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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상인의 새살낙니기(塞薩洛尼基·테살로니키) 여행기(2/4)
로툰다-갈레리우스 개선문-갈레리우스 황궁
우리는 에그나티아 도로가 지나가는 사거리에 자리 잡은 신트리바니 광장(sintrivani square)에 도착했다. 그리스어 신트리바니는 분수라는 뜻이니 이곳은 우리말로 분수광장이다. 그런데 광장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하고는 달리 이곳은 그리 크지 않은 원형의 분수가 설치된 손바닥만 한 터였다. 이 분수는 오스만제국 말기에 이곳에 있던 동쪽성벽이 헐리면서 휑해진 주변 환경을 단장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하는데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예스런 멋을 풍겨 볼만했다. 분수 꼭대기에는 이집트 양식의 연필 탑(오벨리스크)을 세워 상승감을 주었고, 중간은 그리스 양식의 사자머리와 코르누코피아 부조로 장식했는데 사자 입에서 물이 나와 제법 운치가 있다. 동그란 하단은 물이 담기는 곳으로 오스만 풍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 분수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지중해 동부를 호령했던 이집트, 그리스, 오스만 세 문명의 혼합양식으로 만든 것이다.
로마문명의 영향이겠지만 유럽도시를 여행할 때면 조형미가 있는 분수를 자주 보게 되는데, 특별히 나의 기억에 남는 곳은 스페인 마드리드이다. 이 도시에는 크고 화려한 분수와 작지만 앙증맞은 분수가 주요 거리나 광장에 설치되어 있어 뙤약볕에 도시를 걷느라 지친 여행객의 눈을 상쾌하게 해주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분수가 없다. 동아시아 문명에는 분수가 없었기에 유럽도시 못지않게 예쁜 분수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21세기 현대에 들어서도 인상적인 분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건축예술과 조각미술의 수준이 유럽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반도체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세계 최고수준에 도달했듯이, 우리나라 건축과 조각분야도 전문가들의 수준이 향상되고 시민들의 심미안이 함께 높아져서 우리만의 색깔과 멋이 있는 분수가 광장에 세워질 날을 고대해 본다.
※ 딱 하나 인상적인 분수가 있긴 하다. 서울 여의도 공원 근처 한화빌딩 앞 물고기 분수로, 물고기 몸통에 색깔 유리를 모자이크한 작품인데 매우 아름답다. 다만 이 물고기가 분청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가물치를 닮았으면 가물치의 역동적인 모습과 증권가 건물이 더욱 잘 어울렸을 텐데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다소 밋밋한 잉어를 닮은 점이 살짝 아쉽다.
※ (위 사진) 신트리바니 광장(분수광장) 주변 풍경 (아래 그림) 옛 로마제국 시대 테살로니키 성벽의 동문에서 개선문으로 이르는 길: (A) 동쪽 성벽의 외성, (B) 삼각형 방어벽을 갖고 있는 내성, (C) 동문 앞 다리, (D) 동문, (E) 동서대로 (데쿠마누스 막시무스), (F) 개선문
신트리바니 광장이 있는 사거리는 고대 로마시절에 테살로니키 도심으로 진입하는 동쪽 성문이 있던 곳이다. 로마인들은 카산드리아 게이트로 불린 동쪽 성문으로 들어가 데쿠마누스 막시무스를 따라 걷다가 로만 아고라에 들러 허기를 채운 다음, 골든게이트로 불린 서쪽 성문으로 나가 비아 에그나티아를 따라서 로마로 갔다. 분수광장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 서쪽의 갈레리우스 개선문 방향으로 몇 발자국 옮기면 오른쪽 너른 잔디밭 위에 동쪽 성벽을 이루었던 성벽의 잔해(기단부와 벽체 일부)를 볼 수 있다.
BCE 315년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왕이 테살로니키를 건설하면서 쌓은 성벽은 홑겹이었지만, CE 4세기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더 견고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기존 성벽의 안쪽에 또 하나의 성벽을 쌓아 두 겹 성벽으로 만들었다. 이 때 쌓은 내성에는 직사각형 보루와 삼각형 방어벽을 일정 간격마다 교대로 설치했는데, 이곳 사거리에 남아있는 성벽잔해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동로마 초기에 쌓은 테살로니키 성벽은 전체 길이가 7km이며 현재 4km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보다 온전한 형태의 동로마 성벽을 보고자 한다면 북쪽의 아크로폴리스나 서쪽의 골든게이트로 가야 한다.
6-16. 신트리바니 광장(분수광장)의 분수와 테살로니키 동쪽 성벽의 잔해 (1) 가로방향으로 뻗은 대로가 에그나티아 거리이다. 노란색 동그라미 친 곳에 동쪽성문의 성벽 잔해가 남아 있다. (2) 19세기말 오스만제국이 세운 분수가 있어 분수광장이라 불린다. (3) 동쪽성벽의 잔해에서 두 겹 성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A: 외성, B: 내성의 삼각형 방어벽)
고대 로마도시는 기본적으로 장방형 구조였다. 로마인들은 동서방향의 거리를 데쿠마누스라고 불렀으며, 남북방향의 도로를 카르도라고 불렀는데, 마주 오는 전차 두 대가 무난히 교차할 수 있는 폭 6m의 대로에는 막시무스라는 단어를 붙여 각각 데쿠마누스 막시무스와 카르도 막시무스라고 불렀다. 폼페이나 테살로니키와 같은 로마의 대도시는 데쿠마누스 막시무스와 카르도 막시무스가 교차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전체 도시를 직사각형 그물코처럼 구획 짓고 여기에 맞춰 건물을 세웠다. 현대 테살로니키의 동서대로인 에그나티아 거리는 땅 밑에 파묻힌 옛 로마의 데쿠마누스 막시무스 옆으로 평행하게 달리는데, 2006년부터 이 거리를 따라서 지하철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테살로니키의 메트로 시스템은 그리스 아테네에 이어 두 번째이지만 교통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완전 무인자율주행 시스템으로 건설된다고 한다.
