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통상적으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사후세계를 통해서 선악 간에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의 최후의 장면을 상상하게 되고, 그런 이야기들을 문학적 소재로 많이 등장시킵니다. 그 예로 기독교문학에서 대표적으로 많이 알려진 존 번연의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 Progress)이 천국을 찾아가는 여정과, 그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더욱이 흥미 있는 사회현상은 여전히 업과 윤회, 그리고 지옥과 환생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 예술문학 등이 사후세계의 거짓된 낙관론과 거짓된 안정망으로 허망한 그물을 쳐주고 있는 세상풍조와 시대사조로 포스트 모더니즘 인본주의를 목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전에 그런 종류의 영화가 천만 관객으로 이끈 것에 대해서 누군가 평가하면서, 그 영화가 조금은 한국사회를 정화(淨化)시키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영화지만, 그럼에도 사후세계에서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심과, 더불어 죄를 지으면 혹시 지옥에 갈 수 있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는 역할을 아주 미력하게라도 했을지 모른다는 말에, 필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만. 인간 실존이 쉽게 뉘우칠 수 없는 죄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불교의 종교문화사상은 사후세계이야기로 목련존자가 지옥에 있는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한 지옥행이야기나, 또 지장보살의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살생의 업보에 의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문학적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불교적인 종교문화사상에 나타나는 업보(業報)와 기독교적 업보(業報)?가,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불교의 업보는 원인과 결과에 의해 선인선과(善人善果)와 악인악과(惡因惡果)에 대한 중음계에서 49일 간 심판을 받고 육도(六道)윤회로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나머지는 다른 곳으로 윤회를 하든지 그렇게 윤회환생의 순환론적 세계관을 진리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도 사후세계에 나타나는 천국(낙원)과 지옥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적인 영적교훈은 부자가 거지나사로를 외면하고 자기 것을 가지고 호의호식했다는 행위로 인해 지옥에 떨어지고, 거지나사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로 천국에 들어갔는지를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의 핵심은 사후이야기로 나타나는 인과(因果)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깊은 영적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계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적 인과의 업보?는 거지나사로가 보여준 장면을 유추하면, 거지나사로는 아무 공로없이 하나님으로부터의 긍휼하심과 구원의 은혜를 덧입고, 아무런 선인선과나 악인악과의 행위와 관련성을 뛰어넘어서 이루어진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묘사하고 있는 복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선악 간의 인과행위에 따른 업보로 심판이 정해지지만, 기독교적 인과의 업보?의 심판에서는 인간과 관련된 선악 간의 행위와 관련이 없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주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복음 7장 17, 18절에서 예수님은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고, 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는 선인선과(善人善果)와 악인악과(惡因惡果)를 역시 유사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하지만 복음의 핵심은, 그러한 인과응보와 업보의 논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부활생명으로 깨뜨리고 끊어버리셨다는 것에 방점을 찍게 됩니다. 이 부활생명, 곧 영생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나타난 인과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업보적인 인과논리가, 결국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능력이 그 인과론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 깨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이 결론적인 교훈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그런 복음을 인생들에게 값 없이 주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긍휼하심과 은혜로 인해 나타난 복음의 능력이 불교의 종교문화사상과는 전혀 다른 영원한 인간의 생사(生死)를 가르고,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이정표(里程標)가 됩니다.
덧붙여서 필자는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시각과 놓쳐서는 안 되는 교훈에 대한 논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습니다. 바로 천국과 지옥이 죽은 후에 닥치는 것만이 아니고, 또 그냥 그렇게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 여기서도 그런 일을 당하고 경험하며 겪을 수 있다는 것을, 경구(驚句)와 비유(比喩)가 늘 종교적인 언어를 통해서 영적으로 말해지고 경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회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오류(誤謬)와 왜곡된 현장을 무관심으로 지나쳐 간 사건사고가 삶에 실화(實話)로 존재하고 있고, 그런 이 땅에 천국과 지옥의 자리가 함께 있었던 그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천국의 문은 닫아버리고 지옥의 통로를 열어 놓고, 넓은 문으로 인도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과, 그들을 조정하는 악한 영들의 모습이, 지금도 여전히 과거와 다를 바 없이 항상 보게 되면서, 소 잃고도 외양간 하나도 올바로 고치지 못하고 계속 반복하고 있는 사회적인 자화상을 그냥 지켜 보고만 있는 것 같아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인재를 바라보면서 안타깝고 답답한 무거운 마음이 슬프기만 합니다.
따라서 사후세계에서 겪을 천당과 지옥은, 일단 가 본 후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 있기에, 이 땅에서 느껴지는 천당과 지옥의 사회적 경험과 내적체험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으로, 삶 가운데에서 인식하고 영적으로 깨달을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래야지만 어떻게 보면 죽은 후에 받을 사후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이 땅에서 현재적으로 실감(實感)되어져, 오늘 이곳에서의 삶이 더욱 귀중하고 개과천선(改過遷善)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을 천국으로 여기고 감사생활의 이유를 제공해 주는 하늘의 아름다운 덕(德)이 복음으로 선전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맛보는 천국의 즐거움이나 지옥의 괴로움이 우리에겐 미리 간 보는 맛보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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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영적원리가 나타나는데, 바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 도래했다는 것은 현실세계 속에서 천국이 존재한 것이고, 그리고 귀신이 쫓겨났다는 것은, 귀신의 본거지인 지옥이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과 지옥이 지금 여기에서 실질적으로 자리 잡고 인간 세상 속에서 활동하고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런 곳이 구체적으로 이 땅의 어디에 있다고 한정 지어서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 눈에 보기 좋고 살기 좋게 보이는 곳이나 종교집회장소 등이 이 땅에서 임재(臨齋)하시는 하나님나라와 천국의 존재라고 말 할 수도 없으며, 또 사람들의 눈에 거칠고 누추하고 냄새나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나라의 천국이 아니라고 역시 말 할 수가 없기에, 이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말해질 수가 없는 하나님의 주권섭리의 신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떤 곳에 있든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 중심에 깊이 숨겨져 있는 어떤 마음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내재되어 존재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선종(禪宗)에서는 ‘마음이 능히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며 마음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心能作佛 心作眾生 心作天堂 心作地獄)고 하여 유심(唯心)구조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유심불토란 마음을 깨달으면 날 수 있는 곳’(唯心佛土者了心方生)이라고 보았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부처나 중생, 그리고 천당과 지옥 모두가 마음으로 짓는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도마복음의 예수님도 역시 그런 영적원리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온통으로 존재하는 가운데에서 천국의 깨달음과 지옥의 고통이 동시에 사람의 마음 가운데 함께하고 있다는 하나님나라의 믿음을 강조한 일체유신조(一切唯信造)영성을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나라의 천국이 온통으로 편재되어 있기에, 선종처럼 마음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제는 현실세상에서 실존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이 어느 순간에 바뀔 수 있는 환경과 여건, 그리고 상황이 우리 곁에 상존함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실천생황영성을 견지해야 합니다. 특히 과거를 돌아보면 세월호 참사 등 수많은 인재의 사건사고의 소식은, 마치 평온한 순간이 일 순간에 아비규환(阿鼻叫喚)인 지옥으로 변하게 하는 비극을 자주 목도해 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섭리가 어떻게 나타나든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순종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나그네 영성으로 천국소망을 가지는 귀하고 복 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