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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뒤 꽃담
꽃담은 순수 우리말로 아름다운 무늬나 그림을 넣어 장식한 담을 말한다. 문헌에는 회면벽(繪面壁), 회벽화장(繪壁華墻), 화문장(華汶墻), 영롱장(玲瓏墻)이라 기록되어 있고 한자어를 차용해서 화담(花墻), 화초담(花草墻), 화문담(花汶墻)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또 다른 우리말로 무늬담, 그림담 이라고도 한다.
화담과 화초담, 화문담이 꽃과 꽃나무, 꽃무늬만으로 장식하여 만든 담을 연상시키고, 그림담과 무늬담은 표현 기법을 한정하여 꽃담의 개념을 폭넓게 담아내지 못한다. 신랑 신부의 첫날밤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꽃잠이라 하듯, 담 중에 무늬나 그림을 넣어 아름답게 장식한 우리의 담을 꽃담이라 부르는 편이 좋을 듯하다.
전국 어디에서나 꽃담을 볼 수 있다. 세련되고 화려하나 야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궁궐의 꽃담이 있고, 담장의 높이와 함께 담장 무늬로 집주인의 인품이 드러나는 사대부집의 꽃담이 있다. 깨진 기와조각을 토담에 박아 넣어 만든 질박한 시골 꽃담이 있으며 기와와 벽돌과 막돌만을 가지고 만들었어도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절집의 꽃담이 있다.
꽃담의 백미로 경복궁 자경전과 교태전의 꽃담을 들지만 빛깔과 무늬 그리고 분위기가 낙선재의 꽃담과 다르다. 꽃으로 치자면 경복궁 꽃담은 장미와 같아서 화려하여 꽃담 일부로도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반면에, 낙선재 꽃담은 안개꽃과 같아서 은은하며 꽃담끼리 혹은 지붕과 굴뚝이 한데 어울릴 때 더욱 아름답다.
▲ 꽃담 일부만 봐도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경복궁 자경전 꽃담
낙선재는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배치되어 있고, 전면과 측면에 행각이 둘러쳐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 건물을 통틀어 낙선재라 한다. 한때 고종의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순종이 나라를 빼앗기고 머물기도 하였지만 본래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의 거처로 지어져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상중(喪中)의 왕후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단청도 하지 않았다.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라 건물의 장식과 후원의 배치가 섬세하다. 낙선재 서쪽에 돌출된 누마루에 있는 둥근 만월창과 석복헌 동쪽과 뒷면의 쪽마루, 쪽마루 난간의 호리병 모양의 조각품은 저절로 눈길이 간다.
▲ 낙선재 누마루의 만월창과 예쁜 굴뚝
낙선재 뒤뜰은 후원의 영역이다. 수강재 뒤뜰 동산에는 동쪽에서부터 취운정, 한정당, 상량정이 서있다.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화계를 쌓고, 담장을 아름답게 둘러서 아늑하게 하였으며 적당한 크기의 괴석과 굴뚝을 배치하여 건물과 담장과 굴뚝이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낙선재는 지금은 창덕궁에 속해 있지만 본래 창경궁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동산에 오르면 창경궁의 모습이 내려다보이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있는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의 지붕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이 아니라면 어디 한적한 곳에 세워진 높은 정자에 오른 기분이 든다.
낙선재 꽃담 여행은 후원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이 시작하는 곳에서 멀찌감치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승화루가 소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고, 오른쪽 옆으로 육각 지붕을 멋있게 이고 있는 상량정이 있다. 꽃담과 어울려 있는 상량정 정경이 창덕궁의 제일경이라 할만큼 예쁘고 아름답다.
▲ 상량정과 꽃담
꽃담은 낙선재 행각을 두르고 언덕을 쉬엄쉬엄 타고 올라 상량정 동산에서 멎는다. 지붕을 뚫고 솟아 있는 몇 개의 굴뚝은 꽃담과 썩 잘 어울린다. 바깥 담의 꽃담이라 품위가 있으면서 절도 있게 보이기 위해 밑 부분은 사고석을 고르게 쌓고, 그 위에 다른 무늬 없이 석쇠무늬(귀갑무늬)로 장식했다.
