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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작품>
비단개구리 알/ 박비송
전학 간 학교에 3학년 아이들은 열 명 남짓 되었다. 전 학년 모두 한 반 밖에 없는 작은 시골 학교였다. 거기다 새로 살게 된 집은 주변에 슈퍼도 하나 없는 외진 곳이었다. 앞이 아득했다. 아빠는 당분간만 이곳에서 지내다가 형편이 안정되면 다시 서울로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집 나간 엄마에 대해서도 일주일 뒤면 올 거라고 했었는데 벌써 6개월째 감감무소식이니까.
"주목. 서울에서 새로 전학 온 친구다. 소은아, 친구들한테 한마디 해라."
담임선생님은 내가 한때 할머니 말투라 불렀던 경상도 사투리로 카랑카랑하게 나를 소개하셨다. 시골학교의 선생님은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의 세련된 담임선생님과 말투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안녕? 나는 한소은이라고 해. 앞으로 잘 지내자."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내 소개를 하는 동안 열 명 남짓한 시선이 나를 뚫어져라 구경하고 있었다.
"와, 예쁘다."
한 남자 아이가 말했다. 시골 아이들도 보는 눈은 있구나 하고 우쭐하려던 순간,
"예쁘긴 뭐가 예쁘노."
또 다른 남자 아이의 삐죽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를 향해 힘껏 눈을 흘겼고 그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지손가락을 불쑥 들어 올리고는 이를 훤히 드러내며 장난스런 표정으로 실실 웃어댔다. 나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앉을 자리로 예상되는 유일한 빈자리가 그 아이의 옆자리였기 때문이다.
"저기 반장 옆에 빈자리 보이제? 저기 가서 앉아라."
예상대로 선생님은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고 나는 느린 걸음으로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저런 아이가 반장이라니. 시골은 시골이다.
"오, 백과 좋겠네."
다른 아이들이 놀리듯이 말했다.
"백과? 네 이름이 백과니?"
'이름도 생긴 것만큼 촌스럽구나'라고 비웃으려던 참이었다.
"장난하나? 내 이름은 백승호고 백과는 내 별명이다."
"백과가 무슨 뜻인데?"
"비밀이다."
백과가 킥킥거리며 말했고 나는 괜히 약이 올랐다.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백과는 축구공을 들고 밖으로 나갔고 나머지 남자아이들도 우루루 뒤따라 나갔다. 여자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 주변에 몰려왔다.
"안녕? 나는 김선주다. 친하게 지내자."
여자 아이들 중 키가 가장 큰 선주가 웃으며 말했다. 선주는 반에서 부반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응. 그래."
나는 억지로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근데 반장은 왜 별명이 백과야?"
어떤 우스꽝스러운 뜻의 별명일지 기대하며 내가 물었다.
"백과사전이란 뜻이다. 모르는 게 없어서 선생님이 지어 주셨다."
"아…. 그래?"
의외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백과랑 짝지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된다. 니도 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라."
"칫, 많이 알면 뭐 얼마나 알려고."
"진짠데? 수학도 잘하고 한자도 많이 안다."
"그 정도 가지고 뭐."
"오, 니도 수학 잘하나?"
"한자도 쓸 줄 아나?"
아이들이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차례로 물었다.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 받은 적 있어. 한자는 학습지하면서 배웠고."
"오, 니 대단하네." 내 한마디에 감탄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다시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백과랑 친해지면 좋다. 어떨 때는 선생님보다도 더 설명을 잘하는 거 같더라."
한 아이가 또 백과를 칭찬하며 말했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귓속을 긁었다.
"근데 니는 왜 서울에서 이런 촌으로 전학 왔노?"
다른 아이가 문득 나에 대해 물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에 내가 대답을 얼버무리는 사이 갑자기 선주가 끼어들었다.
"할머니랑 같이 살라고 이사 왔을걸. 니 복남 할머니 손녀제?"
선주가 할머니의 이름을 말하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장이라서 이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는 거의 다 알고 있거든."
그 사실이 선주는 마치 자랑인 양 큰 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떨떠름했다.
"그럼 엄마 아빠는 서울에 계시나?
"아니…."
"아빠랑 둘이만 왔다고 들었는데. 맞제?"
선주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 말 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아직 친하지도 않은 낯선 아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짜증스러웠다. 미리 물어보지도 않고 내 가족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대는 선주가 이해되지 않았다. 집안 사정까지 남들이 속속들이 알고 있을 만큼 좁은 동네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막막했다.
"너는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얘기를 막 하고 그래?"
내가 발끈해서 눈을 부릅뜨고 쏘아댔다. 선주를 포함한 아이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생각보다 크게 나온 목소리에 나도 내심 놀랐다.
"왜 신경질이고? 별로 나쁜 이야기도 아닌데."
"나쁘건 말건 내 얘기잖아. 아무한테나 말하고 싶지 않은 얘기일 수도 있지 않겠니?"
"야. 그게 뭐 어때서 그라노? 여기 엄마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랑 사는 애들 많다."
다른 아이가 나서며 말했다.
"누가 엄마가 없대? 내가 너희랑 똑같은 줄 알아?"
"뭐라고? 그럼 니는 뭐가 다른데?"
"……." "아까부터 잘난 척만 하더니. 니는 서울에서 왔다 이거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선주가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누구나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말한 건 네 잘못이잖아!"
"뭐 그 정도로 사생활을 침범하는 거가? 느그 아빠 사업 망해서 집이고 뭐고 다 넘어간 거란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니 느그 아빠랑 할매 집에 얹혀살러 온 거다이가!"
"……."
머리를 한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팔다리에 힘이 쑥 빠졌다. 언제 왔는지 백과가 나를 일으키려고 내 한쪽 팔을 잡았다. 그 손을 휙 뿌리치고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내 바로 뒤에는 어느새 공놀이를 마치고 돌아온 남자 아이들이 서 있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안 그래도 먼 길을 나는 더 천천히 걸었다. 이런 시골에서 산다는 것이 더 감감해졌다. 땅만 보고 걷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소은이 왔니?"
아빠가 절뚝이는 다리로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아빠가 운영하던 공장이 문을 닫은 이후부터 아빠는 거동이 불편해졌다. 의사 선생님은 아빠가 뇌졸중이라고 했다.
"아빠. 여기서 언제까지 살아야 돼?"
"왜 그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여긴 나랑 안 맞아. 애들은 말도 안 통하고."
"낯설어서 그럴 거야. 조금만 지내보다가 다시 얘기하자."
아빠가 환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애써 웃는 아빠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학 온 첫날 이후 여자 아이들은 나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른 아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앉아 밥을 먹는데 나는 내 자리에 혼자 떨어져 앉아있었다. 밥이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입에 넣고 씹었다.
무슨 이유인지 백과도 점심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제자리에서 밥을 먹었다. 그래도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있어서 완전히 동떨어진 기분은 덜했다.
"니 애들이랑 말 안 할 거가?"
백과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도 엄마는 안 계시고 아빠랑 할머니랑 산다. 내가 다섯 살 때 집을 나가셨거든. 선주는 할아버지랑 둘이 살고."
"……."
"우리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다 보니까 선주도 별 뜻 없이 말한 거 같다. 기분 풀고 니가 먼저 사과하면…."
"왜 내가 먼저 사과를 해? 사과는 선주 걔가 해야지."
"니도 잘한 건 없잖아. 성질도 니가 먼저 부렸고."
"됐어. 잘난 척하기는."
나는 식판을 들고 홱 일어나버렸다. 왜 그렇게까지 날카로운 반응이 나온 건지 모르겠다. 그날 이후 백과도 나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과학 시간, 선생님은 개구리가 자라는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개구리 알을 잡아 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는 아빠와 함께 뒷산 개울가로 갔다. 아빠는 맨손으로 쉽게 개구리 알을 잡았고 비닐봉지 안에 그것을 물과 함께 담아 봉지 입구를 꼭 묶어주셨다.
다음 날 선생님은 크고 네모난 유리통 안에 물을 붓고 우리가 잡아 온 개구리 알을 넣자고 하셨다. 그런데 아빠가 잡아주신 개구리 알과 다른 아이들이 가져온 개구리 알의 생김새가 달랐다.
"도롱뇽 알이네?"
내 개구리 알을 보고 한 아이가 말했다. 아빠가 분명 개구리 알이라고 했는데 이상했다. 놀라운 건 선생님마저도 그것을 도롱뇽 알이라고 하셨다.
"야. 그거 갖다 버려라. 도롱뇽이 알 깨고 나오면 올챙이들 다 잡아먹는다."
한 아이가 말했다.
"이거 개구리 알 맞아…."
내가 말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들리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크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빠가 다리를 절룩이면서 뒷산까지 올라가 잡아주신 건데.
"그거 개구리 알 맞아요. 비단개구리 알."
뜻밖에도 선주가 손을 들고 선생님께 말했다.
"맞아요. 그거 비단개구리 알이에요. 초록색에 검은 얼룩무늬 있는 거요."
이번에는 백과가 덩달아 설명을 해주었다. 아이들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아-"하며 끄덕였다. 선생님은 비단개구리를 다른 통에 따로 담아 다른 개구리들과 자라는 모습을 비교해보자고 하셨다. 그런데 비단개구리 알을 따로 담을 통이 마땅히 없었다.
"이 통에 담으면 되겠네요."
선주가 자신의 플라스틱 물통을 꺼내며 말했다. 그리고 내 개구리 알을 자신의 물통에 고이 담고 물을 부어 주었다. 반 아이들의 개구리 알들과 내가 가져온 개구리 알이 각각 다른 통에 담긴 채 창가에 나란히 놓였다. 네모 모양의 큰 유리통과 작은 플라스틱 물통이 사이좋게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는 시간, 나는 선주의 자리로 갔다.
"그때는 내가 너무 예민했어."
"아니다. 내가 말을 심하게 했다. 미안. 이제 점심시간에 밥 같이 먹자."
선주가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선주의 손은 따뜻했다. 그 손을 꼭 잡은 채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제자리에 앉아있는 백과와 눈이 마주쳤다. 백과는 내가 전학 온 첫날처럼 엄지손가락을 불쑥 들어 올린 채 이를 훤히 다 드러내고 싱긋 웃어 보였다. 그 표정이 꽤 우스꽝스러워서 나도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끝-
<201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작>
수리와 문제집 속 친구들/박연미
“엄마, 오늘은 놀면 안 돼요? 어제도 잔뜩 풀었잖아요.”
엄마는 수리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1학년 수학 문제집을 펼쳤어요.
“다른 아이들을 앞서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해.”
수리는 엄마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을 앞서면 뭐 해요? 놀이공원에 갔을 땐 윤서가 나보다 훨씬 앞에 서 있었는데 놀이기구는 같은 거 탔단 말이에요.”
엄마는 못 들은 척 오리가 그려진 뺄셈 문제를 설명했어요.
“수리야, 오리 다섯 마리가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었어. 그런데 세 마리가 어디로 가 버렸어. 그럼 오리는 모두 몇 마리 남았을까?”
수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어요.
“오리 세 마리는 어디 갔는데요?”
엄마가 대답했어요.
“글쎄….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지금은 오리가 몇 마리 남았는지 생각해 보렴.”
수리는 곰곰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리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서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어요. 눈만 이리저리 굴렸죠.
수리를 물끄러미 보던 엄마가 문제집을 앞쪽으로 넘겼어요.
“아직은 뺄셈이 어려운가 보구나. 그럼 덧셈을 해볼까?”
수리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엄마는 붕어가 그려진 문제를 설명했어요.