그런데, 전체 길이가 14km밖에 안 되는 메트로 라인에서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베니젤로스 역과 신트리바니 역을 공사하던 중에 지하에서 CE 4세기경 로마 도시유적이 발견되는 바람에 완전개통이 몇 년 째 뒤로 미뤄지고 있다. 이곳에서 30만 점에 달하는 유물을 수습하는데 몇 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가장 어려운 숙제는 발굴된 지하도시 유적의 보존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그리스 여행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2020년 봄까지 공사를 마치고 메트로를 개통한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이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나 여행기를 마무리 지을 무렵에는 개통시기가 2023년 봄으로 넉넉하게 늦춰져 있었다. 그런데 기사에 딸린 동영상이 있어 살펴보았더니, 메트로 역사의 지하복도 한쪽에 설치된 유리 진열장 안에 옛 로마도시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아마 이번에는 목표한 해에 메트로가 개통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동쪽성벽의 잔해를 주마간산으로 구경하고, 에그나티아 거리를 따라 갈레리우스 개선문이 있는 서쪽으로 걸어갔다. 지금부터 이천 년 전 기독교 전도를 위해 빌립보를 출발하여 테살로니키에 온 사도바울도 현대 에그나티아 거리의 옛 이름인 데쿠마누스 막시무스를 따라서 도심으로 들어왔겠지만 그때는 개선문이 세워지기 전이었다. 이 거대한 아치는 CE 298년, 로마제국의 카이사르(caesar·부제)였던 갈레리우스가 아르메니아의 사탈라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298-303년 사이에 세운 것이다. 거친 세월의 풍파에 개선문은 원형의 1/3정도만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온 동방박사에게 나도 한 때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려는 듯 은근한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개선문은 그리스어로 아치를 뜻하는 카마라(kamara)로 불리기도 한다. 카마라는 테살로니키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라서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하는데, 이 날도 코끼리 다리처럼 생긴 육중한 사각기둥 주위로 청춘남녀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있어 초저녁 거리에는 생기가 넘쳐났다.
6-17. 갈레리우스 개선문 서기 298년, 사산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동서대로와 남북대로 교차점에 세웠다. (1)-(2) 동쪽에서 바라 본 모습. 원래 8개의 기둥이 있었지만 동쪽(앞쪽)에 있던 4개는 전부 사라졌다. (3)-(4) 서쪽에 있던 4개 기둥 가운데 3개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동서로마로 분리되기 이전의 기념물이기에 테살로니키의 초기기독교 및 비잔틴 건축물로 한정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는 빠져있다.
이 승리의 아치는 데쿠마누스 막시무스(현재 에그나티아 거리)와 행진거리(현재 디미트리오 고나리 거리)의 교차점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개선문만 홀로 서있던 게 아니었다. 남북대로인 행진거리를 따라서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로툰다-(사거리) 갈레리우스 개선문- 갈레리우스 황궁 복합단지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이 기념비적인 로마건축물은 모두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에 걸쳐 갈레리우스 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는 왜 하필 테살로니키에 황제 건축물을 잔뜩 세웠을까? 유물과 유적지는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므로 그것에 얽힌 역사배경을 알고 구경하면 훨씬 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니 조금 지루하더라도 CE 3세기 로마제국의 정세를 간단히 짚어보자.
로마제국은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첫 황제가 되어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칭호를 받은 이후 200년간 번영과 평화를 누렸는데 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CE 235년 북방 게르만족 원정에 나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1차 전투에 승리했음에도 게르만족에 화평을 제안하였는데 이에 반감을 품은 황제의 군대가 그를 암살했다. 이 사건을 기폭제로 해서 각 지역의 장군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서로 치고받는 내전을 오랫동안 벌였고 이로 인해 로마제국은 큰 위기에 빠졌다. CE 235-284년에 이르는 약 50년간 25명의 황제가 바뀔 정도로 혼란했던 이 시기를 서양사에서는 군인황제시대(military anarchy) 또는 3세기의 위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라고 부른다. 제국의 흥망사를 훑어보면, 한 때 위대했던 제국이 영원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강력한 이민족의 침입이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분열이듯이 로마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랜 내전으로 인해 로마제국의 정치는 불안정해졌고 국경수비는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를 틈타 과거보다 훨씬 강력해진 이민족이 빈번하게 국경을 침입하였다. 황제는 전비마련을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는데 이로 인해 상업이 크게 쇠퇴하였고 각지에서 소작농의 반란에다 역병까지 돌아 로마제국은 붕괴 일보직전이었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에 빠진 로마제국의 대혼란을 수습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체제를 다시 회복시킨 이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기간: CE 284-305)였다. 그는 지중해를 호수처럼 에워싼 드넓은 로마제국의 영토를 황제 한 명이 감당하기엔 벅차다고 판단하여 사두정치(tetrarchy)를 창안하였다. 이것은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두 명의 정제(augustus·아우구스투스)가 맡고 정제는 부제(caesar·카이사르)를 한명씩 두어 방위를 분담하는 통치방식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동방정제가 되고 부제로 갈레리우스를 임명하면서 제국의 동방에 위치한 발칸반도의 방위를 맡겼다. 갈레리우스는 부제시절이었던 3세기 후반에 자신의 통치영역 안에 있는 테살로니키에 황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CE 298년, 아르메니아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나르세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을 격파한 그는 로마에 매우 유리한 강화조약을 맺고 발칸으로 돌아와 테살로니키 황궁에 머물렀다. 그는 이 무렵에 갈레리우스 개선문을 세웠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5년 스스로 정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갈레리우스는 당시 동부제국의 수도 역할을 했던 니코메디아에서 동방정제로 취임하였다.
