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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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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소식 스크랩 박태주 선생님의 루빈의 꽃병
지리산명수 추천 1 조회 172 16.04.28 18:4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소설가 : 박 태 주

*전북 남원출생.

*단편 '화려한 마을'로 '문예한국' 신인상 등단. 중편 '파업전야'발표하며 주목받고, 장편 '제비뽑기'로 베스트셀러 됨.

*주요작품으로 단편 '활터가는 길' '국궁놀이' 화려한 마을'. 중편 '커피타임''어머니' '마라' 

장편소설 '제비뽑기' 그림자작가' 누군가 너를 위해' '돌연변이의 꿈' 등 다수.

*동인시집으로 '척박한 땅에서 새싹을 일구는 사람들'이 있음.

*제1회 노원문학상 수상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한국장로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

 

 

 

 

 

루빈의 꽃병

                                                                                         박 태 주.

 

봄이 찾아들었다가 겉치레처럼 맥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목련꽃이 스스로 목을 꺾듯이 이승과 결별하고 싶었다. 민틋한 뒷동산 찔레꽃처럼

눈부신 하얀 소복을 입고 급사한 남편 곁으로 가고 싶었다. 시댁에서는 피에타 상을

연출하고도 남을 순결한 슬픔에 빠진 자신을 불결한 여자로 보았다. 급기야 남편의

죽음을 복상사로 여기고 부검을 의뢰하며 무엇인가에 집착했다. 남편은 죽어서도 눈

을 감지 못하고 요지부동할 노릇이었다.

남편과는 주말부부였다. 남편이 죽던 날. 토요일, 늦게 지방에서 올라 온 남편은 피곤

하다며 평소처럼 곯아떨어졌다. 티적거리거나 보챌 수가 없었다. 일테면 자신은 그렇

게 성가셔 하는 남편을 보며 루빈의 꽃병에는 회색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D대학교 장의학과 정인철 교수는 나이가 많은 제자들의 사연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는 유안서가 홀연히 살아가길 원했고, 그런 이유로 국궁(國弓)에 입문하기를 권했다.

소증 나 병아리 ?듯 무엇이든 하고 싶었던 그녀로선 국궁이 활력소로 여겨졌다.

정인철은 그녀를 활터에 입회시키고, 각지 끼는 법부터 활 매는 법, 궁대 매는 법, 활

당기는 법 등 기초적인 사항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었다. 마치 국궁학과 교수처럼.

유안서는 딸을 유치원에 맡기고 매일 아침 8시 반경이면 활터로 직행했다.

호석정(虎石亭)이었다. 활터는 남산에서도 소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무 냄새만 맡아도 살 것만 같았다. 다행히 활을 당겨보니 체형에 잘 맞았다.

활쏘기는 무엇보다 잡념을 잊을 수 있었다. 특히 기초 동작인 활쏘기 전 항문에 힘을 주어

분문을 닫고, 배꼽 밑 아랫배에 힘을 모으며 만작(滿作)할 때의 단전호흡이 매력적이었다.

국궁은 항상 올바른 자세와 균형을 요구했다.

정인철은 궁도이론을 가르치는데도 열을 올리며 자랑이 대단했다.

“궁도는 긴장과 이완의 반복 운동입니다. 피의 순환을 촉진하고 그것이 내장의 여러 기관을

발달시킴은 물론 특히 활을 끝까지 당기는 만작을 함으로써 호흡기능 발달 및 위장병 치료에

아주 좋은 효과를 낸답니다. 또한 궁도는 심, 기, 궁시(弓矢), 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무심의 경

지에서 활을 쏠 때 비로소 관중(貫中)되므로 정신일도가 경기의 요체지요. 사정(射亭)에 올라

활을 쏘게 되면 선인들이 남긴 교훈과 예법, 지혜 등도 익힐 수 있어 정서함양과 인격수양에도

도움이 되며, 고요한 사정에서 과녁에 관중했을 때의 청아한 여운과 쾌감은 활을 쏘아 보지 않

고서야 느낄 수 없는 한량의 여유요, 기개인 것입니다.”

유안서가 잠시 눈을 들자 시야에 온통 소나무가 보이고 그 너머 소나무향 사이에 널따란 과녁

세 개가 꼿꼿이 서있었다. 언젠가는 저 과녁을 뚫어야 한다.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곧 삶을 명중해야 한다. 언제 한번이라도 삶의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쏴

본 적이 있었던가. 연못 속에서 잘 노는 개구리를 향해 무책임하게 돌팔매질을 해봤을 뿐이지.

정인철은 유안서의 활 쏘는 자세를 교정해 주면서 그녀의 몸매에, 특히 히프에 눈길이 간다.

“벌써 궁체가 나오네. 유 여무사는 궁체가 좋아서 훌륭한 여무사가 될 자질이 다분해요.”

“어머머, 그래요? 교수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울게요.”

“열정이 실력이 되는 것이지요. 그 근성이 합격 점수가 됐으니 오늘 학교수업 끝나고 저녁식사

어떠세요?”

