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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호 산문집 _ 바람개비는 즐겁다
나의 뿌리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나의 계보나 족보도 모른다. 아는 것은 오로지 내가 북한을 떠나온 실향민의 후손이라는 사실뿐이다.
1945년 해방 직후 북한을 떠나 남한(이남)으로 내려온 이주민의 1대 후손인 나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원조 탈북자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고 어머니는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다. (명천은 맛있는 명태로 유명한데, 명태는 명천 어부가 동해안에서 처음 잡은 생선이라는 말이다. 함흥은 함흥차사로 이름난 곳으로,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데서 유래하였다.) 부모님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3년경 결혼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명천 지방 유지의 장남으로 서울로 유학 와 당시 경성의 보성전문을 다녔고 그 후 일본 대학 법문학부에 재학하다가 귀국하였다. 아버지가 남긴 편지 등의 필체를 보면 한자와 한글이 모두 달필인 것을 볼 때 아버지가 당시 지식인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내 어린 기억으로는 휴전 직후 우리 동네에 미군 물차가 와서 식수를 나누어 주었는데 아버지가 미국 병사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어린 나는 물론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가 영어 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 같다. 1960년대 중학교 입학할 때 나는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명천에서 교사를 하시던 아버지는 해방을 맞았는데, 그해 9월 30대의 젊은 김성주(후에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 김일성으로 개명)가 입북하면서 북한의 해방 축제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졌다. 당시 소련에서 공부하고 훈련받고 지령 받은 젊은 공산주의자 김일성은 부르주아 지식인 숙청, 지주 축출과 토지 개혁, 몰수, 자본가 축출, 기독교인 축출 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였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북한의 많은 사람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황순원의 장편소설 『카인의 후예』에 이 당시 평안도 상황이 잘 그려지고 있다.) 나의 부모님도 초기 탈북 행렬에 합류했는데 (장남인 아버지는 형제가 많았으나 아버지만 남하하였고 어머니는 친가 가족 전체가 남하했다.) 아마도 탈북이 비교적 쉬웠던 1946년경 남하한 것 같다.
처음 정착한 곳은 서울 노량진(정확히는 노량진 초등학교 근처)으로, 나는 1947년 12월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 후 6·25전쟁 중 아버지는 국군에 입대했고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황해도 옹진 등 이리저리 피난 다녔다. 1953년 7월 17일 휴전 후 부모님은 당시 인천의 변방인 주안에 정착하였고, 나는 지금은 번화한 지역이 된 주안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주안파출소 순경으로 근무하였던 아버지는 고등교육까지 받았는데 하급 경찰관 생활에 불만을 품었던 것 같다. 이것이 부모님과 나의 어린 시절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께 직접 함경도 고향에 대해 여러 가지를 여쭤볼 시간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주로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다.
내가 뿌리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부끄럽게도(?) 비교적 최근이다. 무엇보다 젊어서는 사는 데 바빠 나의 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다 보니 내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연히 호적등본을 자세히 보니 본관이 전주(全州)로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나는 전주 정씨였던가?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나는 본관이 어디냐고 물으면 바로 “하동 정씨”라고 대답했었다. 그때까지 나는 정씨 성 중 가장 많은 하동 정씨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호적등본에 전주 정씨로 되어 있다니! 그렇다면 전주 정씨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나의 조상이 남쪽 전주에서 북으로 갔단 말인가? 이때부터 나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품게 되었다. 전라도 전주와 함경도 명천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었지만 풀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도 한때 여진족 부장으로 전주 이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성계는 군인이니까 변방 지역 함경도에 근무했겠지 하고 추정했었는데 이성계는 전주와는 관계가 없고 원래 여진족 출신으로 함경도 지방의 토호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고려 변방 지역에 소속된 장수가 되면서 본으로 전주를 택해 전주 이씨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원래 한민족이 아닌 북방민족인 여진족이나 몽골족 후예였던 나의 조상도 이성계처럼 조선 백성으로 살고자 전주 정씨가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 조상을 북방 출신이라고 확신하였지만 얼마 동안 이 문제는 미결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퇴임 후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가진 중국 전공의 선배 교수로부터 생전 처음 전가사변율(全家徒邊律)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무엇보다 그동안 어떻게 이런 역사에 관해 까막눈이었을까 탄식하였다. 전가사변율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전주 정씨라는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확실치 않고 확인할 길도 없지만 아, 나의 조상도 원래 남한의 하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 살다가 세종 때 시작된 전가사변율에 따라 함경북도로 이주한 것인가 보다.
