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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장
1 그후 그들은 바다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렀더라.
2 주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곧 더러운 영을 지닌 어떤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주를 만나더라.
3 그는 무덤 사이에 거처를 둔 자인데, 아무도 그를 묶어둘 수가 없고, 심지어 쇠사슬로도 묶을 수가 없더라.
4 그가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였었으나, 쇠사슬을 잡아 끊고, 또 족쇄를 산산이 부수어 아무도 그를 다루지 못하더라.
5 또 밤낮 산에서나 무덤에서 늘 울부짖으며 돌로 자기 몸을 상처내고 있더라.
5:1이 열리자마자 성경 개정자들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보다시피 마 8:28은 "겔게사인들의 지방"이라 되어 있으나 본문 막 5:1은 "가다라인들의 지방"이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이며 마태복음은 그것을 베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추측에 맞춰 그 개정자들은 본문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마 8:28의 "겔게사"를 "가다라"로 변개시켰다(RV, ASV, RSV, NASV, NIV, ESV 등).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다른 이유로 막 5:1 본문의 "가다라"를 "거라사"(겔게사를 현대적으로 개정한 표현)로 바꿔 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여러분이 의문의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권위를 두신 헬라어 본문(수용원문)과 영어 본문(권위역본)은 그 난장판 가운데 버티고 있다.
알다시피 문제는 본문에 있지 않다. 다수 사본들은 TR과 AV 본문을 지지하고 있다. 성령께서 여러 세대에 걸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영예를 주신 성경 본문 대신 새로운 것에 대해 점수를 주는 학자들의 제한된 지성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행 17:21). 학자들이 "원문"이나 "더 오래되고 더 우수한 사본들"을 찾아다니는 대신 자기들의 성경을 공부했더라면 성경에 나오는 성읍이 하나 이상의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음을 알았을 것이다(이를테면 재판관기 1:11의 드빌이라는 성읍의 경우). 겔게사와 가다라는 갈릴리 바다 동편에 위치한 동일 지역에 대한 두 가지 명칭이며 이것에 대해 성경의 모순은 없기에 본문을 고치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신자들과 배교자들은 1절에서만 흠을 잡는 게 아니라 2절에서도 그렇게 하는데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 독자들이 자기들의 성경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여기는 그 믿음을 흔들고 싶어한다. 예수께서 두 명의 마귀들린 남자들을 만나셨는가(마 8:28) 아니면 한 명을 만나셨는가(막 5:2)? 만일 예수께서 두 명의 남자를 만나셨다면 두말하면 잔소리로 그는 여기서 그 둘 중 하나를 만나고 계신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모순을 찾기 위해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린다 해도 진실은 그것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치유하신 사람들의 숫자를 정확히 제시했고(마 8:28이 그렇고 마 20:30에서 소경들의 숫자가 그렇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들 중 특정인을 다루시는 장면에 촛점을 맞춰 설명하고 있다(5:2, 10:46). 이런 것들을 생각해내기 어렵다 해도 최소한 여러분이 자기 게으름과 어리석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이거나 혹은 여러분이 마음이 완전히 뒤틀려있는 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없다고 생각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여러분이 읽는 본문은 마귀들림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담고 있다. 3-5절에서 마귀들림의 특성에 주목하라:
1) 마귀들린 사람은 시체들 사이에 있기를 좋아한다(3절). 그 남자는 "무덤 사이에 거처를 둔 자"였다: 그는 묘지 가운데 거처를 잡고 살았다.
나는 절대 그렇게 해보고 싶지 않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나는 흑인 남자와 마찬가지인데 항간의 농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밤중에 묘지를 지나가던 흑인 젊은이가 있었는데 유령이 그를 쫓아오는 것이었다. 유령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청년은 도망치다가 넘어져서 무릎과 팔꿈치가 까졌다. 그는 일어서서 다시 조금 더 뛰다가 묘석에 정강이를 세게 들이받았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 묘지 담장에 도달했고 만신창이가 되면서 담장 가시 철망을 넘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한 이웃 사람이 그가 상처입고 피투성이 엉망이 된 모습으로 집에 도착한 것을 보았고 이웃이 그에게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라고 묻자 흑인 청년이 대답했다. "유령이 저를 밤새 쫓아다녔어요." "유령이 너를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구나." 이웃이 말했다. "나도 알아요." 그 깜둥이(darkie)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네 스스로 다치게 만들었구나."
한 유령이 묘지에서 밤새 흑인 소년을 쫓아다녔다. 2마일 쯤 추격이 이어진 후에 소년은 나무에 기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유령이 소년을 따라잡고 숨을 헐떡이면서 그 옆에 털썩 앉았다. "꼬마야, 우리 참 멀리도 달렸구나" 유령이 말했다. "네" 소년이 답했다. "내가 한숨 돌리면 다시 시작하죠."
이런 이야기들이 웃기게 보일지라도 여러분이 실제 무덤들 사이에 사는 사람을 만난다면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오래 전 현재의 펜사콜라 성경침례교회 아래 도로변에 위치한 휘트마이어 묘지에 누군가 침입했었다. 그자는 매장된지 얼마 안된 열두살 소녀의 시신을 파내어 사체를 훼손했다. 위스콘신 출신의 에드 게인은 1947년에서 1952년 사이 시체들을 발굴해서 여성들의 얼굴 가죽을 포함한 피부와 뼈들을 재료로 뭔가를 만들어냈다.