안서는 아직 활을 내지는 못하고 활시위를 당기며 궁력을 키우고 자세를 잡고 있었기에 스승을

대접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교정에는 어두운 블랙이미지의 가을복장 차림의 학생들이 한가롭게 잔디위에 앉아 있었다.

성급한 나뭇잎은 벌써 가볍게 날리며 계절의 복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으면 좀 멀리 가도 될까? 잘 아는 음식점이 있는데......”

“교수님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정인철은 자신의 차를 몰고 Y대학병원 쪽으로 향했다. 병원에 들어서서 병동 앞마당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면서 무거워 보이던 입을 연다.

“저, 병원에 잠시 문병 좀 하고 바로 나올게요. 괜찮다면.”

“그렇게 하세요. 전 차 안에 있을게요.”

유안서는 죽은 남편을 생각한다. 부검결과, 남편은 과로사로 판명되었다.

운명을 이길 힘이 없다던가. 남편은 부관참시 당하고서야 양반으로 신분 상승하여 5일장을

치렀다. 그래도 시댁부모들은 복상사의 의증을 끝까지 풀지 않고 지청구질을 했다.

미운털을 빼낼 수 없었던

그녀는 불행조차도 스스로 극복해야했다. 결국 대구 시댁을 떨치고 싱글 맘의 길을 선택하여 딸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게 된다. 이사를 주선하고 도운 사람은 친분이 남다르게 자별한 동무

김형식이었다. 그는 성불하지 못한 파계승이기도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 장례지도

사라며 정인철 교수를 소개해 주고 편입학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잠시 후 정 교수가 면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는지 그제야 서두르며 차를

몰아 구기터널을 지나 북한산 기슭으로 향한다. 서울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보신탕집이란다.

전통 한옥 처마집인 ‘싸리집’은 요리를 잘 해 서인지 노린내가 전혀 없었다. 음식도 청결했다.

보신탕 국물이 우유 빛처럼 하얗고 구수한 맛을 내는 전골이 특히 별미였다. 정 교수는 소주도

한 병 시켰다. 술이 한잔 들어가자 편안하게 말했다.

“안서씬, 안락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안락사는 왜요? 아까 병문안 갔던 환자가 혹시 식물인간이라도?”

“비슷해요.”

“인간은 누구나 편안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전 안락사를 찬성하지만 그 가족의

입장이 되면 쉬 결론을 못 내릴 것 같은데요.”

“그렇겠군. 가족이라면...”

“그러시면 교수님은 복상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복상사라고요? 하하하. 그것 참, 나보다 더 복도 없는 남자가 또 있나보죠?”

“무슨 말씀이세요?”

정인철은 고개를 숙이며 화제를 돌린다. 쑥스러워 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 홀아비여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

“우리가 어때서요. 스승과 제자 사이인데다가 활 동호인이기도 하구요.”

“남들이 우리를 연인으로 보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요. 하하하.”

정인철은 더 이상 속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의미 있게 웃고 만다. 식물인간인 아내. 어머니는

아내의 안락사를 강요하고 있었다. 바람피운 며느리를 더 이상 사람으로 보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아내는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모텔에서 나오다가 재수가 옴 붙어 시어머니에

게 발각되었고, 순간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처갓집 생각은 달랐다.

식물인간이 된 딸이 빨리 깨어나 누명을 벗길 바라고 있었다. 더욱이 병원비를 처갓집에서 부담

하고 있었기에 처갓집 입장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었다.

“참, 활 잡은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죠? 오늘 사실 사범을 소개해주려고 만나자고 했어요. 사직공원에

있는 사직정이라는 활터에 가면 초보자들을 위한 ‘국궁교실’이 상시개설 되어 있거든요.”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군요. 감사해요.”

사직정에 도착하자 많은 국궁 동호인들이 활을 내고 있었다. 유안서는 김용철 사범을 소개받고,

 ‘국궁교실’에 등록하여 체계적으로 활을 쏘기 시작했다. 사직정에는 화살내기 전에 각지 빼는

연습을 하는 주살대와 초보자의 자세교정용 고침장도 있었다. ‘국궁교실’에는 소수의 외국인과

많은 직장인들이 진종일 시간을 바꿔 가면서 활쏘기를 배운다. 유안서는 이미 한 달 이상 정

교수로부터 기본기는 배웠기 때문에 훨씬 수월했다. 그러다보니 신사(新射)치고는 김용철 사범

으로부터 총애까지 받았다. 체계적으로 활을 배우기 시작하자,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다.

주말이면 딸을 데리고 다니면서 활을 쏘았다. 한동안은 사대에 서서 활을 내 한 발도 못 맞추며

불(不)을 냈지만, 차츰 1중, 2중, 3중씩 명중했다.