테살로니키는 갈레리우스가 부제시절이었던 CE 299-303년과 정제시절이었던 CE 308-311년 두 기간에 걸쳐 황제도시가 되었다. 갈레리우스가 테살로니키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테살로니키에 주조소(mint)를 설치하고 자신의 얼굴 옆모습을 새긴 동전을 발행한 것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황궁 터, 그리고 로마영토의 수호자로서 자신의 당당한 모습을 새긴 개선문의 프리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 성인록에는 그가 테살로니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망하던 해인 311년, 그는 로마 가톨릭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테살로니키는 갈레리우스 황제가 다스리는 동부로마의 본부 역할을 했던 시기에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군사적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갈레리우스는 311년 심각한 병에 걸려 서거했다. 여우가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수구지심(首丘之心)이란 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지상정인 듯, 그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했던 테살로니키가 아닌 자신의 고향인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로 돌아가 그곳에 묻혔다.
우리는 개선문의 코끼리 다리에 부착된 대리석 패널(프리즈)의 부조를 살펴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갈레리우스 개선문의 외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로마 개선문, 예를 들면, 이태리 로마의 포로 로마노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하고는 완전히 다르게 생겨 생소한 느낌이 든다. 이 개선문은 동서대로와 남북대로의 교차지점에 굵직한 벽돌기둥을 8개 세우고 이 위에 벽돌아치를 얹고 다시 이 위에 삼각형 지붕과 돔을 얹은 구조이다. 험난한 세월을 겪으면서 원형 돔이 얹혔던 지붕과 동쪽벽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서쪽벽체에 딸린 기둥 4개 가운데 3개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서쪽의 정중앙 아치를 지탱하는 코끼리 다리 두개에는 사면을 빙 둘러 대리석 패널이 부착되어 있는데, 사각형 다리의 삼면에는 각 면마다 각기 네 개의 패널이 부착되어 있고, 바깥쪽 한 면에는 두개의 패널이 부착되어 있어 살아남은 남쪽과 북쪽의 두 기둥에는 총 28개(=3면x4개+1면 2개)x기둥 2개)의 대리석 패널이 부착되어 있다. 대리석 패널에는 개선문을 세우게 된 역사적 사건과 로마 미술에서 승리를 나타낼 때 흔히 사용하는 상징적 장면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오랜 세월에 북쪽 기둥의 프리즈는 손상과 마멸이 심한 편이고, 남쪽 기둥의 프리즈가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게 많이 남아있어 볼만 하다.
6-18. 갈레리우스 개선문의 부조 (1) 살아남은 서쪽벽체의 기둥 3개와 아치 (2) 남쪽기둥의 북쪽 면을 장식한 프리즈는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위에서 두 번째에 유명한 갈레리우스 황제와 페르시아 황제의 전투장면이 새겨져 있다. (3) 남쪽기둥의 동쪽 면을 장식한 4개 프리즈 가운데 위에서부터 2-3번째 부조를 보여준다.
보존상태가 괜찮은 개선문 남쪽기둥의 부조 몇 장면을 감상해보자. 사진(6-18(2))에 보인 것처럼, 남쪽기둥의 북쪽 면(아치의 안쪽 면)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4개의 대리석 패널이 부착되어 있다. 맨 위에서부터 첫 번째 패널에는 카이사르 갈레리우스가 어느 한 도시를 출발하여 다른 도시에 도착하는데 이곳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패널의 양 끝에 있는 벽감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있다. 카이사르는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바퀴가 둘 달린 전차에 올라타 행진한다.
위에서 두 번째 프리즈는 이 개선문을 장식한 28개 프리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갈레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나르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있다. 말 위에 올라 탄 카이사르의 흉갑에는 늑대와 두 소년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로마를 상징한다. 그의 앞에는 말에 올라탄 수염을 길게 기른 페르시아 인이 있는데 아마도 그는 페르시아의 샤(황제), 나르세로 보인다. 두 사람은 전장에서 직접 마주친 적은 없지만 조각가가 창조력을 발휘해서 갈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의 나르세 황제를 창으로 공격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승리의 화관을 발톱으로 꽉 쥔 독수리 한 마리가 그에게 접근하고 있다. 로마황제는 앞발을 높이 쳐 든 말 잔등에 단단히 앉아 있는 반면, 페르시아 왕은 거의 말 위에서 떨어지려고 한다. 겁에 질린 페르시아 인들은 갈레리우스의 말발굽 아래에서 웅크리고 있다. 이 프리즈는 카이사르 갈레리우스의 용맹과 힘을 보여준다.