▲ 절도와 품위가 있는 꽃담
발걸음을 옮기면 장락문(長樂門)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솟을대문이 보이는데 솟을대문 양옆 행랑채의 담 역시 꽃담으로 쌓았다. 밑 부분은 사고석으로 그 위에는 전돌로 쌓았는데 전돌의 두께를 위아래로 달리하여 변화를 주었다. 같은 두께의 전돌을 사용해도 위로 갈수록 가늘게 보이는데 윗 부분의 전돌은 가는 것을 사용해 체감률이 더하도록 하였다.
꽃담은 건물의 벽을 이루는 벽체와 담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낙선재 누마루 밑의 벽체는 눈여겨볼 만하다. 직선과 점선의 무늬도 아니고 육각형이 연이어 있는 석쇠무늬도 아니다. 직선으로 구획하여 사각형, 마름모꼴 등의 무늬를 넣어 기하학적 추상화를 보는 듯 현대적 감각이 돋보인다.
꽃담은 문과 어울릴 때 멋이 더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혹은 후원으로 통하는 샛담에는 일각문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문이 딸려 있다. 낙선재에서 석복헌으로, 석복헌에서 수강재로 넘어가는 곳에도 있고 후원 샛담에도 있다.
이 중에 여성들의 전용 통로였을 법한 좁고 후미진 공간에 있는 석복헌 일각문은 한 쪽 담에 포도무늬와 매화나무를 장식해 놓아 눈길을 끈다. 매화는 지조와 절개를, 포도는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인들이 거주하는 건물 뒤쪽에 주로 그려 넣었는데 경복궁 자경전 담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포도나무는 세 송이의 포도를 매달고 있는데 포도송이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 포도무늬로 장식된 작은 꽃담
한정당과 상량정을 넘나드는 일각문처럼 샛담의 양쪽 무늬를 다르게 하여 변화를 주기도 하였다. 왼쪽은 사고석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전돌로 점선무늬를 놓았고 오른쪽엔 담 높이의 반은 사고석으로 쌓고 그 위의 반은 다시 세로로 반을 나누어 왼쪽엔 석쇠무늬를, 오른쪽에는 점선무늬를 표현하여 단조로움을 피했다.
▲ 일각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 무늬를 달리하여 변화를 준 꽃담
꽃담과 문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 상량정에서 승화루로 통하는 만월문이다. 승화루 쪽 담장 무늬가 더욱 화려하여 볼만하나 만월문이 굳게 닫혀 상량정 쪽에서만 볼 수 있다. 문지방은 화강석으로 쌓고 원은 전돌로 둥글게 쌓았다. 둥그런 문 옆으로 지형의 높낮이에 맞춰 2층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3층의 사고석을 쌓은 뒤 전돌로 점선무늬를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깔끔한 멋이 난다.
▲ 만월문과 꽃담
낙선재 꽃담의 하이라이트는 상량정이 있는 동산과 낙선재 후원을 구분하는 긴 꽃담이다. 이 담이 담고 있는 표정에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직선과 곡선이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고 그 무늬가 끝없이 이어져 끝도 시작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의미를 담고 있다.
▲ 무늬가 끝없이 이어지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꽃담
꽃담은 화계와 굴뚝과 어울려 더욱 운치를 낸다. 낙선재 후원에는 동산의 지세에 따라 화강암을 곱게 다듬어 몇 단의 화계를 쌓고 화계 위에 굴뚝을 세워 놓았다. 우리는 구들이라는 독특한 난방문화를 가지고 있어 한옥에 굴뚝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구조인데, 굴뚝을 보기 싫다고 하여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 놓아 굴뚝을 하나의 장식물로 여겼다.
굴뚝을 만들더라도 주위 환경, 예를 들어 꽃담의 빛깔과 그 무늬를 고려하여 만든다. 굴뚝은 잘 알려진 대로 경복궁의 아미산의 굴뚝과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을 최고라 치는데 그 색깔은 모두 붉은 황토색을 띠고 있어 화려하게 보인다. 이는 꽃담의 전체적인 색깔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낙선재의 굴뚝은 꽃담과 같이 전체적으로 잿빛을 띠고 있는데 빛깔과 무늬가 조화를 이룬다. 경복궁의 꽃담과 굴뚝처럼 붉은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낙선재가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와 같은지 모르겠다.
▲ 후원과 꽃담
집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꽃담의 표정이 다르고 꽃담에 배어 있는 향기가 다르다. 궁궐의 꽃담이라도 경복궁의 꽃담과 낙선재의 꽃담이 다른 이유가 이 때문일 게다.
