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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부역조(換父易祖)를 실천한 죽산안씨2(신竹山安氏) 인물들 (2)
- 죽산안씨에서 순흥안씨로 -
다음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기록에 소개된 죽산안씨들이다.
그러나 저들의 후손이란 자들은 '자기 조상은 순흥안씨 후손'이라고 막무가내로 우기고 있다.
자세히 보시라. 저 자들이 과연 순흥안씨이겠는가!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이 오류이겠는가?
다음 사람들이 순흥안씨족보에 실려있다면
환부역조가 되는가. 안되는가!
12. 안방준(安邦俊)
1573년(선조 6)∼1654년(효종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우산(牛山). 첨지중추부사 중관(重寬)의 아들, 중돈(重敦)에게 입양되었다. 처는 경주정씨로서 판관 승복(承復)의 딸이다. 보성 출신.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 1591년(선조 24) 파산(坡山)에 가서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하였으나 거절, 1614년(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瑬)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鄭澈)·조헌(趙憲)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하여 호남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鄭夢周)·조헌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초에 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李貴)는 이를 인간(印刊),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찰방·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하였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천거하여 지평·장령·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초 지방의 유일(遺逸)을 초치 등용하려 하였을 때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년(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金自點)에게 보낸 왕복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大同法)을 반대하면서 김육(金堉)을 선조조의 유성룡(柳成龍)과 비유, 그를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하였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조헌·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인조반정공신인 김류·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成文濬)·송준길(宋浚吉)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집권하에서는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년(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에 의하여 그의 사우(祠宇)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는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편저로 《항의신편》·《이대원전 李大源傳》·《호남의병록 湖南義兵錄》·《삼원기사 三寃記事》·《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혼정편록 混定編錄》·《매환문답 買還問答》·《기묘유적노랄수사 己卯遺蹟老辣瀡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죽산안씨 우산 안방준이 순흥안씨라니 말이 되는가. 이래도 되는 일인가. 사람의 탈을 쓰고!
13. 안유신(安由愼)
1580년(선조 13)∼1657년(효종 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수초(遂初), 호는 남파(南坡). 아버지는 직장 중묵(重默)이며,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홍한(弘漢)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폐모반대소로 옹진에 유배되었다가 4년 뒤인 1617년에 풀려났다. 1626년(인조 4)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영변에 부임하였고, 1629년에는 제릉참봉(濟陵參奉), 1634년에는 빙고감예관(氷庫監刈官)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상서원직장으로 남한산성까지 호종하였다가 이듬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1638년에 양천현령(陽川縣令)에 부임하여 3개월 만에 사직하였고, 1639년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낙향, 후진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남파유고》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14. 안음(安崟)
1622년(광해군 14)∼1685년(숙종 11). 자는 경진(景鎭), 호는 송촌(松村) 또는 퇴우(退憂). 본관은 죽산(竹山). 조부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고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안후지(安厚之)이며, 어머니 창녕성씨는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의 따님이고, 처부는 해남윤씨 윤유방(尹惟方)이다. 형은 안전(安峑)으로 보성(寶城)에 살았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인(門人)으로 문장에 능하였으며 1657년(효종 8) 정유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이르었다. 1666년(현종 7)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대하여 서인측의 기년설(朞年說)을 반박하는 경상도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1,000여명의〈의례소(議禮疏)〉에 대해 470명의 전라도 유생들을 대표하여 반박 상소를 올렸다. 1680년(숙종 7)에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허견(許堅)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 후 보성읍 우산리 택촌(宅村)으로 물러나와 퇴우당(退憂堂)을 짓고 강학(講學)하였으며, 사람됨이 강직(剛直)하여 사람들에게 추중(推重)을 받았다. 효제위본(孝悌爲本), 학문자수(學問自修), 물근권리(勿近權利), 불구문지(不求聞知)를 유언(遺言)으로 남겼다. 문집으로 《송촌집(松村集)》이 남아 있다. 묘소는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현촌마을 검월등(劍月嶝)에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15. 안수상(安壽相)