위에서 세 번째 프리즈는 사두정치를 이루는 네 명의 통치자(동방정제와 부제, 서방정제와 부제) 사이의 조화와 통일을 나타낸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천상의 아치’ 위에 앉아 있는데 이는 전능함을 나타낸다. 두 명의 카이사르(부제)인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동·서방의 아우구스투스 옆에 각기 서 있다. 카이사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은 속주를 의인화한 것이다. 이들을 향해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가 오른손을 내밀고 있는데 이것은 속주에 대한 황제의 은전을 나타낸 것이다. 이 프리즈의 주제는 사두정치의 지배방식과 위대함을 보여준다.
맨 아래에 있는 네 번째 부조의 장면은, 사진의 아랫부분이 잘려서 안보이지만, 일곱 개의 벽감 안에 각기 새겨 넣은 일곱 명의 승리의 여신 니케를 나타낸 것이다. 페플로스를 걸치고 왼손에는 야자수 가지를 들고 오른손엔 작은 조각상을 잡고 있는 똑같은 형태의 인물상을 반복해서 벽감 안에 새겨놓았는데 상당히 마멸되었다.
사진(6-18(3))은 남쪽 기둥의 동쪽 면을 장식한 네 개 프리즈 가운데 맨 위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프리즈이다. 두 번째 프리즈는 갈레리우스 부제가 패배한 페르시아의 평화사절단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얼굴 대부분이 망실된 부제는 왼쪽에 있다. 부제를 둘러싼 군인들과 그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있는 다섯 명의 페르시아 사람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짧은 키톤을 입고 긴 부츠를 신고 있는 여성 뒤쪽으로 긴 옷을 입고 있는 네 명의 여인이 있다. 여인들은 머리 위에 성벽관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나라 또는 도시를 의인화한 것으로, 네 명의 여인은 네 명의 공동 통치자(tetrarch)가 각기 다스리는 지역을 뜻한다. 반면에 이 네 명의 여인들을 이끌고 있는 마치 아마조네스처럼 깡총한 옷을 차려입은 여성은 로마를 의인화한 것이다.
맨 위에서 세 번째 프리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정제와 갈레리우스 부제가 승리를 축하하는 희생제를 거행하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 프리즈에는 제단을 중심으로 왼쪽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오른쪽의 갈레리우스가 헌주그릇을 손에 들고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제단 뒤쪽으로 두 명의 황제 사이에 두 명의 여인이 있다. 한 여인의 머리 위에는 오이코메네(OIKOUMENE)란 이름의 일부가 남아 있다. 두 번째 글자는 화합이란 뜻의 오모노이아(OMONOIA·harmony)로 해석된다. 이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가 사두정치의 수호신에게 승리의 희생제를 치루는 장면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이 제식은 로마의 군사기지가 있던 안티오키아(Antiocheia·안티옥)에서 거행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갈레리우스가 개선문에 부조로 새겨 넣을 만큼 찬양했던 사두정치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사두정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세기의 위기를 종식시키고 CE 293년에 고안한 지 불과 20년 만인 CE 313년에 막을 내렸다. 사두정치가 오래가지 못한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회민주정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최고 권력은 결코 나눌 수가 없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다. 사두정치는 결국 또다시 황제끼리 내전을 불러왔다. CE 311년 갈레리우스 동방정제가 병사한 이듬해부터 시작해서 CE 324년까지 약 22년간 동·서방 정제와 부제 사이에 치고받는 치열한 내전을 벌인 끝에 당시 서방부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최후 승자가 되어 동방과 서방을 다시 하나로 통합하고 유일 황제가 되었다.
이후 로마제국은 한동안 한 명의 황제로 대물림하다가 또 다시 동·서 황제로 나뉘었다. 그것은 황제 한 명이 제국의 드넓은 국경을 따라 동분서주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이민족의 도전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황제를 두 명 세우게 되면 동방 또는 서방황제의 사망 시 승계과정에서 파열음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로마제국은 또다시 서방로마의 황제승계를 두고 내분에 휩싸였다. 이 상황을 무력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동방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CE 394년에 그는 최후 승자가 되어 동·서방을 통합한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CE 279년 동방황제로 즉위했던 해에 심한 병을 앓고 난 뒤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CE 380년 초에 이른바 테살로니카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니케아 신경을 신봉하는 삼위일체 기독교만이 합법적인 제국의 종교이며 가톨릭(catholic·보편성)이라 부르는 유일한 종교라고 선언한 것으로 이때부터 기독교는 로마국교가 되었다. 그는 CE 392년에 이교 금지령을 내려 델피신전을 폐쇄하였다. 신전이 폐쇄되기 직전인 CE 362년에 율리아누스 로마황제는 개인주치의이자 친구인 오리바시우스를 델피에 보내 봉납물을 바치고 퓌티아로부터 신탁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내 궁전이 땅으로 추락했다고 황제에게 전하라. 포이보스(Phoebus·아폴론의 별칭)는 더 이상 그의 집도, 예언의 월계수도, 예언의 샘도 지니고 있지 않노라. 물은 이미 말라 버렸노라.”