성경은 "그분[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니라"(12:27)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천사들이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너희는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 여러분이 죽은 신 대신 "살아 계신 하나님"(딤전 4:10)을 원한다면 마호메트에게서 답을 찾지 말라. 그는 죽어서 메디나에 묻혀 있다. 부처에게도 가지 말라. 그 부처교도들은 매년 부처의 뼛조각을 앞세워 행진하는 의식을 갖고 또 그 뼈들을 각처의 사원에 모셔둔다. 레닌에게도 가지 말라. 그의 시체는 미이라가 되어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관광객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교황들의 시체 역시 이하동문이다. 그들 모두는 죽은 신들이다. 나의 구주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 계시지 않는데 그 분의 무덤은 비어 있다.
2) 초자연적인 힘(4절). 그 남자는 자신을 묶어둔 사슬과 족쇄를 부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종종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면서 괴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음을 안다. 가끔 여러분은 신문에서 부모가 차에 깔린 아이를 구하려고 자동차를 들어올렸다는 이야기를 볼 것이다. 본문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비정상적 힘을 내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본문과 보다 흡사한 상황은 "합성 헤로인"(PCP)에 중독된 십대 아이들의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런 약물에 취한 청소년 한 명은 열 명의 성인 남성이 덮쳐도 제압하기 힘들다. 성경에는 마술과 마약 사용이 연계되었다는 근거 구절들이 있고, 마약 중독은 마귀들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인간의 신체가 약물에 반응한 물리적 효과이지 마귀들림과는 구별된다.
정신병동에 갇힌 환자들은 종종 괴력을 발휘할 때가 있다. 3:21-22에서 주석했던 대로 정신병 중 일부는 마귀들에 의해 유발되는데, 그렇다고 모든 정신병이 마귀들림은 아니다.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막 9장을 주석할 때 하겠고 여기서는 이만 줄이겠다.
여러분이 본문에서 보는 초자연적 힘은 영적인 경로로 들어온 힘이다.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작은 모세." 작은 모세는 루이스 모세라는 이름의 유대인이었는데 그는 데이토나 해변에 살았다. 그는 자신을 지면에서 들어올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든 5천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공개 도전을 상시 해 놓았다. 보디 빌더인 찰스 아틀라스, 헤비급 프로 권투선수 토니 갈렌토 같은 이들이 도전했지만 그들은 그를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해변 판잣길에서나 모래사장에서 시험해 보았지만 다 실패했다. 작은 모세는 동양 무술에서 말하는 "기"라는 것을 사용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기"란 신체에서 발원하는 에너지를 말한다. 무술에서는 수련자가 기를 집중해서 자기 몸을 땅에 뿌리내린 식물처럼 땅과 일체가 되게 하는 법을 학습한다. 작은 모세가 쓴 방법이 그것이었고 그 보디빌더들과 권투선수들이 그를 거의 들어올릴 뻔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런 일에는 모종의 영적 존재가 개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눅 8:27의 경우처럼 마귀들림은 벌거벗음을 수반한다. 창 3장에서 인류의 첫째 조상들이 범죄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처음 하신 일은 그들에게 옷을 입히시는 것이었다(창 3:21). 여러분은 벌거벗고 다니는 것이 수치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창 3:7-10). 나체로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걷지 않고 뛰는 이유가 이것이다. "바바리맨"이 뛰어서 도망가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들은 선과 악을 알기에 자기들의 육신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안다.
육신을 드러내려는 욕구는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옷을 벗는 것은 술취함과 유관하고(합 2:15) 우상 숭배(출 32:25)와 성적 문란과도 상관이 있다(레 18, 20장).
4) 초자연적 반응(3-4절). 그 마귀들린 자는 사슬로 묶어둘 수도, 순화시킬 수도 없었다. 사랑, 친절, 온유한 태도로 그를 바로잡을 수 없었고 사슬과 징벌로도 불가능했다. 그는 당근과 채찍 어느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귀들린 사람들은 외부 자극에 올바로 반응하지 않는다. 밥 존스 1세는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할때 그의 반응들을 보면 된다고 했다. 반응을 흉내낼 수는 있으나 계속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나는 내 앞의 청중이 "삭풍 앞에 움츠린 것 같은" 자세인지 긴장이 이완되어 있는지 언제든 구별할 수 있다. 사람들이 긴장이 풀리면 그들은 여러분의 농담을 듣고 웃고 여러분이 슬픈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훌쩍이거나 운다. 여러분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오싹해한다. 이는 그들의 외면과 내면이 괴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 앞의 사람들이 자기 의도를 숨긴 연극 배우 같은 자들이라면 그들은 속으로 여러 궁리를 하기 때문에 자극에 신속히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마귀들린 사람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마귀들린 사람에게 웃긴 이야기를 해도 그를 전혀 웃게 할 수 없다. 여러분이 슬픈 이야기를 해도 마찬가지이다. 무서운 이야기를 해도 무반응이다.
과거에 내가 브렌트 침례교회에서 목회할 때 설교 시간마다 내내 이상한 표정을 한 채로 머리카락 한 올을 계속 만지작대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행동과 표정은 내가 슬픈 얘기, 무서운 얘기, 심각한 얘기를 해도 전혀 변동이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그녀는 수동적인 상태에 있었고 그것은 마귀들림의 증상이다.
나는 여러분이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마귀들림 증상을 보이는 사람과 대화해 본 적이 있다. 그는 극단적 칼빈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있는 자였다. 나는 그가 대화하는 중 계속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데 그는 또한 단조로운 톤으로 일관하여 말을 했고 그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런 태도였다. 마귀들림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부분은 그 마귀들린 사람의 눈과 음성이다. 이는 "몸의 빛은 눈이라"(마 6:22; 눅 11:34),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마 12:34; 눅 6:45). 여기 막 5장에서 마귀들린 남자는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며"(7절) 다녔다. 비슷한 현상을 행 16:17-18에서 보라.