안서는 집념이 강했고, 소질이 남달랐다. 놀랍게도 활쏘기 6개월 만에 입단 및 승단대회에 참가할

정도의 실력과 배짱이 생겼다. 흘레구름이 몰려오던 날. 수락산 속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수락정에서 입단 및 승단대회가 개최되었을 때였다. 초단에 응시한 사람만 해도 백 명이 훨씬

넘어 활터가 무술장과 같았다. 대회는 궁도인들의 경연장이요, 축제였다. 정인철 교수는 이미 5단

이었고, 이번엔 6단에 응시해 일찍부터 참석해 습사를 하고 있었다. 화살 1순(巡)인 5발을 쏘아 단

한 번이라도 5중 했을 때부터 남자 궁사들은 ‘접장’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어 있었다. 5단 이상의

궁사들은 ‘명궁’으로 존대 받았다. 그 정도 되면 활도 소나 양의 뿔로 만든 각궁을 쓰다가 비로소

대와 꿩깃으로 장식하여 만든 죽시로 바꾸어 사용하며 스스로 품격도 살렸다.

비가와도 활터는 경기하기가 적격이다. 김용철 사범은 심사위원으로 위촉받아 심사를 보았다.

유안서는 서두르지 않고 담대하게 활을 쏜다. 그녀는 1순(巡)에 5발씩 돌아가며 9순(巡)을 쏘아

총45발 중에서 27발을 명중하는 놀라운 성적으로 초단에 입단했다. 45발 중에 25발을 적중하면

초단이었고, 2단은 28중, 3단은 29중, 4단은 30중, 5단은 31중을 해야 했다.

초단 입단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몇 년씩 활을 쏜 활터의 선배도 초단에 응시했다가

낙방했다. 승단자도 드물었다. 정인철도 승단하지 못하고 일찍 하산했다. 아내의 일로 정신이

혼란해 활이 잘 맞질 않았다.

안서가 입단하는 데는 단연 김용철 사범의 노고가 빛났다. 그는 안서가 입단하자 모든 뒤풀이를

거절하고 안서와의 저녁을 기다렸다. 그녀도 동호인들의 축하의 잔을 뒤로 하고 서둘러서 김

사범과 회포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누구보다 김 사범에게 대접을 하고 칭찬도 듣고 싶었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서도 김용철이 유안서 초단을 데리고 간 집은 미사리에 있는 ‘황토마당’

이라는 한정식토속음식점이었다. 토방 룸마다 촛불이 켜져 있어 인테리어가 덧보였다. 골동품

장식품 사이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많은 음식이 알알이 박혀보였다. 안서는 들뜬 상태에서

동동주 몇 순배를 마셨다.

“박다인 여무사와 성효원 여무사가 질투의 눈으로 보던데?”

“그 여자들 축하한다는 말도 안 하던데요.”

“허긴 그 사람들은 활 쏜 지가 5년이 넘었어. 그래도 아직 단증을 못 땄는데 이제 새파란 신사가

초단이 되었으니 속이 많이 쓰렸을 거야. 질투심이 하늘을 찌르는 여자들이야, 조심해.”

“저는 괜찮지만, 저 때문에 사범님까지 미움 받으시면 어쩌나.”

“그러고도 남지. 이미 우리 사이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눈치던데... 하하하.”

“어쩜 좋지. 내가 사범님 보호해 드려야겠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주 앉아있던 용철이 일어나 안서 옆자리로 다가갔다. 빗소리가

음악소리를 머금고 은은히 내리고 있음을 그제야 느꼈다. 그들의 숨결에 촛불의 불꽃이 잔잔히

흔들릴 정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용철은 평소에 많이 해본 솜씨로 갑자기 안서의 입술을

훔쳐 버린다.

“아, 이러시면... 안돼요.”

안서는 용철을 밀쳐냈지만 활쏘기로 다져진 그의 완력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용철은 사납게

안서를 애무한다. 안서는 어렵게 그의 팔 안에서 빠져나오며,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따귀를 후려쳤다.

용철은 멋쩍어하면서도 당당했다. 그는 원래 양궁 선수 출신이었다. 대개 양궁선수일 경우 실업팀

에서 선수생활을 조금 하다가 비인기 종목이어서 전업하거나 국궁으로 종목을 바꾸어 선수생활을

연장하고 있었다. 국궁이 전국체전 정식종목이어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선수급들을 환대하고

있었다. 용철도 도 대표 선수로 적정의 보수도 받았다. 당연히 푼더분한 여성 초보자들은 사범을

크게 존대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범들은 거만하게 처신하며 성폭행까지 했다.

“실망했어요. 그 동안 김 사범님의 인품을 존경했는데...”

안서는 남편과 사별하고 난 뒤, 자신을 지탱하는 힘은 만학(晩學)과 국궁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이미 활의 노예가 될 정도로 국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김 사범과 최악의 관계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진심이야. 언제부턴가 유 여무사를 사랑하고 있었어.”

“우리, 그만 나가요. 찬바람 좀 쐬어야겠어요.”

용철은 다소 안정된 기미를 보이는 안서를 보자 마음이 놓였다. 용철은 큰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한강 옆 비포장 길 위에 몰던 차를 주차했다. 멀지 않는 곳에 또 다른 데이트족들의 차가 보였다.

