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약속은 온 인류를 믿음으로 이끌기 위해 더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후에 무시무시한 멸망에 대한 경고가 뒤따라 나오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두렵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구원이 믿는 자들에게 약속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영생의 핵심적인 구성 부분들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례가 복음을 믿는 믿음과 결합돼 있는 것은 우리 구원의 표標가 세례 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세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증언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틀린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울러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누구나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는 믿음과 아울러서 우리 구원의 절반을 차지하는 요소가 아니라, 우리 구원을 증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표標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연약함을 생각하셔서 그러한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것들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는 그 자체로 꼭 필요한 것은 아니고, 단지 우리 순종과 관해서만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존 칼빈 {공관복음 주석}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15)’1292쪽~1293쪽.
첫댓글
제 글 "세례"에서 막 16:16절에 대한 저의 이해를 쓴 부분입니다.
칼빈의 주석과 한 번 비교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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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세례 그리고 구원
예수님의 막 16:15-16절 말씀을 보면 믿음과 세례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막 16:15-16절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만을 보면
믿음 뿐만이 아니라 세례도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16절 하반절을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을 뿐,
"믿지 않고 세례도 받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는 말씀을 보면
정죄의 조건은 믿지 않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받지 않은 것은 정죄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세례받지 않은 것이 정죄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세례받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생각해야 할까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것이요"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 같은데
위에서 살펴 봤듯이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곧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면, 세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의 역사(살전 1:3절, work of faith, 또는 work produced by faith)라는 말씀이 있는데
믿음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함께 일합니다.
약 2:22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믿음과 함께 일하는 행함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는 독립적인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속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믿음에 속한 행위, 믿음으로 인한 행위, 즉 믿음의 행위입니다.
정리하면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세례는 믿음의 행위, 곧 믿음에 속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없이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믿음이 없으므로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례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세례"는 "죄사함을 얻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죄사함을 얻는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죄사함을 얻는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으므로 죄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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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끼을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구원의 서정을 “믿음→ 세례-구원”으로 잡으셨습니까? 누가 이 구원의 서정을 ‘믿음을 주시는 성령께서 내주하심. 즉 중생-믿음의 발현-믿음에 따른 칭의,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으로서 구원을 인증하심.→ 죄를 사하셨다는 뜻을 담은 성례로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신칭의의 믿음을 확증함으로써 이 땅 위 그리스도의 교회로 접붙임을 받았음을 인증(도장을 찍음)함’으로 이해하겠습니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를 이야기하시며 오순절의 경우(행 2:38) “회개하고 믿음→ 세례-죄 사함-성령께서 임하심-구원”이라는 ‘구원의 서정’을 추출하셨는데, ㅡTR-RE 님과 라마드 목사님이 이미 제시하셨습니다만ㅡ 고넬료 경우, ‘성령께서 임하심-믿음→믿음의 행위로서 세례를 받음-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구원을 받음, 즉, 이신칭의로 구원을 얻음.’이라는 ‘구원의 서정’을 추출해야 합니까?
@이지끼을 또 봅시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제자를 삼음→세례’라는 도식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TR-RE 님에게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를 제시하셨습니다. 이지끼을 님 식으로 하면, 이 말씀에서 ‘세례-삼천 제자가 생김’이라는 도식을 추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순절 때 제자들은 삼천 명을 제자도 삼지 않고 세례를 줬습니까? 즉, 그들은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주님 말씀을 어긴 자들이었습니까?
@이지끼을 또 봅시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① 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② 그러면 당신과 당신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지끼을 님 ‘구원의 서정’ “믿음→세례-성령이 임하시는 성령의 내주-구원”에 맞추면, ①과 ② 사이에 “그리고 세례를 받으심으로 믿음의 행위를 드러내십시오.”가 생략돼 있겠습니다.
도대체 이지끼을 님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과 ‘칭의’는 어디에 위치합니까?
@사계四季
1)
TR-RE 님과 라마드 목사님이 이미 제시하셨습니다만ㅡ 고넬료 경우, ‘성령께서 임하심-믿음→믿음의 행위로서 세례를 받음-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구원을 받음, 즉, 이신칭의로 구원을 얻음.’이라는 ‘구원의 서정’을 추출해야 합니까?
-제가 TR-RE님께 말씀드렸던 것인데 사계님께도 말씀드리지요
고넬료의 경우 성령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로 모두들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이후에 받은 세례가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는 세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씀에 따르면,
고넬료가 받았던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사도들이 받았던 성령세례와 같은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순절의 성령세례도 "중생케하는 성령세례"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의 성령세례로 사도들은 성령충만케 되었습니다.(행 2:4절)
그러면 사도들은 성령세례로 중생하고 또한 성령충만하게도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곧 성령세례와 중생, 그리고 성령충만이 동시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로 정의하는 것은
사도행전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계四季
2)
하나 더 말씀드리면 성령세례로 중생한다고 생각할 때 성령충만은
중생때 시작된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더욱 커져 성령충만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사도행전과 맞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나니아를 통해 성령충만부터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것은 사도행전과 맞지 않습니다.
사도행전과 맞지 않는다는 것은 바울의 신학과도 맞지 않는 것이 됩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바울이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도 자신의 글에서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로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고넬료에게 임했던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로 생각하는 것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사계四季
3)
마태복음 28:19절을 간략히 쓰면,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세례를 주며, 가르쳐 지키게 하며, 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이 부분은 라마드님께 여쭤 보시면 좋겠습니다.
@사계四季
4)
행 16:31절만 말씀하셨네요. 34절까지 보면 좋겠습니다.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 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제가 이 구절들에서 주목하는 것은
말씀이 전해졌는데 그 말씀을 믿었다는 말 대신 세례를 받았다고 하고
이를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곧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