나는 교리적으로 혼돈에 빠져 있는 크리스찬들의 경우 그들이 화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는 "한몸된 교회"(the church of the oneBody)에 대해 이야기한다(그들은 두 단어를 항상 붙여서 말한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한 몸을 이룬 교회라는 말인가? 그것은 성경에 나온 표현도 아니다. 성경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2-23), 그리고 엡 4:4의 "한 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에는 "한 몸 된 교회"(church OF the one Body)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상식 밖의 말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그 몸은 오직 하나이다. 세상에 만 개의 "그리스도의 몸들"이 존재할 수는 없기에 침례교 신부주의자인 노엘 스미스의 가르침(모든 지역 교회가 개별적인 "그리스도의 몸"이라 주장하는)은 어불성설이다.
어떤 옛날 성결교 설교자가 설교하면서 몇마디 말할 때마다 "어"라는 소리를 집어넣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 어! -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 어! - 하나님께서 그에게 십계명을 주셨는데 - 어!" 은사주의자들은 "성령(HolyGhost)침례"를 말하는데 그들은 Holy와 Ghost를 띄어서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는 어떤 캠벨파 설교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뱁타이즈(baptize)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항상 첫째 음절에 강조를 두어 "법타이즈"(BUPtize)라고 말한다. 그들 안에 같은 악령이 들어있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을 알라,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모든 설교자들이 똑같은 타입으로 설교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똑같은 억양으로 설교하게 시키지도 않으신다. 성경 기자들은 각자 고유의 서술 방식이 있었고 성령께서는 그들의 방식을 획일화시키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가진 개성을 들어 쓰신다. 주께서는 크리스찬 학교들이 학생들을 교육하는 식으로 주의 자녀들을 볼로냐 소세지마냥 틀에 찍어내지 않으신다. 성경은 거친 개인주의(rugged individualism)를 창출하는데 여러분이 어떤 학교나 교파가 거기 소속된 사람들을 복사판처럼 획일화시키는 것을 보거든 그 일이 성령보다는 다른 영에 의해 주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5) 악한 짓을 지속적으로 하는 행태가 마귀들린 사람의 특성이다(5절). 태생적으로 아담의 성품은 죄를 짓기에 적합한 어두움을 더 선호하지만(요 3:19) 이 마귀들린 남자는 "밤낮" 그러했다. 어떤 죄인이 단지 특정 죄에 빠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죄를 공공연히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을 보거든 그것은 정상인의 행태가 아니며 영적인 존재가 개입한 것임을 알라.
6) 높은 장소를 배회하는 것은 마귀들림의 현상 중 하나이다: "산에서나"(5절). 왜 그런 것인가? 그 자들 안에 있는 악령이 그들의 창조주를 흉내내기 때문이다 - 사 14:13. 구약 시대에 배교한 유대인들은 "산당들"(대하 11:15)에서 마귀들에게 희생제를 드렸다.
7) 괴성을 지르는 것은 마귀들림의 한 증상이다(5절). 이교도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들에게 "소망이 없는"(살전 4:13)고로 계속해서 흐느끼고 울부짖곤 한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우상숭배를 할때 "탐무즈를 위하여 울며"(겔 8:14) 앉아 있었는데 탐무즈는 하지에 죽었다가 동지(크리스마스!)에 부활하는 이교의 태양신이다. 그것은 마귀숭배였다(고전 10:20).
8) 자해를 통해 속죄하려 하는 것은 마귀들림의 증상이다(5절): "돌로 자기 몸을 상처내고 있더라." 갈멜 산에 모인 그 바알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칼과 단창들로 몸에 상처를 내되, 피가 흐를 때까지 하더라"(왕상 18:28). 그들의 종교 의식에는 자해행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이와 유사한 행위를 찾으려면 필리핀에서 이스터 무렵에 카톨릭 교도들이 속죄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짓을 하는 경우를 보면 된다. 스페인에서는 카톨릭 교도들이 삼베자루 옷을 걸치고 돌길을 무릎으로 기어가면서 스스로 채찍질을 해댄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니며 마귀들의 교회이다(계 17-18장).
죄인의 피는 선한 피가 아니기에 여러분이 자기 피를 흘린다고 해서 죄값을 치를 수는 없다. 오직 순결한 피만이 죄를 제거할 수 있다(히 9-10장). 여러분의 피는 창 3장에서 더럽혀졌기에 그 이전 상태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여러분이 자기 몸의 피를 다 쏟는다 해도 속죄는 되지 않는다. 여러분에게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가 필요하다.
여러분은 이 남자의 행동이 마귀의 사디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말은, 이 남자 안의 마귀들이 그를 충동해서 자해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마귀들은 이 남자의 고통으로 인해 즐거워한 것인데 그것이 사디즘이다. 마귀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 아는가?
겔 32장으로 가 보면 파라오가 사탄의 모형으로 등장하는데 사탄은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는 자기가 파멸시킨 사람들과 함께 거기 살게 된다.
겔 32:31은 이렇게 말씀한다: "파라오가 그들을 보고 그의 모든 무리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으리니."