도어를 내리자 비가 들이쳤다. 안서가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는 동안 용철은 다시 안서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안서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으나 그를 적당히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러자 그는

또다시 안서의 입을 덮친다. 그는 강제로라도 안서를 겁탈하려하고 있었다. 안서는 그럴수록 몸이

식어갔고 고슴도치 되었다. 그는 강권을 발휘했고 안서는 겉옷이 찢기도록 몸부림쳤다. 그는 강하게

반항하는 안서를 결국 어찌하지 못하고 발정난 비 맞은 개처럼 발광하다가 깝신대며 방아질을 한 뒤

절구통 밖에다 방사하고 만다. 안서는 활터로 가는 길목에서 지나가는 우박을 맞았다고 생각한다.

안서는 불붙은 화살을 볏짚에 마구 쏘는 그의 무례함을 덮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용철은 안서에게

당한 모욕을 참지 못하고, 욕정을 다른 곳에서라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바람을 가르며 서빙

고동으로 박다인 여무사 집을 찾아갔다. 독신인 박다인은 그의 또 다른 애제자였다.

안서가 무기력해져서 집에 들어갔을 때 뜻밖에 동창생인 김형식이가 TV를 보고 있었다.

딸 연지는 그가 잔뜩 사온 장난감을 안고 잠들어 있었다.

“전화도 없이 어떻게 왔어?”

안서는 그를 나무랄 힘도 없었다.

“아침에 통화했잖아. 입단하면 축하파티하자고 해놓고선 연락이 돼야 말이지.”

안서는 그제야 건성으로 말했던 김형식과의 약속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총각을 집으로 오라는 말은 아니었잖아.”

“연락이 됐으면 밖에서 만났지! 파계승 알기를 난봉꾼으로 아시나? 난 안서가 결혼해 버리자

스님이 되었다가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파계했고, 안서가 혼자되자 다시 사랑을 되찾고자

노력하고 있는 거 알잖아?”

“미안해. 나 오늘 너무 피곤하거든.”

“어서 빨리 돌아가라는 말이군. 알았어. 그나저나 오늘 입단했어?”

“으응.”

“와- 축하해. 대단하네. 나도 국궁에 입문해서 안서한테 배워야겠는데?”

“놀리지 마.”

안서는 형식이가 와 있어서 차라리 위안이 되며 차츰 마음이 안정되었다.

“모처럼 왔으니까, 커피나 한잔 하고 가.”

“난 술이면 더 좋겠는데?”

안서는 기분을 바꾸기 위해 즐겨듣던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의 바이올린 앨범 ‘집시의 열정’을

틀었다. 촛불이 타 들어가듯이 밤이 집시음악 ‘몰도바’ 속으로 타 들어가며 안서의 삶을 반영하

고 있었다. 이름 모를 들판에서 밤이슬을 피하는 집시 캠프 위로 달빛이 내리고 모닥불 가에 모여

앉은 집시들 가운데 누군가가 바이올린을 들어 연주하는 선율로 ‘몰도바’가 다가왔다.

안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행으로 빨려들어 갔다. 술에 적당히 취해있기도 했지만 뜻밖에

형식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집시여인이 되고 있었다. 분명 침잠해 있던 성욕이 윤리의 눈치를 보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첫사랑 남자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기다림을 파헤쳤다.

김용철 사범 따위의 욕구를 뿌리친 후련함이 형식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빌미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느새 형식이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며 폴카 춤추듯이 경쾌하게 안서를 안아들어 침실로 향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몇 년을 기다렸는지 알기나 하나. 형식은 안서의 몸속으로 차근차근 들어간다.

안서는 온몸을 연다. 마른논에 물 잦듯 하던 남편과의 살맛은 더위 먹고, 이제 새 물 속에서 깊숙이

유영하기 시작한다. 여왕개미가 수개미를 향해 돌진해 짝을 찾아 교미하듯이 안서는 오랜만에

여왕이 된다. 형식은 여왕개미를 학수고대 기다리다 간택된 수개미가 되어 여왕개미에게 충성을

다한다. 형식은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는 치타 같았고, 안서는 지구력을 앞세운 얼룩말이 되어

아프리카 세랭게티 초원을 누비기 시작한다.

여왕개미와 수개미는 붙은 채로 공중에서 지그재그로 날면서 맘껏 교미한 뒤 땅에 떨어진다.

안전하게 땅에 떨어진 여왕개미는 땅을 파고 새로운 개미집을 짓는 데 성공한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비행과 사랑에 소모한 수개미는 기진하여 땅에 떨어져 지극히 짧은 행복을 누리고

죽듯이 형식은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황홀경속으로 떨어졌다. 우리 결혼하자. 그런 말로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좋은 여자 만나서 빨리 결혼해. 싱글 맘은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그리움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안서는 남편으로부터 느끼지 못했던 감정 속에서 모처럼 온 몸을 불사른 열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안서는 뱅충맞게 ‘살아지는 것’을 느꼈고, 형식은 실전처럼 죄의 속성에 빠져 사랑을

체험한다.