“붕어 네 마리가 어항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조금 있다가 붕어 세 마리가 더 왔어. 그럼 붕어는 모두 몇 마리가 되었지?”
수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어요.
“엄마, 붕어 세 마리는 어디서 왔어요?”
엄마가 얼굴을 찌푸렸어요. 때마침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면 수리 머리에 콩, 꿀밤이 떨어졌을지 몰라요.
엄마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자 수리는 혼자 중얼거렸어요.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붕어는 어디서 왔을까?”
그때였어요. 수리는 깜짝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문제집 속 동물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거든요. 엄마랑 공부할 땐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죠. 앞장 뒷장 넘겨봐도 마찬가지였어요.
“엄마, 문제집 속 동물들이 사라졌어요.”
엄마가 전화를 끊고 오자 수리가 문제집을 내밀었어요. 문제집을 살펴본 엄마가 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었어요.
“어? 열도 없는데 이상하네?”
엄마는 문제집 속 동물들이 사라졌다는 걸 인정하는 것보다 자기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휴, 오늘은 그만하자.”
엄마가 방을 나갔어요. 혼자 남은 수리는 방 안을 찬찬히 훑어보았어요. 동물들이 어딘가 숨어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다 탁자 위에 놓인 동그란 어항을 보게 되었어요. 어항 안에는 금붕어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헤엄치고 있었죠.
수리는 어항 앞으로 다가가서 나지막이 물었어요.
“금붕어야, 네 친구들은 어디 갔니?”
금붕어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헤엄칠 뿐이었죠. 수리는 답답했어요. 금붕어가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수리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 질렀어요.
“네 친구들은 어디 갔냐니까!”
그제야 금붕어가 수리 쪽을 쳐다보며 입을 벙긋거렸어요.
“궁금해?”
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어요.
“응, 넌 친구들이 어디 갔는지 알아?”
“알아, 그곳으로 데려다 줄까?”
“좋아!”
수리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붕어가 공기방울을 따라 흔들리는 물풀을 입으로 톡톡 건드렸어요. 그러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요. 방 벽이 사방으로 물러나기 시작하더니 눈앞에 아담한 마을이 나타났어요. 어항은 마을 한가운데 동그란 연못이 되었고, 작은 화분에 심긴 버드나무는 연못가에 선 커다란 나무로 변했어요.
수리는 연못으로 달려갔어요. 연못에는 붕어와 잉어와 메기, 개구리 등이 헤엄쳐 다녔어요. 연못 둘레 풀밭에는 말과 염소, 토끼, 사슴들이 풀을 뜯고 있었지요.
수리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어요. 그때 머리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네가 우리 마을을 궁금해한 수리구나?”
수리는 깜짝 놀라 버드나무 가지 위를 올려다보았어요. 동그란 안경을 쓴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죠.
“수리야, 우리 마을에 온 걸 환영한다. 나는 이 마을 선생이다.”
수리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어요.
“이 마을은 무엇을 하는 곳이에요?”
“흠흠, 아이들이 더하기를 할 때 도와주러 가는 동물들이 사는 마을이란다.”
수리부엉이 선생님이 황갈색 바탕에 검은 세로줄무늬가 있는 날개를 털며 말을 이었어요.
“빼기에 나오는 동물들이 돌아오는 곳이기도 하지. 한마디로 문제집에 나오는 동물들이 사는 곳이야.”
“와, 저도 이런 마을이 있는지 궁금했어요!”
수리가 신나서 소리쳤어요.
“흠흠, 그렇지. 우리는 문제에 나온 동물들을 궁금해 한 아이만 초대한단다. 그래서 널 이리 데려온 거야.”
말을 마친 수리부엉이 선생님이 동물들을 불렀어요. 코끼리와 기린, 사슴, 다람쥐, 오리 등 온갖 동물이 연못가로 모여들었어요. 줄을 타던 원숭이는 줄을 놓고 왔어요. 반달가슴곰은 어슬렁어슬렁 걸어왔지요. 사방에서 새들이 날아와 버드나무 가지 위에 빼곡히 앉았어요. 연못가는 금세 동물들로 바글바글했지요.
수리부엉이 선생님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어요.
“여러분, 우리 마을에 기쁜 소식과 걱정스러운 소식이 한 가지씩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수리가 우리 마을에 왔다는 것입니다.”
“수리야, 만나서 반가워!”
“수리야, 궁금했어!”
동물들이 저마다 인사를 건넸어요.
인사말이 잦아들자, 반달가슴곰이 앞발을 들고 물었어요.
“걱정스러운 소식은 뭔가요?”
“흠흠, 셈을 도우러 갔다가 마을로 돌아오지 않는 동물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번엔 다람쥐가 앞발을 들고 물었어요.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요?”
“흠흠, 아직 모릅니다. 이유를 아는 동물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아무도 말이 없었어요.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이었죠.
그때였어요. ‘안내’ 이름표를 단 토끼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쳤어요.
“큰일, 큰일 났어요!”
“흠흠, 무슨 일입니까?”
“슬기가 사람 인형 더하기 문제를 풀려는데 인형 한 개가 모자라요.”
슬기는 수리랑 같은 반 아이였어요.
“흠흠, 우리 마을 창고에 사람 인형이 넉넉하게 있지 않나요?”
수리부엉이 선생님의 물음에, 토끼가 숨을 할딱이며 대답했어요.
“오늘 토요일이라 덧셈을 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창고가 텅 비었어요.”
“흠흠, 이를 어쩐다?”
수리부엉이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에 휩싸였어요. 토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했어요.
“어떡하죠? 다음 문제가 사람 인형 더하기 문제란 말이에요.”
그때 수리가 손을 번쩍 들었어요.
“제가 갈게요!”
“안 돼. 넌 진짜 사람이잖아!”
수리부엉이 선생님이 말렸지만 수리는 동물 마을을 돕고 싶었어요. 모험을 하고 싶기도 했고요.
“인형처럼 꼼짝 않고 있을게요. 보내 주세요. 네?”
수리부엉이 선생님은 슬기가 앞 문제 답을 썼다는 소식을 듣더니 하는 수 없이 허락했어요.
“토끼는 빨리 수리를 데려다 줘요.”
토끼가 사람 인형과 수리를 나란히 세우고 지휘하듯 연필을 휘저었어요. 순간 펄럭펄럭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나더니 수리는 어느새 사람 인형이 되어 슬기 문제집 속에 들어와 있었지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슬기는 그림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걸 보고 깜짝 놀랐을 거예요.
수리는 사람 인형 셋이 나란히 서 있는 줄 끝에 꼼짝 않고 서 있었어요. 옆줄에는 사람 인형 넷이 나란히 서 있었지요.
슬기는 더하기 문제가 어려운가 봐요. 연필을 꼭 쥐고 사람 인형 그림만 뚫어지게 보았어요. 수리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어요. 슬기가 자기를 알아볼지도 모르니까요. 다행히 슬기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어요. 문제를 보며 한숨만 팍팍 쉬었어요.
‘슬기야, 너도 힘들겠다. 토요일인데 놀지도 못하고’.
수리는 마음속으로 슬기를 위로했어요. 하지만 슬기 귀에 들릴 리 없었지요.
그때 방 밖에서 슬기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슬기야, 이리 와서 간식 먹어.”
슬기가 연필을 놓고 벌떡 일어났어요.
그런데 슬기가 방을 나가고 난 뒤였어요. 어디선가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수리가 귀를 쫑긋하고 들어보니, 옆 페이지에 있는 동물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였어요.
“어휴, 맨날 아이들 문제 풀이 도와주러 다니는 것도 정말 지겹고 재미없어.”
한 동물이 그러니까 다른 동물이 거들었어요.
“맞아, 오늘도 동물 마을로 돌아가면 또 문제 풀이를 도와주러 가야 할 거야. 사람 어른들이 아이들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고 공부를 시키니까.”
그러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어요.
“그럼, 우리 동물 마을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놀러갈까?”
“어디로 가지?”
“놀이공원 벽에도 동물 그림이 많으니까 그리로 가자. 엊그제 다른 동물들도 거기로 간댔어.”
“좋은 생각이야.”
동물들이 와글와글 떠들더니 한순간에 조용해졌어요.
한참 후에 방문이 열리더니 슬기가 들어왔어요. 다시 문제를 보던 슬기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문제집 속에 있는 동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없었거든요. 사람 인형 문제만 빼고요.
“엄마, 문제집 속 동물들이 사라졌어!”
슬기가 놀라서 문제집을 덮고 방을 나갔어요. 순간, 수리는 동물 마을로 돌아왔지요.
“수리야,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수리부엉이 선생님이 칭찬해 주었어요. 수리는 어깨가 으쓱했어요.
“동물들이 마을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도 알아냈어요. 동물들은 매일 문제풀이를 도와주러 다니니까 지겹고 재미없대요. 동물들도 놀고 싶어 해요. 놀이공원에 간다고 했으니까 그곳에 가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수리 말에, 수리부엉이 선생님이 양쪽 날개를 치켜들었어요.
“흠흠, 동물들도 놀 권리가 있어요. 우리도 실컷 놉시다!”
“만세, 우리도 놀자!”
연못가에 모인 동물들이 소리쳤어요.
“고맙다, 수리야!”
동물들이 입을 모아 소리치자 수리는 얼굴을 붉혔어요.
그때 방 밖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수리야 뭘 하는데 이렇게 시끄럽니?”
엄마가 문을 벌컥 열었어요. 순간, 동물 마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방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어요.
엄마가 보았을 때, 수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요.
“수리야, 간식 먹으렴.”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수리는 문제집을 보며 말했어요.
“동물들아, 다음에 또 만나자!”
<2018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작>
편의점에 온 저승사자/유지영
지갑을 탈탈 털어보니 3600원.
새로 나온 다섯 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다 사기엔 부족한 돈이다. 하지만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하니까 일단 편의점으로 향했다.
우리 동네엔 편의점이 세 군데다. 아직 나를 후원해주는 곳은 없지만 곧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면 제일 멋진 조건을 거는 가게와 친구 맺기를 할 거다.
매일 공짜 아이스크림 두 개. 친구를 데리고 갈 거니까. 거기다 신제품이 나오면 몽땅 시식하고, 화이트데이나 빼빼로데이같이 특별한 날에는 기프티콘을 팡팡 날려줘야 하고…….
이런 생각을 하니 몸이 붕붕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드림 25시 편의점 앞.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를 와락 반겨 주었다. 예닐곱 명의 손님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와! 쟤 유튜브에서 봤어. 사인이라도 받을까.’
이런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아 머리랑 옷을 한 번 더 매만지고 당당하게 아이스크림 코너로 걸어갔다. 신제품은 역시 비쌌다. 내 돈으로는 두 개도 살 수가 없었다.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에 있는 식빵이랑 블루베리 잼을 이용해 새로운 맛을 만들 궁리를 해보았다. 그때 누가 어깨를 툭 쳤다. ‘드디어’라고 생각하며 모델 같은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야, 박준. 오랜만이다. 나 해리.”
꽃무늬 원피스에 밀짚모자를 쓴 까무잡잡한 아이, 3년간 나랑 짝꿍을 했던 해리였다.
“아, 안녕. 너 하와이 갔었잖아.”
“여기서 중학교 다니려고 다시 왔어.”
“그래? 난 네가 참 부러웠는데.”
“아이스크림 골랐니? 내가 사줄게. 짝꿍의 귀국 선물이라 생각해줘.”
안 그래도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사 가서 맛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해리가 사준다니 속으로 콧노래가 나왔다.
“야, 너 그동안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니? 얘기 좀 해줘.”