꽃담에는 표정이 있고 집주인의 향기가 담겨 있다. 항상 좋은 향기를 뿜는 꽃은 쉽게 시들고 그 향기가 오래가지 않지만 꽃담은 사시사철 한 자리에 있으면서 눈이 오면 눈으로 단장을 하고 비가 오면 향과 빛깔의 농도를 짙게 하여 다른 향기를 뿜는다. 게다가 꽃담에는 집주인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어 그 향기가 쉽게 달아나지 않는다. 꽃담은 꽃처럼 아름답게 꾸민 담이지만 꽃보다 아름답다.
흉배에 수놓은 학.
흉배는 조선시대 왕족과 백관의 상복(常服)의 가슴과 등에 부착하는 것으로 문양에 따라 품계를 나타낸다. 특히 왕족이 사용하는 것을 보(補)라 하였다. 흉배는 관복과 같은 색의 비단에 다양한 문양을 수놓기 때문에 장식적인 면과 함께 계급을 구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흉배의 제정은 1446년(세종 28)에 처음으로 논의가 있었고, 1454년(단종 2)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에 흉배를 붙이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1505년(연산군 11)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고, 또한 사용된 문양도 중국 명나라와는 전혀 다른 사슴ㆍ돼지ㆍ거위ㆍ기러기 등을 사용하는 자주성을 보였다. 그러나 1734년(영조 10)에 와서는 문관 당상관은 운학흉배, 당하관은 백학흉배를 사용하게 하였고, 1871년(고종 8)에는 문관 당산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관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는 1910년까지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화면의 쌍호문은 무관 당상관이 착용하였다. 단학흉배는 문관 당하관이 단령에 착용한 것이다.
쌍학흉배[雙鶴胸背]
본문
문관 1품 이하 3품까지의 당상관과 이 품에 해당하는 종친,부마가 사용했다.
경국대전에 상복의 의차는 사(紗), 라(羅), 능(綾), 단(緞)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비단이 귀했으므로 단은 주로 왕실에서 사용되고 조정대신은 사계절 모두 사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흉배만은 조정대신들도 단을 이용하였다.
유물에 의하면 소재는 짙은 청색이 가장 많고, 자주색도 있다. 도안은 쌍학을 중심으로 구름,물결,바위,불로초 등 장생문을 색집사(色絹絲), 금은사(金銀絲)로 정교하게 수놓았다.
쌍호흉배[雙虎胸背]
본문
시대 : 19세기
설명 : 흉배는 관료와 왕 및 왕족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냈던 표장(表章)으로, 조선 왕조 오백 년을 통치했던 권력 집단의 위계를 가르는 표징물로서 사용되었다. 임금은 곧 하늘이고 그가 거느린 신하와 백성은 땅에 비유되었기에 임금과 왕비 및 왕세자의 옷에 붙인 것은 보(補)라 불렀고 모양이 둥글었다. 그리고 보에는 용 문양을 수놓았는데 왕비와 세자빈은 용문과 봉황문을 겸용했다.문무 관원은 품계와 반별에 따라 등차되고 선별된 실제의 조수(鳥獸)가 표장으로 정해졌다.