마귀가 끝없이 깊은 구렁에 사슬로 묶인 다음 그는 자기로 인해 그곳에 따라온 수많은 인간들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비록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지만 너, 너, 너, 너를 보니 기분이 좋구나." 사탄은 자기가 파멸시킨 사람들 가운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잃어버린 죄인이여, 당신이 결국 지옥에 간다면 당신은 오직 한 존재, 곧 마귀에게만 축복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분위기를 원한다면 천국에 가고 친구를 원한다면 지옥에 가라"고 한다. 지옥에는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아두라! 여러분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정신이상자와 영원을 같이 보낸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친구를 원한다면 갖게 될 것이다; "나를 용서해 주게"(예. 눅 14:18-19).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마귀들림의 증상 가운데 몇 가지를 더 언급하자면 이렇다:
9) 덥고 습한 장소들을 선호하는 경향. 마 17:14의 마귀들린 아이는 "종종 불 속에도 넘어지고 여러 번 물 속에도 빠졌"었다. 밥 존스 대학의 스튜어트 커스터가 말하는 럭크만의 "이상한 교리들"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커스터가 성경적 논거를 통해 나의 "가장 이상한" 해석들을 반박한 적이 있는가? 전혀 없다! 그는 "지리적 위치와 환경에 상관없이 마귀는 미혹할 수 있다"라던지 "사탄의 졸개들은 신자가 언제 어디에 있던지 공격할 수 있다"(스튜어트 커스터, 킹제임스 성경 논쟁의 진실, 밥 존스 대학 출판부, 1981, pg. 32) 같은 일련의 경건한 헛소리들을 늘어놓는데 그것은 내 말과는 무관한 설명들이다. 그가 자신의 "증거 본문"으로 무엇을 제시했는지 아는가? 그는 어떤 역본의 어떤 구절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진지한 성경 연구"라 부를 수 있겠는가?
나를 속여볼 생각은 하지 말라 "애송이 스튜어트." 나는 필리핀 마닐라에 체류했던 적이 있는데 그곳은 덥고 습한 지역이고, 또 나는 하와이 호놀룰루에도 있어 보았는데 그곳 역시 덥고 습하다. 나는 뉴올리언스, 키웨스트에도 있었는데 그곳들도 모두 덥고 습한 곳이다. 나는 상선을 타는 선원들과 대화해 보았는데 그들은 지구상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부패한 도시가 이집트 카이로(덥고 습한 장소)라고 말했다. 그보다 기온이 좀더 낮은 위도상에 있다 해도 일반적으로 항구 도시들은 내륙 도시들보다 비도덕적이다. 이 문제의 논점은 마귀들이 앨라배마의 프랫빌, 플로리다의 홀트, 몬타나의 미줄라, 또는 테네시의 콜롬비아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마귀가 어떤 곳들에서 더 왕성하게 활동하는가 하는 것이다.
본문 막 5장에서 마귀들이 그 남자를 떠나서 돼지떼에게로 들어갔을 때 그 돼지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아는가? 13절 - "바다에 빠져 죽더라". 이는 바다가 따뜻하고(화씨 98.6도) 습하기(75%가 수분) 때문이다. 바다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물 없는 곳"(마 12:43; 눅 11:24)을 헤매고 다녀야 했을 것이다. 마귀들이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아는가? 불못이다.
10) 바울에 따르면 강제된 독신 생활과 육식을 금하는 것은 마귀들림과 상관이 있다(딤전 4:1-3). 여러분은 성직자에게 독신을 강요하고 사순절(혹은 금요일이나 다른 어떤 날) 중에 고기를 먹는 것은 죄짓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어디인지 아는가? 그 교회는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실행하는 곳인데 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니며 그들은 크리스찬들에게 정통 교리를 가르칠 "최고 교도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그 교회는 어찌나 마귀적인지 그 신도들에게 흡혈과 식인의 교리를 가르치고 하늘나라에 가려면 여자 마귀에게 기도하라고 시킨다.
이제 의문이 하나 생기는데 그것은 크리스찬도 마귀가 들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평균적인 은사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할텐데 그들이 증거 구절로 제시하는 본문은 요일 4:4이다.
"어린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겼으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
물론 이 구절은 크리스찬이 마귀들릴 수 있는가의 주제를 다루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그 자들이 이 구절을 추론의 근거로 삼는 논리는 성령께서 악령과 한 그릇 안에 계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죄악에서 떠나" "귀한 그릇"(딤후 2:19-21)이 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 크리스찬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는 명령을 어기면 그는 "마귀의 정죄함에로 빠질"(딤전 3:6) 수 있으며 "마귀의 올무에 빠지"(딤전 3:7)는 경우도 생긴다. 그는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신은 멸망케"(고전 5:5) 될 수도 있다. 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 사탄보다 크신 것은 맞지만, 여러분이 자기 지체를 주께 맡겨 복종시키지 않고(롬 6:13) 죄의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는다면(롬 8:13; 골 3:5), 또 "성령 안에서 행하라"(갈 5:16-25)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언제든 마귀들릴 수 있다. 크리스찬은 "성령으로 충만"(엡 5:18)할 수 있는가 하면 사탄으로 가득찰(행 5:3) 수도 있다.
형제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마귀가 여러분의 혼을 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 가기 전까지 사탄은 여러분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 사탄은 여러분의 눈, 손, 귀, 다리, 두뇌, 간, 신장, 심장 등을 칠 수 있다(고전 5:5). 그는 여러분의 사역을 망가뜨릴 수 있으며(데마 - 딤후 4:10) 여러분의 간증(롯 - 벧후 2:7-8), 기쁨(다윗 - 시 51:12), 신앙 고백(베드로 - 눅 22:31-32), 돈과 소유물(욥 - 욥기 1장), 천상의 상급들(요한2서 8절), 천년왕국의 유업(고전 6:9-10; 갈 5:19-20), 가족(사무엘 - 삼상 8:1-3), 건강(고전 11:30), 그리고 여러분의 육신적 생명(롬 8:13; 요일 5:16)까지 상실케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마귀가 여러분을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마귀가 여러분에게서 이 모든 것들을 취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이 마귀적 강박증인지 마귀에 억압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경배하고,
7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며 말씀드리기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가 하나님을 두고 당신께 간청하오니 나를 괴롭히지 마소서.”라고 하니,
8 이는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라.
