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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공정고(供正庫)
정의
조선초기 궁궐에서 소요되는 미곡·장(醬)·겨자[芥] 등의 공급을 맡던 관서.
개설
공정고는 고려 때 요물고(料物庫)로 불렸으며 궁궐에서 사용하는 곡물 등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이것이 조선건국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다만 명칭만 공정고로 바뀌었다. 『경국대전』에는 왕을 위한[御用] 곡물과 간장·고추장 등의 물품을 담당하는 관서로 기록되었으며, 1882년(고종 19)에 혁파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충선왕 때 설치된 요물고는 조선건국 후 1401년(태종 1) 7월의 관제개혁 때 공정고로 명칭이 바뀌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이후 1405년(태종 5) 3월에는 이조(吏曹)의 속아문(屬衙門)에 배치되었으며[『태종실록』 5년 3월 1일] 도관서(導官署)를 거쳐 사선서(司膳署)·사선시(司膳寺)로 불렸다. 그러다가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왕을 위한 미곡과 궁궐에 공급하는 간장·된장 등의 물품을 담당하는 정3품아문의 사도시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1310년(충선왕 2) 궁중에서 소요되는 미곡 등의 수입과 지출을 맡아 보던 비용사(備用司)를 요물고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조선건국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건국 직후에 개정된 직제에 따르면, 요물고에는 종5품의 사(使) 1명, 종6품의 부사(副使) 1명, 종8품의 주부(注簿) 2명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1398년(태조 7) 5월에 가회방(嘉會坊)의 인가(人家)에서 발생한 화재로 요물고도 소실되고 말았다[『태조실록』 7년 5월 3일]. 이에 요물고를 궁성(宮城) 안에 새로 지었다.
그 뒤 1401년 7월의 관제개혁 때 요물고를 공정고로 바꾸었고, 1405년 3월 육조(六曹)의 직무 분담과 소속 아문을 정할 때 이조의 속아문으로 배치하였다. 다시 1422년(세종 4) 9월에 공정고를 고쳐서 도관서라 하고, 제조(提調) 1명을 배치하였다. 1460년(세조 6) 5월 당장에 필요하지 않은 관원을 줄이고 관사를 혁파할 때 도관서를 경창부(慶昌府)와 함께 사선서에 합속(合屬)하였다. 1466년 1월 관제를 다시 정할 때 도관서를 없애고 사선시로 고쳐서 정3품의 정(正), 종3품의 부정(副正), 종4품의 첨정(僉正), 종6품의 주부(主簿), 종7품의 직장(直長)을 각각 1명씩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사도시(司䆃寺)」에 따르면, 공정고를 고쳐서 사도서(司䆃署)라 하였다. 실제로 1478년(성종 9) 8월에 정극인(丁克仁)이 여러 고을에서 사도서에 갱료(粳料)를 바칠 때 아전[吏]들이 부정을 일삼는다고 진언하였다[『성종실록』 9년 8월 2일]. 이후 세조가 『경국대전』을 반사(頒賜)할 때 본래 5품아문인 사도시를 3품으로 승격시켰다[『성종실록』 14년 12월 23일].
변천
1882년(고종 19) 12월에 내섬시(內贍寺)·내자시(內資寺)·사재감(司宰監)·의영고(義盈庫)·장원서(掌苑署)·사포서(司圃署) 등과 함께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공해전(公廨田)
정의
중앙의 관사 근무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거나 업무 수행에 필요한 종이·붓·먹 등과 같은 비품들을 마련하기 위해 해당 관청별로 지급한 전지.
개설
공해전은 해당 관청의 책임자가 출근하여 일을 처리할 때 점심을 제공하거나 관청의 업무 수행에 필요한 종이·붓·먹 등과 같은 비품들을 마련하기 위한 전세 수입원으로, 민전 위에 설정된 수세지였다. 그러나 공해전은 태종 때부터 단계적으로 혁파되었으며, 1466년(세조12)에 이르러 모든 공해전이 없어졌다[『세조실록』 12년 3월 15일].
내용
중앙의 각 관사에는 각사위전(各司位田)과 공해전을 지급하였다. 각사위전은 각 관사의 고유 업무 수행, 즉 경상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전세 수입원이었다. 한편 공해전은 해당 관청의 책임자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거나 관청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기 위한 세입원이었다.
공해전은 각사위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의적인 전세 수취가 이루어졌다. 심지어 공해전세(公廨田稅)의 수입과 지출이 최소한 1403년(태종 3)까지는 사평부(司平府)에 보고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였다[『태종실록』 3년 윤11월 29일].
권력 구조의 재편성이 일단락된 태종 때부터 각사가 공해전을 자의적으로 운영할 수 없도록 통제를 하는 한편, 단계적으로 공해전을 혁파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해전의 운영을 사평부의 통제 아래 두고 그동안 각사가 자의적으로 운영했던 공해전의 수입과 지출 업무를 사평부에 보고하도록 조치하였다. 동시에 다달이 사용하는 공해전세를 낭비한 관원에 대해서는 낭비한 액수만큼 강제로 징수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긴요하지 않은 각사 공해전을 아예 혁파해 버렸다. 대신 공해전이 혁파된 관사의 운영비는 풍저창(豊儲倉)에서 지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공해전이 혁파되고 관사 운영비를 풍저창에서 지급하는 과정에서 공해전을 혁파당한 각사의 반발이 심하여 공해전이 다시 지급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혁파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1414년(태종 14)에는 호조(戶曹)의 요청에 따라 각사에서 자체적으로 영사(令史)를 파견하여 공해전을 답험하는 관례를 금지시켰다[『태종실록』 14년 11월 7일]. 1434년(세종 16)에는 흉년으로 인한 군자곡(軍資穀)의 감소를 명분으로 중추원·사헌부·사간원·의금부·상의원(尙衣院)·군기감(軍器監)·선공감(繕工監)의 공해전을 풍저창으로 옮겨 소속시켰다[『세종실록』 16년 12월 12일]. 이어 1444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田制改革)에서는 그나마 존속해 오던 도화원(圖畵院)·충호위(忠扈衛)·혜민국(惠民局)·제생원(濟生院)·전의감(典醫監)·동활인원(東活人院)·서활인원(西活人院)·사역원(司譯院)의 공해전을 혁파하였다. 더 나아가 남아 있던 부마부(駙馬府)·기로소(耆老所)·내수사(內需司)·충훈부(忠勳府)·충익사(忠翊司) 등의 공해전도 1466년까지 모두 혁파하였다.