생몰년 미상. 본관은 죽산(竹山). 증조부는 참의(參議) 안방준(安邦俊)이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고 심학에 몰두하였다. 감사(監司) 이해조(李海朝), 순무사(巡撫使) 권상유(權尙游), 부사(府使) 이이명(李頤命) 등이 조정에 연이어 천거하여 1714년(숙종 40) 포의(布衣)로 부름을 받고 경성에 도착하여 임금을 뵙고 진언하여 참봉에 제수되었다. 관직은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16. 안후상(安後相)
1665.12.2.~1726.1.7. 조선 중기의 유생.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익경(益卿), 호는 매계처사(梅溪處士). 증조부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 조부는 안일지(安逸之, 1613~1643), 아버지는 안외(安崴, 1639~1701)이다. 재기를 겸비하여 가학을 이었다. 향약(鄕約)으로 의고(義庫)를 세워 빈민을 구제했고 학재(學齋, 木美菴)를 지어 고을의 인재를 가르치고 끌어주어, 어사(御史)와 관찰사가 연이어서 고을의 선정을 임금에게 아뢰어 전조(銓曹)에 등용하려 하였으나 관직에 임명되기 전에 죽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17. 안창후(安昌後)
1687년(숙종 13)∼1771년(영조 47). 조선 후기의 문인. 자는 계중(繼仲), 호는 한설당(閒說堂). 본관은 죽산(竹山). 전라남도 보성 출신. 아버지는 세헌(世獻)이다. 효우학행으로 유림의 포상천거를 받았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평생을 한설당에서 글벗들과 시문에 힘썼다. 1747년(영조 23)에 유교적 도덕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생활윤리를 연작시조로서 시조 24수와 가사 1편과 함께 같은 제목의 한시문을 지었다. 그가 국문으로 시조와 가사를 짓게된 동기는 증조부인 욱(彧)이 김인후(金麟厚)와 임억령(林億齡) 등과 사귀던 집안이었던 데에 있다. 이른바 호남가단의 중심지였던 담양, 장성의 인물들이 많은 국문시가를 지음으로써 보성의 한설당 집안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러한 지연과 인맥을 따라 ‘한설당 25가’(시조 24수와 가사 1편)도 나올 수 있었으며, 17세기에 보성에서 가사 〈남초가 南草歌〉를 지은 박사형(朴士亨)의 영향도 직접적으로 입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시조 24수에는 저마다 소제목을 붙였는데, 가사의 제목은 〈명분설 名分說〉이다. 저서로는 문집 《한설당유고 閒說堂遺稿》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18. 안치방(安致邦)
1709년(숙종 35)∼미상.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백거(伯居), 재중(載重), 호는 원봉(圓峰). 증조부(曾祖父)는 안유일(安惟一)이고 조부는 안세혁(安世赫)이다. 안만유(安晩裕)와 김기상(金起商)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744년(영조 20)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 2등 23위로 합격하였고, 1756년(영조 32) 식년시(式年試) 을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고 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좌랑(佐郞)에 이르렀고 문행(文行)이 뛰어나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1698∼1761)가 그의 문장(文章)을 임금에게 추천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19. 안규창(安圭昌)
1871년(고종 8)∼1908년.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자는 사의(士義)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우봉(牛峰: 현재의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牛山里))에서 태어났다. 문강공(文康公) 안방준(安邦俊)의 10세손이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의병 활동을 하던 족제(族弟) 담산(澹山) 안규홍(安圭洪)을 후원하여 군량을 담당하였다. 그의 후원으로 안규홍은 1908년(융희 2) 불호산(不虎山)에서 왜장 영호구웅(永戶久雄)의 목을 베고 6월 동복(同福) 운월치(雲月峙)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1908년(융희 2) 6월 의병 소탕을 위하여 일본군이 급습하였을 때 우봉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20. 안규용(安圭容)
1873년(고종 10)∼1959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회봉(晦峰). 1873년(고종 10) 7월 28일 보성(寶城) 옥평(玉坪)에서 안풍환(安豊煥)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29세 때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연구하였다. 1921년 보성 진봉(眞鳳)에 죽곡정사(竹谷精舍)를 짓고 강학을 시작하였다. 이후로 《향례합편(鄕禮合編)》·《주문지결(朱門旨訣)》·《동몽수지(童蒙須知)》·《주자학칙(朱子學則)》을 간행하였다. 1934년에 일제가 서당인가를 받으라고 독촉하자 8월 문인들을 해산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은거하였다. 1936년 그의 나이 64세 때 문인 박규현(朴奎鉉)의 일기가 문제가 되어 아들인 안종선(安鍾宣)과 함께 일경에 구속되어 구례(求禮)와 광주(光州) 등지에 3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이후 1959년 8월 19일 보성 원봉에 있는 낙재(樂齋)에서 향년 87세의 인생을 마감하였다. 회봉은 성리설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의 뜻을 마음이 본성과 감성을 통합한다고 해석하면서 등불이 열과 빛을 내포하고 있는 것에 비유하여 간명하게 파악하였다. 따라서 그는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본성과 마음을 스승와 제자에 비유한 것[性師心弟說]은 마음의 통합적 전체성에 벗어난 것이라 비판하고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가 마음과 성품을 임금과 백성에 비유한 것[心君性兆民說]은 성품이 본성지성을 벗어난 것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을 ‘성품을 따르고 이치를 따르는 것’이라고 소박하고도 실천적 성격으로 규정하면서 번쇄한 분석보다 일상적 도리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곧 도학의 본래정신으로서 의리에 근거한 현실적 실천성의 회복을 추구한 것이다. 