9 주께서 그에게 묻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시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이름은 군단이오니, 이는 우리가 많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
10 또 그가 주께 간절히 청하기를 자기들을 이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
11 그때 저쪽 산 근처에서 큰 돼지떼가 먹고 있었는데,
12 모든 마귀들이 주께 간구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 주소서. 그러면 우리가 그들에게로 들어가겠나이다.”라고 하더라.
13 예수께서 즉시 그들에게 허락하시니, 그 더러운 영들이 나와서 돼지들에게 들어가더라. 그러자 그 돼지떼가 산비탈을 거세게 달려 내려가 바다로 들어가서, (그 수는 약 이천 마리나 되더라.) 바다에 빠져 죽더라.
마귀들린 사람들의 성향이 종교적이라는 데 주목하라(1:24 주석을 보라). 이 마귀들린 남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주께 경배했다(6절). 여러분이 이 장면에서 유추 가능한 것은 단지 입술로만 고백하는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 이상이다.
"내가 하나님을 두고 당신께 간청하오니 나를 괴롭히지 마소서"(7절).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인데 특히 십대 청소년들이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이 그들의 "재밋거리"를 망쳐놓는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려고 오셨던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고 또 구원하려는"(눅 19:10) 목적으로 오셨다. 주께서는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요 10:10)는 목적으로 오셨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나면 삶이 망가지거나 피폐해지는 게 아니라 풍성한 생명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이다.
나는 구원받기 전에 내가 살았던 그 삶을 여러분에게 내세우고 싶지 않다. 여러분이 어린 나이에 구원을 받았기에 내가 구원받기 전에 행했던 것과 같은 많은 마귀 짓들을 할 기회가 여러분에게 없었다면 그것은 축복받은 경우이다. 그럼에도 마귀같이 살다가 나이를 한참 먹은 후에 구원받은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는 여러분이 갖지 못한 장점이 하나 있다. 여러분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없는 많은 장점들을 가졌지만 우리는 특별한 장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죄악의 쾌락을 따라가는 삶과 풍성한 생명으로 가득찬 삶을 구별할 줄 안다. 구원받은 후의 내 삶은 "하나님도 없었"(엡 2:12)고 희망도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였던 나, 잃어버린, 저주받은 죄인이었던 27년 동안의 그 삶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어떤 설교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매우 빈궁한 과부가 다녔는데 그녀는 집세를 낼 돈도 없었다. 교회의 어떤 성도가 그 딱한 사정을 듣고 그녀에게 상당한 액수의 후원금을 목사를 통해 전달해 달라고 했고 목사는 그것을 전달하러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설교자가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반응이 없자 그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고, 그럼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는 할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다음 번에 그가 교회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다가가서 말했다. "제가 그 날 자매님 집을 찾아갔는데 집에 안 계시더군요." "아 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집에 있었어요." "그러면 왜 제가 노크하고 벨을 눌렀는데도 대답하지 않으셨나요?" 설교자가 물었다. "목사님인줄 몰랐네요." 과부가 말했다. "집주인이 세를 받으러 온 줄 알았네요. 제가 집세를 낼 돈이 없어서 문을 열지 않았답니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마음 문 앞에 서서 그가 주님을 초청하기를 기다리시는데 죄인은 주께서 그를 괴롭히러 오신 것으로 오인한다. "내가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실 거에요. '너는 이것 하지 마, 저것 하지 마. 그런 것들은 다 버려야 돼' 같은 식으로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해가 될 일을 하실 계획이 없으시다. 주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교제하고 여러분에게 뭔가 가치있는 것을 주려고 오신 것이다.
여기서 또 주목할 점은 1:24, 4:4, 15의 경우처럼 "더러운 영"이 단수로 지칭됨에도 "많기 때문"이라고 복수로서 응답하고 있다는 것이다(9절). 본문의 "많은" 악령들은 "군단"을 이룰 정도로 많다. 군단은 로마 군대의 편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로마 군단은 6,000명의 병사로 구성되는데 규모가 적은 군단의 경우 3,000명도 가능하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아주 많은 개체들이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이번 경우에는 약 2천 마리의 마귀가 두 남자에게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그 두 남자로부터 쫓겨난 마귀들이 몇 마리의 돼지들에게 들어갔는지 보라). 마귀들이 왜 남자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천사들과는 달리 새들과 작은 날벌레들처럼 묘사되는지 그 이유가 여기 있다(비엘세붑을 다룬 3:22 주석을 보라).
10절에서 마귀들은 그리스도께 "자기들을 이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 그렇게 요청한 첫번째 이유는 쫓겨난 거처로 다시 돌아갈 기회를 찾고자 함이었다(마 12:43-45). 자기 개혁과 구원은 다르다. 죄인이 담배를 끊고 술을 끊으며 욕설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며, 물침례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하거나 십일조를 바칠 수 있으나 그럼에도 구원받지 못한 채 죽어 지옥에 던져질 수 있다! 이 남자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그 분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마귀들은 그들에게 다시 들어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또한 이 가다라 지방이 마귀들에게 좋은 "사냥터"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악령들은 이미 두 명의 남자를 숙주로 삼는 데 성공했었다. 그 두 명 모두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돌이킨다 하더라도 그 지역에는 마귀들이 노릴 수 있는 예비 후보들이 많았다. 그 가다라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의 돼지떼 가운데 선택해야 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돼지들을 택했다(17절).