참고문헌
오정섭, 「고려 말·조선 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 재정」, 『한국사론』 27, 1992.
이장우, 「세종 27년(1445) 7월의 전제 개혁 분석: 조선 초기 전세 제도와 국가 재정의 일원화 추구와 관련하여」, 『국사관논총』 92, 2000.
과렴(科斂)
정의
고려후기에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관리들로부터 임시로 필요한 경비를 징수하기 위해 만든 세목.
개설
고려후기 국가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고자 필요할 때마다 관리들에게 운영 비용을 징수하였는데, 이를 과렴이라고 하였다. 과렴으로 제왕(諸王)·재추(宰樞) 이하 각 품(品) 관리들에게 여러 종류 물품들을 차등 있게 거두어들였다. 심지어 일반 백성들에게 거두기도 하였다. 과렴은 국가 재정의 고갈 때문에 행하여졌지만, 원 간섭기에는 주로 왕이 원나라에 가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건국 이후에도 과렴은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리들이 민간으로부터 과렴하여 축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내용
고려후기 몽골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인구 감소, 노동력 부족,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국가 재정은 만성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국가는 필요할 때마다 관리들에게 운영 비용을 징수하여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였다. 과렴은 이미 1157년(의종 11)부터 나타났지만, 몽골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두드러졌다.
과렴은 국가 재정의 부족으로 제왕·재추 이하 각 품 관리들에게 금·은이나 명주[紬]·생명주[絹]·베[布貨]·모시·곡물·목재 등을 차등 있게 거두어들였다. 과렴은 국가 재정의 고갈 때문에 행해졌지만, 원 간섭기에는 주로 왕이 원나라에 가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말 전제개혁(田制改革) 이후 조선에서는 과렴이 이전처럼 심하지는 않았지만 없어지지도 않았다. 수령들이 환곡이나 공물(貢物) 등을 빙자하여 과렴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성종실록』 24년 11월 1일]. 심지어 지방관이 ‘차비(差備)’ 혹은 ‘인정(人情)’이라 하면서 민간에서 과렴하여 재산을 모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세조실록』 2년 3월 17일]. 이에 국가는 인공천과렴율(因公擅科斂律)을 적용하여 처벌하였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백성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세금[常稅]보다 오히려 과렴과 역역(力役)이 더 많다고 인식하였다[『성종실록』 22년 11월 25일]. “과렴은 살갗을 벗기고 피를 빨듯이 심하게 하고 요역(徭役)은 근골(筋骨)이 괴롭도록 시키고 있다[『명종실록』 9년 6월 1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안병우, 「고려 후기 임시세(臨時稅) 징수의 배경과 유형」, 『한신논문집』 15-2, 1998.
과전(科田)
정의
문·무 관리들에게 18등급으로 구분하여 차등 있게 분급한 개인 수조지.
개설
1391년(공양왕 3) 5월에 제정된 과전법(科田法)에서는 관리들을 18등급으로 구분하고, 이에 따라 왕자·부마·종친과 전·현직 관리, 임시직 관리에게 차등 있게 과전을 지급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였다.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만 가지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당사자가 죽더라도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세습할 수 있었다. 게다가 경기에 있는 전지(田地)에 한해 수조지(收租地)로 지급해 주었기 때문에 새로 관직에 제수되는 사람에게 줄 과전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과전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과전의 1/3을 충청도·전라도·경상도로 옮겨 지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과전의 불법 점유를 막기 위해 진고체수(陳告遞收)의 규정을 마련하고, 과전을 지급하는 방식을 바꾸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전의 부족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한편 과전의 수조권자[田主]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조세를 거두어들이면서 경작자[佃戶]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1466년(세조 12)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직전(職田)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1470년(성종 1)에는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접 직전세(職田稅)를 거두어 해당 현직 관료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1556년(명종 11)에 들어서는 국가 재정 악화를 이유로 직전을 사실상 폐지하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이성계 일파는 1388년(우왕 14) 6월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면서, 민생 안정과 국용(國用)·군자(軍資)의 확보를 명분으로 전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조준(趙浚) 등의 상소로 시작된 전제개혁 운동은 이행(李行)·황순상(黃順常)·조인옥(趙仁沃)·허응(許應) 등이 가세하면서 마침내 1391년(공양왕 3) 5월에 과전법이 공포되었다.
새로 정비된 과전법의 규정에 따라 현직 관리뿐만 아니라 퇴직 관리, 임시직 관리까지도 과전의 지급 대상이 되었다. 모두 18등급으로 구분하고 10~150결을 차등 있게 지급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였다.
내용
조선건국 후 1394년(태조 3)에는 실제로 근무하지 않고 벼슬의 이름만 부여한 첨설직(添設職)에게도 모두 실직(實職)에 준하는 과전을 지급하였다. 과전의 지급 대상은 이들뿐만 아니라 왕자·부마(駙馬)·종친 등도 포함되었다. 왕자, 왕의 형제, 왕의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伯叔]로, 대군(大君)에 봉해진 자는 300결, 군(君)에 봉해진 자는 200결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부마로서 공주의 남편[駙馬尙公主者]은 250결, 옹주의 남편은 150결을 지급하였으며, 그 밖의 종친도 등급에 따라 각각 차등 있게 지급하였다[『세종실록』 8년 1월 27일]. 이러한 과전 지급 규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만 소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죽더라도 아내가 수절할 경우에는 수신전의 명목으로, 아내가 죽고 자식들이 어릴 경우에는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휼양전의 명목으로 세습할 수 있었다. 이는 과전이 세록(世祿)으로서 지급된 전지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단순히 관리로서 직무에 대한 대가 차원이 아니라 대를 이어 관리로서의 신분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기 위한 의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 신료들은 과전을 왕이 자신들에게 “영구히 하사해 준[永永賜與]” 것이라고 여겼다[『세종실록』 1년 9월 19일].