“난 하와이 얘기가 더 궁금한데.”
우린 편의점 앞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야금야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너 뭐 재미있는 일 없니? 학원 레벨이나 수학 진도 얘기는 하도 들어 이젠 질려. 어쩜 한국 아이들은 다 똑같아? 내가 이러려고 한국 온 건 아닌데. 넌 원래 좀 특이했잖아?”
“그렇지. 내가 좀 반짝하지? 난 요즘 키즈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느라 정신없다.”
“우아. 멋지다. 역시 너다워. 그런데 그게 뭐야? 아직 이곳에 적응이 덜 돼서. 스마트폰도 담달에 아빠가 사주기로 하셨거든.”
“유튜브는 알지? 세계 최대 동영상 공유 사이트 말이야. 거기다 내가 만든 영상을 올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구독할 수도 있고, 댓글도 달 수 있어. 1인 방송이지.”
“그럼 혼자 PD와 앵커, 카메라맨 같은 걸 다 한다고? 힘들지 않아?”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아. 아이디어만 있으면 영상 만드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 또 댓글 달리는 걸 보면 힘이 나.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해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
“해외 다녀온 건 난데, 네가 더 글로벌하다. 그럼 여기도 촬영 때문에 온 거야?”
촬영?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기분이 폭신한 구름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응, 사실 요즘 구독자 수가 늘지 않아 걱정이야. 먹방이나 초딩 일상을 찍는 건 누구나 하는 거고, 주머니 사정도 팍팍해서 뭔가를 하려 해도 힘들어.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해.”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음, 그럼 이런 건 어때? 핼러윈 때처럼 귀신 코스프레를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거야. 하와이에서 정말 재미있었거든.”
해리는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지만 난 너무 반가워 눈물이 솟아날 것만 같았다.
“그래. 그거야. 무더위를 날려버릴 무섭고도 재미있는 것. 여긴 한국이니까 한국 귀신으로 해 봐야지. 정말 고마워.”
그렇게 나와 해리의 작전은 시작되었다.
드디어 D-데이.
저녁밥을 든든히 먹고, 의상과 스마트폰을 챙겨 나갔다. 캠코더와 화장품은 해리가 가져오기로 했다. 촬영을 할 때마다 두근거렸지만 오늘은 정말 심장이 팔딱대서 가슴에 손을 얹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치솟는 구독자 수와 감탄사 가득한 댓글들…….’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행복했다. 아파트 벤치에서 해리가 내 얼굴에 화장을 해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릴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꼭 연예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거울로 내 얼굴을 보니 정말 그럴싸했다. 짙고 검은 눈썹과 입술, 창백한 하얀 얼굴……. 내 등골이 다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해리가 장거리 촬영을 위해 캠코더를 맞추고 있는 동안 나는 재빨리 검은 도포를 입고 갓을 썼다. 나만큼 어린 저승사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바람처럼 스르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고등학생 누나 둘과 눈이 마주쳤다.
“꺄!”
두 누나는 공포 영화 한 장면을 본 듯 기겁해서 바깥으로 도망쳐 버렸다. 대화 좀 하려고 했는데 저 누나들은 담력이 너무 약했다. 갓을 슬쩍 올리며 가게 안을 둘러봤다.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카운터 형이 눈에 들어왔다. 난 목에 힘을 주고 묵직한 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같이 가시지요.”
“무슨 때? 난 매일 샤워해서 때는 없는데요.”
뭔가 계획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 더 배에 힘을 주었다.
“지금 당장 나와 함께 가야 하는데 혹 마지막 소원이 있나요? 내가 급이 좀 높은 사자라 청을 들어 줄 수도 있는데…….”
“지금 소원은 사자 나으리와 함께 노는 것입니다.”
이런! 별 이상한 형을 다 보았나? ‘주니랑 TV’ 구독자 수가 곤두박질치는 게 훤히 보였다. 땀이 난 손으로 검은 도포 자락을 꽉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대사를 준비해야 했는데, 이제 후회한들 어쩌란 말인가! 그때 누군가 거칠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니 누가 내 가게 손님을 내쫓았어? 너니? 참 요즘 초딩은 못 말린다니까. 공부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이런 장난 할 정신이 어디 있어!”
편의점 주인 대머리 아저씨였다. 아까 누나 둘이 물건도 못 사고 도망간 걸 아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전 저승사자예요. 이 점원 대신 아저씰 데려갈 수도 있어요. 절 방해하지 마세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세게 나가야 했다. 물러서면 지는 거니까.
“그래. 너 말 잘했다. 누가 누굴 방해했다는 거야. 너 영업방해죄로 고소당해 볼래? 아직 미성년자라고 봐줄 것 같아? 대신 너희 부모님이 배상을 하든지, 철창신세를 질 수도 있어.”
부모님! 배상! 철창! 그만 내 심장은 쪼그라들어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아저씨. 손님들을 놀라게 한 건 맞지만 쫓아낸 건 아니에요. 창밖을 보세요.”
점원 형의 말에 모두 창밖을 보았다. 아까 도망 나갔던 누나 둘이 핸드폰으로 열심히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아직 초등학생이니까 너그럽게 봐주세요. 물건 서리한 것도 아니고 힘겹게 의상까지 입고 와서 재밌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있잖아요.”
구세주 같은 형의 말에 나는 겨우 숨을 들이켤 수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 하기야 요즘 아이들 놀 만한 게 없지. 아저씨가 생각이 짧았다.”
“저승사자님, 이렇게 먼 길 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마지막 소원은 알바 시급이 올라 여친에게 멋진 선물을 사 주는 것입니다.”
훤칠한 키의 점원 형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저승사자님, 제 마지막 소원은 가족 여행을 가보는 것입니다.”
아저씨도 제대로 해 볼 마음인지 소매를 둥둥 걷으며 말했다.
“어디 보자. 흠.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
나는 턱 밑 수염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저승사자 나으리, 그럼 얼른 알려 주셔야죠.”
아저씨는 잔뜩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천진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았다.
“아저씨가 알바 형에게 가게를 맡기고 여행을 가는 거예요. 그럼 형은 시급이 오른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죠. 뭐 기분 좋으면 아저씨가 보너스를 줄 수도 있지요. 그럼 여친 누나에게 멋진 선물을 사줄 수 있을 거예요. 아저씨도 가족 여행 맘 편하게 다녀올 수 있잖아요.”
갑자기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라 주저 없이 말해 버렸다. 두 사람 다 표정이 환해졌다.
“저승사자님! 고맙습니다. 그럼 제 목숨 한 달 더 연장해 주는 거지요?”
“물론이지요. 제가 염라대왕 오른팔인걸요.”
내 말에 점원 형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때다 싶어 나도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며 해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 여기까지 ‘주니랑 TV’였습니다.”
촬영 종료 버튼을 누른 해리도, 밖에서 영상을 찍고 있던 누나 둘도 키득거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야, 너희들 뭐니? 완전 대박인걸. 아깐 진짜 놀라서 뛰쳐나갔는데 뭔가 재미있는 일 같아서 다시 와서 동영상을 찍었지.”
긴 머리 누나가 가까이서 내 얼굴을 한 번 더 찍었다.
“사실 제가 유튜브 키즈 크리에이터예요. ‘주니랑 TV’라고 검색하면 제 채널이 나와요. 오늘 영상도 올릴 거고요. 구독 부탁드립니다.”
불편한 갓을 벗고 한껏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내 애교가 통한다면 이 자리에서 구독자 넷은 확보한 거다.
“그럼 우리 가게도 유명해지겠구나. 종종 우리 가게에서 깜짝쇼를 하렴. 물론 손님들을 내쫓거나 물건 부수지는 말고.”
아저씨가 캔 음료를 쟁반에 가득 담아 오셨다.
“마지막 소원이라는 아이디어 아주 좋았어. 더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하잖아. 해결책도 아주 멋졌어. 그런데 아저씨, 정말 가족 여행 가실 건가요?”
점원 형이 음료수 캔을 시원스레 따며 물었다.
“그래. 이번에는 꼭 가야겠다. 스크루지가 꿈에서 죽어 보고야 깨달았지만 난 오늘 네 덕에 진짜 중요한 걸 발견했다.”
“어머, 참 재미있어요. 우리도 마지막 소원 생각해 봐야겠어요.”
안경 쓴 누나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무 띄워주니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사실 ‘주니랑 TV’ 구독자 수가 줄고 있어서 좀 무리를 했는데, 의외로 잘되었어요. 하지만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걱정이 돼요.”
“왜 그렇게 구독자 수에 신경을 쓰니? 그냥 네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니었니? 너의 톡톡 튀는 모습만 보여 줘도 충분할 것 같아. 즐기다 보면 구독자 수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지.”
형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맞아요. 처음 키즈 크리에이터를 시작하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재미있게 해볼게요. 오늘 저승사자도 큰 선물을 받아 가네요. 고맙습니다.”
난 도포 자락을 모아서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때 점원 형이 선반 뒤에 가려져 있던 캠코더 버튼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여기까지 BJ 김아담이었습니다.”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작품>
비밀이 사는 아파트/허용호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마음속 어딘가 꼭꼭 숨겨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밀이 마음속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비밀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그런 곳이다.
나는 203동 1008호에 산다. 물론 나도 누군가의 비밀이다. 그가 비밀을 마음속에 숨겼을 때, 이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마음속에 갇힌 비밀들은 대부분 이 아파트로 모여든다. 비밀들이 갇힌 마음속 방에는 이 아파트와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 비밀들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 통로를 통해 주인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게 되는데, 주인이 잊어버리거나 죽었을 때는 공급받지 못한다. 깊은 잠 속에 빠져 버린다. 누군가 깨워주지 않으면 영원히 잠을 잔다. 1000년 넘게 잠들어 있는 비밀도 있다. 너무 오래된 비밀의 방은 입구조차 녹슬어 누구도 출입할 수 없게 된다. 무덤이나 다름없다. 세월이 흐른 후 어쩌다 밝혀지는 비밀이 있다.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이 오래 잠자는 비밀을 밝혀낸다. 주인도 잃고, 오래 잠을 잔 탓에 힘이 없지만, 사람들은 흥미롭게 여긴다. 어떤 비밀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경우도 있다. 잠자는 비밀에게 최고의 보람이다.
비밀들은 대부분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방이 검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그런데 나는 밝은 것이 좋다. 내 방은 커튼이 없다. 비밀치고 특이한 편이다. 1007호에는 '아줌마 비밀'이 사는데 너무 지저분하다. 쓰레기를 복도에 버려두고, 짐은 또 얼마나 많은지 비상구 계단까지 널브러져 있다. 그의 방 앞을 지날 때마다 냄새가 난다. 비밀이 다른 비밀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지만, 안 좋은 습관은 어쩔 수 없이 해를 주게 되는 것 같다. 아줌마 비밀의 주인은 아마 게을러터진 사람일 것이다. 위층 1108호에는 어떤 '남자 비밀'이 산다. 층간 소음이 너무 심하다. 밤이고 낮이고 쿵쿵거린다. 비밀인 주제에 혼자 춤이라도 추는 것일까? 아래층에 사는 비밀은 안중에도 없다.
비밀들도 등급이 있다. 1급 비밀들은 대부분 지하층에 산다. 지하층은 커튼을 치지 않아도 컴컴하고, 칙칙해서 좋아하는 것 같다. 그 비밀들은 검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주인이 여러 명인 경우도 있다. 대부분 나쁜 일을 하고 숨기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 비밀들과는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위층으로 갈수록 등급이 낮은 비밀들이 산다. 그 비밀들은 색깔이 다양하다. 하얀색도 있고 회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분홍색도 있다. 대부분 착한 비밀들이다. 노란색 비밀은 귀엽다. 분홍색 비밀 중에도 예쁜 비밀이 있다.