이 돼지떼는 그 성읍이 수익을 얻는 큰 원천이었던 게 분명하다. 비록 그 유대인들이 모세 율법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을 수는 없었겠지만(레 11:1-7) 그 지역에 거하는 이방인들에게 팔기 위해 돼지들을 길렀으리라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 지역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로마인들도 살고 있었기에 그럴 수 있다. "큰 돼지떼"(11절)의 숫자는 2,000마리로 확인된다(13절). 파운드 당 60센트를 받는다 치고 한 마리당 평균 220파운드의 고기가 나온다고 계산하면 이 유대인들이 손실을 본 금액은 25만 달러 이상이 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딤전 6:10).
"모든 마귀들이 주께 간구하여 말하기를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 주소서. 그러면 우리가 그들에게로 들어가겠나이다.”라고 하더라"(12절). 마귀가 사람의 몸에 더 머물지 못하게 되면 차선의 선택지는 돼지이다. 성경에는 돼지가 구원받지 못한 여자의 상징으로 나온다(잠 11:20; 벧후 2:22). 벧후 2:22에서는 "돼지는 씻고 나서 그녀의 진창 속에서 뒹군다"고 말씀한다. 여러분은 이런 광고를 본 적 없는가? 여자 진흙 레슬링(Women mud wrestling). 여러분이 아무리 애써도 성경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 돼지떼에 대해 읽으면서 나는 미국의 노예제 시대에 있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를 생각하게 된다. 어떤 구원받지 못한 백인 농장주가 자신의 노예들이 밤에 습지로 가는 것을 보았다. 주인이 그 흑인 노예들을 따라갔다가 그들이 사이프러스 그루터기들 사이에서 춤추고 소리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1950년대까지도 앨라배마의 "흑인 지역"에서 흑인 남자가 구원받으면 자기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밤새 거리를 돌아다니며 "하나님께 영광을! 하나님께 찬양을!"이라고 외치곤 했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주인은 혼자 바보처럼 웃었다.
다음날, 주인은 흑인 노예들 중 한 명을 불렀다. "어제 밤 너희가 습지에 가서 한 일이 뭐냐?"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찬양을 드렸어요." 노예가 대답했다.
"그건 내가 본 일 중에 가장 정신나간 짓이었어." 주인이 말했다. 그는 다음주에 또 그 노예들이 습지에 가서 소리치고 춤추는 것을 보기 전까지 그 일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같은 장면을 보자 이번에 그는 웃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종을 불러 물었다. "너희는 내가 모르는 무엇을 가졌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는거냐?"
"구원받는 것 말씀인가요?" 깜둥이가 말했다.
"그래, 그게 뭐든 간에 너희가 그렇게 행복한 이유가 뭐냐 말이다." 주인이 말했다.
그때 그들은 돼지우리 옆에서 대화하고 있었는데 그 흑인 크리스찬이 말했다. "저, 주인님, 먼저 하셔야 될 일은 저 담장 너머 돼지우리 안에 들어가서 돼지들과 함께 있어 보는 거에요."
그 백인 남자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말했다. "너, 말 조심해."
"주인님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셨기에 말씀드린 거에요." 노예가 말했다.
"나는 돼지우리로 들어가 돼지들과 있을 생각이 없어" 주인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그런데 다음주가 되어 그는 또 그 흑인 크리스찬들이 늪지대로 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 그는 완전히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 다음날 그는 같은 노예를 불러서 말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나는 꼭 구원을 받아야겠다."
노예가 대답했다. "좋아요, 주인님. 저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돼지들과 함께 있어 보세요."
"좋다, 좋아!" 주인이 말하고 그는 실행했다.
"이제 그 돼지떼 한가운데로 들어가세요." 노예가 말했다.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어!" 백인 주인이 소리치면서 우리를 뛰쳐나와 발을 굴러댔다.
물론, 다음 주가 되어 또 주인은 흑인 크리스찬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마음에 심히 찔림을 받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다음 날이 되어 그는 노예를 불렀다. "네가 하라고 하는 일은 뭐든지 하겠다. 어떻게 구원받는지만 알려다오."
그들은 또 돼지우리로 갔다. 주인은 담장을 넘어 돼지떼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이제, 주인님, 그 진흙 바닥에 무릎을 꿇어 보세요."
이번에 백인 주인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돼지들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종이 "일어나세요, 주인님! 주님께서 이제 그 돼지우리에서 나오라고 주인님을 부르십니다."
"하지만 그건 네가 나에게 하는 말이잖아!" 실망한 주인이 말했다.
"알아요" 구원받은 노예가 말했다. "구원받기 위해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거기서 나올 결심을 하시기 전까지는 구원받을 수 없어요."
아멘! 여러분에게 자신의 현 위치를 돼지우리나 개집으로 여기는 생각이 없다면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7:25-30을 보라).
그 마귀들이 돼지떼에게로 들어가기를 구하자 "예수께서 즉시 그들에게 허락하시니"(13절); 즉 주께서는 그들에게 떠날 것을 허락하셨다. 주께서는 그것들이 "즉시" 떠나도록 하셨다. 어떤 재치있는 사람이 말했듯이 그 사건은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마귀들린 돼지떼"의 출현이었다. 2천 마리의 돼지들이 산을 내리달려(참고. 5절) 갈릴리 바다로 뛰어들면서 "돼지들의 집단 자살"이 일어났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눅 8:31에서 마귀들은 "주께 간청하기를 그들에게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은 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기에 이 장면은 무척 중요하다. 거기서 말하는 "깊은 곳"은 갈릴리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닌데 이는 돼지떼가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깊은 곳"은 여러분의 머리 위에 있는 우주적 깊음을 말한다(1:16-17의 주석을 보라).