사전경기(私田京畿)의 원칙에 따라 과전은 공신전 등과 마찬가지로 경기의 전지로만 지급하였다. 1402년(태종 2) 2월 무렵 과전의 총 지급 결수가 8만 4,100여 결로, 경기도 전체 전지 면적의 56%를 넘어섰으며[『태종실록』 2년 2월 5일], 전국 전지 면적의 약 10%에 달하였다. 그러나 사전경기의 원칙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새로 관직을 수여받는 사람에게 줄 과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1417년(태종 17)부터 1431년(세종 13) 사이에 과전의 1/3을 충청도·전라도·경상도[下三道]로 옮겨 지급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임시적인 조치였을 뿐, 그 뒤로도 직전법(職田法)이 실시될 때까지 과전은 경기도에 국한하여 지급되었다.
과전 운용상의 또 다른 문제점은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과전을 서로 맞바꾸거나[相換] 번갈아 가면서 전조(田租)를 거두는[遞收] 데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토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수확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비옥한 토지를 자신의 과전으로 지급받고자 하는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미 지급받은 과전을 좀 더 비옥한 곳으로 옮기고자 요청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일반적인 상환은 쉽지 않았지만,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자신의 사유지 위에 설정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더욱이 윗대로부터 대를 이어 물려받은 과전은 그 자손에게 우선적으로 지급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과전을 자신의 사유지 위에 지급받거나, 윗대의 과전을 그대로 물려받거나, 본인의 과전을 가족들이 수신전·휼양전의 명목으로 물려받는 경우에는 사실상 은점(隱占)에 의한 세습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국가가 그것을 환수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물론 과전법에는 은점을 막기 위해 진고체수(陳告遞收)의 규정을 마련해 두었다. 이는 은점한 과전을 먼저 신고하는 사람에게 그 과전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규정이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환수해야 할 과전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고체수는 과전의 지급과 환수를 공평하게 하고자 했던 입법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사람들의 규정 위반이나 사망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풍조를 조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여러 해 동안 관리로 복무하거나 새로이 관리가 된 사람들 가운데 과전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에 국가는 사망한 사람의 과전을 신고한 사람에게 그 전지를 과전으로 지급하되, 신고자가 과전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많은지 적은지를 살펴서 지급액을 정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이 진고하는 대신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의 친족이 진고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환수한 과전을 지급할 때에도 호조(戶曹)가 직접 맡아서 주관하였다[『태종실록』 17년 2월 23일][『세종실록』 11년 9월 30일]. 그 결과 과전에 대한 개인의 지배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국가의 지배력은 강화되어 갔다.
1431년(세종 13)부터는 과전을 지급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즉, 1품부터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까지를 1등으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부터 종4품까지를 2등으로, 5·6품을 3등으로, 참하(參下)를 4등으로 구분하였다. 말하자면 당상(堂上)·당하(堂下)·참상(參上)·참하로 구분하여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과전을 지급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13년 1월 30일].
그러나 국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전의 은점은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관리들에게 3년마다 과전단자(科田單子)를 받아 그사이 바뀐 내용을 수정하고자 하여도 원안(原案)이 분명하지 않거나 단자를 바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증빙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세종실록』 7년 7월 15일]. 모든 관리들은 가능한 한 선대 이래로 과전을 계속해서 이어받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수신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재혼하거나, 휼양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시집가고 장가간 뒤에도 몰래 숨겨서 전조를 징수하거나 부모가 사망한 뒤에도 바꾸어 받지 않고 그대로 전조를 징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세조실록』 8년 5월 27일]. 이렇듯 과전을 지급받을 자격을 상실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과전을 은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관리가 되는 사람들에게 지급할 과전은 점점 부족해져 더욱 심각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변천
고려말 전제개혁 이후 국가 수세지나 개인 수조지를 막론하고 1결당 평상년(平常年) 수확의 평균 1/10에 해당하는 30말[斗]을 징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지만 해마다 농사의 작황이 달랐기 때문에 답험손실(踏驗損實)을 통해 징수량을 다시 조절하였다. 그런데 국용전(國用田)·군자전(軍資田)과 같은 국가 수세지는 국가의 공적인 경로를 거쳐 답험손실을 했지만, 과전과 같은 개인 수조지는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田主]이 직접 답험손실을 하여 전조를 거두어들였다. 이 과정에서 전주는 손실(損失)의 정도를 지나치게 가볍게 책정하여 좀 더 많은 전조를 거두려 하였다. 예를 들면 1석[15말]을 거두어야 하는 경우에도 실제로는 23~24말을 거두기도 하였다. 또한 과전의 경작자[佃客]를 상대로 전조 이외의 쑥[薦]·숯[炭]·장작[薪]·꼴[草]·행전(行纏)·말 먹이[馬糧]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물품들을 불법적으로 징수하여 경작자를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다[『태종실록』 16년 5월 14일].
1416년(태종 16) 경기 지역의 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농민들의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쌓였다. 국가에서는 이를 과전과 같은 사전(私田) 주인들의 횡포로 발생한 재해라고 하면서 이듬해부터 지방관을 통하여 사전에 대한 답험손실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태종실록』 17년 7월 22일].
