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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기오의 역사 (펌 자료 입니다)
1) 스페인 지배시기
19세기 초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정부는 북부 루손섬의 산악지대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때 스페인 정복자들은 북부 산악지대에서 비옥한 골짜기들과 소나무로 뒤덮인 언덕들,
그리고 각종 식물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산맥지대(코딜리에라)를 발견하게 됐다.
더욱이 이곳에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하던 구리, 은 및 광물들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이같이 사실이 마닐라와 세부등 대도시로 전해지자 곧 천주교 수사들과 군인들, 그리고 광산업자들이 북부 루손 산악지대를 찾게 되었다.
그들은 산악지대를 차례로 정복해 나가면서 민간신앙을 천주교로 변화시켜 나갔고 동시에 개발 가능한 모든 자원들을 개발해 수탈해 갔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정부는 이곳 산악지대에 지방정부를 세우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산악지대의 사람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북부 산악지역 사람들이 워낙 용맹한데다 누구의 지배를 받는일을 꺼려 스페인군대는 자주 이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지방정부를 세우는 대신 각 부족의 호족들에게 자치권을 이양하는 데 동의해야만 했다.
2) 미국의 식민지배 시기
1900년 미국의 식민지배자들이 바기오를 처음 발견 했을때만 해도 바기오는 그저 카파그와이(KAFAGWAY)라 불리는
산악부족의 작은 산골 마을의 하나에 불과했다.
지금과 같이 산 아래로 통하는 길도 없는 집 몇 채만 있었던 전형적인 산골마을이었던 것이다.
당시 바기오는 벵겟 지역의 가장 부자였던 마테오 까리노(Mateo Carino)라는 사람의 소유였다.
그는 건기동안 양들과 말들을 방목했고 일부 습지대에서는 오리를 사냥하기도 했다.
바기오를 발견한 미국의 식민지배자들은 바기오를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휴양도시로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골짜기와 언덕을 덮은 소나무 군락들과 서늘한 기후는 이런 조건을 충족하기에 가장 알맞았기 때문이다.
바기오는 또한 이런 휴양도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자원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 가버너였던 윌리암 하워드 타프트(William Howard Taft)와 각료들은 주저하지 않고 바기오를 여름수도와 휴양도시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1900년 11월 벵겟에 최초의 지방정권이 수립되었고 카파그와이라 불렸던 이지역은 바기오라는 새이름을 얻게 되었다.
바기오라는 이름은 이발로이라는 산악부족의 이끼를 가르키는 말인 ‘빅비우(BIGVIW)’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현재 번햄공원이 있던 자리의 습지에서 자생하던 물이끼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01년에 당시 필리핀 미 육군 20 보병대를 이끌었던 케논 대령(당시소령)(Col. Lyman. Kennon)이 4천여명의 일군들을
동원하여 바기오와 아래지방을 연결하는 최초의 도로인 벵갯도로가 착공하여 3년 후 완공을 보게 되었다.
당시 7만5천페소란 자금으로 건설한 이 도로는 이후 도로 건설자인 케논 대령을 기리기 위해 케논로드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3년 드디어 바기오는 미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필리핀 군도의 여름수도(The Summer Capital)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도시건설 계획은 즉시 시행되었는데 당시 필리핀 총독이었던 라이트(Luke E. Wright)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설계했던 도시건축 공학자인 대니얼 번햄(Daniel H. Burnham)을 초청하여 바기오에 대한 도시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바기오는 아시아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계획도시가 되었고 바기오 중앙에 자리잡은 중앙공원(Central Park)은 도시 설계자를 기념하기위해 번햄공원(Burnham Park)이라 명명되었다.
처음 바기오는 19개의 타운으로 이루어진 도시로 개발되어 중앙정부 관리들과 미군 장교들의 휴양숙소들이 들어섰다.
특히 여름 기간 동안에는 거의 모든 중앙정부의 관리들이 바기오로 피서를 와서 정부 업무를 보게 되었기에
명실공히 여름수도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시기 미군정부는 바기오에 휴양부대를 창설하여 운영할 계획을 세우고 바기오 남쪽을 개발했는데 지금 캠프 잔 헤이(Camp John Hay)로 알려진 곳이다.