그는 〈사설(士說)〉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어 왔던 선비의 이념과 위치를 도학의 기반이 붕괴되는 시대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그는 ‘선비는 귀한 것도 천한 것도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 귀하고 크다고 꼭 선비가 되지도 않으며 천하고 작다하여 꼭 선비가 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선비는 도덕과 인의를 밝혀서 진실로 크게 꿰뚫어 보며 굳세게 뜻을 세우고 값지고 드문 뜻을 풀어서 우주 가운데 우뚝하게 서는 것이니….’라고 주장하여 굳건한 자율적 인격 주체로서의 선비 상을 재천명함으로써 도학이념을 계승할 수 있는 기반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21. 안규홍(安圭洪)
1879년(고종 16)∼1909년.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죽산(竹山). 별명은 계홍(桂洪)·안담살이·안진사.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 전라남도 보성 출신. 아버지는 달환(達煥)이다. 매우 가난하여 머슴살이(담살이)로 편모를 봉양하였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점차 심화되어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거의토적하기 위하여 담살이 동지들과 모의하는 한편, 주인에게 거사할 자금으로 전곡포백(錢穀布帛)을 요구하였다. 또한, 보성의 우국지사인 참봉 안극(安極)의 묵계 아래 안극의 집에 침입, 그의 무기와 가재를 몰수하고 점차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8년 2월 관북 출신 강성인(姜性仁)이 무장한 의병 수십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병력은 70명으로 불어났다. 먼저 보성 동소산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강성인의 민폐가 매우 심하자 그를 참형시키고 군기를 엄히 하였다. 이로써, 대오를 정비하고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을 부장·참모장·선봉·좌우익부장·유격장·좌우부 참모·서기·군수장(軍需將)으로 편제하였으며, 휘하에 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이관회(李貫會)·송경회(宋敬會) 등의 용장이 활약하였다. 1908년 2월 일본군이 보성군 조성에서 벌교·순천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자 평소 이 일대의 산악지리를 자세히 파악, 파청의 험한 곳에 복병을 매복시켜두었다. 미도(米戶)와 히라이(平井)의 2개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들이닥치자 일제히 맹사격을 가하여 적군을 괴멸시킨 뒤 적의 무기와 서류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대원산으로 들어가 호군하였다. 이것이 파청대첩이다. 이에 일본군은 복수하고자 대원산을 포위, 공격하여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한편,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임명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1908년 8월 24일 진산에서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대첩을 거두었다. 또, 화약과 군량을 준비하여 태세를 갖춘 뒤 1909년 3월 25일 원봉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진산대첩과 원봉대첩으로서 파청대첩과 더불어 보성의진의 3대대첩이다. 보성 병치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유격장 안택환(安宅煥), 서기 임준현(任準鉉)이 전사하는 등 그뒤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장흥 백사정(白沙停)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패전의 원인을 분석, 적에게 의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토왜(土倭)의 제거가 시급함을 깨닫고, 복내시장과 호곡 등지에서 토왜섬멸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병·혈족을 통한 회유·협박 및 기만책으로 점차 의진 이탈자가 늘자, 1909년 7월 일단 의진을 해산하였다. 같은해 9월 25일 귀향하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鄭基贊)과 함께 토미이시(富石)부대에 붙잡혀 광주에 수감, 그뒤 대구로 옮겨진 뒤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22. 안택환(安宅煥)
1886년(고종 23)∼1910년. 한말의 의병. 본관은 죽산(竹山). 일명 진석(辰石). 자는 일언(一彦). 전라남도 보성 출신. 모(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달성배씨(達城裵氏)다. 1908년 보성에서 기의한 의병장 안규홍(安圭洪) 휘하에서 소휘천(蘇輝千)과 함께 유격장으로 활약하면서 그해 2월경부터 파청(巴靑: 보성)·진산·원봉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뒤 8월에 보성의 병치전투(並峙戰鬪: 병치는 일명 양가랭이)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다가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23. 안상규(安尙圭)
1890년(고종 27)∼1973년 1월 10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치명(治明)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전라남도 승주(昇州)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4일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벌교면(筏橋面)에서 안응섭(安應燮)·전호규(田戶奎) 등 33명의 동지들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장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벌교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8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24. 안규삼(安圭三)