더 나아가 세종은 공전과 사전은 모두 국전(國田)이므로 답험손실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경기의 사전에 대한 답험손실을 법제화하였다[『세종실록』 1년 9월 19일]. 과전을 왕이 자신들에게 영구히 하사해 준 것이라는 양반 신료들의 주장은 공전과 사전이 모두 국가의 토지[國田]이기에 당연히 답험손실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명분에 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1444년(세종 26) 공법(貢法)의 실시로 전국의 모든 경작지에 똑같은 전분(田分)과 연분(年分)의 기준이 적용되면서 이러한 원칙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로써 수조권을 매개로 한 전주의 과전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반면에 국가의 전지와 농민에 대한 지배력은 점차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1466년(세조 12) 8월부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이 시행되었다[『세조실록』 12년 8월 25일]. 아울러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지급하던 수신전과 휼양전도 폐지하였다. 또한 직전의 지급액도 1등급의 경우 150결에서 110결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과전에 대한 답험손실권이 국가로 이관되고 직전법이 실시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조(田租)의 수취권은 과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과전을 경작하는 농민[佃戶]에 대한 전주의 횡렴은 여전하였고, 이에 대한 농민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국가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1470년(성종 1) 직전세(職田稅)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다.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접 직전세를 거두어 해당 전주에게 지급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전주는 수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반면, 국가의 전지와 농민에 대한 직접 지배력은 더욱 확대·강화되었다.
1556년(명종 11)에는 거듭되는 흉년과 변경(邊境)의 소요 사태로 인해 군사비를 과다 지출하여 재정이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이것을 내세워 사실상 직전을 폐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박시형, 『조선 토지 제도사(중)』, 과학원출판사, 1961.
이경식, 『조선 전기 토지 제도 연구: 토지분급제와 농민 지배』, 일조각, 1986.
천관우, 『근세 조선사 연구』, 일조각, 1979.
이경식, 「조선 전기 직전제의 운영과 그 변동」, 『한국사연구』 28, 1980.
朝鮮史硏究會 編,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 朝鮮史における國家と民衆』, 朝鮮史硏究會, 1976.
관둔전(官屯田)
정의
지방 행정기관과 역·진의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절급(折給)해준 전지.
개설
조선이 건국된 직후 관둔전을 혁파하였지만 수령(守令)들은 자의적으로 백성을 동원하여 관둔전을 경작하였다. 그리고 그 수입을 관청의 운영 경비에 보태거나 자신들의 개인적인 지출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다가 1424년(세종 6) 10월에 관둔전을 복구시켜 부족한 지방의 재정에 보태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수령들은 오히려 규정 밖의 둔전[數外屯田]을 경영하는 데 더 몰두하면서 농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국가에서는 지방관청의 운영 경비를 지원해 주는 대신 일정 양의 토지를 각 지방의 관청에 지급하였다. 그리고 그 토지의 소출 일부를 지방관청의 운영 경비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내용
조선 정부는 건국 직후 음죽둔전(陰竹屯田)을 제외한 모든 국둔전(國屯田)을 혁파하였다. 또 1406년(태종 6) 11월 하륜(河崙)이 “주(州)·현(縣)의 둔전은 이미 금령(禁令)이 있다[『태종실록』 6년 11월 23일].”고 발언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관둔전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지방에서는 공수전(公須田)에서의 수입만으로는 지방관청의 지출 경비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들은 자의적으로 백성을 동원하여 관둔전을 경작하고, 그 수입을 국고(國庫)에 들이지 않고 관청의 운영 경비에 보태거나 자신들의 개인적인 지출 비용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국가로서도 이러한 현실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424년(세종 6) 10월에 마침내 관둔전제도를 복구시켜 유수(留守)·목(牧)·대도호부(大都護府)는 수전(水田)·한전(旱田)을 최고 10결까지, 도호부(都護府)·지관(知官)은 8결, 현령(縣令)·현감(縣監)은 6결을 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노비(官奴婢)를 시켜 폐단 없이 경작하게 하였다. 그 소출은 감사에게 보고하여 장부에 기입하고, 관아의 비용이 떨어졌을 때 감사에게 보고하여 쓰도록 조처하였다. 아울러 수령들이 규정을 초과하는 둔전을 경영하거나, 백성을 동원하여 둔전을 경작할 경우 율(律)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6년 10월 6일].
비록 2년 뒤 각 도의 국둔전과 관둔전을 모두 혁파하는 조치를 취하였지만[『세종실록』 8년 5월 11일], 자신들의 축재(蓄財) 수단이 축소·상실될 것을 우려한 관료들의 집요한 반발로 관둔전은 혁파된 지 9개월 만에 다시 설치되었다[『세종실록』 9년 2월 14일]. 수령들은 관둔전의 경영을 통해 지방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축재니 출세를 위한 규정 밖의 둔전[數外屯田] 경영에 더 몰두하면서 농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다. 하지만 지방관청의 경비 부족이라는 명목 때문에 관둔전 경영은 현실적으로 묵인되고 있었다.
변천
국가는 관둔전 경영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동시에 지방관청의 안정적인 재원 운영을 위해 1458년(세조 4) 8월에 관둔전의 지급 결수를 2배로 늘렸다[『세조실록』 4년 8월 22일]. 이 조치는 『경국대전』의 관둔전 지급 규정에 그대로 반영되어 절도사(節度使)가 있는 주진(主鎭)에는 20결,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가 있는 거진(巨鎭)에 10결,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萬戶)·도위(都尉)가 있는 제진(諸鎭)에는 5결, 그리고 부·대도호부·목(牧)에는 20결, 도호부·군(郡)에는 16결, 현·역(驛)에는 12결을 각각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관둔전은 자경무세(自耕無稅)의 공전(公田), 즉 해당 기관이 소유권을 갖는 공유지였다. 처음에는 서리·관노비 등을 동원하여 경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병작(並作)의 형태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이경식, 「조선 전기 둔전의 설치와 경영」, 『한국사연구』 21·22, 1978.
이재룡, 「조선 초기 둔전고」, 『역사학보』 29, 1965.