CE 393년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신탁은 예언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났다.(all is ended.)”는 탄식이었다. 이 해에는 1천년이상 계속되었던 올림픽 경기도 막을 내렸다. 생기발랄했던 신화의 시대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암흑기라 불리는 기독교 유일신앙의 시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CE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임종 직전에 로마를 동서로 분리하고 어린 나이의 두 아들에게 각각 나누어주었다. 마침내 천년제국 로마는 동서로 완전히 분리되고 두 번 다시 통합되지 않았다.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와 허약해진 국방력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던 서로마 제국은 CE 476년에 멸망하였으며, 정치·군사·경제적으로 탄탄했던 동로마 제국은 이후 1천년을 더 버티었다.
이렇게 갈레리우스 개선문의 부조를 설명하다가 조금 지루하지만 갈레리우스 시기의 사두정치부터 동서로마의 분열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역사를 개관한 것은 이 개선문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테살로니키의 15개 비잔틴 건축물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 개선문은 현대 테살로니키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적일 뿐만 아니라 3세기 말-4세기 초 로마제국의 사두정치시대에 지어진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레리우스 개선문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것은 CE 300년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CE 395년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어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의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테살로니키의 15개 건축물은 모두 비잔티움 시대를 대표하는 초기 기독교 교회와 건축물로 한정되어 있다. 갈레리우스 동방부제의 지시로 테살로니키의 남북대로를 따라서 세운 세 개의 건축물, 즉 로툰다-개선문-황궁 복합단지 중에서 로툰다만이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건물이 비록 비잔티움 시대 이전에 지어졌지만 4세기말 이후 기독교 교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6-19. 갈레리우스 개선문에서 바라 본 로툰다 (1) 로툰다는 바닥이 둥근 원형건물을 일컫는다. CE 306년에 건립된 테살로니키 로툰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2) 행진거리를 따라 세워진 개선문과 로툰다의 복원도 (CE 4세기 초)
개성상인의 로툰다(Rotunda) 관람기
개선문이 세워진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125m 떨어진 거리에 조명으로 훤히 밝힌 로툰다(rotunda)가 보였다. 로툰다는 바닥이 둥근 원형건물을 일컫는 건축용어로, 로마의 판테온(pantheon·범신전)도 로툰다이다. 테살로니키 로툰다는 직경 24.5m의 원기둥 벽체에 둥근 돔을 얹은 것으로 지상에서 돔 중앙까지 높이가 30m에 달하는 상당히 우람한 벽돌 건물이다. 그런데 원기둥 모양의 바깥 벽체가 둥그런 돔 위쪽으로 치솟은 탓에 외부에서는 거대한 돔이 보이지 않아 약간 아쉽다. 로마 건축가가 건축미를 약간 손상시켜가면서 이렇게 설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파손되기 쉬운 돔을 보호하기 위한 기와지붕을 얹기 위해서였다. 그는 무거운 기와지붕을 떠받는 서까래를 고정시킬 벽체가 필요했는데 원기둥 벽체를 돔 위쪽으로 훌쩍 올리고 여기에다 서까래를 고정시킴으로써 건축공학적 문제를 해결하였다. 높이가 30m이면 대략 10층 건물에 해당한다. 로툰다처럼 10층 높이의 벽돌건물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벽체가 두꺼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로툰다 하단의 벽체 두께는 자그마치 6.3m인데 로마 건축가는 이 두터운 벽체에 둥근 아치천장을 갖는 8개의 벽감을 일정간격으로 설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하면서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로툰다의 용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 건물은 갈레리우스 황제가 자신의 마우솔레움(mausoleum·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본 따 지은 황제숭배 신전이었거나 제우스 신전이었다고도 한다.
CE 306년 무렵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로툰다는 수십 년간 사용하지 않다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지시로 4세기말에 기독교 교회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로툰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이자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는 교회 건축양식이란 게 따로 없던 시절이라 로툰다나 바실리카와 같은 기존 공공건물을 교회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테살로니키 기독교인들은 원형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서 동쪽 벽감의 벽을 허물고 여기에 반원형 후진으로 마감한 직사각형 모양의 지성소를 이어 붙였다. 또한 이 시기는 아직 기독교 미술이 정립되지 않은 때라서 교회 내부를 어떤 도상학적 콘셉트로 꾸미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당면한 숙제였다. 당연히 초기 기독교 예술가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궁리한 끝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인 아우구스투스(로마황제)가 머무는 황궁의 장식과 황제숭배컬트에서 일부 빌리기로 했다.
6-20. 로툰다 구조 (1) 지상에서 돔 꼭대기까지 높이는 30m 이고 돔 높이만 10m이다. 돔 위에 지붕을 씌웠다. (2) 로툰다 내부. 둥실한 돔을 세 영역으로 나누어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3) 평면도 (4) 남쪽에서 바라 본 로툰다
자, 그러면 초기 기독교 예술가가 어떤 도상학적 콘셉트를 가지고 세계 최초의 교회 가운데 하나인 로툰다 내부를 꾸몄는지 안으로 들어가 구경해보자. 우리는 13세기 동서무역을 위해서 고려 벽란도에서 출발한 개성상인으로 변신하여 오늘 오전에 테살로니키 항구에 도착했다고 상상해보자. 고려청자는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인기 짱이었다. 고려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는 신하를 급히 보내 산딸나무 꽃무늬나 들국화 무늬가 장식된 최상품 고려청자 수십 점을 싹쓸이 해갔다. 나머지 중하품은 로만 아고라에 풀어놓기가 무섭게 테살로니키 부자들과 중간상인들이 모두 사갔다. 배에 싣고 온 고려청자 수천 점을 불과 반나절 만에 팔아치운 개성상인은 시간도 남고해서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한 테살로니키에서 가장 볼만하다는 로툰다 구경에 나섰다. 로툰다 교회는 원형의 건축물과 내부를 장식한 모자이크 성화가 아름다워 지중해 연안의 기독교인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였다.