비밀들은 외롭다. 그러나 서로 어울리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아는 체하지 않는다. 먼저 인사를 건네면 무안당하기 일쑤다. 예외는 있다. 1504호에 사는 비밀은 별명이 '엉덩이 비밀'이다. 노란색이다. 주인 이름은 영호이며 초등학교 5학년이다. 자기 엉덩이에 사마귀가 있는 것을 마음속에 숨기는 바람에 이 아파트로 오게 됐다. 엉덩이 비밀의 방에 놀러 왔다. 초인종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주머니 비밀' 형."
엉덩이 비밀이 반갑게 인사했다. 내 별명은 주머니 비밀이다.
"잘 지내니? 엉덩이 비밀."
엉덩이 비밀의 방은 지저분하다. 주인이 초등학생이니까 그렇겠지. 아이답게 장난감이 널려 있고, 벽도 노란색이다. 내 방처럼 커튼이 없다.
"네 주인이랑 이야기는 잘돼 가니?"
엉덩이 비밀은 이 아파트를 떠나고 싶어 한다. 엉덩이 비밀과 나는 떠나는 방법을 의논하는 중이다. 비밀이, 비밀이 아니게 되면 아파트를 떠나야 한다.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자유다. 아래층에 사는 비밀들은 영원히 이곳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위층일수록 떠나고 싶어 한다.
"네. 그런데 아직은 나가지 못할 것 같아요. 여자 친구가 절대로 비밀을 알게 할 수 없다는데요."
엉덩이 비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흠, 여자 친구가 생긴 모양이구나. 엉덩이에 있는 사마귀를 여자 친구가 알게 하고 싶겠니?"
고개를 살짝 흔들며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줬다.
"그래도 나가고 싶어요. 여긴 정말 답답해요."
엉덩이 비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 머리를 맞댔다.
"목욕탕에 가면 다 보게 될 텐데, 숨겨서 뭐 할 거냐고 할까요?"
"흠, 그래도 여자 친구에게 숨기고 싶어 하면 넌 나갈 수 없어. 소중한 사람에게 비밀이 아니어야 하거든."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여자 친구의 비밀 하나를 알아내 서로 교환하면 어떨까?"
이 아파트 어딘가에 여자 친구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 좋은 생각이에요."
엉덩이 비밀이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문제는 영호 여자 친구의 비밀을 어떻게 찾느냐다. 일일이 방을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아파트 단지를 다 뒤지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렇다고 관리사무소에 방송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공개적으로 비밀을 찾는 건 비밀을 모욕하는 일이다. 비밀은 비밀을 지키지 않는 것을 제일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엉덩이 비밀과 나는 특별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서로의 비밀을 교환했으니 말이다.
"비밀 중에서 찾을 게 아니라 영호를 설득하면 돼요. 서로 좋아하면 비밀이 없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럼 아마 비밀을 알려주고 싶어 안달할걸요."
엉덩이 비밀은 참 똑똑한 비밀이다. 주인이 똑똑해서 그렇겠지.
"그나저나 주머니 비밀 형은 안 나갈 거예요?"
내 주인은 화영이다. 스물세 살 된 청년인데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다. 척추를 다쳐서 가슴 아래로는 아무 느낌이 없다. 바늘로 찔러도 모른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좋은 일인지 모른다. 고통은 힘든 것이니까.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다. 땅을 딛고 설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떤 느낌도 없으니 가슴 위쪽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 공중에 떠 있으면 날고 있는 느낌일까? 그러나 항상 날고 있다면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새가 땅에 내려앉지 못하면 좋을까? 땅에 내려앉을 수 있으니 나는 것도 좋은 거다.
화영이의 비밀은 가슴 아래를 느끼지 못해 생겨났다. 느끼지 못하니 오줌 누는 것도 모른다. 그래서 소변 주머니를 항상 달고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너무 불편해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지긴 했지만 비밀이 돼버렸다. 다른 사람이 아는 게 싫었다. 부끄럽게 느껴졌다. 화영이는 그 비밀을 마음속에 꼭꼭 숨겼다. 그래서 내가 이 아파트로 오게 된 거다.
"몸이 불편한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엉덩이 비밀이 힘줘 말했다.
"그러게. 그렇지만 화영이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형은 화영이가 왜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요?"
엉덩이 비밀이 물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이가 하나 빠졌다면요? 그래도 이상한 건가요? 몸은 자동차처럼 고장도 나고 그러잖아요."
소변 주머니를 차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따돌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해요. 자주 보게 되면 흔한 일이 되잖아요."
"흔한 일이 된다는 건 화영이처럼 다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거잖아?"
엉덩이 비밀이 머리를 살짝 긁었다. "그럼 흔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게 해야 해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화영이의 마음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는 헤어졌다. 각자 자기 주인을 만나고 나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화영이를 만났다. 화영이는 내가 비밀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나는 이 아파트를 떠나고 싶다.
“화영아. 너는 장애인이 된 것이 부끄러운 거니?”
내가 넌지시 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걷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 같아 싫어.”
화영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화영아. 네 몸은 자동차 같은 거야.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말이야. 자동차는 고장도 나고, 언젠가는 폐차장으로 보내야 하는 거야. 좋은 차를 타면 좋겠지만 고장 난 차를 탄다고 부끄러운 것은 아니야.”
화영이 눈이 동그랗게 빛났다.
“그렇긴 하지만 불편해. 그리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화영아. 네가 자동차를 타고 여행한다고 생각해 봐. 고장 난 차로는 빨리 가지 못하잖아. 그래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거야. 여행이란 빨리 가는 게 목적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 쳐다보는 것 신경 쓰지 말고, 자세히 보고 더 많이 느끼라는 거지? 그게 여행의 목적이라는 거지?”
화영이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여행은 그렇게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보는 거야.”
엉덩이 비밀이 내 방으로 왔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다. 영호와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다. 영호는 여자 친구에게 비밀을 교환하자고 했을 것이다.
“영호 여자 친구 비밀은 뭐라니?”
“영호 엉덩이에 사마귀가 있는 것을 아는 게 비밀이래요. 영호 엄마가 가르쳐 줬는데 비밀이라고 했거든요.”
엉덩이 비밀이 똑똑한 이유는 주인이 세 명이나 있어서인 모양이다.
나도 이제 이 아파트를 떠나야 한다.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신난다.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작품>
눈 오는 날/이서영
세상이 꽁꽁 얼어붙을 듯 추운 날입니다. 산골마을 공터에 이동도서관 버스가 찬바람을 맞고 서 있습니다. 성에가 잔뜩 낀 유리창 안으로 사서 선생님이 홀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산골마을에는 평소에도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데다 그나마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책을 빌리려면 먼 산길을 걸어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 같이 추운 날에는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찬바람 속을 걸어와서 허탕이라도 치면 큰일이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휘이잉 휘이잉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나뭇가지며 돌들이 데구르르 바닥을 굴러다닙니다. 누군가 오는 소리인가 싶어서 선생님은 창밖을 내다봅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람쥐 몇 마리가 먹이를 구하려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입니다.
‘도토리라도 챙겨왔으면 좋았을 걸.’
도로변까지 내려온 다람쥐를 보며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똑똑.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자 흘레바람이 사납게 버스 안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저도 모르게 감겼던 눈을 뜬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얼굴이 작고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우비처럼 생긴 옷 안에서 오돌오돌 떨고 서 있었으니까요.
선생님은 얼른 아이를 버스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조금 전부터 날리기 시작한 눈발이 아이가 쓰고 있는 모자 위에 솜털처럼 떨어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손바닥으로 쓸자 거짓말처럼 사르르 녹아서 사라졌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난로 옆에 앉힌 후 석유난로의 심지를 돋우었습니다.
먼 숲길을 걸어왔는지 아이에게서 떡갈나무며 굴참나무 냄새가 났습니다. 무릎담요를 가져다 어깨에 걸쳐주자 아이가 포도알처럼 까만 눈을 들어 선생님을 봤습니다.
“혼자 왔니?”
선생님이 묻자 아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어른은 어디 계시는데?”
다시 묻자 아이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킵니다. 선생님이 창밖을 내다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조금 떨어져서 아이를 봤습니다. 책을 읽을 생각이 아예 없는지 아이는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추위에 하얗게 얼었던 볼이 발그스레해지자 선생님은 아이 옆으로 다가가 앉았습니다.
“책 읽을 줄 아니?”
아이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습니다.
‘그랬구나!’
선생님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팔을 뻗어 가까운 책장에서 ‘아기양과 나비’를 꺼냈습니다. 아이가 잘 볼 수 있도록 무릎 위에 책을 펼쳐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풀 나풀 나비는 날아가서 민들레꽃에 앉았습니다. 또가닥 또가닥 아기 양은 나비를 따라가서, “네 집은 어디니?” 하고 물었습니다. 나비는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이 다 내 집이야. 나는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으니까.”
나비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선생님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계속해서 읽어 주었습니다.
아기양이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어 줘.” 나비가 말했습니다. “나는 겨울이 되기 전에 멀리 날아가야 해. 난 너처럼 따뜻한 털을 가지고 있지 않거든.” 나비는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갔습니다.
아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들었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서운한 얼굴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책을 한 권 더 꺼냈습니다. 아이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습니다. 선생님은 ‘장화신은 고양이’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방앗간 주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나자 첫째 아들과 둘째아들이 모든 재산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막내에게 남은 것은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가 소스라쳐 놀랐습니다. 몸을 웅크리고는 벌벌 떨기까지 했습니다.
“어머, 미안하구나.”
선생님은 얼른 책장을 덮었습니다. 아마도 고양이에게 크게 놀란 적이 있는가 보았습니다.
“괜찮아. 선생님도 너 만할 때 개한테 손가락을 물린 적이 있었어. 한동안은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나도 크게 울곤 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개 두 마리와 살고 있는걸.”
선생님은 아이의 등을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아이의 떨리던 몸이 차츰 차분해졌습니다.
선생님은 고양이가 나오는 책을 피해 다른 책을 더 읽어주었습니다. 아이는 산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산새가 지저귀는 부분에서는 귀 기울여 듣는 듯 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는 부분에서는 몸을 흔들어댔습니다. 개구리가 나오자 펄쩍 뛰어 따라했습니다. 마침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였습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자 눈보라가 버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저도 모르게 감겼던 눈을 뜬 선생님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봤습니다. 아이와 꼭 닮은 엄마가 문밖에 서 있었으니까요.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렸는지 엄마 머리 위에 소복하게 하얀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서둘러 엄마를 버스 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아이에게처럼 엄마에게도 갈참나무며 졸참나무 냄새가 났습니다. 엄마를 본 아이는 달려가 품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엄마는 몇 번이나 머리를 꾸벅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가 잘 들어줘서 책 읽는 일이 행복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책을 빌려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이는 잠깐 시무룩해졌지만 곧 괜찮다는 얼굴을 했습니다.
엄마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선생님에게 내밀었습니다. 쭈글쭈글 마른 밤 몇 알이었습니다.
버스 문을 열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이 많이 오네!”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엄마와 아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엄마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버스 밖으로 성큼 나가 눈밭을 걸어갔습니다.
“아이, 추워.”
선생님은 버스 문을 닫았습니다. 창문 밖을 내다 봤지만 엄마와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람쥐 두 마리가 나무 위를 오르내리며 즐겁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입니다.
“나도 돌아가야겠다.”