관수관급(官收官給)
정의
지방관이 경작자로부터 직전세(職田稅)를 징수하여 중앙정부에 상납하면, 정부가 이를 직전(職田) 수조권자에게 지급하는 제도.
개설
고려말 전제개혁 때 정비된 과전법에서는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만 보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죽더라도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과전이 세습되었다. 그 결과 과전으로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져 1466년(세조 12) 8월부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이 시행되었다. 그런데 규정된 전조(田租) 외의 여러 물품들에 대한 과다 징수 문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1470년(성종 1) 4월에 직전세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다. 관수관습제란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전세를 징수하여 해당 수조권자에게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내용
고려말 전제개혁 때 정비된 과전법에서는 현직 관리·퇴직 관리·임시직[權務]뿐만 아니라 왕자·부마(駙馬)·종친 등에게도 경기도의 전지(田地)로 과전을 지급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에는 실제로 근무하지 않고 벼슬의 이름만 부여한 첨설직(添設職)에도 모두 실직(實職)에 따라 과전을 지급하였다.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만 보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죽더라도 아내나 자식들이 수신전·휼양전의 명목으로 세습할 수 있어서 태종 즉위 초에 이미 과전의 부족이 문제되기 시작하였다. 국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과전의 일부를 충청도·전라도·경상도[下三道]로 옮겨 지급하였다. 또한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과전을 신고하면 신고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과전을 지급하는 진고체수(陳告遞受)를 실시하고, 과전을 지급하는 기준도 변경하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과전은 지급받은 사람[田主]이 직접 답험손실을 하여 전조(田租)를 수취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주는 실제보다 많은 전조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전조 외의 여러 가지 물품들을 불법적으로 징수하여 과전 경작자[佃客]들을 힘들게 하였다. 이에 1417년(태종 17)부터 과전에 대해서도 지방관을 통하여 사전에 답험손실을 실시하여 전주의 과전에 대한 지배력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466년(세조 12) 8월부터는 현직 관리들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하였다[『세조실록』 12년 8월 25일]. 아울러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지급하던 수신전과 휼양전도 폐지하였다. 나아가 각 관품(官品)에 대한 직전의 분급액도 과전에 비해 크게 축소시켰는데, 1등급의 경우 150결에서 110결로 크게 줄어들었다.
직전법의 시행으로 대부분의 현직 관리들은 규정된 액수의 직전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수조권(收租權)은 여전히 직전을 지급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어서 전조와 볏짚[藁草]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물품에 대한 과다한 징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직전법의 실시로 현직에 재직하는 동안에만 직전을 지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이에 대한 농민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다.
성종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1470년 4월에 직전세 관수관급제를 시행하였다[『성종실록』 1년 4월 20일]. 국가가 경작자에게서 직접 직전세를 거두어 해당 전주에 지급하였던 것이다. 이어 1478년 7월에는 전주에게 바쳐야 하는 초가(草價)도 해당 고을 지방관의 감독 아래 경작자가 직접 경창(京倉)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정부가 이를 녹봉의 예에 따라 전주들에게 나누어 지급하기 시작하였다[『성종실록』 9년 7월 20일]. 이러한 관수관급제는 공신전(功臣田)·별사전(別賜田)·사전(寺田)을 비롯한 모든 개인 수조지에 확대 적용되었다.
변천
1556년(명종 11)에는 거듭되는 흉년과 변경(邊境)의 소요 사태로 군사비가 과다 지출되는 등 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이유를 내세워 직전을 사실상 폐지하면서 관수관급제도 폐지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김태영, 『조선 전기 토지 제도사 연구: 과전법 체제』, 지식산업사, 1983.
이경식, 『조선 전기 토지 제도 연구: 토지분급제와 농민 지배』, 일조각, 1986.
이숙경, 『고려 말 조선 초 사패전 연구』, 일조각, 2007.
이경식, 「조선 전기 직전제의 운영과 그 변동」, 『한국사연구』 28, 1980.
광흥창(廣興倉)
정의
관리들과 각종 역을 담당하던 사람들의 월급 관련 사무를 담당하던 관청, 또는 그 월급을 보관하던 창고.
개설
조선의 광흥창은 기본적으로 고려 충선왕 때 개정된 광흥창을 계승한 것으로, 관리들의 녹봉과 각종 유역인들의 월봉(月俸, 朔料)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다만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소속 관리의 수가 약간 늘어났을 뿐이다. 1405년(태종 5) 3월 관제개혁(官制改革)을 통해 풍저창과 함께 호조의 소속 관사가 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정4품 수(守) 1명, 종6품 주부(主簿) 1명, 종8품 봉사 1명, 정9품 부봉사(副奉事) 1명씩을 광흥창에 배치하도록 규정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08년 고려의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직후 관제를 개혁할 때 이전의 좌창(左倉)을 광흥창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광흥창에서는 관리들의 녹봉과 각종 유역인들의 월봉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소속 관원으로는 정5품 사(使) 1명, 정6품 부사(副使) 1명, 정7품 승(丞) 1명을 두었다. 그러다가 공민왕 때 사는 종5품, 부사는 종6품, 승은 종7품으로 바꾸고, 종8품의 주부 1명을 더 배치하였다.
내용
조선의 광흥창은 기본적으로 고려의 광흥창을 계승한 것이었다. 다만 소속 관리 가운데 부사·승·주부의 인원수가 각각 1명씩 더 늘어났을 뿐이었다. 1405년(태종 5) 3월 육조(六曹)의 직무 분담(職務分擔)과 소속 관사들을 정할 때 풍저창과 함께 호조의 소속 관사가 되었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1414년(태종 14) 1월 관제개혁 때에는 주부가 부승(副丞)으로 명칭이 바뀌었다[『태종실록』 14년 1월 18일].