로툰다 주변은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개성상인은 순례행렬의 꽁무니에 붙어서 로툰다 출입구인 남쪽 통로(bay)를 통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통로의 둥근 아치천장에는 황궁의 벽이나 거실바닥을 꾸미는데 사용했던, 지극히 세속적이지만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예쁜 새와 과일 문양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통로에 들어선 순례일행과 개성상인은 처음 보는 멋진 장식문양에 이끌려 하나같이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장식문양의 아름다움에 저마다 경탄을 하였다. 모자이크로 치장된 통로는 지상세계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건물 중앙의 거대한 돔에 표현된 천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통로를 통과하여 중앙의 돔에 의해 만들어진 널찍한 공간, 즉 네이브(신자석)로 들어섰다. 순례자들은 거대한 돔을 360도 빙 돌아가면서 돔의 벽면을 장엄하게 장식한 모자이크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비잔티움 예술가가 창안한 돔 모자이크 구성의 주제는 천상의 세계(the heavenly world)이다. 그는 천상의 세계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거대한 돔을 맨 꼭대기에서 아래 방향으로 삼분할하고 각 분할영역마다 특정 주제를 모자이크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6-21. 로툰다 돔의 맨 아래 순교자 영역의 모자이크 비잔티움 예술가가 창안한 돔 모자이크 구성의 주제는 천상의 세계이다. 맨 아래 부분은 순교자 또는 성인의 영역이다. 8개 천국의 문마다 좌우로 늘어선 두세 명의 순교자들이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하고 있다.
로마제국이라는 현실세계는 황제-귀족-평민-노예로 구성된 계급사회이었듯이, 중세초기 기독교 예술가가 상상한 천상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천사 또는 열두제자-순교자-일반 기독교인으로 이루어진 위계적 세계였다. 로툰다 돔의 맨 아래 부분은 순교자 영역이다. 아래쪽 원둘레 65.5m를 빙 돌아가면서 순교자를 그린 8개의 패널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과거 9세기에 이곳을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지성소 바로 윗부분(동쪽 패널)을 제외하고 7개 패널이 온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살아남았다. 각 패널마다 두 명 또는 세 명의 순교자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두 팔을 양 옆으로 벌리고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펼친 채 기도하는 자세로 서 있다. 이들의 배경에는 헬레니즘 시대나 로마시대 극장의 무대 정면(scaenae fron)을 닮은 장엄한 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은 천국의 문을 상징한다.
돔의 중간 부분인 두 번째 면은 거의 다 파손되고 샌들을 신은 발 흔적만 남아 있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도상이 있었는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의 제자인 사도들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천사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이곳의 도상학적 주제는 천국의 뜨락(the heavenly court)이었을 것이다.
6-22. 로툰다 돔의 맨 꼭대기 모자이크 돔 꼭대기의 도상학적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출현이다. 네 명의 날개달린 천사가 사방에 각기 배치되어 동그란 원반으로 표현된 천국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다.
순례자 일행의 눈길은 순교자들이 맞이하는 천국의 문을 통과하여 천국의 뜨락을 지나 마지막으로 돔의 맨 꼭대기에 있는 천계의 왕, 예수 그리스도로 향하게 된다. 이곳을 장식한 모자이크의 도상학적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출현(theophany of Christ)이다. 네 명의 날개달린 천사가 사방에 배치되어 동그란 원반으로 표현된 천국을 두 손으로 떠받들고 있고 천국의 한가운데에 오른손을 높이 치켜 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천국은 황궁을 장식하는데 사용되었던 문양(과일나무, 빛나는 별)으로 장식된 몇 개의 동심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침내 순례자는 경외감으로 가득 찬 눈으로 동심원의 중심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6-23. 예수 그리스도, 로마황제, 붓다의 상 비교 (1) 초기 기독교시기에 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모자이크 (4세기 초, 이탈리아의 산타 코스탄차 성당) (2)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모습을 새긴 주화 뒷면 (CE 379-395) (3) 쿠샨제국의 카니슈카 대왕의 금화(뒷면)에 새긴 붓다의 상 (CE 120년) (4) 서산 용현리 마애불 (7세기, 백제)
비잔티움 예술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여러 날 고민했을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여전히 황제숭배컬트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자인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이미지를 빌리기로 했다. 19세기 말에 유럽에서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자동차의 형상은 영락없이 마차를 닮았듯이, 문명의 과도기에서는 앞선 세대의 형상이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로툰다 돔 중앙의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는 지진으로 파괴되어 사라졌지만 목탄으로 그린 밑그림이 살아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을 대략 추정해 볼 수 있는데, 그 형상은 비슷한 시기에 만든 이태리 로마의 산타 코스탄차(Santa Costanza) 성당의 예수 그리스도 모자이크와 비슷한 모습으로 밝혀졌다.