선생님은 석유난로의 심지를 내리고 창문 커튼을 닫았습니다. 도서관이 있는 큰 마을을 향해 눈 오는 길을 버스로 달려갔습니다.
<2018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품 >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들/이은정
전화를 받는 엄마 표정이 구겨졌다. 옆에서 나는 동생과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티브이에서 만화 주인공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악당한테 로켓포를 맞고도 만화 주인공은 끄떡없었다. 현실에서라면 벌써 천 번은 죽었을 거다. 옆에서 동생이 깔깔 웃었다. 나는 엄마가 전화기를 내려놓자 물어보았다.
“엄마, 누구 전화야?”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현택아, 시골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데. 그런데 병원에 안 가신다고 고집을 부리는구나.”
엄마가 작게 한숨을 쉬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형아, 저 주인공 말이야 천하무적이야. 안 죽어.”
티브이 화면 속에서 주인공이 어떤 할아버지를 구하고서 웃고 있었다. 밥을 먹는 내내 엄마는 힘이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날 밤 자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부엌에 작은 등이 켜져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나란히 앉아 얘기하고 있었다.
“한평생 엄마 속을 그렇게 썩이시더니. 그랬다고 아픈 것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엄마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장인어른 생각이 그러면 가시는 길옆에서 잘 보살펴 드려야지. 다행히 애들도 방학이니까 같이 내려가면 되겠네.”
아빠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 화장실로 갔다. 오줌을 누면서 시골 할아버지를 떠올려보았다. 시골에 가면 우리를 반갑게 반겨주시는 외할아버지. 하지만 항상 책을 읽으며 먼 산을 자주 보셨다. 할아버지는 나와 동생의 장난에 웃거나 미소를 지으시는 게 다였다.
다음날 짐을 싸서 엄마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엄마는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엄마, 우리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는 거야?”
동생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엄마가 입을 꾹 다문 채 운전을 했다.
나는 오늘 학원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기분이 좋았다.
“우리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니야. 현택이는 내년에 중학교 가기 전 마지막 휴가라고 생각해.”
엄마가 거울 너머 내 표정을 봤는지 한소리 했다.
“할아버지 많이 아프셔. 어쩌면 이번 주를 못 넘기실지도 몰라.”
동생이 엄마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뭘 못 넘기는데? 나처럼 줄넘기를 못 해?”
나는 동생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날렸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엄마는 슬퍼 보였다. 나는 엄마 눈치를 보며 동생과 눈치껏 떠들었다.
시골집은 조용했다. 매미 소리와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할아버지 집은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안방과 그 옆에 창고가 붙어 있다. 오른쪽에는 아주 작은 방과 그 뒤에 부엌과 화장실이 있다. 옛날 집을 고쳐서인지 책에서 보았던 초가집을 닮았다. 댓돌 위로 낡은 까만 고무신과 여자 신발이 올려져 있었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머니 한 분이 할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다.
“이제 오냐. 네 아버지가 전화하지 말랬는데 내가 했다. 귀찮게 하기 싫다며 유난을 떨어도 가는 길은 자식들이 지켜봐야지.”
할머니는 조금 있다 나갔다. 할아버지는 하얀 이불을 가슴까지 올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눈을 떴다. 살며시 미소를 지었지만, 힘이 없는지 입술만 살짝 움직였다.
엄마는 가만히 할아버지 옆에 앉아 이불 끝을 꼬집었다. 오히려 동생은 바싹 마른 할아버지 모습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할아버지 많이 아파?”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엄마 옆에서 이불 끝에 달린 실밥을 뜯었다.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할아버지의 앙상한 팔이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약해 보였다.
동생은 잠시 눈물을 흘리더니 자신의 할 일을 다 한 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도 슬그머니 동생을 따라 나갔다.
“서울 병원으로 가요.”
엄마 목소리가 방 밖으로 튀어나왔다. 할아버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루에 앉아 마당 한쪽에 심어진 옥수수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쳐다봤다. 매미 소리에 새가 지저귀었다. 집 뒤 작은 산에서 만난 바람이 뒷마루 창으로 몰려와 시원했다. 뒷마루 창이 액자 속 그림 같다. 엄마 목소리는 매미소리에 묻혀 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동생과 뒷마당으로 갔다. 쭈그리고 앉아 작은 샘물을 바가지로 퍼마셨다. 울타리를 타고 작은 포도송이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포도알은 작았지만 시큼하고 달콤했다. 동생이 재잘거릴 때마다 입속에서 보라 꽃이 피었다.
우리는 뒷산으로 연결된 오솔길로 올라갔다. 오솔길 옆으로 버섯들이 작은 통나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솔길을 얼마나 올라갔을까. 먼저 올라간 동생이 길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아, 이것 봐. 새가 있어.”
작은 새였다. 아직 솜털이 난 모습이 아기 새 같다.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형아, 아기 새가 엄마를 잃었나 봐. 우리가 찾아주자.”
동생이 아기 새를 들어 올렸다.
나는 가만히 아기 새의 깃털을 쓰다듬었다. 차갑다. 몸도 뻣뻣했다.
“이 새 죽었어.”
내 말에 동생이 울상을 지으며 흙 위로 아기 새를 떨어트렸다.
동생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뛰어갔다. 나는 아기 새를 묻어주고 싶었지만, 동생을 따라 뛰었다.
동생은 예전에 길에서 죽은 비둘기를 보더니 그 뒤로 죽었다는 말을 싫어했다. 한참을 뛰어 언덕 위 도라지꽃이 피어 있는 곳에 동생이 보였다. 동생은 꽃을 꺾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직 피지 못한 도라지꽃 망울이 흔들렸다.
나도 내려가는 길에 아기 새에게 꽃무덤을 만들어주기 위해 꽃다발을 만들었다.
동생과 나는 뒷산을 돌아다녔다. 한참 있다 배가 고파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에 아기 새를 찾았다. 어느새 아기 새 위로 개미 떼가 잔뜩 몰려있었다. 동생은 저만치서 나를 쳐다보며 빨리 가자고 손짓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도라지 꽃다발을 아기 새 위에 덮었다. 그러자 개미 모습도, 죽은 아기 새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오자 엄마는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었다. 도마 위 칼질에 꼬마북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는 가끔 엄마가 떠주는 물에 입술을 적셨다. 엄마가 바쁘면 내가 숟가락에 물을 떠서 한 방울씩 할아버지 입에 넣어주었다.
할아버지는 점점 말라갔다. 뼈만 남은 얼굴에 깜깜한 밤처럼 깊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할아버지 많이 아파요?”
문득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물었다.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다 그렇게 아프진 않구나. 참을 만하다.”
엄마가 동네 할머니랑 하는 말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암이라고 했다. 이번 주나 다음 주면 돌아가신다고 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잠을 잤다. 가끔 잠을 자면서 사람들 이름을 불렀다.
“어릴 적 노닐던 친구분들 이름을 부르는 것 같구나.”
엄마가 말했다.
할아버지의 어릴 적 모습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가끔 눈을 뜨고 한곳을 바라봤다. 눈동자가 마른 얼굴에서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몸이 점점 말라갔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할아버지 모습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엄마는 지나가는 말로 할아버지한테 서울로 올라가자고 말했다.
“여기서 일 치르기에는 저희 생각도 해주셔야지요.”
엄마는 그 말을 할 때 벌서는 학생같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는 엄마 말에 눈을 감았다.
동생과 나는 동네를 어슬렁거리거나 개울에서 수영하거나 뒷산을 올라가는 일이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나는 가끔 밤에 잠을 자다 깼다. 모기장 너머 건너편 안방에서 엄마와 할아버지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멀리서 한밤을 알리는 개의 울부짖는 소리가 길게 나팔처럼 들렸다.
“너희 엄마를 꽃상여 태워 보내야 했었는데.”
안방에서 할아버지 목소리가 힘없이 들렸다. 엄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외삼촌 세 분이 번갈아 전화했다.
“이번 주말에는 내려오세요. 하실 말씀이 있데요. 엄마 고생시킨 것도 미안하고 우리 고생시킨 것도 미안하다고 말씀하세요.”
엄마 눈가에 눈물이 반짝거렸다.
이제 할아버지는 물도 마시지 않았다. 산을 돌아다니다 내려왔을 때 엄마가 전화하고 있었다.
“내일이나 내일 모레면 가실 것 같아요.”
엄마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할아버지가 누워계시는 안방 문을 가만히 열었다. 할아버지는 뒷산 까맣게 말라 푸석푸석 누워있는 나무 같았다.
그날 밤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깼다. 얼른 마당 한쪽으로 뛰어가 오줌을 눴다. 열린 안방 문 사이로 할아버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어머니, 어머니.”
다음 날 서울에서 외삼촌 세 분과 외숙모들이 왔다. 큰 형들과 누나들은 오지 않았다. 나중에 온다고 했다. 엄마는 할아버지한테 막내딸이다. 시집도 늦게 가서 우리를 늦게 낳았다. 그래서 제일 큰 사촌 형은 벌써 장가를 갔다. 오늘내일 아기가 태어난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삼촌이 된다. 아기가 나한테 삼촌이라고 부르면 왠지 간지러울 것 같다.
어른들은 작은 안방에 꽉 들어찼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숨소리만이 작고 힘들게 들렸다. 이제 꿈도 꾸지 않는지 누군가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어른들은 마루로 나와 다들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매미는 딱 시끄럽지 않을 만큼 울었다. 매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는 졸음이 몰려왔다.
엄마가 옥수수를 쪄서 쟁반에 내왔다. 옥수수를 먹자 조금 졸음이 밀려갔다.
어른들도 마루에 앉아 옥수수를 하나씩 들고 먹었다.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것 같다. 열린 안방으로 할아버지가 보였다. 즐거운 음악을 감상하듯이 눈을 꼬옥 감고 입술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첫째 외삼촌은 마당 한곳에 놓인 고무호스의 물을 틀었다. 마른 마당에 물을 뿌리자 무지개가 떠올랐다. 동생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무지개가 떴다.”
외삼촌이 웃으며 고무호스를 높이 쳐들었다. 구멍 끝을 손으로 막고 하늘로 물을 흩뿌렸다. 물줄기 사이사이 예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갑자기 동생이 얼굴을 찌푸리며 하늘을 쳐다봤다. 동생은 돌처럼 꼼짝 않고 댓돌 위에 서있었다.
“뭐 해?”
내가 물었다.
“하늘에 있던 무지개가 내려와서 하늘이 구멍 났나 보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었다.
“바보, 무지개는 어디에나 있어.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야. 보이면 무지개가 되는 거고. 무지개 색깔은 우리가 보이는 빛을 색으로 표현한 거란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책에서 본 내용을 얘기했다.
동생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무지개에 검은색도 있어?”
나도 모르겠다. 검정 무지개도 있을까?
“물론, 안 보인다고 없는 건 아니야.”
나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죽어도 있는 거야?
동생이 옥수수가 잔뜩 낀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모두 조용해졌다. 어른들 눈동자가 흔들렸다.
큰 외숙모가 동생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단다. 지금 바람이 불잖니. 그런데 눈에는 보이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지.”
“아 그럼 나중에 바람이 불면 할아버지가 옆에 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지?”
동생은 가끔 엉뚱한 말을 너무 잘 한다. 동생은 고무호스를 들고 마당에 물을 뿌렸다. 마루에 앉아 어른들은 얘기했다.
옥수수를 먹고 나자 나는 또다시 졸렸다. 슬그머니 작은 방에 들어갔다. 팔베개를 베고 누웠다.
얼마나 졸았을까. 잠이 깼다. 조금 전까지 꿈속에서 누군가의 뒤를 쫓아갔다.