김용철 사범의 상한 자존심은 안서에게 실패한 유희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짓눌려 있던 열정이 실력으로 발산했다. ‘국궁은 마음에 표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궁은

정신통일과 시선의 일치가 중요한 운동이며, 정신력이 게임포인트였다.

안서는 전국 사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상금을 타 용돈으로 쓰기위해서라도

활을 열심히 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입단하면서 탄력이 붙더니 실력이 일취월장해 호석정 삭회

여무사 부문에서 우승했다. 이어서 서울시 산하 사정(射亭)에서 개최하는 사정 대항전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우승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전국대회에서도 충분히 통했다. 최소한 여무사 부문에서는

전국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속초 설악정대회, 사월 초파일 춘향제와 함께 열리는 남원 관덕정대회,

유일하게 바다를 끼고 있는 통영 한산정대회, 제천 의림정대회, 경주 호림정대회, 영주 충무정대회,

서귀포 백록정대회, 완도 청해정대회, 양구대회 등등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이름을 날렸다.

상금도 꽤 쏠쏠해 생활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자연히 시 대표 선발전에도 참여하여 홍일점으로

서울시 대표에 뽑히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

각종 대회는 주로 주말에 열렸기에 딸 연지를 떼어놓고 다니기가 그래도 용이했다. 활터는 전국에

3백 개가 넘었다. 동호인 수가 3만 명이 훨씬 넘었지만 정작 전국대회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는 실력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어느새 승단도 해 2단이 됐다.

그녀가 궁도계에 뿌리를 내리며 두각을 나타내자 전국적으로 프러포즈하는 남자 접장들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여무사들의 눈에는 가시였다. 남자 접장들은 안서가 과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가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녀의 궁체에 녹아들었다. 활을 쏘며 서슴없이 내보이는 도도한 히프는

누구라도 엉큼한 생각을 한번쯤은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혹의 선물이 답지했다. 몰래 속옷과

핸드백, 구두 등을 다퉈가며 사 주었다. 자동차 기름도 넣어 주고, 활까지도 사 주는 사람도 있었다.

마음먹고 눈 한 번만 슬쩍 감으면 연애할 남자들은 즐비했다.

협회 간부이면서 활 실력도 있는 조만석 원장 같은 경우에는 보다 노골적으로 프러포즈해 왔다.

그는 60대 초반으로 강남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부자였다. 안서에게 반해 한달에 두 번씩만

데이트해 주면 생활비를 대주겠다고 까지 말하고 있었다. 안서는 비교적 갈무리를 잘했지만 데이트를

거절당한 궁사들은 은근히 반목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구설수에 올랐다.

그래도 안서가 속내를 보일 수 있는 궁도인은 정인철 교수정도였다. 정 교수는 아내가 세상을 뜬 뒤

활터에 발을 끊었다가 모처럼 나타났다.

“유 여무사, 더 예뻐지셨네요. 우리 집사람 장례식 때 조문 올 줄은 몰랐는데, 정말 고마웠어요.”

“고맙긴요. 상심이 크셨겠지만 딸아이를 생각해서 빨리 잊고 재혼하세요. 남자 분들은 혼자 사시기

힘들다던데...”

“걱정해 주니 고맙군요. 이제 죽음의 연구보다 생의 연구가 더 절실하게 생겼어요. 유 여무사는

요즘 공부는 안하고 활만 열심히 쏘셨나 봐. 활약이 대단하시데? 그렇게 해서 장의학과는 졸업이나

제대로 하겠어요?”

“죄송해요, 교수님. 명심하겠습니다.”

6월 6일 현충일. 현충사 활터에서 충무공탄신기념 전국 국궁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안서는 그동안 서울시 대표로 뽑혀 열흘 이상 합숙 훈련까지 했다. 강행군이었다.

대회가 열리기 전날 다른 선수들은 먼저 아산으로 출발했다.

안서는 딸 연지에게 저녁을 챙겨 먹이고 밤늦게 차를 끌고 내려가 차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활터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대학 동기생인 이병석이 안서가 현충사대회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운전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병석은 오래전부터 안서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마음에 두고 있었다.

밤에 피곤하게 운전하고 다음날 대회에 나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병석이 차를 가지고

나와 태워주겠다니 고마울 뿐이었다. 밤 9시가 넘어서 그의 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외면만 반짝

거리고, 내면은 속 빈 강정과 같은 청춘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안서 앞에서는 별 수 없이 수컷이었다.

그 먼 곳까지 운전을 자청하였으니 그의 사랑은 요술방망이 같았다. 소음이 별로 없는 그의 차는

어느새 밤을 이고 달려 평택을 지나 아산에 들어서고 있었다.그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같은 방에서야 못 잔다고 해도 같은 숙소에서 묵는 것만으로도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변두리에 있는 모텔에 들어서자 시계는 11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병석이 카운터에 가서 객실비용을 계산하려 한다. 병석은 한참 주머니를 뒤지더니 안서에게

다가왔다.

“급히 오다 카드를 놓고 왔어요. 현찰로 방 두개를 잡으려 하니 돈이 모자라는데요......”

