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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의 고장 강릉에서 역사를 만나다.
o 기간 : 2013. 11. 12(화)~13(수)
o 장소 : 강릉 일원
특별감시업무 관계자 실무회의를 강릉 라카이샌드파인 리조트에서 있었다. 이날 실무회의를 통하여 향후 특별감시 발전 동향 및 향후 추진방향과 감시업무의 활성화 방안 및 2014년 추진할 주요 주진과제를 확정하였다.
실무회의 마치고 휴식시간을 짬을 내어 리조트 뒤편에 있는 경포대해수욕장을 찾았다. 오후 늦은 시간대이고 철 지난 해수욕장이라 사람들의 왕래는 거의 없었다.
경포대를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는 관광객을 위한 말 수레만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산한 바다이지만 오랜만에 바라보는 파란 쪽빛 바닷물이 생기를 불러일으킨다.
<경포대해수욕장>
실무회의 마치고 강릉전파관리소 전파운용과와의 교류를 통한 화합의 장으로 만찬을 함께하면서 현안 사항과 향후 추진방향 등에 대하여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그린횟집의 쟁반회>
<화합의 장>
실무회의 마치고 다음 날은 솔향의 고장 강릉에서 문화유적 탐방에 나썼다.
□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강릉시 초당동에 소재하는 경포호 부근에 허균·허난설헌 생가터는 문화재자료 제59호(강릉시)로 지정되어 있다. 그 맞은편에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우물과 방앗간 옆으로 좁은 문을 두어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남녀의 구분을 하였다.
<허균·허난설헌 생가>
허난설헌은 1563년(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허난설헌의 이름은 허초희(許楚姬)이다. ‘난설헌(蘭雪軒)’은 초희의 호이며, 난초(蘭)의 청순함과 눈(雪)의 깨끗한 이미지를 따서 ‘난설헌’이라 지은 것이다.
<허난설원 동상>
허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선조 3년)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뒷날 주옥같은 시 213수를 남겼다. 허난설헌은 15세 때인 1577년에 서당 김성립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떠났다.
<허균․허난설원 기념관>
남동생 허균은 집안에 흩어져 있던 허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1608년에 ‘난설헌집’을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 실려 있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藩)과 양유년(梁有年)의 서문이 책머리에 실려 있다. ‘난설헌집’은 1692년 동래부(東萊府)에서 중간(重刊)하였다.
□ 강릉 오죽헌(烏竹軒)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으나 수재 최응현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인 이사온(李思溫,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 용인 이씨(신사임당의 어머니)에게 상속되었다.
이사온은 슬하에 아들이 없이 무남독녀인 이씨 부인(신사임당의 어머니) 하나만을 두었고, 이씨 부인도 신명화(申命和)와 결혼하였으나 역시 아들이 없이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그중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에게 글을 배운 뒤 문리와 논어, 맹자, 중용, 대학 등을 스스로 깨달을 만큼 뛰어났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영재, 수재, 신동으로 통한다.
용인 이씨는 재산을 물려줄 때 외손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권처균에게는 제사를 받들고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외할머니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權處均)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집 이름이 되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주심포와 유사한 이익공계 형식을 보이고 있어, 주심포 집에서 익공식 집으로 넘어가는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정은 고미반자를 두었으며 삼면은 창호문으로 둘렀다.
<오죽헌의 정문>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조선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 외에도, 이 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남으로써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1963년 1월 3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 내의 문성사>
문성사는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 (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되었다.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 ‘문성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어제각>
경내 어제각(御製閣)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과 율곡이 유년기에 사용하였던 용연벼루를 보관하는 유품 소장각이다. 임금의 어명으로 지었다하여 ‘어제각’이다. 현재 이곳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초상화, 오죽헌과 벼루가 도안되어 있는 오천원권 지폐가 전시되어 있다.
<오천원권 지폐의 배경이 된 곳>
율곡이 10세 이전에 쓰던 이 용연벼루에는 매화가지가 새겨져 있다. 꽃망울이 없고 움트는 가지만 있는 것은 싹이 피고 열매를 맺기에 율곡은 아직 어리다 하여 이 벼루가 닳도록 먹을 갈아 써서 매화꽃이 피고 열매 맺듯이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라고 전한다.
□ 선교장
선교장은 선교장 전경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도 하고 경포호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고도 하여 이름 붙은 선교장(船橋莊)은 조선시대 사대부 이내번의 집이다.
조선말기의 전형적인 사대부의 저택으로 안채, 사랑채(열화당), 별당(동별당,서별당), 정각(활래정), 행랑채등 민가로서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조선후기의 주거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10대손인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너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 있다.
열화당(悅話堂)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형식의 건물로 아주 운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선교장 전경>
동별당(東別堂)은 안채와 연결된 주인 전용의 별당 건물로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쪽에 2개, 서쪽에 1 개의 온돌방을 만들고 앞면에는 넓은 툇마루를, 뒷면과 동쪽은 좁은 툇마루를 돌렸다.
활래정(活來亭)은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연못 위에 세운 정자로 순조16년(1816)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세웠다. 정자명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西有感) 중 "위유두원활수래(爲有頭源活水來)"에서 땄다고 한다. 이 건물은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 접객용 다실이 있다.
이외에도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 서재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이 있는데 소실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또한 건물의 측면에는 원래 창고였으나 개화기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학교(東進學校)터가 있다.
□ 매월당 김시습기념관
조선시대 천재문학가의 채취를 맡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강릉 경포대 선교장 옆에 위치한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이 바로 그곳이다.