무슨 꿈이었더라.
까까머리에 키 작은 아이가 까만 고무신을 신고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계속 불렀던 것 같다. 아이는 쪽진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작은 보따리를 들고 걸어갔다.
왜 불렀을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이는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멀리 햇살 가득한 푸른 들판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아이는 은행나무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계속 불렀다. 아이는 작은 키였지만 나보다 걸음이 빨랐다.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햇살 속으로 아이가 사라졌다.
마루 저편 안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아빠. 흑흑.”
창문으로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지나갔다. 매미 소리도 지나갔다.
가만히 누워 까까머리 아이를 생각했다.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하지 않던 그 아이가 치사했다.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었다. 나를 지나치는 바람 소리와 매미 소리에게 속삭였다.
“그래, 잘 가.”
소리들이 멀리멀리 그 아이한테 전해졌으면 좋겠다.
<2018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너라도 그럴 거야’/박명희
“승표야, 벼, 병아리가 나왔어.”
은빈이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꺅! 승표는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승표는 머리를 맞댄 아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부화기 안에서 병아리가 아장거리고 있었다.
“뺙뺙뺙뺙”
반달눈을 깜빡이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승표야, 이제 네가 병아리 엄마니까 잘 보살펴야 한다.”
승표는 병아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털이 어찌나 보드라운지 입안에든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릴 것 같았다.
“삐약아, 안녕?”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은 놓쳤지만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부화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동안 유정란 살 돈을 모으느라 좋아하는 핫도그를 보고도 침만 꼴깍 삼켰다. 돈이 모자라서 엄마 몰래 돼지저금통에서 천원을 꺼낼 때는 심장이 다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자, 이제 공부하기로 해요.”
선생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삐약이가 뛰어놀았다. 시곗바늘이 달팽이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딩동댕, 드디어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삐약아, 이제 집으로 가자.”
승표는 삐약이를 작은 통에 넣어 품에 안았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자 아이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승표가 부러운 아이들은 헤어지기 전에 병아리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이제 엄마 허락만 받으면 된다.
“아파트에서 닭을 키우겠다고? 아휴, 참 대책이 없네.”
짐작대로다. 엄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승표는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꼼짝 않고 서서 허락을 기다렸다. 엄마가 승표와 삐약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삐약이가 엄마를 빤히 보며 울어댔다.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네가 알아서 해. 엄마는 손 안 댈 거야. 그리고 베란다에서만 키우는 거야.”
“넵!”
신이 난 승표는 삐약이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삐약이는 승표와 마음도 잘 통했다. 손바닥 위에 모이를 올려놓고 부르면 달려와 콕콕 찍어 먹었다. 되똥거리며 걷는 엉덩이는 얼마나 귀여운지. 삐약이만 보면 승표는 저절로 입이 헤벌쭉해졌다.
토요일 오후였다. 승표는 컴퓨터게임에 빠져 있었다. 게임은 주말에 딱 한 시간만 허락되기에 일 초도 놓치기 아까웠다. 옆 눈 한 번 팔지 않고 승표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승표야, 청소하게 베란다 문 좀 열어 둬.”
평소 같으면 투덜거렸을 것이다. 엄마에게 밉보였다간 자칫 삐약이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 승표는 재빨리 베란다 문을 열고 모니터 앞으로 달려왔다.
“승표야, 이리 와봐.”
엄마 목소리가 이번에는 귀를 잡아당겼다. 조금만 더하면 게임을 이기는데, 키보드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요.”
“병아리가 나갔단 말이야.”
“예?”
승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만 열지 왜 방충망까지 열어서는….”
승표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삐약이가 화단으로 뛰어내려 놀고 있었다. 집이 1층이라 다행이었다. 승표는 신발 뒤를 꺾어 신고 바깥으로 나갔다.
“뺙뺙뺙뺙…”
다급하게 우는소리가 들렸다. 승표는 화단을 살폈다. 얼룩 고양이가 삐약이를 쫓고 있었다. 승표는 신발을 제대로 신느라 멈칫했다. 그 사이 고양이는 삐약이를 물고 담장 쪽으로 달아났다. 승표는 허겁지겁 따라가며 돌을 집어던졌다.
“야! 거기서.”
고양이는 배가 불룩했다. 그런데도 승표보다 더 재빨랐다. 약 올리듯 고양이는 사뿐히 담을 넘어 사라졌다.
“삐약아! 삐약이를 꼭 찾아야 해.”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삐약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승표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털레털레 내딛는 발걸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꼭 복수할 거야.”
승표는 주먹을 꼭 쥐었다. 게임 속의 전사처럼 눈이 이글거렸다.
다음 날부터 승표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왔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집 주변을 뒤졌다. 며칠 동안 길고양이 몇 마리를 보았지만 얼룩 고양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가방을 집에 놓고 바깥으로 나가는데, 옆 동에 사는 은빈이가 다가왔다.
“승표야, 오늘도 고양이 못 찾았어?”
승표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가 도와줄게.”
은빈이와 동생 수빈이가 작대기를 집어들고 따라나섰다.
“여기 나무 틈새로 빠져나갔다고 했지?”
“분명히 한 번은 다시 나타날 거야.”
“먹이로 유인해볼까?”
승표는 엄마 몰래 참치통조림을 가져왔다. 뚜껑을 열어 고양이를 놓친 자리에 통조림을 놓아두었다.
“이제 저 모퉁이에 숨자.”
승표는 탐정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통조림을 지켜보았다. 두 시간이 지나도록 고양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수빈이가 집에 간다고 일어섰다가 재빨리 앉았다.
“고양이 왔어. 저기 봐.”
흥분한 수빈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담장 아래로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쉬잇!”
“그 고양이 맞아?”
은빈이가 귀엣말로 물었다. 삐약이를 물고 간 고양이는 배가 불룩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고양이는 배가 홀쭉했다.
“아닌 것 같기도 해.”
두리번거리던 고양이가 몸을 낮추었다. 통조림 쪽으로 슬슬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이쪽을 힐끗거리며 통조림을 먹었다. 승표는 고양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승표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고양이는 통조림을 다 먹었다. 고양이가 혀로 입가를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양이가 뛰기 시작했다.
“따라가 보자.”
아이들도 후다닥 일어나 고양이를 따라 뛰었다. 한 번 멈칫거린 고양이가 아이들을 보더니 나무를 타고 올랐다. 승표가 발을 동동 구르며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으아, 거의 잡을 뻔했는데.”
“통조림 먹을 때 때려줬어야지.”
수빈이가 작대기로 바닥을 소리 나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 사이 고양이는 담장 위로 뛰어내려 저편으로 사라졌다.
“내일은 포위작전을 써보자.”
은빈이와 수빈이가 돌아갔다. 약이 오른 승표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다음 날 수업을 마치고 몇몇 아이가 따라나섰다. 힘 좀 쓰는 무건이와 날쌘돌이 재현이가 작대기를 들었다.
“고양이를 때려준다고? 고양이가 불쌍해.”
여자아이들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말 하려면 끼지 마. 우리는 도둑고양이에게 복수하려는 거야.”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다. 어제처럼 참치통조림을 담장 아래에 놓았다. 한참이 지나도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참을성 없는 무건이가 하품하며 몸을 비틀었다.
“더는 못 기다리겠다. 고양이가 자주 나타나는 곳을 뒤져보자.”
아이들은 담장을 돌아 재개발 지역으로 들어갔다. 건물은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칠도 벗겨졌다. 버려진 물건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아무도 살지 않아 기분이 으스스했다. 풀이 뒤엉킨 화단을 지날 때는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귀신 나올 것 같아.”
“쉿! 무슨 소리가 들려.”
앞서가던 날쌘돌이가 몸을 숙였다.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담장을 돌자 소리가 더 커졌다. 고양이 소리였다. 부서진 가구 더미에서 나는 것 같았다.
“저기다, 저기.”
무건이가 엉덩이를 추어올리며 가구 더미 속을 들여다보았다.
“새끼고양인데?”
승표는 무건이를 밀어내고 속을 살폈다. 망가진 서랍장 틈에서 새끼고양이 세 마리가 오글거리고 있었다. 어미고양이는 먹이를 구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새끼의 무늬가 어제 본 고양이를 꼭 닮았다.
“어제 그 고양이 새끼가 분명해.”
“요놈들이라도 꺼내서 혼내줄까?”
무건이가 작대기를 바닥에 탁탁 쳤다. 겁먹은 새끼고양이들이 서로 엉키며 울어댔다.
“그, 그건 안 돼. 새끼는 잘못 없어.”
깜짝 놀란 승표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 저기 숨어서 기다려보자.”
아이들은 모퉁이를 돌아 쪼그려 앉았다. 무건이가 휴대폰을 꺼냈다. 오락을 하는 무건이 옆에 아이들이 달라붙어 구경했다. 승표는 서랍장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늘은 꼭 복수하고 말 거야.’
한참 뒤, 저쪽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왔다, 왔어. 어제 그 고양이야.”
고양이가 서랍장 앞에서 멈추었다. 주변을 살펴본 고양이는 미끄러지듯 둥지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숨죽이며 고양이 가족을 지켜보았다. 어미 고양이가 털썩 눕자 새끼 고양이들이 옥실거리며 젖을 빨았다.
“고양이가 새끼를 가져서 배가 불룩했나 보다.”
은빈이의 말에 승표는 자꾸만 눈을 깜빡거렸다. 입술까지 잘근잘근 깨물었다. 당황하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새끼고양이 좀 봐. 너무 귀엽지?”
“언니, 고양이 불쌍해. 집도 추워 보이고….”
복수 따위는 잊은 듯 은빈이와 수빈이가 속삭였다. 학원에 가야 한다며 재현이가 먼저 자리를 떴다. 마냥 기다려도 고양이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또 먹이로 유인하자.”
담장 아래 두었던 참치통조림을 가져와 가구 더미 앞에 놓았다. 잠시 뒤, 어미 고양이가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코를 씰룩거리며 통조림 냄새를 맡았다.
‘그래, 나와라. 먹을 때 딱 한 대만 때려 줄 거다.’
승표는 작대기를 단단히 쥐었다. 무건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이야.’
승표가 작대기를 견주는데, 고양이가 둥지 안으로 쑥 들어갔다.
“에이, 눈치 챘나?”
“야야, 다시 나온다.”
이번엔 새끼고양이까지 같이 나왔다. 어미가 비켜서자 새끼고양이들이 통조림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어미 고양이는 옆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자기도 배고프면서….’
작대기를 치켜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복수해야 해! 안 돼!’
복수하자는 승표와 안 된다는 승표가 머릿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눈썹을 잔뜩 올린 무건이가 승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홍승표, 복수 안 해?”
얼굴이 굳어진 승표는 한숨을 쉬며 작대기를 내려놓았다.
“야, 왜 그래?”
무건이는 승표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에이, 시시한 녀석.”
무건이가 승표를 밀치고 대신 나섰다. 고양이들은 통조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허공에 작대기를 몇 번 휘두른 무건이가 고양이를 견주었다. 작대기를 막 내려치는 찰나에 승표가 고함을 질렀다.
“그만!”
승표는 무건이의 작대기를 빼앗아 저만치 던져버렸다. 화들짝 놀란 어미 고양이가 새끼들을 데리고 둥지로 들어갔다.
“너 이 자식, 도와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무건이는 씩씩거리며 승표를 떠밀었다. 승표는 흙바닥에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홍승표 너, 두고 봐.”
눈을 흘기던 무건이는 주먹을 쥐어 보이곤 먼저 가버렸다.
“승표야, 괜찮아? 그만 가자.”
