁은 3$ 또는 3,000원(한화)을 준다. 중국 위안화로 굳이 환전할 필요가 없이 달러나 한화 천원권과 만원권이 통용됐다.. 맛사지 걸들은 20대 초반에서 30대중반까지였다. 그런데 한국말이라곤 아파? 쎄게? 좋아? 천원, 만원 하는 이런 말뿐이었다. 물론 영어는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다. 발 맛사지는 약 1시간 계속되며 끝나면 서비스로 목과 어깨 그리고 등을 안마해준다. 천원짜리 3장을 팁으로 줬더니 고맙다를 연발하며 90도로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절하고 나간다. 발맛사지가 끝나고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도무지 음식이 맞질 않아 간단히 몇 숟갈 뜨고 일행보다 먼저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얼마있다가 가이드가 오기에 현지식(現地食)은 맞지 않아 한식으로 먹자고 했더니 호텔에서 자고난 아침은 호텔식으로 하고 내일 낮부터 한식당으로 안내하겠다고 해서 좀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 식사후의 계획을 물었더니 19시 30분에 시작하는 산수간쇼를 관람한다고 한다.
산수간(山水間)쇼의 관람료는 40$/인이었다.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산수간은 시각적인 활동성과 예술성을 결합한 대형 산수가무쇼로 계림 산수를 배경으로 소수민족쇼, 서커스, 현대무용(발레), 원형 철 공 속의 오도바이쑈를 완벽히 종합한 쇼였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중국의 전통적인 서커스와 서양발레가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 낸 산수간쇼는 세계를 놀라게 하는 쇼중의 하나이다..역동적인 무대의 조명,음악,화려한 의상,인간의 몸으로 중국문화와 자연을 멋지게 표현했다. 특히 안이 훤히 보이는 좁은 원형 공 속에 오토바이 다섯대가 한 대씩 차례로 들어가 원형을 도는 순간은 관람하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 않는 그들의 신기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또한 소수민족들의 전통의상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 공연을 끝으로 하루의 여행을 끝내고 위에나 호텔로 돌아 왔다. 마침 함께 간 친구가 우리의 참소주 팩을 20여개 가져왔고 안주로 햄소세지 2개와 고추장과 청양고추를 가지고 와서 세 친구가 마시는데 몹시 부러웠다. 한 친구가, 속이 좋지 않는 것과 중국 음식 향료와 기름기 음식이 안좋을 때는 소주 몇 잔하면 속이 잡힐 거라 부추기며 모두 권하길래 소주 석 잔을 마셨다. 6개월 동안 술을 안마시기로 내 자신과 약속했는데 4개월만에 그 약속을 깬 셈이 되었다.
다음 날 호텔에서 조식으로 만두 두어개, 쌀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커피를 마신 뒤 객실로 가서 짐을 가지고 호텔 프론트로 나가니 일행 중 반이 모여 있었다. 오늘은 버스로 약 2시간 가량 이동하여 남방인 양삭(陽朔)으로 간다는 것이었다.나는 버스기사 바로 뒷자석에 앉았다. 주위를 눈여겨 보기 위해서였다. 역시 계림은 산수(山水)가 아름다워 관광의 요람지로 손색이 없다. 우리나라 금강산은 12,000봉이지만 계림은 36,000 봉우리를 자랑하며 이강,도화강을 비롯한 많은 강들이 흐르고 산들이 뚝뚝 떨어져 저마다 거의 수직을 이루는 돌산인데도 나무들은 드문드문 잘 자라고 있으며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신들의 산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 많은 봉우리는 마치 비 온 뒤의 죽순과 같아 보였다. 계림시에서 양삭현으로 가는 도중 두 가지 놀란 것이 있었다. 하나는 계림의 어디를 가나 숲이며 가로수가 계수나무라는 것이다.그리고 계수나무는 금계,은계,단계, 사시계의 4가지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으며 계피는 금계로만 만든다고 한다. 왜 계림(桂林)이라고 이름 지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하나는 교통질서였다. 계림시내에서 여러번 목격했지만 교통순경이 교통정리하는 신호등 있는 큰 네거리를 제외하고, 자동차 머리를 먼저 집어 넣는 차가 우선일 정도였다. 