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정서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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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초입부터 날씨 변덕이 극심하다. 예년과 달리 수능 때까지도 날씨가 포근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10도 이상 기온이 내려가 한파주의보가 발령되기도 했다. 지구 온난화라는 말도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때 아닌 폭염과 홍수, 폭설, 혹한 등 자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역행하는 듯 보이는 사태로 세상이 들썩이고 있다. 지난여름엔 그리도 비가 많이 내려 한국은 이제 아열대 기후로 변했다고 푸념 석인 염려가 뭇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상하지 못한 기후변화는 종종 우리를 당황시킨다.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무겁게 느끼도록 만든다. 앞으로 빠르게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어 우리가 고령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 어떤 변화들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것인지, 어떤 충격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퇴출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변화는 가파르게 진행되고 우리의 적응력은 점점 무디어만 간다. 선은 이렇고 후는 저렇다, 그러니 아마도 이러저러하게 풀려나갈 것이라고 대충 예상할 수 있다면 땅을 딛고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한결 수월할 것 같다.
문학은 어쩌면 그 위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리의 궁금증과 불안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아날로그적으로 진보하는 문학이 디지털화되어가는 인간의 삶을 예단하고 비전을 갖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앞에 때때로 무기력함을 느끼는 게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 세상의 변화에 정서적으로 재빠르게 대응할 수 없다면,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문학 고유의 특성과 영역 안에서 완보하는 쪽이 행복한 게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진부하다고 여겨온 것들에 대한 연민이랄까, 고전문학의 정서를 되돌아보면서 우리 인간의 삶의 가치관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또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숙고해보는 것도 흥미 있으리라.
우리가 어려서 읽은 콩쥐팥쥐전과 장화홍련전을 떠올려보자. 그저 동화로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이 고전 작품 속에는 당시 우리네 사고방식과 정서 및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라는 고전문학의 시대적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콩쥐는 착한 아이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만큼 나중에 복을 받아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팥쥐 엄마는 재취로 팥쥐를 데리고 들어와 전실 자식인 콩쥐를 구박한다. 계모 형 가정소설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팥쥐는 감사의 부인이 된 콩쥐를 찾아가 연못에 빠뜨려 죽이고는 자기가 콩쥐 행세를 한다.
콩쥐팥쥐전 악행의 종결자인 팥쥐는 어떻게 되었을까. 팥쥐는 콩쥐를 연못에 빠뜨려 죽인 살인자로서 콩쥐에게 주어진 부귀영화를 갈취했다. 결국 콩쥐의 혼령에 의해 팥쥐의 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팥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살인죄를 지었으니 사형을 받아 마땅하겠으나 작품 속 팥쥐와 팥쥐 엄마의 형벌을 끔찍하기 그지없다. 팥쥐의 죄상을 조정에 고하자 조정에서는 팥쥐를 수레에 매달아 죽이고 젓갈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려 보낸다. 팥쥐 어미는 배달된 항아리가 선물인줄 알고 기뻐하다가 딸의 송장으로 만든 젓갈임을 알고 기절하여 죽고 만다.
상당히 충격적인 처벌이 아닐 수 없다. 고전 작품 속에 이런 극단적인 악행과 처벌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화홍련전의 계모 허 씨는 쥐를 잡아 껍질을 벗긴 뒤 장화가 몰래 임신하여 떼어낸 아기라고 속인다. 장화홍련전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당시 계모들이 어떤 곤란에 처하였기에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행태가 벌어졌을까. 과연 그 시대의 계모들을 통해 작품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콩쥐 엄마도, 장화홍련의 엄마도, 심청이의 엄마도 일찍 세상을 떠난다. 고전소설 속에서 엄마들은 조기에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존재감을 실현하지 못한다. 그들이 주인공들로부터 일찌감치 분리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려서 친 엄마를 잃은 주인공들을 통해 보상받고자 했던 민중적 열망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심청이도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은 용궁에 가서 어머니 곽 씨 부인을 만난 후, 연꽃을 타고 이승으로 돌아온다. 현실계와 비현실계를 넘나들면서 환생하는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비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이 환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콩쥐는 연못바닥에서 생시 모습 그대로 발견된 뒤 환생한다. 가히 판타지 소설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작품들을 깊이 분석해 의미를 도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비련의 주인공들에게 드리워진 억울함, 눈물과 분노, 무기력함 등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웬만한 보상으로는 그들에게 드리워진 고통과 짓눌림을 위로해 줄 수 없다.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화려한 보상을 통해서만 지난했던 과정을 위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복수와 응징 또한 처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고전 문학에서 계모에게 쏠렸던 화살은 현대에 들어와 친엄마에게로 이동된다. 어려서 엄마를 잃은 주인공들은 오매불망 친엄마를 그리워하지만, 성장기까지 공존해온 엄마들은 자녀와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기 십상이다. 흔히 자기 엄마가 필시 계모일 거라고 생각하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우리들 중 다수에게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어머니의 환상을 인간인 현실의 어머니들에게 투영하면서 계속 불평을 해온 것은 아닐까. 더구나 계모는 친엄마가 아니니 기대 수준을 훨씬 낮춰야 하는데, 계모에게 친엄마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비난했던 것은 아닐까.
요즘은 며칠 걸러 한 번 씩 가족 간의 살해사건이 보도되곤 한다. 끔찍한 일이지만 왜 그런 일들이 자꾸 발생하는지, 우리 사회의 가족관계의 역학구조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 무엇이 우리의 혈연관계마저 뒤흔들고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고전문학 시대의 가치관이나 행태로부터 그리 멀리 오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팥쥐는 콩쥐에게 주어진 행운과 부귀영화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콩쥐를 살해했다. 장화홍련의 계모 허 씨는 집안의 재산을 장화와 홍련에게 나누어주고 싶지 않아서 두 딸을 없애려고 하였다. 욕망과 도덕적 가치관 사이의 불균형에서 자초된 결과일 것이다.
얼마 전 소설 『도가니』를 각색한 영화가 개봉되어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모델이 된 장애아학교에 대한 실질적인 처분과 법령의 제정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문학작품의 힘이 발휘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과 역할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들이 처해 있는 환경과 삶의 모습을 조감하면서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비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최근『엄마를 부탁해』라는 작품이 전 세계적인 호평을 받으며 각국의 언어로 출간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어떻게 되든지, 올겨울 한파 주의보가 어떻게 되든지 늘 우리의 사정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일 터, 오늘 날의 문학이 변화하는 세상과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천착함으로써 먼 훗날까지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예지 능력을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