지난 2005년 12월에 개관한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은 전통한옥구조의 지상1층 건물로 총면적은 310㎡이며, 매월당 김시습과 관련된 전시물 42점이 전시되어 있다.
매월당 선생의 문화적 업적과 얼을 계승고자 건립된 김시습기념관은 그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영상실, 매월당문집 영상자료 3개시설과 체험학습으로 한국인물찾기, 김시습선생이 3살 때 지은 시를 그래픽으로 영상체험 할 수 있는 2개 시설 등이 있다.
또 김시습선생의 대표작인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매월당집 영인본 등 고서들이 전시된 고문학 체험의 장이다.
주변에는 경포대해수욕장, 초당두부마을 등 관광명소들이 즐비하고 오죽헌과 선교장 등의 문화유산들이 위치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최갑석 강릉시 문화예술과장은 “매월당김시습기념관은 규모는 작지만 하루 30~50여명이 찾는 강릉의 명소중 하나다 ”며 “앞으로 한문으로 된 고서를 홀로그램을 이용, 한글로 번역해 관람객들이 고서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고 설명했다. 문의 644-4600
□ 참소리축음기 에디슨과학박물관
손성목 관장이 40여 년간 60여 개국에서 축음기를 모아 1992년 문을 연 세계 최대 규모의 오디오 박물관이다. 17개국에서 만든 축음기 4,000여 점 가운데 1,400여 점의 축음기와 음반 15만 장, 그리고 8,000여 점의 음악 관련 도서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어, 100년 소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디슨박물관보다도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만든 축음기 진품들이 더 많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전시된 기기들은 생생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98%나 되며 아메리칸 포노그래프(전세계 6대 중 유일하게 현존)와 같은 세계에서 하나뿐인 기기도 있다. 또한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베어드의 30라인 텔레비전)을 비롯하여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인 유성기 1호(틴호일:1877년)부터 오늘날의 오디오까지 세계 오디오의 발전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리의 세계관에는 축음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고딕 르네상스식 오르간과 원통형 원반형 플레이어 피아노, 1800년대에 주로 듣던 뮤직 박스, 1920년대 자동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영상의 세계관은 에디슨의 영사기에서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 CD, LD, DVD에 이르기까지 영상과학의 발자취를 에디슨을 비롯한 각 시대 위인들의 일생을 통해 보여준다. 또 빛의 세계관에서는 가스등에서부터 세계 최초의 전구에 이르기까지 조명기구의 발전사를 볼 수 있다. 에디슨 발명품관에는 에디슨의 3대 발명품인 축음기·전구·영사기를 비롯한 에디슨 발명품 8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세계 최초의 밀랍관 축음기(에디슨 클라스 엠), 1956년 미국 일렉트로 보이스사가 제작한 음향재생기기 파트리션 스피커, 최초의 리모트컨트롤 기능을 가진 오토매틱 그래모폰, 1925년 미국 빅터 록킹 머신사에서 제작한 크레덴자(CREDENZE) 등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서 들여온 영국제 EMG IMNN는 당시 3개밖에 만들지 않은 수공품으로 최고의 음색을 자랑한다.
□ 경포대
경포대는 강릉시 저동, 운정동, 초당동의 경포호수 북쪽에 위치한 누각으로, 경포대해수욕장과 가까운 곳에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경포호수를 내려다보는 위치인데, 경포대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은 많아도 경포대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포대는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 안렴사였던 박숙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았다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세웠다가 그 뒤 1508년(중종 3)에 강릉부사 한급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정면 5칸, 측면 5칸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경포대는 우물천장을 하게 마련인 팔작지붕인데도 연등천장이며, 주춧돌도 자연석을 그대로 놓은 뒤 기둥에 딸린 부위만 둥글게 다듬어놓았다. 1626년(인조 4) 강릉부사 이명준이 크게 중수하였다.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던 장유가 지은 『중수기』에는 “태조와 세조도 친히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라고 적혀 있다.
현재의 건물은 1745년(영조 21) 부사 조하망이 세운 것이며, 낡은 건물은 헐어낸 다음 홍수로 사천면 근처 앞바다까지 떠내려 온 아름드리나무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관동팔경 중 첫손에 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경포대의 현판은 전서체와 해서체로 쓴 것 두 개가 있다. 해서체는 순조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이익회가 썼고, 전서체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 유한지가 썼다.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을 썼다고 알려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라고도 하고 또는 조선 전기 4대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인 양사언의 글씨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고, 뒷부분의 파손된 두 글자는 후세 사람이 써서 덧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 숙종의 어제시와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사람의 글이 걸려 있는 가운데 율곡 이이가 열 살 무렵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도 편액 되어 있다. “하늘은 유유하여 더욱 멀고 달은 교교하여 빛을 더하더라.”라는 글도 있지만, “해 뜨는 이른 아침이나 달 밝은 가을밤에 경포대에 올라 경포호를 굽어보거나 호수 너머 동해의 푸른 바다를 대하면 속세는 간데없이 온통 선경이요”라고 표현했던 옛 사람의 시가 주위의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등이 알맞게 어우러진 운치 있는 경관을 보면 생각난다.
일찍부터 강릉 사람들은 경포대에서 볼 수 있는 여덟 개의 경치를 경포팔경이라 불렀는데,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해돋이와 낙조 그리고 달맞이, 고기잡이배의 야경, 노송에 들어앉은 강문동, 초당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등이 경포팔경이다.
<경포대에서 바라본 경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