“나도 현금이 얼마 없는데... 하는 수 없지, 그럼 내 카드로 계산해요.”

안서는 카드를 병석에게 주었다. 병석은 3층에 나란히 붙은 방 두개를 잡았다.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에 들었다. 병석은 쌍방울이 워낭소리를 내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안서가 묵고 있는 방에 전화를 할까, 노크를 할까 몇 번을 망설였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고, 또한 딱지를 맞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병석은 초행지인 아산의 밤을 놉이 품삯 치르듯

뜬 눈으로 지새운다.

이른 새벽. 안서는 샤워를 하고, 위아래 하얀 궁도 복장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와 병석의 방문을

노크했다. 어디 가서 해장국이라도 먹고 시합장에 들어갈 요량이었다. 몇 번을 벨을 누르자 병석이

부스스 눈을 부비며 문을 열고 나오면서 안서를 끌어안아 버린다.

“지질하게 이러면 안 되지. 전장에 나가는 사람한테.”

안서는 말썽꾸러기 학생을 나무라는 훈장처럼 단호했다. 그래도 병석은 1분정도 안서를 붙잡고

고개를 안서의 가슴에 묻고 있다가 팔을 놓았다. 안서의 여자냄새를 처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유 선생님은 너무 아름다워요. 오늘 활 잘 쏘셔요. 응원할게요.”

안서는 다행이다 싶었다. 두 사람은 해장국을 먹고 현충사로 향했다. 현충사 입구에 다다라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 뒤에서 요란하게 경적이 울리며 차가 달려와 멈췄다. 정인철 교수였다.

그도 흰색의 궁도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군, 자네가 여기 웬 일인가?”

정 교수가 승용차를 한쪽에 주차하고 내리면서 말했다. 병석은 면목이 없었지만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구경 좀 하려고 유 선배님 따라 왔습니다, 교수님.”

“그으래?”

병석은 두 사람을 행사장으로 보내야만 했다. 안서와 정 교수는 화기애애하게 왁자글한 행사장

속으로 나란히 빠져들어 갔지만 병석은 먼발치에서 속창알머리 없는 놈처럼 지켜보아야만 했다.

안서는 차분하게 활을 쏘았다. 병석은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먼발치에서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고

관람만하다가 조용히 행사장을 빠져나가 서울로 향했다. 안서는 활을 쏘면서도 딸 연지를 생각했다.

그나마 시댁에서 학비는 올라왔지만 두 모녀가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사대에서 표적을 겨누고 활을 세게 당겨 마음의 조준을 하고 살을 놓아 개인전에서

2위를 하는 좋은 성적을 내며 소기의 상금도 탈 수 있었다. 현충사 대회가 끝난 며칠 뒤 대구 시댁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아버지는 버럭 화부터 내셨다.

“네게 준 신용카드 거래를 중단시켰다. 이제 오그랑장사 더 할 일도 없다.”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네가 혼자 살며 연지 키우는 게 그래도 안쓰러워서, 생활비조로 신용카드를 사용하라고

준 것이다. 그런데 바람피우며 모텔이나 다니다니, 고얀 것!”

마른침 넘어갈 일이었다. 지난번 현충사 국궁대회 때 병석과 모텔에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안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아버지는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 그건 현충사 활쏘기대회에 나갔을 때 저 혼자 잔 건 데요.”

“잔말 마라. 애나 잘 키우면 됐지, 활 쏘고 다닌다는 자체부터가 틀렸다.

네가 한량이냐, 아님 화냥년이냐! 오사리잡년으로 살겠다는데 더 이상 말릴 수 없지. 몹쓸 것!”

시아버지의 수화기 놓는 소리가 가슴을 찢었다.

한 순간 실수가 이렇게 큰 불신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솔한 행동을 한 자신이 미울 뿐 변명할 수도 없었다.

며칠 뒤 이번에는 시부모가 직접 찾아왔다.

그날따라 안서는 술을 마신 뒤 활을 메고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갔다.

“이럴 줄 알았다! 연지는 우리 손녀니 우리가 데리고 가 키우겠다.

교육상 더 이상 너에게 맡겨 둘 수 없다. 이 집에 외간남자가 드나든다는 것도 다 알고 왔다.”

안서는 말문이 막히며 눈물부터 나왔다.

“오죽한 도깨비 낮에 날까! 끌끌끌... 멀쩡한 신랑 잡아먹고도 모자라 또 그 짓거리라니.”

시어머니의 비웃는 저주의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안서는 죽은 남편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울산에 현지처를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은 구원이나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녀는 딸을 데리고 야반도주하려해도 갈만한 곳이 없었다. 긴 밤을 하염없이 울었다.

모녀는 날이 새기가 무섭게 메별 속에서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안서는 딸을 오래 쳐다보지도 못한 채 빼앗기고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다. 앞이 캄캄했다.

누구에게 말할 정황도 못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호석정 활터에서 청천벽력 같은 제명통보서가 날아왔다.

겉까지 야해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잠재된 여자이므로 사정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게

제명사유였다.

