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장미동 내항1길에 위치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구불길 중 6-1길 탁류길에서 만날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
군산의 지리적 위치는 북으로 금강, 남으로 만경강 사이에 자리잡고 외적의 침입 시에는 적의 첫번째 공격을 받게 되는 역사적 숙명을 감내하여야만 했습니다. . . '역사는 미래가 된다'는 모토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 최대의 근대문화자원을 전시하여, 서해 물류유통의 천년, 세계로 뻗어가는 '국제무역항 군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물관 입니다.
어청도'의 등대 모습이네요. 이 등대는 일제 강점기에 중국대륙 침략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정략적으로 건설되었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 조차지였던 다렌을 접수한 후 일본 오사카에서 출발하여 중국 다렌으로 향하는 항로를 개설하였고, 중간지점인 어청도는 보급과 연락, 안전상의 문제로 중요한 거점이 되었 합니다. 마냥 이쁘기만 한 빨간 등대에 이리 가슴 시린 역사가 담겨 있네요...^^
전통적인 우리나라 화포제작방식과 달리 화포의 포구 쪽이 본체보다 좁아지는 개량된 형태의 제작기술을 적용, 발견 당시에는 외국대포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보존처리를 거친 후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돼오다 이번에 군산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게 됐다. 오식도 화포는 길이 127.7cm, 지름 8.2cm에 중량은 125kg으로 포신의 중간부분에 걸기 좋게 단면 원형의 축이 붙어 있고 작약구에는 심지를 꽂았던 구멍이 확인되며, 작약구 뚜껑에 원형의 고리가 부착돼 있다. “군산은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의 현장이지만 화포와 같은 유물이 출토된 적은 오식도 화포가 처음이며, 특히 개항을 거쳐 일제강점기 일제의 중요 거점지역이었던 군산을 우리 조상들이 무기력하게 빼앗긴 것이 아니고 당시로서는 최신형 화포를 배치해 방어했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1층에 있는 해양물류역사관입니다. 해양물류역사관은 물류유통의 중심시였던 군산의 과거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서 군산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하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군산, 삶과 문화, 해양유통의 중심, 해상유통의 전성기, 근.현대의 무역, 바다와 문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연출공간에 관련된 유물과 영상을 같이 배치하여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조운선' 입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백성들에게 거둬들인 세곡을 도성으로 운반하는 운송선을 말합니다. 조운선을 설치한건 고려시대 이후 군산에 모아진 전북지역 세곡을 개경과 한양으로 운반하던 물류유통의 항구였던 군산의 역할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18세기 말 문헌인 '각선도보'에 실린 기록을 바탕으로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3/1로 축소) 고증하여 제작하였으며, 조선시대 조운선의 운항을 삼차원적으로 느끼게 하고자 배에 올라가 시뮬레이션을 작동하여 배를 직접 움직이는 느낌을 연출 하였다 합니다.
십이동파도, 야미도 유물입니다.
십이동파도 해저 유물발굴은 한 어부의 신고에 의해 고군산도 북서쪽 십이동파도 인근 해역에서 2003년, 2004년까지 이뤄졌고, 고려청자 8,100여점과 그것을 싣고 가던 고려시대 침몰선 1척이 인양되었다고 합니다. 야미도 유물은 고려청자를 밀매하던 도굴범의 자백에 의해서 발굴되었구요. 그곳에서도 4,800여점의 청자를 인양했다고 합니다. 군산지역의 해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3층의 근대생활관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창밖으로 군산항의 풍경이 내려다 보입니다. 박물관 내부에 전시 되어있는 어선과 창밖에서 들어 오는 항구의 어선들... 잠시 격세지감을 느끼며 옛 모습의 군산항을 잠시나마 상상해 봅니다.