차가 오토바이를 피해다녀야 했으며 사람이나 차나 오토바이나 교통질서에는 무딘 편이었다. 가는 도중, 왕복 2차선에서 앞에 가는 트럭이 길을 비켜줄 수 있음에도 절대로 길을 비켜주지 않으니 중앙선을 넘어가 역주행 해도 바로 앞에서 오는 차가 비상등이나 크락션도 누르지 않고 속도를 줄여 주며 오히려 갓길로 비켜주는 것이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만연된 그들의 교통문화는 바로 그런 상대를 배려(?)해주는 대륙의 기질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관람할 곳은 세외도원(世外桃源)이었다. 보조 간판에는 "國家首批AAAA級景區"라고 쓰여있었다. 모타선을 타고 약 1시간 돌아 오는 코스로 고대 중국의 유명한 문학가이자 시인이었던 도연명(陶淵明/376~427년)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전해져 내려오면서 사람들은 책 속에 묘사된 정경이 자신들이 항상 꿈꾸던 이상 속의 세계로 여기며 이것을 세외도원이라 불렀다 한다. 나룻배가 강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면 강가의 소수민족들이 민속무(民俗舞)를 추며 관광객들을 환영한다. 강을 한 바퀴 돌며 소수민족들의 독특한 의상과 가무(歌舞)를 즐기며 안내양 아가씨의 중국 노래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안내양 아가씨가 전혀 영어나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한게 아쉬웠다. 배가 장족 마을에 도착하여 그들의 생활상을 알아 볼 기회가 주어졌다. 전통의상을 입은 장족 아가씨들과 사진도 찍고 그들의 수공예품을 직접 구경하며 사기도 한다. 2층의 장족 아가씨가 창문으로 내다 보다가 관광객들이 다가서자 줄을 매단 공을 던졌는데 공이 내쪽으로 날아와 공을 움켜잡았더니 저 장족 아가씨와 결혼해야 한다고 가이드가 놀렸다. 옛 장족 처녀들은 혼기가 되면 정성껏 수놓아 만든 공(스노우공이라 한다)을 총각들에게 던져 그 공을 잡은 총각과 결혼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차원에서 옛 일을 재현할 뿐이며 공을 잡은 관광객에게 장족 처녀가 정중히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결혼에 대한 얘기를 가이드로부터 몇 가지 들었다. 묘족처녀는 마음에드는 총각의 발을 힘껏 밟아 좋다는 마음을 표시하면, 그 처녀가 마음에 들 경우 총각은 처녀의 귀를 만져줌으로서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동족은 혼기가 찬 처녀 총각들이 모여 상대를 번갈아 가며 춤을 춘 후 처녀가 마음에 드는 총각에게 수 놓은 패를 전하여 신랑을 정하면, 총각은 패를 받아 짝이 마음에 들면 곧 바로 가까운 동굴 속으로 가 신방을 차린 후 7일 또는 보름정도 동거를 하며 살아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서면 동굴에서 나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처녀 총각이 동굴 속에서 동거하는 것을 양가 부모들이 묵인하는 것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때문이라 한다. 장족 여인이 물레를 돌리며 실을 감는 장면과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모습은 옛 어머니들을 보는 것 같았다. 수 많은 생활품들이 모두 수공으로 이루어져 아름다웠으며 한 장족 아가씨는 넥타이를 일일이 수를 놓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이강의 죽선(竹船) 타기 유람이었다. 계림을 산수갑천하(山水甲天下)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계림여행 절정의 코스로 약 1시간 정도 유람을 하다보면 이강과 그 주변의 기묘한 봉우리들이 물과 어우러져 한 폭의 절묘한 동양화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중국의 북쪽엔 만리장성이 있고 남쪽엔 이강(漓江)이 있다.“는 말이 유명하 듯 중국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계림에서 이강크루즈를 하지 않는다면 백두산 올라서 천지를 안본 것과 같다고 한다. 