1903년 바기오에 최초의 전화가 개통되었고 1905년에는 바기오 컨트리 클럽(Baguio Country Club)이 세워졌다.
이듬해인 1906년 바기오땅을 상업과 주거를 위한 지역으로 개발키로 하고 토지를 분양했고 1907년에는 최초의 병원인
바기오 종합병원(Baguio General Hospital)이 착공되었다.
그리고 1908년에는 마닐라 인트라무르스에 있었던 필리핀 사관학교(Philippine Military Academy)의 전신이었던
필리핀 경찰학교(Philippine Constabulary School)가 바기오로 이전하게 됐다.
1910년에는 바기오의 상수도 시스템이 가동되었고 1913년에는 하오수 시설도 완비되어 근대식 위생시설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1919년에는 최초로 바기오 공항에 항공기가 착륙하게 되었고 최초의 공립학교인 바기오 중앙학교(Baguio Central School)가 1924년에 완공됐다.
3) 2차세계대전과 일본의 진주
필리핀내에서 세계대전은 캠프잔헤이에서 시작해서 ·캠프잔헤이에서 끝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세계대전중 필리핀을 공습한 일본 공군은 바기오의 캠프잔헤이를 주 타겟으로 삼았고 바기오시는 곧 폐허가 되었다.
필리핀에 진주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는 바기오의 캠프잔헤이를 자신들의 숙영지와 지역 사령부로 삼았다,
1944년 더글라스 맥아더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링가엔만 상륙작전을 성공시키자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는
자신의 지휘소를 바기오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일제의 괴뢰 정부였던 호세 라우렐(Jose Laurel)정부도 바기오로 이전을 했다.
그러나 1년뒤 필리핀 미군 연합군은 바기오로 진격하여 일본군대의 항복을 받게 됨으로 필리핀의 여름수도인 바기오를
수복했다.
야마시타장군은 일본이 필리핀에서 패전한 뒤에도 5개월을 버티다가 1945년 9월3일 캠프잔헤이에 있는 미국 대사의 관사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하지만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치른 바기오의 댓가는 엄청났다.
바기오시는 대부분 폐허가 되었고 많은 바기오 시민들은 임시 숙소가 지어지기 전 바기오 성당에서 2달 동안 난민처럼 살게 되었다.
그러나 바기오 시민들과 정부당국은 바기오시 복원에 총력을 기울여 바기오는 점차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북부 루손섬과 코딜리에라 지역의 상업과 교육, 그리고 휴양 중심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1976년 여름수도라는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여전히 필리핀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바기오를 여름수도라 부르고 있다.
4) 시련과 재건, 그리고 오늘의 바기오
그러나 바기오의 시련은 전쟁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0년 7월16일 북부 루손을 강타한 강한 지진은 바기오에 가장 큰 상처를 남겼다.
하얏트 호텔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층건물들이 무너져 내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리조트와 호텔들이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기오에서 아래지방으로 향하는 모든 길들은 산사태로 두절되었고 오직 항공기로만 이동이 가능했다.
전기와 물 공급도 끊겼고 음식마저 동이 났으며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당시 사람들은 지진이 하나님의 심판이라 믿었다. 미군의 휴양시설이 있었던 지진전의 바기오는 그야말로 흥청망청 돈을
써대는 유흥 도시였다.
당시 바기오의 특급호텔이었던 하얏트 호텔의 카지노에는 내외국인들이 들끓었고 여기에 기생하는 홍등가와 유흥시설들이 즐비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진이 이 일대를 지나가 쑥밭이 됐다.
이같은 사실을 상기하고 있는 바기오 시민들은 지금도 캠프 잔헤이내 호텔에 카지노를 들여오려는 개발회사의 노력을 시민들의 힘으로 막고 있다.
이같은 반성을 기초로 바기오 시민들은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났듯이 지진의 폐허가운데서 다시 도시를 건설했고 지금의
바기오시를 재 탄생시켰다.