'1930년 9월, 군산의 거리에서 나를 만나다' 근대생활관은 1930년 9월, 군산의 거리를 걷는 듯한 공간으로 재현해 놓은 곳입니다. 일제의 강압적인 통제 속에서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 사람들의 모습을, 도시의 역사, 수탈의 현장, 서민들의 삶, 저항과 삶, 근대건축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연출공간에는 1930년대 군산에 존재했떤 11채의 건물을 재현하여 체험 및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곡취인소'는 미두장으로 칭하는데 일제강점기 증권거래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두'란 곡식을 사고 팔면서 생기는 시세 차이를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일종의 투기행위였습니다. 당시 쌀의 시세는 하루에 여러번 변동하였는데, 가장 큰 소비지였던 일본 오사카 시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합니다.
미곡취인소 내부... 탁본 체험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1920년대 군산미곡취인소, 1934년 군산지도, 군산항 제3차 축항공사 쌀탑등 세곳을 탁본 할 수 있답니다.
내항과 부잔교.... 일제는 군산 지역에 내항철로 개설, 대형 창고와 부잔교 건립 등의 축항공사를 통해 호남지방의 쌀을 일본으로 용이하게 수탈하고자 했습니다. 축항공사 후, 군산내항에는 수백만석의 쌀이 산덩이처럼 쌓여 있었고 그 쌀들은 일본의 오사카와 시모노세끼 등으로 실려 나갔지요. 반면 우리 농민들은 그렇게 많은 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등에서 들여온 조와 잡곡류 술찌꺼미등으로 끼니를 이어 갔다 하니.....^^;;
부잔교.... 일제강점기에 총6개가 만들어졌는데 서해안의 심한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는 구조물로써 물 수위에 따라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여 '뜬다리 부두' 라 한다.
의병항쟁 이후 일제의 수탈에 대응하기 위해 개항장 군산의 조선상인들은 옥구군산항민단을 결성했고 이 단체를 매개로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군산지부를 설립하여 교육 및 산업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계몽운동의 결실이 3.1만세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군산의 3.1운동은 영명학교에서 시작되었고 그해 5월까지 총 21차례 계속되었는데 참가한 인원이 2만5천이 넘었다고 합니다.
영명학교는 군산 최초의 사설 한국인 중등교육(현재 제일중고등학교) 기관이구요. 기독교 선교사인 젠킨 목사 부부에 의하여 1903년 2월 설립되었습니다. 영명학교는 호남 최초의 3.1만세운동의 중심지 였으나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가 거세지고 미국인 선교사들이 간첩으로 몰려 추방당하자 1935년 10월 자진 폐교하였다고 합니다.
군산역의 모습입니다. 군산역은 외관에서 보면 2층의 구조이나 안에 들어가면 1층인 탁 트인 구조로 만들어진 일본식 목조건물이었습니다. 북한의 평양역과 구조가 똑같이 생겼다고 하네요,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전쟁때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근대 이후 군산항의 물류유통 중심지로서의 역할로 군산에는 우리민족의 근대문화유산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특히 근대건축물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물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구)조선은행군산지점, 구)군산세관 본관, 구)장기십팔은행 군산지점 등이 있구요. 이런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볼 때 마다 맘 한구석이 짠~~ 해짐은 아마도 이 땅을 밟고 서 있다는 증거이겠지요!
즐거운 맘으로 보게 되지는 않지만 아픈 역사도 우리 삶의 흔적이요, 그리고 현재의 군산을 이야기할수 있는 밑거름이 되겠지요.
또 다른 군산 여행 길입니다..... http://blog.daum.net/herasuny/12097806 |
출처: 프레임 속의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헤라써니
첫댓글 아~ 이런곳도 있었네요...^^
한번 가봐야 겠어요...^^
아그들 손 잡고 가세요!~~~ ^^
아그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군산......
제가....그리 애국자도 아닌데 시내 곳곳을 다니다 보면 맘이 넘 쨘~~해지는 도시더라구요!
웬지 군산하면 깊은 역사가 있을 것 같은 도시....^^
헤라써니님,,,
뮤쟈게 더운데 자~알 지내시옵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