이강은 계림 북쪽의 묘소산에서 발원(發源)하여 계림,양삭을 거쳐 오주시의 서강으로 흘러드는 총 연장 437km나 된다. 강이 앝고 깊은 곳이 많아 모타의 스크류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장치로 배의 속도를 조절한다.이강가에는 대죽(大竹)이 많이 자라고 있어 방풍 역활을 하고 있었다. 죽선 한 척에 4사람이 승선하며 선장이 배의 속도를 천천히 운행하여 관광객들이 절묘한 경치를 잘 구경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 한다. 봉우리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산세의 수려함은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오게 한다. 도저히 범상한 사람들은 오를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의 산들 그리고 물에 거꾸로 비친 비경들 모두가 선경이었다. 반환점에 이르러 배의 엔진을 끄고 잠시 멈춘 것은 가마우지로 물고기를 잡는 어부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가마우지 목을 줄로 매어 놔 가마우지가 물속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아 나오면 목에 걸린 물고기를 토해내게 하여 잡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고기는 다시 강에 던져진다. 이들 또한 계림관광청에서 월급을 주고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올 때는 관광객들을 위해 아주 저속으로 가던 배가 돌아갈 때는 속도를 내어 빨리 간다. 강가에 천막을 치고 소수민족들의 수공예품을 팔기도 하며 전통의상을 빌려주고 돈을 받으며 함께 촬영도 한다.처음으로 한식의 점심을 먹었다. 된장국,김치와 쌈채소, 갈치구이 등 제법 한국식단을 흉내냈다. 특히 오랫만에 삼겹살 구이도 즐겼다. 가이드가 서비스로 중국술 삼화주(三花酒) 한 병을 내 놓았다. 향도 없고 맛이 좋아 값을 물어 봤더니 17달러(한화 약 18,000원/53도)라 한다. 점심 식사 후 이동한 곳은 우룡하 뗏목타기였다.우룡하 뗏목은 무동력선으로 장대를 이용하여 뗏목을 밀면서 우룡하를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로서 40분이 소요되며 여기서도 가마우지로 고기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돌아오는 강 중앙 인공 섬에 배가 잠시 멈추었는데 소수민족들의 의상을 갖추어 놓고 옷을 빌려주며 1달러 또는 천원을 받고 있었다. 물론 전통의상을 입고 그들과 사진을 찍으면 사진 값은 이천원이었다.
다음은 양삭(陽朔)의 서가(西街) 재래시장이었다. 서가 재래 시장은 이국적인 풍경으로 서양식 카페, 음식점 등 중국과 서양의 양식이 합쳐진 곳으로 중국 속의 서양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 가이드가 충고를 한다. 일직선으로 쭉 곧은 큰 길만 구경하고 옆 골목이나 다른 곳으로 혼자 가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람은 돈을 많이 지니고 있다고 소문이 나서 부량배들의 타킷 1순위라고 알려준다.가게마다 점원들이 나와 빨리빨리를 외치며 자기네 가게로 들어 오라고 손짓한다. 또는 길거리에서 물건을 내밀며 천원! 이천원! 하고 흥정한다.10여년전만 해도 일본 사람들이 판치던 시장에서 이제는 한국 사람이 대세를 이룬다고 한다. 한국돈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어 위안화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국력이나 경제력이 크게 성장했슴을 알 수 있어 가슴이 뿌듯했다. 친구와 넷이 한 모자 가게에서 중절모를 들고 값을 물어보니 "오천원!" 한다. 그대로 놓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삼천원!" 한다. 그래도 손을 저으며 가려하자 "이천원!" 한다. 우리 넷은 서로 마주보며 읏을 수 밖에 없었다. 한 친구가 가방 가게로 들어가 보자고 해서 들렸더니 물건들이 별로여서 한 친구가 “중국 짝퉁은 그런대로 물건이 괜찮다고 하더니 형편없네!” 하자 점원이 "짝퉁?" 하며 우리를 가게 안쪽 벽으로 안내하여 대형 거울을 누르자 벽이 열리며 안으로 안내했다. 