사진(6-23(1))에 보인 산타 코스탄차의 예수 모자이크에서 볼 수 있듯이, 로툰다 돔의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황제를 상징하는 보라색과 존귀함을 상징하는 황금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오른손을 위로 치켜 올린 자세로 서있다. 이것은 사진(6-23(2))에 보인 테오도시우스 1세 동전의 뒷면에 새긴 황제의 자세와 매우 비슷하다. 우리는 동시대에 제작된 두 유물의 비교를 통해서 로마황제의 상징 요소가 초기 기독교 미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사진(6-23(2))에 보인 황제의 제스처는 사실 이보다 훨씬 앞선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진(6-23(3))에 보인 것은 CE 1-4세기에 북인도에 자리 잡았던 쿠샨제국의 카니슈카 대왕(재위기간: 120-144년)의 동전 뒷면에 새긴 붓다상이다. 쿠샨제국은 아프가니스탄 유역의 그리스계 왕국인 박트리아를 멸망시킨 유목민족(월지족)이 세운 나라이다. 박트리아는 기원전 4세기말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에 따라나선 그리스인의 후예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아프가니스탄 유역에 세운 나라이며, 쿠샨제국은 박트리아 왕국의 그리스 문명을 고스란히 흡수하였다. 쿠샨제국의 왕들도 고대 그리스 양식의 주화를 발행하였는데 그리스 주화처럼 정면에는 왕의 옆모습을, 뒷면에는 그리스, 페르시아 또는 인도 신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CE 2세기에 제작된 카니슈카 대왕의 금화에서 붓다는 왼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있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리고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이것은 왕이나 제우스신의 제스처에서 유래된 것으로 ‘두려워 말라(no fear)’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불상의 자세와 손동작을 한자어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이라 하는데 ‘시무외’는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뜻이다. 시무외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은 불상을 처음 만들었던 쿠샨제국의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1-2세기 무렵에 등장하였다.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 시무외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가장 유명한 불상은 사진(6-23(4))에 보인 백제말기에 제작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의 석가모니불이다. 서산 마애불의 시무외인 손동작이나 로툰다의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 손동작은 왕이나 황제의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제스처에서 비롯된 만큼, 비록 시대와 종교는 다르지만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두 신상의 자세에는 서로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툰다 돔 모자이크는 단일하고 통일된 도상해석학에 입각하여 넓은 면적을 모자이크로 꾸민 것으로, 모자이크의 구성은 극도로 상징적이고 영광이 넘치며 위계적이다. 이 작품은 대략 4-6세기에 만든 것으로 초기 기독교 미술과 비잔티움 예술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돔 구경을 모두 마친 개성상인은 테살로니키의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는 인물상이 자신이 믿는 붓다와 너무 빼닮아서 한편으론 놀랍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고향에서 붓다라고 부르는 신을 이곳 사람들은 예수라 부르는가 싶기도 하였다. 너른 세상에는 알가다도 모를 일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자들과 헤어진 개성상인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새살낙니기(塞薩洛尼基)에 와서 로툰다 구경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자 아직 구경하지 못한 모자이크를 마저 구경하기로 했다.
※ 테살로니키를 한자로 표기(음차)하면 새살낙니기(塞薩洛尼基)가 된다. 중국어 발음은 ‘새싸로니치’이다.
그는 지성소 맞은편에 있는 서쪽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천장에는 로마인들이 거실바닥이나 벽면을 꾸미는데 즐겨 사용했던 기하문양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개성상인이 천장을 올려다 본 순간, 기절초풍하여 쓰러질 뻔하였다. 왜냐하면 이 천장문양은 그가 오전에 비잔티움 황제에게 판매한 청자베개의 투각문양을 고스란히 빼다 박은 십자형 꽃잎무늬였기 때문이었다. 개성상인은 여러 청자문양 가운데 특히 이 십자형 꽃무늬를 좋아했다. 고려왕실의 화원들은 이 문양을 ‘칠보무늬’라고 부르지만 개성상인은 그 이름은 개나 줘버리라고 하고 ‘산딸나무 꽃무늬’라고 불렀다. 그런데 로툰다의 십자형 꽃잎은 한술 더 떠서 불교에서 즐겨 사용하는 만(卍)자 문양으로 멋까지 부렸으니 독실한 불교신자인 개성상인은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힐 일이었다.
6-24. 로툰다의 산딸나무 꽃무늬 모자이크 (1)-(2) 서쪽 베이의 둥근 천정을 장식한 모자이크와 노란색 동그라미 부분의 확대 사진 (3)-(4) 중앙 돔 모자이크(순교자 영역)에서 배경건물의 아키트레이브 모자이크와 노란색 동그라미 부분의 확대 사진
개성상인은 놀란 가슴을 쓰다듬고 혹시나 싶어 로툰다의 돔 모자이크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고려청자 문양을 계속 찾아보기로 하였다. 이것은 숨은 그림 찾기였다. 장사꾼의 애리한 촉은 최첨단 3차원 스캐너가 되어 중앙 돔 모자이크의 순교자 영역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또 찾았다! 순교자 영역에서 배경으로 사용한 천국 문의 아키트레이브 한 귀퉁이에 숨어있는 산딸나무 꽃무늬를 발견한 것이다. 여기 산딸나무 꽃무늬는 한 줄로 늘어서 있어서 얼핏 보면 엽전무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전무늬로 불리기도 하는 엽전무늬는 사실 산딸나무 꽃무늬의 착시문양이다. 개성상인은 머리털이 주뼛 곤두섰다. 고려청자 문양을 새살낙니기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6-25. 로툰다의 산딸나무 꽃무늬 (1) 남쪽 베이의 둥근 천정을 장식한 모자이크. 새, 과일, 별 문양은 로마황실에서 거실이나 벽의 장식문양으로 즐겨 사용한 것이다. 산딸나무 꽃무늬로 테두리를 둘렀다. (2)-(3) 고려청자 합 뚜껑의 테두리 장식문양으로 사용한 산딸나무 꽃무늬. 로툰다와 고려청자의 산딸나무 꽃무늬는 완전 판박이다.