1459년(세조 5) 9월에는 전곡(錢穀)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광흥창과 인수부(仁壽府)·예빈시(禮賓寺)·도관서(導官署)·의영고(義盈庫)·양현고(養賢庫) 등에 근무하는 관원들은 모두 오랫동안 근무하도록 하였다. 한편, 담당 업무에 정통한 사람을 선발하여 맡기도록 하였다[『세조실록』 5년 9월 21일]. 1464년(세조 10) 1월에는 그동안 봉사의 도장을 사용하여 전곡(錢穀)을 들이고 지출하였기 때문에 부정의 소지가 많았다고 하면서, 서강(西江)에 위치한 분광흥창(分廣興倉)도 그 도장을 호조의 명호(名號)로 개조(改造)하여 쓰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0년 1월 12일]. 1466년(세조 12) 1월에는 광흥창의 사(使)를 고쳐 수로 하였고, 승·부승은 각각 1명씩 없애고 대신에 부봉사 2명을 더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변천
1470년(성종 1) 3월에는 풍저강창(豊儲江倉)을 광흥창에 소속시켰다[『성종실록』 1년 3월 27일]. 『경국대전』에 따르면, 광흥창에는 정4품 수 1명, 종6품 주부 1명, 종8품 봉사 1명, 정9품 부봉사 1명씩을 배치하였다.
구분전(口分田)
정의
문·무 관원들을 제외한 각종 직역 종사자들에게 지급한 전지.
개설
조선초기의 구분전은 고려후기의 구분전을 원칙적으로 계승하였다. 구분전은 각종 직역을 담당하던 이들에게 생계유지를 위해 지급하던 토지였다. 관부(館夫), 전운노비[轉運奴], 급주노(急走奴)뿐만 아니라 인리(人吏), 교동(喬桐)·강화도(江華島)에 배치된 수군(水軍), 그리고 황해도의 철간(鐵干), 봉상시(奉常寺)의 제단지기[祭壇直] 등 각종 유역인(有役人)이 구분전을 지급받았다. 그렇지만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田制改革) 때 대부분의 유역인들에게 지급된 구분전은 혁파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전기에는 자손이 없이 사망한 군인(軍人)의 아내,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6·7품 관직자의 아내, 그리고 8품 이하로 전사한 군인의 아내에게 지급한 전지를 구분전이라고 하였다. 또한 5품 이상으로 부부가 모두 사망하고, 아들이 없이 결혼하지 않은 딸만 있을 때에도 딸에게 구분전을 지급하였고, 딸이 결혼한 뒤에는 구분전을 회수하였다. 그리고 자손이나 친족이 없는 70세 이상의 퇴직 군인에게도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그러다가 고려후기에는 양반(兩班)·군인·한인(閑人)뿐만 아니라 읍리(邑吏)·진척(津尺)·역자(驛子)·직(直) 등에게까지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내용
조선초기의 구분전은 이러한 고려후기의 구분전을 원칙적으로 계승하였다. 관부, 전운노비, 급주노뿐만 아니라 인리와 교동·강화도에 배치된 수군, 그리고 황해도의 철간, 봉상시의 제단지기 등 각종 유역인들에게도 그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구분전을 지급하였다[『세종실록』 12년 12월 1일]. 이처럼 구분전의 지급 대상자는 인리·양인(良人)·신량역천인(身良役賤人)·천인(賤人) 등이었는데, 이들에게 지급한 구분전 액수는 1인당 5결에서 3정 1호(三丁一戶)당 0.5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또한 구분전은 지급받은 사람이 자신의 구분전으로 지정된 민전(民田)에 대해 직접 수세권(收稅權)을 행사하였다.
변천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 때 진척·수참수부(水站水夫)·인리·병정(兵正)·창정(倉正)·옥정(獄正)·객사정(客舍正)·국고지기[國庫直]·지장(紙匠)·동요(東窯)와 서요(西窯)의 와장(瓦匠)·종묘간(宗廟干)·봉상시 제단지기·교동과 강화의 수군·영서정간(迎曙亭干)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역인들에게 지급된 구분전은 혁파되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서종태 외 편, 『고려말·조선초 토지제도사의 제문제』, 서강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1987.
江原正昭, 「高麗前期の口分田について」, 『史潮』 99, 1967.
武田幸男, 「高麗時代の口分田と永業田」, 『社會經濟史學』 33-5, 1967.
국고곡(國庫穀)
정의
군자로 사용하기 위하여 서울의 군자감 창고 및 지방의 주창에 비축해 둔 곡식.
개설
국가에서 수취하는 곡식은 각 관서의 재정 소요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자곡(軍資穀)으로 저장되었다. 이러한 군자곡을 수납하는 창고를 국고(國庫)라 하였고, 국고에 저장되어 있는 곡식을 국고곡이라 하였다. 각 군현에서 수취하는 전세(田稅)는 서울 상납분과 지방 유치분으로 나뉘는데, 그중 지방 유치분은 각 군현의 주창(州倉)에 납입되었다. 주창은 지방에 있었으나 그 회계와 수납은 중앙에서 통제하였다. 서울에 상납된 전세 중에서도 군자감(軍資監)에 납입된 전세는 군자로 비축되었고 이러한 비축분 역시 국고곡이었다.
국고곡은 군자 목적 이외에도 재정 손실분을 만회하거나 구휼 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국고곡의 저치(儲置) 상황은 당시의 재정 비축분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에는 각사위전제(各司位田制)에 의거하여 재정이 운영되었다. 각 관서에는 위전(位田)이 지급되었고 위전으로 설정된 토지의 생산물은 각 관서로 납입되어 관서의 재정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특정 관서의 위전으로 설정되지 않은 토지는 군자전(軍資田)으로 설정되었다. 군자전의 전세는 서울의 군자감에 납입되거나 혹은 각 지방의 주창에 납입되었다. 이러한 곡식을 국가에서는 국고곡으로 관리하였다. 각 지방의 주창은 비록 지방에 있어도 그 수납과 관리는 모두 중앙에서 통제하였다. 주창은 지방 재정으로 사용되는 아록전(衙祿田)·공수전(公須田)의 수입을 관리하는 창고와는 별개였기 때문에 이들 주창을 국고라고 통칭하였다.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國用田制)의 시행이 결정되었고, 이후 각 관서의 위전은 모두 국용전으로 통합되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이에 따라 서울로 상납되는 전세들도 우선적으로 국고곡으로서 군자감 창고에 납입하도록 하여 국고곡의 범위와 양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특히 태종에서 세종 연간에는 국고곡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고, 그 결과 국고곡의 비축이 유래 없이 늘어났다.