넷이니 어쩌랴 싶어 안으로 들어 갔더니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밖의 가게보다 훨씬 넓은 곳으로 짝퉁이라면 없는 것이 없었다. 로렉스시계가 우리 돈 십만원에 거래되며 루이비통 가방 등등 세계의 유명 상표를 붙인 가짜가 진짜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있었다. 아마 유명 브랜드를 좋아 하는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바리바리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게를 나왔다. 나는 배우자에게 줄 기념으로 물소뿔로 만든 큰 빗을 10달러 주고 샀다. 잡화거리를 뒤로하고 먹거리 거리를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먹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는가. 정말 없는 게 없이 많다. 놀란 것은 토란이 참외만 하고 유자는 수박만 했다. 그러나 눈요기만 하고 집합장소로 갔다.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가이드에게 발맛사지(애족탕) 체험을 한 번 더하고 호텔로 가자고 하여 일행 모두의 동의를 얻고 발맛사지를 끝낸 후 양삭 위에나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식으로 저녁을 먹고 내일의 여행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09시에 동굴체험을 하기 위해 은자암(銀子巖)으로 향했다. 은자암은 계림시 이포현(彛浦縣)에 위치하고 있는 종유석 동굴로 계림시에서 85km, 양삭에서 3km떨어져 있다. 은자암 경관은 웅장하면서 기이하고 우아하면서 아름답다. 계림에 있는 관암동굴이 남성적이라면 은자암 동굴은 여성적이라 할 수 있는 매우 아름다운 동굴로서 자연과 인문경관이 뛰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은자암은 입구와 출구가 다른 약 3km의 길이로 다양한 유형의 종유석이 수십개의 특색있는 경치를 자아낸다.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키는 종유석과 광한심궁(廣寒深宮), 설산비폭(雪山飛爆)이라는 명칭의 종유석을 삼절(三絶)이라고 불리며, 수십개의 불상을 모아놓은 듯한 종유석과 가느다란 종유석이 천장을 바치고 있는 모습 그리고 진주우산이라고 불리는 종유석은 삼보(三寶)라 칭한다. ·그외 수 많은 종유석(鐘乳石), 석순(石筍), 석주(石柱), 석막(石幕), 석화(石花)등이 형형색색의 빛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동굴내의 인도(人道)나 위험개소 하나하나에 조명시설을 완벽하게 설치하여 관람객들의 안전에 최선을 대비한 것도 손색이 없었다. 역시 계림은 관광대국답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은자암 동굴 체험을 마치고 이동하여 1,000여년 전에 뿌리를 내려 아직도 끊임없이 가지를 뻗어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대용수(나무)를 구경했다. 용수나무란 아시아의 열대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로 가지에서 기근(氣根)이 내려 지주근(支柱根)이 되는 식으로 뻗어나가는 독특한 나무로 열매는 무화과를 닮았다고 한다.이 대용수를 지나면 인공호수가 있는데 호수 가운데로 지그재그로 다리를 놓아 누각과 쉼터를 여럿 만들어 놓았다. 궁여들이 자주 와서 쉬었다 하여 궁녀호수라고도 부른다. 다리는 호수 중앙을 지나 길게 뻗어 있고 다시 돌아 나와야 한다. 다시 이동하여 월량산으로 향했다. 월량산(月亮山)은 양삭의 유명한 관광 명소 중의 하나로서 산봉우리 한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구멍의 모습이 멀리서 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마치 달과 같아서 월량산이라는 이름이 되었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서 초승달, 반달, 보름달, 그믐달로 다양하게 변한다. 봉우리 정상까지는 약 20여분이 소요되며 오솔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구멍 안이 넓은 광장이며 쉼터를 만들어 놓았고, 구멍 너머로 주변의 여러 봉우리가 병풍처럼 겹쳐져 있는 장관을 감상하게 된다.