그는 아까 들어왔던 남쪽 통로로 발걸음을 옮겨서 둥근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까 입장할 때 보았던 새, 과일, 별 문양 모자이크 주위로 테두리 장식문양으로 사용한 산딸나무 꽃무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오늘 팔았던 고려청자 합의 뚜껑 테두리를 장식한 산딸나무 꽃무늬와 비교해보면 두 문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 닮은꼴이다. 청자 고유문양으로 알고 있었던 산딸나무 꽃(칠보문)이 로툰다의 지상과 천국에서 무리지어 활짝 핀 광경을 목격한 개성상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붓다를 닮은 예수상을 봤을 때는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지만, 산딸나무 꽃무늬를 보고나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인가 싶어 개성상인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위 이야기는, 너무 늦은 시각이라 실제 구경하지 못했던 로툰다 모자이크를 설명하기 위해서 13세기 개성상인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설정하여 지어 낸 것이다.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로툰다의 산딸나무 꽃무늬는 논픽션이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산딸나무 꽃무늬는 인류 최초의 청동기 문명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계곡 문명인이 창안한 문양이다. 이 문양은 인더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에 일어났던 활발한 상업교류를 통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건너갔다가 기원전 4세기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을 따라나선 그리스인에 의해 다시 고향근처 북인도로 전달되었고, 이어서 기원후 1세기부터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일어난 불교의 동점에 의해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로툰다는 교회로 전환된 후 약 1200년 동안 기독교 교회로 사용되다가 1430년 테살로니키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1591년에 모스크로 바뀌면서 건물 바깥에 이슬람사원의 뾰족탑(미나레트)이 덧붙여졌다. 다행히 회교도들은 모자이크 벽화를 파괴하지 않고 단지 회칠하여 덮음으로써 모자이크는 크게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1912년 테살로니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자 다시 교회로 바뀌면서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게오르기우스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 가운데 한 명으로 오늘날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에서 널리 추앙받는 수호성인이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로툰다는 성 게오르기오스 축일(4월23일) 등 일 년에 십여 차례 종교적 행사와 고전음악 연주회와 같은 라이브 이벤트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6-26. 갈레리우스 황궁 복합단지 (1) 복원도 (4세기 초) (2) 황궁의 아트리움 건물 폐허지 (3) 옥타곤 건물 폐허지
갈레리우스 황궁(Palace of Galerius)
어느덧 시각은 저녁 8시 30분을 가리켰다. 배도 출출해져서 우리 부부는 고나리 거리의 남쪽으로 내려가 식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 길은 갈레리우스 황제시절에 로툰다-개선문-갈레리우스 황궁을 남북방향으로 잇는 거리였다. 그래서 개선문에서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200여 미터 내려가면 지금은 폐허가 된 갈레리우스 황궁이 나타난다. 사실 나는 이곳에 3세기말-4세기 초에 지은 옛 로마시대 황궁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단지 차량운행을 금지한 너른 거리라서 걷기에 편해 보여 이 길을 따라 내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길 아래로 옛 집터 유적지가 내려다보였다. 터가 상당히 넓어서 로마시대 일반시민들의 거주지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갈레리우스 황궁의 아트리움이 있던 자리였다. 일반 가옥의 경우에는 정사각형 공간인 아트리움을 빙 둘러서 응접실, 침실, 서재, 식당 등이 있고, 이 공간은 안채정원에 해당하는 페리스틸리눔과 연결되어 있지만, 갈레리우스 황궁에서는 아트리움이 바실리카라 불리는 황제의 접견실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트리움 건물 남쪽에는 팔각형 돔 건물인 옥타곤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온전히 살아남았다면 로마의 판테온 못지않게 아름다웠을 이 건물도 아랫부분만 간신히 살아남아 세월의 무상함만 일깨워 줄 뿐이었다.
우리는 황궁 터 바로 옆에 있는 나바리노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주변에는 카페와 음식점이 줄지어 있어서 이곳 역시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알려진 곳이지만 저녁 9시를 넘긴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천막이 설치된 광장 옆 노천 식당에 들러 저녁식사를 주문했다. 아테네를 출발하여 테살로니키까지 그리스 북쪽 자동차여행을 순조롭게 마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맥주 한 병을 시키고 홍합을 곁들인 파스타와 오징어 튀김으로 느긋하게 저녁을 먹었다. 늦여름 한낮의 열기도 많이 가라앉아 밤공기는 시원하였다. 저녁을 마친 우리는 다시 에그나티아 거리로 가서 튀케 여신과 하느님이 함께 우리에게 선물한 58번 시내버스를 타고 파노라마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오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비잔티움 교회를 몇 군데 구경하고, 오후에는 테살로니키 공항으로 가서 아드리아 해의 코르푸 섬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에 탑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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