14 그러자 그 돼지들을 치던 사람들이 달아나서 그 성읍과 지방에 그 일을 전하니,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나오더라.
15 그들이 예수께 와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 즉 그 군단을 지녔던 자가 앉아 있고, 옷을 입고 있으며, 또 정신이 온전한 것을 보고 두려워 하더라.
16 그때에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에게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가와, 또한 그 돼지떼에 관해 사람들에게 말하니,
17 그들이 주께 그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하더라.
18 그리하여 주께서 배에 오르시니,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주와 함께 있기를 간구하더라.
19 그러나 예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집에 가서 네 친구들에게 주께서 너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들을 행하셨으며, 너를 얼마나 가엾게 여기셨는가를 말하라.”고 하시니라.
20 그가 떠나, 예수께서 자기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들을 행하셨는가를 데카폴리에서 전파하기 시작하니, 모든 사람이 놀라니라.
그 돼지떼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들의 "생계 밑천"이 언덕을 내리달려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자 성읍으로 달려가 돼지의 소유주인 그들의 "협동조합" 멤버들에게 자기들의 "자산"에 일어난 변고를 보고했다. 그러나 당연히도 그 소문은 돼지 소유주들에게만 퍼진 것이 아니라 성읍 전체와 근방에까지 퍼졌다. 곧 "성읍 대표단"이 예수와 그 광인들을 보기 위해 나왔다.
마 8장에서 보았다시피 거기에는 두 명의 광인이 구원받은 것으로 나온다. 마가는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이 한 명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한 명에게도 똑같이 일어났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마가가 묘사한대로 그 남자는 이제 "앉아 있고"(15절) 더 이상 괴성과 비명을 지르며 밤낮 뛰어다니지 않는다.
구원을 받은 후 그는 "옷을 입고" 있다. 그는 더 이상 나체로 다니지 않는다. 여러분은 성도가 어떤 영광을 지향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아는가? 성도는 "옷입고" 있기를 바라며 "벗은 채로" 발견되기를 원치 않는다(고후 5:2-4). 성도가 입는 옷은 "흰 옷"(계 3:5, 18)인데 그것은 "성도들의 의"를 상징하는 옷이다(계 19:8). 그것은 죄인이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전가된 의가 아니다. 그것은 성도가 구원받은 후에 행한 개인적 의인데 그 의를 근거로 그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받는 것이다. 올바로 살지 않은 크리스찬은 그 상을 잃어버릴 수 있고(요이 8절)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벌거벗은 채로 다녀야 할 것이다(계 16:15).
마지막으로, 그 가다라인들은 마귀들렸던 광인이 "정신이 온전한 것"을 보았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때 잃어버린 세상 죄인들은 여러분이 미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어 구원받는 그 순간이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순간인 것이다(눅 15:17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구원받을 때 여러분은 마침내 정상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건전한 생각"(딤후 1:7), 곧 "그리스도의 생각"(고전 2:16)을 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구원받았을 때 부모님들은 내가 정신이 나간 줄로 알았다. 내 남자 형제 한 명은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쟁 신경증"(shell-shock: 셸쇼크)을 앓게 되어 정신병동에서 살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정신병원애 있어야 했다. 구원받은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델라웨어의 르호봇 해변으로 가서 내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이 녀석도 조니처럼 돌아버린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가 말했다. "나는 괜찮다, 아들아. 그런 생각에 너무 빠지지 말려무나. 내일 아침에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받아보자." 그것이 아버지의 "해법"이었다.
그 당시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정상으로 돌아왔었다. 내가 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 나를 가르친 그렇고 그런 형편없는 교사들은 내게서 정상적인 마음을 훔쳐 갔었다. 펜사콜라에 있는 성 미카엘 카톨릭 성당의 설리반 신부와 캔자스 토페카의 성공회 교회 학교는 내게서 정상적인 생각을 훔쳐 갔다. 그 사람들 때문에 나는 인생에서 27년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그리고 구원받을 때 비로소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제 16-17절이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보라: "그때에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에게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가와, 또한 그 돼지떼에 관해 사람들에게 말하니, 그들이 주께 그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하더라." 그들은 이제 막 264,000달러 어치의 돼지들을 잃어버렸기에 그리스도께 떠나달라고 요청했다(10절 주석을 보라). 그들은 마귀들렸다가 고침받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의 태도가 얼마나 냉담하고 정도를 넘었으며 사악했는지 여러분은 알겠는가? 그 가다라인들이 그 마귀들린 남자들을 묶어두려 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누구도 그 광인들이 돌아다니는 영역을 공격받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없었다(참고. 행 19:16). 그곳은 안전히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이제 예수께서 오셔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가해지던 심각한 위협을 완전히 없애 주셨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이 떠나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여러분은 이 사람들의 반응이 1장에서 카퍼나움의 유대인들이 보였던 태도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 머물면서 우리 아버지의 알콜 중독을 치료해주실 수 있나요?" "우리 아들이 마약에 빠졌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내 할머니가 죽어가고 있어요, 뭔가 도와주실 수 없나요?" 그런 반응이 아니었다: "여기서 떠나시오. 당신 때문에 우리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나는 1949년 이래 미국이 천천히 와해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목회자로서 나는 부흥에 관심이 있다. 나는 부흥에 대해 쓴 글들을 읽어 왔고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부흥을 주시기를 청하는 설교들을 들어 왔다. 내가 크리스찬으로서 66년간 사는 동안 관찰해온 사실이 무엇인지 아는가? 나는 성령께서 이 나라를 곱씹어 보고 계신 것을 보았다. 성령께서 이 나라에 부흥을 주시고자 할때마다 어떤 크리스찬들이 제꺽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다. 주께서는 이 나라를 향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부흥을 원하거든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라." 미국 크리스찬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한다. "저는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알았다" 말씀하시고 떠나신다. "그들이 주께 그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하더라."