은빈이와 수빈이가 승표를 일으켰다. 글썽거리는 눈물 너머로 삐약이가 어른거렸다.
‘삐약아, 미안해….’
서쪽 하늘이 승표의 눈처럼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201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작품>
메인이미지/김지연
비가 그친 토요일 오후는 고요했습니다. 혼자 침대에서 뒹굴던 현수가 불쑥 이불을 들춰봅니다. 이불 밑에서 파란 구슬이 나왔습니다.
잃어버리는 바람에 한참을 찾았던, 단짝 도윤이가 준 구슬이었습니다.
구슬을 보고 반가웠던 현수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습니다.
오늘 아침, 놀이터에서 만나자는 도윤이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현수의 생일을 깜박하고 넘어간 일을 사과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현수는 놀이터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안 가도 다른 애들이랑 재밌게 놀고 있겠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누운 현수의 귀에 쨍쨍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 리코더로 동요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도!도!솔솔 라라솔 파파미미 레!레!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익숙한 리듬을 따라 현수는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현수도 요즘 학교에서 리코더 연습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쟤도 나랑 같은 학년인가?
그런데 들을수록 리코더 연주가 좀 이상합니다. 들쭉날쭉 음정에 제멋대로 박자. 소리가 중간에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차례대로 계이름이 올라가는데 특히 낮은 ‘도’와 ‘레’는 괴상하게 쉰 소리를 냈지요.
리코더 연주는 끊길 듯 말 듯 계속되었습니다. 현수의 이마에 짜증이 몰려왔습니다. 자기가 음치인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 같습니다.
청진기로 진단하는 의사처럼, 현수는 벽에다 바닥에다 귀를 대봅니다. 책상을 밟고 올라가 천장에도 귀를 기울여봅니다. 현수를 약 올리듯 리코더 소리는 사방에서 울려 퍼집니다.
에잇. 다시 잠이나 자자.
그러나 얼마 안 가 허공을 가르는 성난 소리에 현수는 이불 속에서 다리를 동동거렸습니다.
결국 현수는 씩씩거리며 이불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두 달 전 현수는 이곳 초록맨션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원래 현수네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산 아래 자리한 여섯 채의 건물이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현수네 집은 4동이었습니다.
현수는 작고 낡은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기로 이사 온 뒤부터 도윤이와 같이 학교에 가거나 놀이터에서 노는 일이 부쩍 줄었습니다.
오늘도 리코더 소리가 아니었다면 두더지처럼 방에 콕 박혀 있었을 테지요.
‘리코더 부는 애를 어떻게 찾는담?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볼 수도 없고. 누군지 당장 나오라고 고함을 질러볼까?’
탐정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현수는 심각하게 주차장을 서성였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현수를 부르는 이가 있었습니다.
“이리 온. 얘야.”
아카시아나무 밑 평상에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앉아 계십니다. 처음 보는 분입니다. 현수는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할머니에게로 쭈뼛쭈뼛 다가갔습니다.
비가 온 후라 평상이 조금 젖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옷소매로 앉을 자리를 슥슥 닦아내주었습니다. 현수가 망설이다가 할머니 옆에 엉거주춤 걸터앉았습니다.
“혼자 무얼 그리 찾고 있누?”
“그냥 좀… 어떤 애를 찾고 있었어요.”
“친구를 찾고 있는 게로구나.”
“친구는 필요 없어요. 그런데 할머니도 여기 사세요?”
“으응. 나는 1동에 산단다. 여기 오래 살았지. 아카시아 향이 참 좋은 곳이거든.”
현수는 고개를 들어 공기 중에 섞인 아카시아 내음을 맡아 보았습니다.
작은 날개를 단 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럼 혹시 리코더 부는 애가 누군지 아시겠네요?”
“응? 뭐라고? 리코코? 잘 안 들리니 크게 말해다오.”
“리코더요! 리.코.더. 이렇게 부는 거 있잖아요. 이렇게. 아이 참.”
메인이미지
현수는 답답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서 양 손으로 피리 부는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할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현수는 뚜루루 뚜루루 입으로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잘한다고 손뼉으로 장단을 맞춰주었습니다.
현수는 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떠는 손자가 된 것 같아 쑥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할머니 얼굴에 번진 미소를 보니 즉석연주가 썩 나쁘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맞아. 너만 한 아이를 본 것 같은데…. 경비실에 가보려무나. 경비 아저씨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꾸벅 인사를 하고 걸어가던 현수가 뒤를 돌아봤습니다.
아카시아 이파리에 맺혀 있던 빗방울이 평상 위로 똑 떨어졌습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 자리에서 할머니가 인자한 미소로 현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고에 도착한 현수가 까치발을 하고 빼꼼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각종 우편물과 재활용품, 가지런히 접어놓은 상자들 사이로 현수가 버린 장난감 상자가 보입니다.
‘아저씨가 다 정리해 놓으셨구나…’
처음 이사 온 날, 현수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아저씨는 경비복 대신 허름한 점퍼를, 모자 대신 털 귀마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히죽 웃는 아저씨를 보며 왠지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현수였습니다.
“현수 아니니?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빗자루를 든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아저씨가 현수를 향해 또 히죽 웃었습니다. 현수의 입가에도 부끄러운 미소가 걸렸습니다.
“아저씨. 저기… 리코더 부는 아이가 누군지 아세요? 1동 할머니께서 아저씨한테 여쭤보면 알 거라고 하셨거든요.”
“리코더 부는 아이라고? 글쎄다…. 리코더 부는 아이라….”
골똘히 생각하던 아저씨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습니다.
“그래, 우진이! 리코더 부는 아이라면 3동에 사는 우진이가 틀림없어.”
“3동에 사는 우진이요?”
“너랑 동갑이란다. 둘이 아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게야.”
좋은 친구라니 그럴 리가요. 어쨌든 현수는 막무가내 리코더를 불어대는 그 녀석 얼굴이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아저씨가 마침 우진이네 집에 갖다줄 것이 있는데 함께 가보겠냐고 물었습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창고 앞 손수레에 책상 하나가 실려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앞장서 손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멋쩍게 뒤따르던 현수가 손수레 쪽으로 점점 가까이 붙어 섰습니다. 그리고는 뒤에서 힘껏 손수레를 밀었습니다.
3동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수가 사는 4동 바로 뒤편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까운데 골목을 건너온 적이 없었단 사실이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아저씨가 손수레에서 책상을 내리는 사이, 현수가 외쳤습니다.
“야아~ 리코더 나와라!”
대답이 없자 현수가 또 한 번 소리쳤습니다.
“리코더 못 부는 애 나와라!”
잠시 후,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삐죽 튀어나왔습니다. 저벅저벅 현수를 향해 걸어오는 두 다리가 막대처럼 뻣뻣했습니다. 이윽고 그림자의 주인공이 현수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뜻밖에도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였습니다.
불편한 다리로 서 있는 여자아이의 오른쪽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이 서로 맞닿아 있었습니다. 리코더에서 낮은 ‘도’와 ‘레’를 담당하는 자리였습니다.
그제야 현수는 리코더 연주가 이상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네가 우진이… 여자였어?”
“그래. 내가 김우진인데 넌 누구야?”
우진이가 현수를 쏘아보았습니다. 우진이네 엄마도 현수를 보고 아리송한 표정을 짓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수의 방과 크기도 구조도 똑같은 우진이의 방안에 새 책상이 놓였습니다. 물론 책상을 나르는데 현수도 힘을 보탰지요. 경비 아저씨가 돌아가고, 현수는 우진이네 엄마가 주신 음료수를 마시며 숨을 돌렸습니다.
현수가 찾아오게 된 자초지종을 들은 우진이네 엄마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우리 우진이가 얼마 전부터 몸이 더 안 좋아져서 거의 방안에만 있는데…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리코더란다. 혼자 연습을 하는데 그렇게 소리가 클 줄은 몰랐구나. 정말 미안하다.”
새 책상이 마음에 드는지 우진이는 손등으로 책상 위를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불편하게 붙어 있는 우진이의 손가락을 보자 현수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진이는 입을 쭉 내밀고 현수를 모른 체했습니다. 이름 때문에 남자라고 오해한 데다 리코더를 못 분다고 한 게 화가 났던 겁니다.
어떻게 기분을 풀어줄지 고민하던 현수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리코더였습니다.
“내가 리코더 가르쳐줄까?”
“됐어.”
“나도 요즘 리코더 연습하는데 쉽지가 않더라. 구멍 막기도 힘들고… 이렇게 침도 막 튀고. 퉤퉤퉤.”
현수가 호들갑스럽게 침 나오는 시늉을 하자 우진이는 어이없는 듯 피식 웃었습니다. 작전이 통한 모양입니다.
“있잖아. 아래에서부터 올라가지 말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야. 높은 도부터 낮은 도까지 하나씩… 너무 세게 불지 말고 입술로 두두두 불어야 한대. 한번 해볼래?”
현수가 자꾸 권하자 우진이는 못 이기는 척 리코더를 건네받았습니다. 리코더를 쥔 양손이 불안하게 떨렸지만, 우진이는 현수의 말대로 최대한 천천히 침착하게 음을 하나씩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도시라솔 파미레도-도시라솔 파미레도-
소리가 한결 나아졌습니다. 현수는 신이 나서 짝짝짝 박수를 쳤습니다. 우진이의 얼굴에도 환한 생기가 돌았습니다.
용기를 얻은 우진이가 현수 앞에서 다시 ‘작은 별’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아까보다 크기는 작아졌지만 훨씬 또렷하고 예쁜 연주였습니다.
“네 말대로 하니까 정말 잘 되네. 고마워.”
“고맙긴. 나도 친구한테 배운 거야. 지금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라니?”
“원래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내가 이사 온 다음부터 사이가 멀어졌어.”
현수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졌습니다. 현수는 오늘 도윤이와 만나기로 했던 놀이터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친구 지금쯤 널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걸?”
“이제 걔는 같은 아파트 사는 애들하고만 놀 텐데 뭐. 저번에도 그랬어. 내 생일도 잊어버리고…”
“아냐. 나라면 네가 왜 안 나왔는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을 거야.”
“정말 그럴까?”
우진이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현수의 어깨 위로 우진이의 따뜻한 눈빛이 와닿습니다. 리코더를 들고 있는 우진이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납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현수가 말했습니다.
“내일 비 안 오면 평상에서 같이 리코더 연습할래? 바람도 솔솔 불고 꼭 소풍 나온 기분일 거야.”
“평상이 어디 있는데?”
“주차장 아카시아나무 밑에 있잖아. 몰랐어?”
“와~ 그거 좋겠다! 야 근데 현수나 우진이나 남자 이름이지만 여자 이름도 되잖아. 너도 몰랐어?”
3동 건물을 빠져나오던 현수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우진이가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현수는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집에서 나온 지 꽤 시간이 흘렀을 터였습니다. 현수는 서둘러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도착해 핸드폰을 열자 역시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도윤이의 이름도 보였습니다. 우진이의 말이 맞았습니다.
잃어버렸던 파란 구슬을 찾았다고 하면 도윤이는 몹시 기뻐할 겁니다.
리코더 소리를 따라 발랄한 새 친구를 만난 얘기를 들려주면, 역시 엉뚱한 이현수답다고 웃음을 터트리겠지요.
말갛게 갠 얼굴로, 현수는 도윤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
[ 201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작품]
'치킨보이'/조호재
“제 꿈은 발라드 가수입니다.”
꿈자랑 발표회 시간. 앞으로 나간 하윤이는 눈을 감고 감정부터 잡았습니다.