다시 계림으로 1 시간 가량 향하던 중 잠시 차를 멈추고 가이드가 밀감을 사왔는데 우리나라의 탱자만한 밀감이 몹시 달고 맛있어서 나는 껍질 채 먹었다. 계림에 도착하여 한식당에서 저녁을 마치고나니 마지막 코스인 양강사호(兩江四湖)는 19시부터 야경에 관람이 이루어진다 한다. 50분 정도의 시간이 있어 쇼핑을 하였다. 중국 전통 고량주인 삼화주(三花酒/53도) 1병과 노화주(老花酒/62도) 1병 그리고 과자 몇 봉지를 사서 여행가방에 넣고나서 선착장으로 나갔다. 양강은 이강과 도화강을 말하며 두 강의 물을 끌여들여 인공호수로 만든 사호는 목룡호, 계호, 용호, 삼호를 말한다. 저녁 7시가 지나자 강 양쪽으로 현란한 조명이 켜지는데 선착장 바로 강 건너에 산호일월쌍탑인 금탑과 은탑의 전경이 강물과 어우러져 선경을 이룬다. 유람선에는 30여명이 승선했는데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유람선이 선착장을 미끄러져 나가자 강 양편으로 황홀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진정 계림의 속살 속으로 빠져 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관광객들의 환호성이 터지고 배가 지날 때마다 전통의상을 입은 소수민족들이 가무(歌舞)와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은 너무 좋았다. 배는 최저 속도로,갈 때는 강 우측을 향한다. 양쪽 강을 잇는 다리도 수없이 많다. 미국의 금문교를 재현해 놓았고 파리의 개선문도 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다리를 지날 때는 관광객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진다. 배가 부딪힐 것만 같기 때문이다. 갑자기 배의 엔진이 꺼지고 강 가운데 배가 조용히 서있다. 그것은 배의 양쪽으로 죽선(竹船)을 탄 어부가 가마우지 서너마리를 가지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 어부들도 월급을 받고 일한다. 마지막 반환점에 이르러서는 배가 10여분 가량 정지한다. 조명이 켜지며 수십명의 남녀 무희들이 북과 장구를 치며 관광객들에게 쇼를 보여준다. 쇼가 끝나고 배를 돌려 반대편 강변 쪽으로 가기 시작하면 역시 소수민족 가무단들이 춤과 노래로 반긴다. 함께 승선했던 안내양 아가씨가 유람선이 선착장에 도착 10여분전부터 피리를 불어주는데 아리랑, 도라지타령, 애국가를 불러주었다.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듣는 노래 특히 애국가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감격스러워 아가씨에게 팁이 쏟아지면 쎄쎄 소리가 배안에 가득찬다. 약 1시간 소요되는 양강사호의 거리는 왕복 8km. 강 양쪽으로 계속 연결되는 조명과 네온싸인을 움직이는 전기료 비용만 해도 엄청날 것이다. 역시 중국 하면 계림을 빼놓을 수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관광의 천국 계림이란 말이 손색이 없다.
계림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시간은 21시10분이었다.
출항 시간이 00시30분임으로 시간이 넉넉하였다. 계림공항 면세점을 들려 시간을 보내며 둘러보았으나 물건 값이 시중보다 그리 싸지 않았고 질도 별로였다. 출국 수속을 기다리기가 너무나 지루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행소요시간이 3시간 30분임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면 05시 경(시차 1시간)이 된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모두들 두툼한 옷으로 갈아 입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영하의 날씨가 우리를 반겼지만 역시 고국은 훈훈하게 느껴졌다. 나라 밖으로 나가 생활해 봐야 고국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어느 여행가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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