1890년(고종 27)∼미상.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원숙(元淑)이고 호는 해파(海波)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전라남도 승주(昇州)에서 운산공(雲山公) 안수금(安秀嶔)의 13세손으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전라남도 순천군(順川郡) 낙안면(樂安面)에서 동지 32명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이팔사(二八社) 결사대를 조직하여 2대대장을 맡았다. 3월 9일 벌교(筏橋)에서, 3월 12일 낙안읍(樂安邑) 시장에서, 3월 14일 다시 벌교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후 강학수(姜學洙)·송영덕(宋永德)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6개월을 억류당한 뒤 추방되었다. 해방 이후 낙안면 독립촉성국민회지부장(獨立促成國民會支部長), 낙안향교장의(樂安鄕校掌議)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25. 안덕환(安德煥)
1897년(광무 1)∼1958년 12월 10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형배(烱培)이고, 호는 석산(石山)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전라남도 승주(昇州)에서 태어났다. 문강공(文康公)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이다. 1919년 4월 3일 전라남도 순천군(順川郡) 동초면(東草面)에서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전평규(田平奎) 등 33명과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하고,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장날인 4월 9일 보성군(寶城郡) 벌교면(筏橋面) 벌교리(筏橋里) 장터에서 15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26. 안규진(安圭晉)
1898년(광무 2)∼1978년 8월 13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원삼(元三)이고, 호는 초은(初隱)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전라남도 승주(昇州)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전라남도 순천군(順川郡) 낙안면(樂安面)에서 동지 32명과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고 이팔사(二八社)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4월 9일 보성군(寶城郡) 벌교면(筏橋面)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모인 다수 군중을 규합,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 14일에는 안응섭(安應燮)·안용갑(安龍甲) 등과 함께 ‘순천군(順天郡) 동초면(東草面) 신기리입(新基里立)’이라고 쓴 태극기를 제작하여 벌교장터에서 높이 게양하고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8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사람의 탈을 쓴 동물들이나 하는 짓이지, 사람이 하면 안 되는 일이다. 환 부 역 조 !
27. 안용백(安龍伯)
1901년(광무 5) 2월 24일∼1977년 5월 11일. 일제 강점기 관료‧교육가. 창씨한 이름은 죽산용백(竹山龍伯)이다. 본적은 서울 종로구(鍾路區) 송현동(松峴洞)이고, 출신지는 전라남도 보성(寶城)이다. 제자로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을 두었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에 촉탁(囑託)으로 재직하였고, 1936년 편수서기(編修書記)로 승진하여 1941년까지 활동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재직하던 1938년 녹기연맹(綠旗聯盟) 회원으로 가입하여 내선일체‧전쟁협력‧황민화 등을 강조하는 내용의 글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녹기(綠旗)》에 〈우리 국민성과 반도인〉‧〈지나역사 8백년 주기설과 전후 경영〉‧〈조선인 청년이 내지인 청년에게 바람 -선입관을 버려라-〉‧〈새로운 씨(氏)를 만든 분에게 묻다〉‧〈신정치체제와 조선〉‧〈내선일체론의 총결산〉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또 《조선(朝鮮)》에는 〈국어보급과 가명(仮名)에 의한 조선어 음표기〉‧〈유도정신 진흥의 의의〉를 각각 1939년과 1941년에 발표하였다. 그 외 내지조선의 신시대색 토론회에 사회로 참여하는 한편, 1941년 의령군수(宜寧郡守)를, 1942년 하동군수(河東郡守)를 역임하였다. 광복 후 경남고등학교 초대 교장‧문교부 고등교육국장‧제2대 전라남도 교육감‧대한교육연합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남고등학교 교장 시절 대통령 김영삼을 가르쳤다. 1958년 대한민국 제4대 총선에 자유당(自由黨) 후보로 보성(寶城)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개표 과정에서 표를 조작한 것이 발각되어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왜놈들의 명령을 따라 '창씨개명'한 것도 자랑삼아 올렸나?
28. 안종삼(安鍾三)
1903~1977. 대한민국의 경찰·도의원. 호는 호산(湖山).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이다. 1949년 5월 구례군(求禮郡) 경찰서장에 임명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시에는 구금 중인 보도연맹원 480명을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석방하였다. 이후 경찰을 이끌고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서울을 수복한 이후 구례로 돌아와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지리산에 남은 북한군을 소탕하고 귀순자를 석방시키는 등의 업무를 지속하였다. 계속해서 화개(花開), 마산면(馬山面) 등지에서 2개월간의 전투를 통해 구례(求禮) 지구를 완전히 수복하였으며, 1951년 총경으로 승진되어 남원에 있던 지리산전투사령부 정보 및 작전참모를 역임하였다. 퇴직 이후에는 구례에 정착하여, 1956년 8월 제2대 도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기록>
사람은 해서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것.
환부역조를 하다니 천하에 못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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