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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사랑 오솔길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정휘옹주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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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의 서6녀인 정휘옹주와 전창위 류정량의 묘역 전경 |
의정부시 가능3동 산 82번지는 선조의 여섯째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와 그 남편 전창군 류정량(柳廷亮)의 묘가 있었는데, 1979년 그의 후손들에 의해 남양주군 별내면 덕송리로 이장됐다. 유정량은 영의정 유영경의 손자로 14세에 정휘옹주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고 전창위(全昌尉)에 봉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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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부대 좌측에 사격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사격장 표지판 우측에 전주류씨 오대봉군 묘역 표지판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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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더 들어갑니다. |
▲ 묘역은 좌측으로, 사격장은 우측 길입니다. |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무인다운데가 있어 말타기를 즐겨했으며 장군이 되기를 원했으나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오를 수 없음을 불만스럽게 여긴 나머지 옹주에게 퉁명스럽게 대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무렵 우리나라에 담배가 처음 들어와 남녀 구분없이 장죽으로 담배 피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옹주도 장죽을 물고 다녀 남편이 보기에 지나치고 눈에 거슬려 몹시 나무랐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부부싸움까지 번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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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의 홍살문을 지납니다. 묘역군 사방으로 철책은 둘려 있으나 입구는 항상 개방되는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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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류씨 오대봉군 묘역 안내판과 근래에 세운 듯한 신도비가 있습니다. |
화가난 옹주는 대궐로 들어가 분함을 실토하자 선조께서 부마를 불러 들였다. 유정량은 괴나리 봇짐을 메고 짚신 두 죽을 양허리에 찬 채 궁중으로 들어갔다. 그 차림새가 버릇없는 것 같으면서도 기인다운 데가 있어 선조께서 손 행색으로 궁중에 들어선 까닭을 물으셨다. 그러자 유정량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상감의 노여움을 산 죄인으로서 유배를 면키 어렵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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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입구 좌측에는 재실 겸 관리사가 있으며, 묘역군은 우측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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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위에서 입구 방향을 바라 본 모습 |
선조가 " 귀양길을 떠날 자라면 짚신 한 죽이면 족하지 두죽은 다 무엇에 쓸 것인고? "라고 묻자 유정량은 " 여필종부라 하였으니 옹주와 함께 떠나려 하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선조는 더 이상 나무라지 아니했다. 한편 유정량의 할아버지인 유영경은 소북파의 우두머리로서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에게 모함당하여 함경도 경흥에서 죽게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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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군 제일 하단에 위치한 전창위 류정량과 정휘옹주의 아들인 전평군(全平君) 류심(柳淰)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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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문을 보니 류심 묘역은 영월엄씨와 해평윤씨와 합장묘입니다. 묘비의 받침돌에 묘비명을 새긴 것이 특이합니다. |
유정량도 16세의 어린 나이에 전라도 고부로 유배당한다. 귀양생활 7년째 되는 어느날 경상도 양산으로 다시 옮겨 가는데 도중에 집은 다헐고 거미줄이 곳곳에 늘어져 있는 주인없는 빈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이때 동네사람들이 달려와서 빨리 나오라고 야단 법석을 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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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 묘역 위에 정휘옹주와 전창위 류정량의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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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휘옹주와 전창위 류정량의 합장묘 |
전에도 여러 길손이 이 집에서 자게 되면 사람이 온데간데 없이귀신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정량은 말대꾸도 하기 싫은 듯 다리를 쭉 펴고 누었다. 조금후에 방안에 차가운 공기가 맴돌며 천장에서 큰 구렁이가 뚝 떨어 지면서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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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휘옹주와 전창위 류정량의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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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면에서 바라 본 봉분과 우측에 세워진 묘비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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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휘옹주 묘역 상석 좌우로 글이 새겨져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좌묘XX, 우묘XX, 뒷 글자는 사진으로는 잘 판독이 안되네요 |
이튿날 날이 새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으나 길손은 간데없고 방안에 큰 구렁이만 죽어 있었다. 유정량은 이미 양산에 도착해 있었다. 한편 유정량에게는 표동이라 불리우는 애마가 있었는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였다. 그런데 어느날 표동이 유정량을 찾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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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휘옹주 묘역 문인석 모습. 좌측 문인석 얼굴은 변색이 되어 보기가 좋지 않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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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봉분의 뒷편 호석은 새로 보수를 한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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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휘옹주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광해군이 표동을 끌고가려 하자 마굿간에서 뛰어나와 이곳 양산 6백리길을 단숨에 달려 온 것이다. 귀양살이 12년되던 해 어느날 표동이 별안간 네굽을 모아 구르며 갈기를 세우고 날뛰자 유정량이 이를 달랬으나 저녁에 겨우 그쳤다. 이날이 바로 인조반정이 있었던 1623년 3월 12일 이었는데 이튿날 아침역졸이 궁으로 돌아 오라는 어명을 가지고 달려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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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휘옹주의 시아버지인 전원군(全原君) 류열(柳悅)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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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휘옹주의 시조부인 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 류경영(柳永慶) 묘역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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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단에 위치한 류경영의 부모인 전릉부원군 류의(柳儀) 묘역 전후경 |
이때부터 표동은 영마라 하여 더욱 이름났으며 그후 40여년간 살다가 죽었는데 후히 장사 지내고 그 무덤을 용마총이라 이름했으나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정휘옹주는 남편이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홀로 되신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며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다 효종 4년(1653)에 세상을 떠났다. - 의정부시청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제14대 선조대왕(宣祖大王) [1552 ~ 1608] 가계도
정비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 ~ 1600] :소생 없음
제1계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 ~ 1632]
서1남 임해군(臨海君) [1572 ~ 1609] (공빈 김씨) |
정휘옹주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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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의 빨간선을 따라서 350여미터 들어가면 정휘옹주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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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중앙 상단의 화살표 부분에 정휘옹주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별내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