경국대전이 편찬될 당시 규정을 보면, 문관 1품은 공작, 무관 1품은 호표를 수놓았고, 문관2품은 운안(雲雁), 무관2품은 호표를 수놓고, 문관3품은 백한(白?), 무관 3품은 웅비를 수놓는다고 하였다. 이 쌍호 흉배의 호랑이는 무관의 용맹함을 상징하며, 한 쌍의 호랑이 주위에 장생무늬인 소나무와 구름, 풀 등을 곁들여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오방낭, 진주낭, 귀주머니
실용과 미를 겸한 장신구인 주머니는 형태,장식,용도 등에 따라 명칭이 다릅니다. 형태는 크게 나누어 모난 것(귀주머니 또는 줌치)과 둥근 것(두루주머니 또는 엽낭)이고, 장식에 따라서 금박주머니 수(繡)주머니 등이 있으며, 용도별로는 향낭,약낭,필낭,주저집,안경집,쌈지,도장주머니 등이 있습니다. 왼쪽부터 오방낭 엽낭 귀주머니 진주낭 오방낭(五方囊)은 동,서,남,북, 중앙을 나타내는 5방위를 뜻하며 오행론(五行論)에서 나온 청,홍,백,흑,황색으로 주머니앞뒤를 다섯으로 나누어 수를 놓아 연두,자주,분홍,노랑의 봉술을 한쌍씩 늘어뜨렸습니다. 새해의 첫 번째 돼지날에 재상가의 어린이들에게 액을 면하고 한 해를 잘 지내라는 뜻으로 붉은 종이에 노란 콩 볶은 것을 싸서 이 주머니에 넣어 보냈다고 합니다. 엽낭(葉囊)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지니는 주머니로 입술에 잔주름을 잡고 양편에서 서로 엇바꾸어 끈을 꿴 둥근 모양의 주머니를 말합니다. 도안으로 사용한 봉황낭(鳳凰囊)은 왕비가 대례복인 적의를 착용할 때 사용한 주머니로 검정 공단에 금색 실로 왕비의 상징인 봉황을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으로 수놓았습니다. 주머니의 입은 일반 백성의 세모주름과 달리 육모주름을 잡아 왕실의 권위와 상징을 나타냈습니다. 귀주머니는 꾸밈새에 있어서 남녀용이 같은데 가장 닳기 쉬운 양쪽 귀와 중앙부 아래쪽 배꼽 부분을 감싸듯 한겹 더 대고, 가장자리는 곱게 상침(上針)해 주머니 원형에 부착시켰습니다. 도안으로 사용한 십장생낭(十長生囊)은 매사에 길상(吉祥)을 기원하는 뜻이 담긴 주머니로 조선조 순조의 둘째 따님인 복온 공주가 시집갈 때 만들어 간 수(繡)귀주머니를 복원한 것입니다. 진주낭(眞珠囊)은 왕비,빈,공주의 대례복에 세줄 노리개와 더불어 장신구로 겉치마에 달았습니다. 녹두알 만한 진주를 박고 금실로 수놓아 다홍 바탕에 알알이 진주가 반짝이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속에는 잘게 다진 향과 고운 가루향이 가득 들어 있어 옛 여인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알 수 있습니다. 우표에 실린 진주낭은 대한제국 순종 왕후 윤비의 것으로 가례 때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예물이라고 합니다.
창덕궁 불로문(不老門)
창덕궁 불로문(不老門)은 금마문(金馬門) 옆 담장의 중간, 기오헌(寄傲軒) 아래턱에 위치한 돌문이며 쇠못을 박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문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지에 의하면 불로문 앞에 불로지(不老池)가 있었고 불로문 안에 어수당(魚水堂)이 있었다고 한다.효종이 봉림대군 시절에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겪은 치욕을 씻고자 불로문 안 어수당으로 송시열을 자주 불러 극비리에 북벌계획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고 영조, 정조, 순조는 신하들과 정사를 논했을 뿐 아니라 유생들에게 여기서 시험을 치루기도 했다. ‘불로(不老)’는 ‘늙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불로문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늙지 않고 오래도록 살라는 축원을 담았으며 조선 국왕의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염원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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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일주문
경상남도 3대 절 중 하나로 유명한 범어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일본인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의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싸우기도 했던 곳 가운데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일주문은 절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를 구분짓는 경계 구실을 한다. 이 건물을 세운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조선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절내 여러 건물을 고쳐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 5년(1781)에 백암선사가 현재의 건물로 보수했다. 앞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창덕궁주합루 어수문
어수문(魚水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담고 있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회마을 솟을대문
충효당(忠孝堂)은 보물 제414호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생가이다. 조선 중기에 지은 단층 기와지붕으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다. 규모는 총 52칸이다. 행랑채에 달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대청 앞에 마주서게 되며 이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대청 정면과 측면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가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일을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구절판 : 아홉 칸으로 나누어진 그릇 또는 여기에 담는 음식.