풍기를 문란 시키고, 남자 궁사들로 하여금 성적 흥분과 성적수치심이 들게 했다는 것이었다.

안서는 공연음란죄로 몰려 호석정(亭)에서 축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정까지 소문이 퍼져

타정(他亭)으로의 이정(移亭)도 거부되기에 이르렀다.

김용철 사범과 박다인 여무사 등이 붕당을 지어 모든 활터에서 영구 제명하려 한 결과였다.

안서는 위기를 느꼈다.

그나마 활은 자기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활터에서 그것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퇴출되다니 화가 치밀었다.

안서는 활터에도 못 나가고 며칠을 안절부절못했다.

게다가 딸 연지까지 도통 전화통화도 할 수 없었다.

안서는 시댁을 찾았다. 용서를 기대하고 간 것은 아니었지만, 시댁에선 찬바람만 불었다.

안서는 문전박대 당했고, 딸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딸이 다니는 학교 앞에서 할머니의 손에 붙들려 가는 딸을 훔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상경 길은 참담했다. 고뇌의 시간이 멈춰지지 않았다. 딸과 활터를 빼앗긴 여인으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김형식에게 연락했다.

형식은 즉각 사모의 정을 쏟아내며 덤벼들었다. 안서는 그래도 편한 그와 술 한 잔 하고 싶었다.

딸 연지마저 없는 자신의 외로운 집에 그를 초대한다.

단 하루 밤만이라도 나의 외로움을 앗아가 줘. 당신의 영원한 반쪽이 될 거야. 아이를 낳게 해줘.

현실돌파구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의 편을 만들고 싶었다.

외롭고 서러운 신세를 아이를 낳아 키움으로서 치유하고 싶었다.

안서는 무슨 일을 해도 외로움과 억울함이 가시지 않고 그때뿐이었다.

조만석 원장을 만난 뒤 결혼해 버릴까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녀는 누구든지 자신에게 마법을 걸어서라도 임신시키는 남자에게 의지할 작정이었다.

안서는 다시 정인철 교수에게 만나기를 청한다. 정 교수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정 교수는 안서를 태우고 차를 몰아 일영을 지나 장흥계곡으로 향했다.

기산저수지가 차분하게 눈에 들어왔다.

“교수님, 제가 활터에서 이렇게 당해도 되는 거예요?”

“이성을 가지고 차근차근 대처해 나아갑시다.”

안서의 항의성 투정을 그는 차분히 받아 주고 있었다.

“제가 과부고, 돈도 없고, 배경도 없다고 이렇게 멸시당해도 되는 거냐고요?”

“우리 사회가 ‘과부멸시’, ‘과부의심’이라는 독선과 절대권위 같은 도그마에 빠져 과부들의 삶을

슬프게 하기도 하죠. 나도 그러한 도그마를 누구의 말처럼 ‘열린사회의 적’이라고 생각해요.

과부경시라는 선입견적 콤플렉스에 시달리시겠지만 그깟 멸시쯤이야 견뎌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루빈의 꽃병처럼 흑백논리에 따른 극단적 편 가르기가 문제일 뿐이죠.”

안서는 대화를 하면서도 외로웠다.

두 사람은 매운탕집 앞마당을 나란히 걸어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허물어져 가는 오래된 기와집에 거미줄이 주검처럼 걸려있었다.

주로 낚시꾼들이 드나드는 집이었다. 물가 쪽 방으로 안내되었다.

아랫목에 이불이 깔려 있는 온돌방이었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땐 터에 방 전체가 따끈따끈했다.

이불 속에 네발을 묻었다. 외딴 방에 두 사람만 있으려니 다소 쑥스러웠지만 그런 대로 정감이 서렸다.

“교수님, 저 궁도협회에서도 잘렸대요. 제가 이렇게 당해도 되는 거냐고요!?”

안서는 자신도 모르게 당돌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정의는 결코 죽지 않아. 내가 머잖아 협회 부회장이 될 거야. 회장도 내가 잘 아는 재력가를 추천해서

이번에 취임하게 되고.”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래도 이미 결정 난 일이고, 온통 그쪽 편뿐일 텐데 정의가 통하느냐고요?

제가 왜 활터에서 이렇게 적이 많아져야하는 거죠? 루빈의 꽃병에서 진실은 뭐죠? 사람인가요, 꽃인가요?”

안서는 정 교수까지 자신을 몰라주는 것 같아 못내 서운했다.

그러는 사이에 주인할머니가 늦가을을 맞아 살이 통통히 오른 잡고기를 넣은 매운탕을 끓여가지고 왔다.

반찬으로는 산에서 캐고, 땄다는 이름 모를 산나물과 버섯이 주종을 이뤘다.

“계산부터 해요. 이제 우리는 잘 테니께 잡수고들 놀다가 가시요.”

정 교수는 음식 값을 먼저 치렀다.

“교수님, 저 오늘 오전에 김용철 사범을 명예훼손죄와 폭행죄로 고소했어요.

저를 위해 증인 서 주실 수 있으시죠?”