국고곡은 비상시 군자로 활용되는 것이었지만, 평상시에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각 관서의 재정이 부족할 때 그 손실분을 보충해 주기도 하였고, 지방에서 축성(築城) 등의 대규모 역사(役事)가 발생할 때 그에 대한 재정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의창(義倉)에서 시행하는 구휼사업에도 국고곡이 상당 부분 사용되었다. 의창을 통한 진휼미의 분급과 환수는 국고곡으로 저축된 곡식을 새것으로 바꾸어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국고곡의 비축량은 그 자체가 나라의 살림을 대변해 주는 구실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관료들은 국고곡의 재고량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재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재정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농경지가 황폐해지고 토지대장인 양안(量案)도 상당 부분 유실되어 전세 수취량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1결당 수취량도 16세기 중반부터 4두(斗)로 하향 평준화되어 갔다. 이에 따라 전세 수취에 의존하던 국고곡의 비축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전세 명목으로 수취한 곡식으로는 관원의 녹봉을 충당하기에도 급급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대동법·균역법 등의 제도를 개혁하여 수세 효율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한편으로 각종 부가세가 증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환곡이 본격적으로 재정을 보충하는 데 이용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군·아문 할 것 없이 환곡을 남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재정 운영 방식이 지속되면서 비축곡의 운영과 관리가 국가의 일원적 통제 아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국고나 국고곡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국고의 명칭은 나타나지 않다가 고종대 갑오개혁을 통해 호조(戶曹)로 재정이 일원화되고 난 이후에야 다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였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국둔전(國屯田)
정의
군자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국유지인 공전을 개간하여 설정한 전지로, 국가의 직영지.
내용
국둔전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고려말엽에는 세력 있는 자들이 사사로이 점유하는 등 폐단이 심하였다. 때문에 조선건국 직후 음죽(陰竹)의 국둔전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혁파하였다.
1409년(태종 9)에 군자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시 설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국둔전 확보를 위한 개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국둔전 경작을 위한 인원 동원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서 1428년(세종 8)에 다시 관둔전(官屯田)과 함께 혁파되었다. 비록 4군 6진이 개척되는 과정에서 평안도와 함경도 연해 지역에 국둔전을 설치·경영하였지만, 이마저도 중지시켰다.
그러다가 문종대에 이르러 평안·함경도뿐만 아니라 황해·강원도의 내륙으로 확대하여 진수군(鎭戍軍)을 동원하여 둔전을 경작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면 보법(保法)과 진관 체제(鎭管體制)의 정비로 국둔전 경작을 위한 노동력 동원이 원활해지면서 국둔전은 삼남 지방으로까지 크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용례
戶曹據京畿節度使啓本啓 諸邑國屯田 竝令船軍治之 留浦軍少 防禦疎虞 請播種五六石以下 令其邑人吏日守奴婢治之 七八石以上 依大典令船軍治之 下詳定所議之 [『세조실록』 12년 11월 29일]
참고문헌
강상택, 「여말선초의 둔전에 대한 일고찰」, 『부산사학』 14·15, 1988.
이경식, 「조선초기 둔전의 설치와 경영」, 『한국사연구』 21·22, 1978.
이재룡, 「조선초기 둔전고」, 『역사학보』 29, 1965.
이종영, 「선초의 둔전제에 對하여」, 『사학회지』 7,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64.
국역(國役)
정의
국가 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노동력을 백성들에게 강제 부과하여 충당하던 방법, 혹은 개별 인민들에게 부과하던 다양한 역의 총칭.
개설
고용 노동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전통 시대의 국가에서는 통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역을 백성들에게 강제로 부과하였다. 이러한 강제적인 인력 동원이 제도화된 것이 바로 역(役)이다. 역의 종류는 항상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국역(國役)으로 후자는 요역(徭役)·잡역(雜役)으로 불리었다. 인민들이 국가에 대해 항상 복무하는 국역은 직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복무자의 입장에서 특정 국역들을 직역(職役)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역은 대대로 세습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신분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국역의 수행은 어떤 직무에 직접 복무하는 방식과 특정 물자를 생산하여 납부하는 방식, 혹은 직무 수행 대신 포(布) 등의 세금을 바치는 방식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국역은 국가의 재정 운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고용 노동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런 경향이 국가 운영에도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국역의 의미가 차츰 퇴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역에 의한 통치 체제가 명목상 퇴색하였다고 하더라도, 국역은 세금의 일부로 전환되어 국가 재정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내용 및 특징
대부분의 조선시대 인민들은 일정 연령 이상이 되면 특정한 노동에 복무하도록, 즉 국역을 지도록 되어 있었다. 예컨대 양반들이 관직에 나아가 관원이 되는 것도 다양한 국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는 양반 중에서도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소수의 관직 진출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양반들은 일반 양인들과 마찬가지로 군역 등을 통해 국역을 부담해야 했다. 이러한 양반들을 위해 국가에서는 특별한 병종(兵種)을 편성하여 이들의 군역 부담을 완화해 주기도 하였다.