예로부터 밀전병·칼국수·수제비·상화병(霜花餠) 등 밀가루 음식은 초여름에 많이 먹는 시절식(時節食)으로 여겼는데, 구절판도 이것의 일종이다. 옛 선조들은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산과 들로 화전놀이(꽃놀이)를 갔는데 이때 구절판은 행찬(行饌:나들이 음식)으로 으뜸이었다. 구절판은 보통 목기(木器)로 만들며 겉면에 자개를 박아 호화롭게 칠기를 입혀 만들기도 한다. 음식 재료도 다양하여 동·식물성이 함께 옆옆이 담아져 선택의 폭이 넓기 때문에 귀한 손님 접대에 쓰인다. 밥상보다는 주안상에 어울린다. 채썬 것이 주종을 이루며, 바깥쪽 여덟 칸에는 곱게 채 썬 그대로, 또는 볶아서 익힌 쇠고기, 표고버섯, 호박, 당근, 죽순, 석이버섯, 달걀 흰자, 달걀 노른자, 달걀 검은자(흰자에 석이버섯을 섞은 것) 등을 색 맞추어 돌려 담고 가운데 칸에는 매우 얇게 부쳐낸 전병을 담는다. 먹을 때에는 접시에 밀전병 한 장을 놓고 여러 음식을 조금씩 담아 위에 겨자장이나 초장을 넣어 싸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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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적 (생선적)
화양적 설날의 전유어는 육류, 어패류, 채소류 등 여러 재료를 이용하여 많이 준비했다가 세배손님을 받을 때마다 상차림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고기전으로 완자, 살코기, 간, 처녑이 많이 쓰이고 생선전(◆)은 제철의 대구, 굴 등이 이용되며 채소류전은 빈대떡, 화양적(◆), 누름적, 김치적 등이 쓰인다.
비빔밥
비빔밥은 밥에다 고기볶음, 나물, 튀각 등 여러 가지 반찬을 섞어 비벼먹는 음식이다. 문헌에는 1800년대 말엽에 나오지만 그 이전부터 먹었던 음식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에게는 제사를 지낸 다음에 음복이라 하여 제사의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다. 마을에서 지내는 동제나 산신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산신제나 동제는 집에서 먼 곳에서 지내므로 식기를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그러니 그릇 하나에 이것저것 제사를 지낸 제물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 그러한 제물을 한데 섞어 비벼 먹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 집에서는 음복례를 지내고 젯메와 제상에 올린 적, 숙채, 간납 등을 넣고 밥을 비벼서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다. 전주비빔밥과 더불어 진주비빔밥이 유명한데 진주에서는 이 비빔밥을 헛제사밥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밤중에 음식을 파는 집을 헛제삿집이라고 한다. 밤참을 먹는 것이 마치 제례 후에 음복을 하고 종부가 비벼주는 밥을 먹는듯하다는 뜻에서 그런 명칭이 붙은 것이다.
신선로
신선로는 열구자탕을 끓이는 조리용구이다. 그릇 복판에 숯불을 피우고 둘레에 여러가지 재료를 넣어 끓이면서 먹을 수 있도록되어 있다. 이 신선로를 처음 만든 사람은 조선 연산군때 인물인 정희량이라고 한다
판소리
판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꾼(唱者)이 고수(鼓手)의 북 반주에 맞춰 극적(劇的)으로 구성된 긴 이야기를 '소리'(歌)와 '아니리'(말)와 '발림'(몸짓)을 통해 전달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공연예술이다.