현재 바기오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가장 가고 싶은 신혼여행 후보지 0순위에 꼽히는 지역이고 필리피내 부자들이면 누구나 다 별장하나를 가지는 것이 꿈인 곳으로 거듭나고 있다.
또한 마닐라 북부의 최대 교육의 거점 도시가 되었고 코딜리에라 지역의 유일한 중앙정부 직할시가 되었다.
또한 지난 2000년 시 공식집계 25만명의 인구가 밀집해 사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2007년 현재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유동인구까지 합쳐 약 60만명의 사람들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기오는 시민들의 65.5%가 30세미만인 젊은 도시이다.
이같은 이유중 하나는 바기오의 많은 수준높은 교육환경 때문에 필리핀 각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은 까닭이기고 하고
상업중심도시로의 역할이 커지며 취업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바기오시 당국 통계에 따르면 여자가 전체인구중 51.3%로 남자에 비해 조금 많은 편이다.
5) 바기오의 교육기관
2005년 현재 필리핀 교육부에 따르면 바기오 시내에는 100개의 초등학교(공립 38학교/ 사립 62학교)와
64개의 고등학교(공립 20개학교/사립44학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성공회(Episcopal Church)에서 세운 브렌트스쿨 인터내셔널(Brent School International)과 다양한 언어와 체육으로 유명한 미국연합감리교회(UMC)와 한국감리교회(KMC)선교사들이 설립한 유니온스쿨 인터내셔널(Union School International)과 선교사 자녀들을 키워내는 학교인 크리스찬 아카데미(Christian Academy of Baguio)등의 인터내셔널 스쿨(International School)이 자리 잡고 있다.
바기오에 최초로 세워진 사립대학은 2차세계대전후 세워진 현재 코딜리에라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rdillera)라고
불리는 BCF(Baguio Colleges foundation)이었고, 그 다음해에 현재 바기오 중앙대학교(Baguio Central University)라 불리는 Eastern Philippines College였다.
이후 바기오 대학교(University of Baguio)의 전신이었던 바기오 공대가 세워졌고, 1909년에 카톨릭 교구 학교로 시작한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St. Louis University)가 차례로 개교를 하게 되었다.
2차세계대전 전에는 필리핀 국립대학교 바기오 캠퍼스(The University of the Philippines Baguio Campus)와
홀리 패밀리 대학(Holy Family College)이 세워져 2년제 대학과정을 공급하다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바기오에는 이들 대학교와 의과대학교인 파인즈 메디컬 컬리지(Pines Medical College), 임마누엘 인터내셔널 칼리지(Immanuel International College), 그리고 필리핀 국군 사관학교(Philippine Military Academy)등 8개의 종합대학과 기타 여러 단과대학들이 교육도시 바기오의 특징을 대변해 주고 있다.
6) 바기오 거리의 유래들과 종교
바기오의 가장 화려한 거리인 세션로드(Session Road)는 필리핀 보이스카웃 연맹이 바기오가 세워진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이 거리를 지나 거버먼트 팍 로드(Gov. Pack road) 있는 베던 파웰(Baden Powell) 홀(지금의 버스 공용터미널)에서 회의를 진행한 데서 연유하였다.
하지만 바기오에는 아직도 산지부족중 하나인 이발로이(Ibaloi) 이름들이 거리에 많이 남아 있다.
바기오 재래시장안에 있는 가양거리(Kayang:hill), 춘툭(Chuntug:mountain), 차눔(Chanum:water), 오텍(Otek:small)등등 바기오 중심에 있는 거리들이 아직도 산지족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바기오의 대부분의 길들은 좁다라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대니얼 번햄이 바기오를 설계할 때 2만5천명의 인구를 상정하고 도시설계를 했기 때문이다.
현재 바기오 거주민의 80%이상이 로마 카톨릭을 믿고 있으며 7%의 사람들이 개신교를, 그리고 3.5%의 사람들이
이글레시아 니 크리스트라는 종교를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회교 및 불교와 도교 도는 민간신앙을 믿고 있다.
-자료 : 유니온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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