“우와! 표정 좋은데?”
선생님의 칭찬에 우쭐해하며 하윤이가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친구들은 책상을 두드려대며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선생님까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어깨를 들썩거렸습니다.
`어? 내가 지금 싸이의 말춤이라도 추는 건가?'
하지만 다시 확인해도 가슴 절절한 발라드가 분명했습니다. 결국 하윤이는 1절도 채 못 부르고 도망치듯 자기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정이 좀 불안했지만 박자만큼은 컴퓨터 뺨칠 정도네!”
선생님의 위로 섞인 감상평은 그 순간 별로 힘이 되지 못했습니다. 열두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된 자신의 비밀! 그 끔찍한 사실이 하윤이의 머릿속을 하얗게 마비시켜버렸습니다.
`내가 음치였다니! 내가!...'
하지만 수업을 마칠 무렵 하윤이의 표정은 다시 밝아져 있었습니다. 꿈을 살짝 수정했던 것입니다.
“그래! 내 꿈은 이제 래퍼야!”
박자 감각이 뛰어나다는 선생님의 위로가 도움이 되긴 됐던 모양입니다.
방과 후 하윤이는 부모님이 일하는 양계장으로 갔습니다. 어미 닭들이 이곳저곳 낳아놓은 달걀들을 찾아내 바구니에 담는 일은 보물찾기만큼이나 재밌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즉흥적으로 랩을 지어 흥얼거렸습니다.
“내 꿈은 누가 뭐래도 래퍼! (꼬꼬)... 내 실력은 따라올 수 없는 슈퍼! (꼬꼬)... 날 비웃는 너희들은 밥이나 퍼! (꼬꼬)...”
하윤이는 갑자기 랩을 멈추었습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어? 누구지? 이 추임새는...'
둘러봐도 주위엔 닭밖에 없었습니다. 하윤이는 쫑긋 귀를 세우고 다시 랩을 해보았습니다.
“내 꿈은 누가 뭐래도 래퍼! 꼬꼬!... 내 실력은 따라올 수 없는 슈퍼! 꼬꼬!... 날 비웃는 너희들은 밥이나 퍼! 꼬꼬!...”
이럴 수가! `꼬꼬'... 분명 닭소리였지만 그건 보통 `꼬꼬'가 아니었습니다. 과녁의 정중앙에 꽂히는 화살처럼 정확한 박자에 명중하는 신통방통한 `꼬꼬'였습니다. 하윤이는 즉시 그 소리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러자 소리만큼이나 특별한 용모를 지닌, 그러니까 온통 하얀 빛깔의 닭 한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습니다.
하얀 닭이 뭐가 특별하냐고요? 그곳은 오골계 농장이었으니까요. 온통 까만 닭들 속에서 솜사탕 마냥 하얗고 토실토실한 그 녀석은 아주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뼈대 있기로 소문난 오골계 가문에서 어떻게 그런 닭이 나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하윤이는 여러 번 그 녀석의 랩 실력을 테스트 해보았습니다. 발성도 좋았고 박자감각도 훌륭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음악적 호흡이 환상적이었습니다.
“랩 같이 할까? 오디션에도 같이 나가고. 어때?”
“꼬꼬!”
“좋아. 네 이름은 이제 치킨보이야! 맘에 들어?”
“꼬꼬! 꼬꼬!”
둘은 그렇게 한 팀이 되었습니다.
며칠 후 나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남쪽 지방에서 시작된 조류독감이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농장은 원래부터 외부인이 출입하기 힘든 곳이기도 했지만 이제 부모님은 다른 사람은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막았습니다.
“이제 너도 오지 마.”
아빠의 결정에 하윤이는 곧바로 반발했습니다.
“저것 좀 보시라구요. 직원 외 출입금지!”
하윤이가 가리킨 건 농장 입구에 붙은 안내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지 말라는 거다.”
“제가 그동안 치운 닭똥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그걸 다 모으면 아마도 저 산보다도 높을 걸요?”
그러니까 자신도 직원이 맞고 얼마든지 농장에 출입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닭똥산' 정도는 아니어도 하윤이가 적잖게 부모님의 일손을 거든 건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손을 든 건 아빠 쪽이었습니다.
농장에 랩하는 닭이 살고 있다는 건 하윤이밖에 몰랐습니다. 오디션에 붙을 때까지 비밀로 하겠다는 게 하윤이의 속셈이었죠. 그래서 아빠와 엄마는 기를 쓰고 농장 일을 돕겠다는 아들이 의아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효자 아들을 둔 게 틀림없어! 하하하!”
농장 출입을 허락받긴 했지만 하윤이는 철저히 위생수칙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손과 머리 신발에까지 몽땅 다 소독약을 뿌려야만 했습니다. 귀찮은 일이긴 했지만 치킨보이를 만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치킨보이! 넌 튼튼하지?”
“꼬꼬!”
“그래도 조심해. 밥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란 말이야.”
“꼬꼬!”
“자 그럼 어제 했던 거 다시 해볼까? 드롭 더 비트!”
강한 비트가 스마트폰을 통해 울려 나왔습니다. 거기에 맞춰 하윤이가 먼저 랩을 시작했고 치킨보이도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꼬꼬! 꼬꼬! 꼬꼬댁!”
저녁 식사 시간. 세 식구가 모여 앉은 식탁에선 힘없는 숟가락 젓가락 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바로 옆 동네 양계장에 조류독감이 발생했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하윤이가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TV를 켰습니다.
“조류독감으로 인해 닭고기와 달걀의 유통량이 급격히 감소한 가운데...”
왜 하필 그 뉴스였을까요. 하윤이는 급히 채널을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음악 채널이었습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곤두선 신경을 건드렸습니다.
“하윤아...”
엄마가 TV를 끄라며 하윤이를 불렀습니다. 할 수 없이 전원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다음 화면이 하윤이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랩 오디션 광고였습니다. 옳다구나! 신난 하윤이가 속으로 펄쩍펄쩍 뛰고 있는데 아빠의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통화를 하는 아빠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전화를 끊은 후에도 돌처럼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시끄러워! TV 꺼!”
하윤이는 얼른 TV를 껐습니다.
“무슨 일인데?”
엄마가 초조히 물었습니다. 아빠는 침착하려 애를 썼습니다.
“하윤이는 잠깐 들어가 있어. 소리친 건 아빠가 미안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왜 자기만 빼놓으려 하냐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빠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간 하윤이는 그러나 문 앞에 귀를 대고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우리 닭들도 감염됐대.”
“뭐?”
“지금 군청 사람들이 오고 있어. 오늘밤에 살처분할 건가봐.”
하윤이는 살처분이란 단어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뜻을 몰라 얼른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았습니다. 전염병이 돌 때 가축들을 죽이는 일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병이 났으면 약을 먹여야지... 튼튼한 녀석들은 그냥도 나을 텐데...'
하윤이는 성급히 동물들부터 죽이고 보는 어른들의 대처에 화가 났습니다. 잠시 후 검색을 계속하던 하윤이가 하얗게 질렸습니다. 병든 가축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병이 들었건 아니건 상관없이 한 마리가 병에 걸리면 그곳에 있던 다른 동물들 전부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돼지, 소, 다른 가축들 역시 똑같았습니다. 사람들 멋대로 대량으로 키우다가 사람들 멋대로 대량으로 죽이는 것, 살처분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윤이는 저도 모르게 거실로 뛰어나가며 소리쳤습니다.
“안 돼요! 우리 농장은 살처분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그 말에 부모님은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얼른 전화 거세요! 살처분 안 하겠다구요!”
하윤이는 아빠에게 핸드폰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아빠가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란다.”
“그러면요?”
“전염병을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거야.”
“약이라도 한번 먹여봐야죠! 우리 닭들은 튼튼하잖아요! 이겨낼 수 있다구요!”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법이 그래.”
“법이요?”
“그래, 법.”
“무슨 법이 그래요!”
따져 묻는 하윤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습니다. 하윤이는 바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어두운 시골길을 뛰어 이른 곳은 농장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낯선 차가 여러 대 도착해 있었습니다. 또 우주복 비슷한 걸 입은 아저씨 몇 명이 농장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닭들을 축사 안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하윤이는 문득 아까 인터넷에서 봤던 게 떠올랐습니다. 살처분을 할 때 닭들을 가둬놓고 열풍기를 튼다고 돼 있었습니다. 열에 민감한 닭이 그런 상태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치킨보이만이라도 구해내야 해!...”
얼마 후 닭들이 모두 축사 안에 갇혔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요란한 닭소리에 하윤이는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당장이라도 들어가 치킨보이를 구하고 싶었지만 저 아저씨들이 가만 놔둘 리 없었습니다.
이제 아저씨들은 축사의 창문은 물론 뚫려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다 비닐과 테이프로 막았습니다. 그 작업이 끝나자 한 아저씨가 수상한 전기코드를 콘센트에 꽂았습니다. 윙 하는 기계음이 들려왔습니다. 열풍기였습니다. 닭들의 울음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습니다.
잠시 뒤 아저씨들은 축사 옆에 쭈그려 앉아 술을 나눠 마셨습니다.
“자넨 처음이랬지? 기분이 어떤가?”
“좋을 리가 있겠어요. 저것들도 엄연히 생명인데...”
“오늘밤 꿈에 계속 닭한테 쫓기고 그럴 걸세.”
아저씨들도 마음이 좋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하윤이는 한껏 몸을 낮춰 축사 문을 향해 다가섰습니다. 치킨보이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테이프를 떼어내고 몰래 문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확 밀려 나온 뜨거운 공기에 숨이 막혔지만 꾹 참고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준비해온 손전등을 비췄습니다. 열풍에 떠밀려 반대편 구석에 몰려 있는 오골계들이 보였습니다. 하윤이는 분주한 시선으로 하얀 닭을 찾았습니다.
“다 구해주고 싶지만 미안해...”
그때 마술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손전등 불빛이 지날 때마다 닭들의 색깔이 변했습니다. 검은색에서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으로, 뭐라 부르기 힘든 색도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뚱뚱한 몸이 늘씬해지고 짧은 날개는 점점 커졌습니다. 어느새 닭들 모두 낯설고 멋진 새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드디어 흰색 빛깔의 새가 앞으로 떡 나왔습니다. 모습이 변하긴 했어도 하윤이는 그 새를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치킨보이!”
치킨보이가 랩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닭! 하늘보다 땅을 더 좋아하는 새! 하지만 이젠 날아가야 해!...”
갑자기 분홍색 새 한 마리가 힘차게 날개를 퍼덕이더니 천장에 구멍을 내고 날아갔습니다. 이어서 다른 새들로 차례차례 그곳을 통해 바깥으로 날아갔습니다.
“...수많은 간판에 적힌 우리의 이름들. 하지만 프라이드 양념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지! 똑똑히 봐! 우리의 하늘을!”
랩이 끝났습니다. 다른 새들은 이미 다 날아간 후였습니다. 그제서 치킨보이도 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에 떠올랐고 하윤이의 주위를 몇 바퀴 빙빙 돌며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잘가... 치킨보이...”
서운한 마음에 하윤이는 눈을 감았습니다. 푸더덕!... 치킨보이의 힘찬 날갯짓 소리가 들리다가 금방 고요해졌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하윤이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지금쯤이면 산 하나를 넘었겠지 하면서도 왠지 두려웠습니다. 눈앞에 닭들이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그래서 귀를 틀어막고 눈을 꽉 감았습니다.
첫댓글 타 문학 카페에서 다운 받은 다음 편집해서 올린 글은 조회수가 멋대로 올라가네요.
손때 묻었다고 그런가? 알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