'판'의 용어는 세 가지로 해석되는데, 첫째는 굿판· 춤판· 씨름판과 같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자리(局面), 둘째는 씨름 한판·바둑 한판과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완결(完結)의 의미, 셋째는 판춤· 판굿· 판염불· 판소고와 같이 전문예능인들이 벌이는 전문적(專門的)인 예능(藝能)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소리'는 판소리·민요·잡가처럼 민간에서 불리는 성악곡을 부르던 일반적인 명칭이다. 이야기로써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으로 짜여 있는 '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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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장구는, 허리가 잘록하여 ‘요고(腰鼓, waist-drum)’ 또는 ‘세요고(細腰鼓)’라고 불리던 고대의 장구형 타악기에서 변형된 악기이다. 요고 종류의 악기는 인도에서부터 일본에 이르는 여러 아시아 국가에 분포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가 요고를 수용해 연주에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이전의 미술자료에서 보이는 요고는 채를 사용하지 않고 양면을 모두 손바닥으로 연주하고 있어, 한 손에 채를 쥐고 연주하거나, 또는 열채와 궁굴채로 장구의 양면을 치는 현재의 장구와는 다른 모습이다
꽹과리
꽹과리는 농악이나 무속 음악 등에서 다양한 장단의 음악을 주도하는 금속 타악기이다. 꽹과리는 ‘꽹매기’, ‘깽매기’, ‘쇠’, ‘광쇠’, ‘꽝쇠’, ‘깽쇠’, ‘소금’, ‘소쟁’등의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 이름들은 모두 소리를 내는 작은 쇠라는 뜻으로 사용된 이름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금’이나 ‘소쟁’이라는 명칭은 꽹과리와 여러 모로 닮은 악기인 징을 ‘대금’, 또는 ‘대쟁’이라는 명칭으로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 몇 십년 전만 해도 꽹과리는 우리의 서민 생활 한가운데에 있었다. 정월의 동제(冬祭)와 절기마다 돌아오는 축제, 농사철의 두레마당 등에서 꽹과리는 언제나 농악대의 선두에 섰고, 전문적으로 판놀음을 벌이며 공연을 했던 놀이패들도 꽹과리 소리를 앞세워 다녔다. 날카롭고 야무진 소리를 내는 꽹과리는 농악대를 이끄는 수장 노릇을 한다. 농악대의 꽹과리는 잽이의 역할에 따라 상쇠와 부쇠, 종쇠로 구분하며, 음양(陰陽)의 조화를 고려해 음색이 부드럽고 낮은 암꽹과리와 음색이 강하고 높은 수꽹과리로 차이를 둔다. 이 중에서 상쇠는 수꽹과리를 치며, 상쇠의 꽹과리 소리는 농악대원들에게 가락의 변화와 진을 짜나가는 방향과 순서, 그리고 개인의 기량을 펼치는 구정 놀이의 차례를 지정해 준다. 또한 오늘날 사물놀이는 농악을 작은 규모로 편성하고 무대화하여 앉은 반으로 편성한 것이다. 여기에 대표적인 악기로서 꽹과리는 장구ㆍ북ㆍ징과 함께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리듬 변화를 주도하는 악기로 더욱 유명하다. 꽹과리는 무속 음악에서도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평안도ㆍ황해도 등의 북한 지역과 경상도 동부 그리고 제주도 지역의 무속 음악이 바로 그것인데, 이 중에서도 동해안 지역의 무속 음악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용고(龍鼓)
용고(龍鼓)는 대취타(大吹打)를 연주할 때 허리에 매고 치는 북이다. 북 모양이나 북통의 용무늬 장식 등이 다른 교방고(敎坊鼓)와 좌고(座鼓), 중고(中鼓)와 거의 비슷하지만 이들 중 가장 작다. 용고라는 북 이름은 북통에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용고를 제외하고도 용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북들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행악 연주에 쓰는 북이라는 뜻으로 고려 시대 이래로 사용되어 온 ‘행고(行鼓)’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다고 보는 견해 있는데, 실제로 행악의 북 관련 기록이 있는 서긍의『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용고가 아닌 행고라는 명칭으로 쓰였던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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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돌또기
오돌또기는 제주도 민요로, 무형문화제 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돌또기가 언제부터 불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대략 1890년을 전후해서 부르게 된 가장 오래된 민요 중의 하나이다. "오돌또기"의 근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제주지역에서 자생하여 육지로 들어갔다는 설, 혹은 육지의 민요가 이입되었다는 설, 여기 실린 설화처럼 김복수의 전설에 따른 안남국의 음악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아직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둥그데당실'로 시작되는 후렴구는 완전히 제주도 민요의 대표적인 토리가 되었다. 제주도에는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요는 발달했지만, 춤을 추거나 놀면서 부르는 창민요는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창민요는 옛 관청이 있던 지역이나 포구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런 창민요들은 음악적으로 노동요와는 다른 노래들이다. 여기 실린 "오돌또기"도 창민요로서 굿거리장단에 그 형식이 세련되어 있어 제주의 노동요들과는 다르다. 이 설화에서는 김복수라는 사람이 안남국에 표류해 갔다가, 유구해서 표류해 온 임춘향이라는 여성을 만나 헤어진 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라고 한다. 제주도 사람들이 유구나 안남 등으로 표류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유구에서 표류해 온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도 가능한 이야기다. 어찌 되었든 이런 애틋한 사연이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라 그런지 이 노래는 제주 전역에 퍼져서 가장 널리 불려지는 창민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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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해당 우표도 함께 소개해 주시면 큰 도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