정 교수는 증인 설 자신이 있었다. 그것마저 못 서준다면 정의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 안서의 일인 만큼 돕고 싶었다. 사실 활터의 보수적 환경에서 증인 서기란 어느 누구도 원치

않을 일이었다.

그는 지난 삭회 후 회식 때 김용철 사범이 안서가 거만하게 군다며 따귀를 때리고 폭언하는 것을

당당히 저지시켰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교수님. 차라리 활 쏘지 말고 아이를 낳아서 키우며 한 삼년 쉬다가 활터가 조용해지면 그 때

다시 나타날까 봐요.”

연약한 여심 아닌가. 정 교수는 안서가 내심 남성에 의탁해 안정된 삶을 꾀하려는 심리상태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믿어요.”

“제가 교수님의 무얼 믿죠? 교수님이 남편이라도 되나요? 아님 철저한 후원자?”

다소 분위기가 서먹해진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없이 술만 마셔댔다.

얼마가 지났을까 정 교수가 안서의 옆으로 다가가 안서의 손을 살며시 잡아 준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었다.

“참, 김형식이 그 친구 간호장교인 아내와 이혼했다던데? 애인이 생겼대나 어쨌대나? 여자 복도 참 많아.”

정 교수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후배 김형식의 이야기를 꺼냈다. 안서는 노총각으로만 알고 있었던

형식이 이혼했다니 너무 놀라웠다.

“노총각이 이혼을 하다니요?”

“그 친구, 육욕이라는 번뇌를 끊어버리지 못하고 결국 파계하면서 바로 결혼했는데도 아직 몰랐단

말이야? 자고로 대처(帶妻)를 못 거느리는 중놈이 축첩하듯 살보시할 보살을 여럿 삼는다던데.”

정 교수의 뼈있는 말을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안서는 그동안 자신을 속여 온 까끄라기만도 못한

인생을 증오한다.

“죽은 제 남편도 다른 여자가 있었어요. 시댁에선 아직도 남편이 복상사로 죽은 줄만 알고 저를

학대하고 있지만.”

안서는 온갖 질곡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오늘밤만이라도 교수님의 진실을 보고 싶어요.”

“난 이미 안서씨에게 내 진심을 보이고 있어요.”

“우리 국궁놀이해요, 죽으면 다 썩을 몸인데....”

안서는 형식을 향한 복수심을 달래려는 듯 자신도 모르게 무서운 유혹의 화살을 쏘았다.

정 교수는 아내가 죽자 주변에서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같은 대학교에 근무하는

독신자인 이혜선 교수까지도 프러포즈를 해와 흥분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현혹되어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가슴이 떨려 왔다. 안서를 다시 찬찬히 쳐다보는 순간 아랫도리가 우쩍 일어났다.

얼마만인가. 뜻밖에 검은 운우의 정 앞에 서다니. 그러는 사이 죽은 아내의 배신이 머릿속을 따갑게

휘어 감으며 이성을 내리쳤다.

“후회하려고요? 인간은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는다고 하던데...”

“두려우세요? 우리들의 만남이 죄가 될 수 있을까요? 교수님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

이제 염장이가 되어 교수님을 염해 줄 자신이 생겼단 말예요.”

“영혼까지도 사랑해 줄 수 있다는 말이군?”

정 교수는 안서가 죽음준비교육을 잘 받고 있는 제자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그녀의 미태술(媚態術)이

감성을 더욱 세차게 뒤흔들고 있었다. 정 교수는 유혹의 소나타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안서를 포옹한다.

독신은 차라리 죄악일 수 있었다. 본능적인 욕구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생각의 길이 같았기에 사대에 서서 국궁놀이를 시작하고 싶었다. 신들린 듯이 자웅을 겨루고 화살에

몸을 싣고 과녁을 향해 날고 싶었다. 드디어 서로 분문을 조이고 만작하며 활을 내고 거두며 몇 번씩

현을 조율하며 흠뻑 젖는다. 장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상의 교합에 흡족해 한다.

안서는 이제 과부멸시라는 도그마의 덫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어느덧 새벽이 되어 창문 밖은 저수지에서 올라오는 물안개로 온통 미궁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낚시꾼들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물고기들마저 잠들어 있을 시간. 두 사람사이를 흐르는

선율은 더욱 감미로웠다.

“... 저를 지켜주세요. 이제 교수님, 당신만을 사랑하고 싶어요.”

“아무 걱정 말아요, 안서씨. 우리 결혼합시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우리, 활터에서 결혼식 올려요. 당신과 죽을 때까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전국에

활을 쏘러 다닐 수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해요. 김형식씨에게 우리 결혼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야겠어요.”

안서는 사랑의 테를 두르고 있었다. 이제 열등감이라는 사고회로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정 교수는 안서가 궁체 못지않게 살맛이 유별난 여자라고 생각하며 연거푸 두 대의 담배를 피워댔다.

이제야 죽은 아내를 용서할 수 있었다. -끝-

          2011년 노원문학 3호 에 실린 소설 루빈의 꽃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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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6.04.28 18:49

    첫댓글 좋은글 잘 간직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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