대다수의 양인은 군역의 형태로 국역에 종사하였다. 군역의 대부분은 양인들에게 부과되는 병종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군역을 양역(良役)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양인들의 군역은 전체 국역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16세 이상의 양인 남정(男丁)은 60세까지 군역의 의무를 지녔다. 직접 군인이 되어 서울이나 지방에서 복무하기도 하였고, 혹은 봉족(奉足)으로 편성되어 군역을 직접 지는 자들을 경제적으로 보조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정병(正兵) 등으로 편성되더라도 직접 복무하는 대신 일정량의 포(布)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지방에서 수령을 보좌했던 향리역(鄕吏役) 역시 국역의 일종이었다. 조선 초에는 향리들이 서울에 올라와서 벼슬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향리 자신과 자제들의 과거 응시 기회를 박탈하여, 세 아들 중 한 명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향리역을 충당해야 할 자들의 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동시에 향리들의 사회적 진출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편 국가에 필요한 특정 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역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소금 생산을 위한 염간(鹽干), 철 생산을 위한 철간(鐵干), 진상용 생선을 잡는 생선간(生鮮干)[『세종실록』 29년 9월 19일], 얼음을 관리·보관하는 빙부(氷夫) 등 그 종류는 무척 다양하였다. 이러한 특정 물품을 조달하는 역은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태종실록』 13년 8월 30일]. 신량역천이란 법제적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계층이었다. 이 역시 해당 역 부담자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변천
인민에게 다양한 역을 부과하던 국가의 통치 방식은 17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고용 노동이 일반화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6세기부터 직접 군역에 종사하지 않고 포를 대신 납부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것이 17세기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 결국 정부에서도 군역을 포로 대신 납부하는 방식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로 국역은 노동력의 직접 부담보다는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군역, 즉 양역이 대표적인 경우로서 이들이 납부하는 포는 조선후기 국가 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역으로 부과되는 포는 인민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대에는 양인층이 국역으로 부담하는 포를 반으로 줄여 균일하게 1필로 규정하는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었다.
국가가 인민들을 직접 동원하여 이들을 각종 역으로 편성한 국역은 조선의 대민 지배원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울러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성장과 그에 따른 국역의 성격 변화는 사회에 조응하여 변화하는 국가 운영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또한 국역 부담이 포납(布納)으로 바뀐 이후, 국가 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 역시 조선후기 재정 운영의 특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성우, 『조선 중기 국가와 사족』, 역사비평사, 2001.
김석형, 「이조 초기 국역 편성의 기저」, 『진단학보』 14, 1941.
국용전(國用田)
정의
특별한 용도로 지정되어 특정 기관이나 개인에게 전조를 납부하는 위전을 제외한, 일반적으로 국가에 전조를 납부하도록 설정된 모든 토지.
개설
조선초의 재정은 각사위전제(各司位田制)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각 관서별로 전세를 거둘 수 있는 위전이 지급되어 이 위전에서 거둔 생산물로 관서의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國用田制)의 시행이 결정되면서 각 관서별로 설정되어 있던 위전을 국용전(國用田)으로 일괄 통합하였다. 이에 따라 개인이 수조하는 과전(科田), 각 지방관아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설정된 토지 및 특정한 역(役)을 지는 이들에게 분급된 토지 이외에는 모두 국용전에 편입되었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국용전의 시행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각 관서별로 수조권(收租權)을 행사하던 토지를 일원화하여 수세(收稅)의 공정함을 꾀할 수 있었고, 호조(戶曹)에 의한 계획적 재정 운영도 가능해졌다. 국용전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각 관서별로 1년 경비 등을 확립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대한 조사 작업이 착수되었는데, 세종 말년부터 추진되어 세조대 완성된 횡간(橫看)이 바로 그러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세종실록』 10년 5월 1일].
이처럼 국용전의 시행은 수취의 균일화와 재정 운영의 효율화라는 측면에서 보건대, 이전 시기에 비해 진일보한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각사위전제 아래에서의 재정 운영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풍년과 흉년에 따라 각 관서의 재원이 일정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고, 또 호조에서 각 관서의 재정 현황을 일괄하여 파악하기에도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1445년(세종 27) 대대적인 전제개혁을 단행하면서 특정한 용도의 토지 분급을 규정하고 그 외의 토지는 모두 국용전으로 통합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7년 7월 13일). 이에 따라 각 관서는 1년의 경비를 추산하여 호조로부터 재정을 지급받았다.
내용
국용전에는 중앙 각 관서의 위전들과 국가 재정 운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광흥창(廣興倉)·풍저창(豊儲倉)의 위전, 그리고 이들 외의 대부분 토지를 차지하는 군자감(軍資監)의 위전 등이 포함되었다. 국용전에 포함되지 않은 토지들은 대부분 각 지방군현의 운영에 필요한 공수전(公須田)·아록전(衙祿田) 등과 특정 역(役)을 지는 사람에게 경제적 보수로 지급되는 토지였다. 국용전에 포함되지 않는 토지는 『경국대전』 제전(諸田) 조에 일괄하여 기록되었다.
다양한 위전이 국용전으로 통합되면서 백성들의 전조 수납 방식도 간소화되었다. 각 고을에서는 기존의 각사위전제 시행 당시 각 관서에 수납하던 전조의 양을 모두 일괄하여 중앙으로 이송하여 수납하고, 그 나머지는 해당 고을의 주창에 납입하였다. 다만 전조를 수납할 때는 우선적으로 납입해야 할 관서를 정하였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사도시(司䆃寺)·풍저창·광흥창·소격서(昭格署)·양현고(養賢庫)에 먼저 납입하도록 하였고, 나머지를 군자삼감(軍資三監)에 나누어 납부하였다.
변천
국용전은 국가에 전조를 납부하는 대부분의 토지를 포함하였다. 특히 국초 약 100,000결을 상회하였던 과전이 16세기에 소멸하면서 이후에는 대부분의 토지가 국용전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궁방전(宮房田)이나 각 군문·아문 둔전(屯田) 등의 개인 수조지가 증가하였지만 그 전체 양은 10%를 넘지 못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대부분의 민전들은 모두 국용전으로 관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종대 이후 조선시대 내내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강제훈, 『조선초기 전세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이장우, 『조선초기 전세제도와 국가재정』, 일조각, 1998.
오정섭, 「고려 말·조선 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 재정」, 『한국사론』 27,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