이 나라에 부흥이 오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부흥은 오지 않을 것이므로 기대하지 말라.
그러나 마귀들에게서 해방된 그 친구는 달랐다. 다른 가다라인들이 예수를 떠나보내려 했지만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떠나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이 주께 큰 빚을 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주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 따라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께서 그 사람에게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다. 주께서는 그가 데카폴리 지방에서 주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셨고, 그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집에 가서 네 친구들에게 주께서 너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들을 행하셨으며, 너를 얼마나 가엾게 여기셨는가를 말하라"(19절). 그 사람의 고향 성읍 사람들은 그 남자가 예수에 대해 증거해도 거의 신경쓰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가다라 지방의 여타 성읍들에서는 그 남자가 예수의 행적을 증거하니 사람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사람들을 이겨왔다. 그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증거하는 것을 듣고 그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스파턴버그에서 첫 번째 감옥 집회를 했을 때 구원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름은 휘트니 우즈이다. 내가 설교하러 왔을 때 휘트니는 자기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나를 무시한다는 투로 신문을 얼굴에 덮었다. 나는 그 일을 신경쓰지 않았다. 내가 감옥에서 설교를 시작하자 몇 명의 죄수들이 구원을 받았다.
3주 정도 지나서 나는 밤새 공부하다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린빌의 중심가로 몇 명의 밥 존스 대학 학생들과 함께 나와서 전도지를 배포하고 있었다. 우리가 일을 마치고 차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동료 중 하나가 내게 말했다. "공원에서 노숙하는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너를 안다고 하던데, 너와 얘기하고 싶다고 했어." 동료들이 그 사내를 내게 데려왔는데 그는 내가 감옥에서 설교할 때 얼굴에 신문을 덮고 자는 척 했던 그 친구였다. 내가 보니 그 친구는 약간 취해 있는 상태였다. 그가 말했다. "잘 계셨어요, 목사님?"
"그렇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쪽은 어떠신가요, 별로 좋아보이진 않네요?"
"맞아요"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제가 감옥에서 당신한테 보인 태도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얼굴에 신문을 덮고 당신 설교를 듣지 않으려 했는데 그럼에도 설교의 모든 내용이 내 귀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올바로 양육받았습니다. 나는 당신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사역자잖아요. 제 어머니는 크리스찬입니다. 나는 아니지만요, 그런데 그녀는 크리스찬이에요."
"그래요, 제가 무엇을 도와주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물었다.
"내가 오늘밤 머물 수 있는 곳을 제공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가 말했다.
"그럴 장소를 모르겠군요" 내가 말했다. "이 동네는 제가 모릅니다."
"저를 선교회로 보내주실 수 있나요?" 그가 물었다.
"지금 약간 취하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대답했다.
"많이 취하진 않았어요." 그가 말했다.
"저는 구조 선교회를 압니다" 내가 말했다. "거기서 좀 일했었는데 거기 사람들은 술취한 사람은 입실시켜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쪽이 원한다면 우리가 부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차에 태우고 구조 선교회로 갔다. 선교회 건물로 가려면 차로 30분 정도 걸렸기에 가는 중에 나는 차 뒷좌석에 그 사람과 함께 앉아서 구령을 시도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내 말을 경청했다. 결국 그는 머리를 숙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우리가 구조 선교회에 도착해서 선교회 사람들에게 그를 받아달라고 했지만 그가 상당히 취해있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그는 차로 돌아와서 자신이 머물던 공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제가 숙식하는 캠핑카 뒤에 공간이 남는데 여름 밤이라 덥긴 하겠지만 제가 그쪽이 누울 담요를 드리겠습니다. 거기서 잠을 잘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길을 내리달려 내 거처로 가는 중에 그 중년 남자가 웃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왜 웃으시죠?"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시겠지만 제가 구원을 받았어요." 그 사내는 그제사 구원의 확신을 얻은 것이었고 그때부터 더이상 잠잠히 있지 않았다. 그가 구조 선교회로 가는 동안 열 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캠핑카 주차장으로 가는 15분 동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를 캠핑카 뒤편으로 데려가 돌돌 마는 담요, 손전등, 그리고 성경을 건네주었다. 내가 들어가기 전에 그가 말했다. "저는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한테 내가 한 일을 알려줄 겁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내가 말했다. "언제 떠날 건가요?"
"아침에요." 그가 말했다.
내가 말했다. "떠날 때 성경은 갖고 가셔도 되는데 손전등과 담요는 두고 가면 고맙겠네요."
내가 트레일러로 들어가려 할때 그가 나를 멈추고 말했다. "목사님, 당신은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내가 말했다. "그냥 편하게 하나님께 고하세요."
"한번 보여주실래요" 그가 말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 나와 대화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래도 보여주세요" 그가 고집했고 나는 보여주었다. 한 시간 후에 나는 그 사내가 트레일러 뒤편에서 기도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내가 나가보니 담요는 접혀 있고 그 위에 손전등이 올려져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가져가서 술을 살 돈으로 바꾸지 않았다. 그는 성경은 가져갔다.
물론 그 후에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모르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알렸을 때 "모든 사람이 놀랐"으리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그들이 뭐라고 했을지 나는 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그 남자는 구원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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