내가 새로 알게 된 전가사변법(全家徒邊法)은 조선 시대 이주민법으로 죄인의 전 가족을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켜 살게 하는 형법이었다. 조선은 대체로 명나라 형법인 대명률(大明律) 오형(五形)에 따랐으나, 조선의 독자적인 이 법의 시작은 세종 때부터로, 인구가 별로 없는 북방 변경 지방인 함경도와 평안도(심지어 황해도, 강원도까지)의 국가 방어와 발전을 위해 남쪽 백성들 특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전가입거(全家人居) 정책이며 법 제도였다. 처음에는 주로 재산이 없는 가난한 범법자 가족들을 대상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직계가족뿐 아니라 연좌제 성격이 강해 5대조 친족들까지 포함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재산이 있는 백성들과 일부 하급 관리들도 파견하였다. 이 법과 제도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주자들이 변경 지역에서 적응하지 못해 도주하기도 하였고 각종 범죄가 발생하는 등 문제도 있었다. 전가사변법은 처음에는 조선 변방 지역의 이주 정책으로 출발하였다가 후에 구속력 있는 형법으로 바뀌었다. 그 후 중종 때 이르러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형벌 정책이 완화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고 동시에 조선 북방 정책의 변화로 이 법은 서서히 약화하여 영조 20년인 1744년 완전히 폐지되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혹시 우리 선조도 전가사변법에 따라 하삼도 어딘가에서 북쪽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았는가이다. 이것을 확실히 알려면 전주 정씨 족보와 『조선왕조실록』 등을 살펴야 할 듯하다. 훗날 통일이 되면 아버지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 현지에 가서 그 지역 향토사라도 찾아볼 수 있으리라. 10여 년 전 도쿄에 갔을 때 나는 일본 대학에 들러 아버지의 학적부를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기회가 오면 다시 한번 시도해볼 생각이다. 보성전문 후신인 고려대학교에 가서 아버지의 흔적도 찾아보고 싶다.
만일 우리 조상이 전가사변율에 따라 하삼도에서 북한으로 이주한 것이라면 혹시 『조선왕조실록』 이주자 명단에서 우리 조상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을까? 아직 한 번도 찾아본 적은 없지만, 전주 정씨 족보에서 나의 뿌리에 대한 어떤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리라.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전가사변율과 관련된 부분을 세조실록 28권부터 정조실록 35권까지 A4로 55쪽이 넘는 사료를 출력해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우리 집안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이 일의 어려움은 또 다른 곳에 있다. 나의 선대들이 남한에서 올라간 게 아니라 원래 함경도 지역에 살았거나 여진족 후예로 조선 변방에서 조선 백성으로 살고자 전주 정씨를 취득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성계 가족이 전주 이씨라는 성과 본을 취득했듯이 말이다. 아직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추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아마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것은 탈북 실향민의 한 많은 숙제로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 내 뿌리를 확실하게 찾지 못하고 분명하게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13세기 유럽 성직자의 말을 마음에 품고 조용히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상냥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다. 상냥한 사람은 이 세상의 한 곳에만 애정을 고정했고, 강한 사람은 모든 장소에 애정을 확장했고, 완벽한 사람은 자신의 고향을 소멸시켰다.
— 위그 드 생빅토르, 『디다스칼리톤』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김성곤·정정호 옮김)
(내가 탈북 실향민, 서울 시민, 한국 국적자이지만 결국 천국 시민권자라면) 나의 영원한 고향은 궁극적으로 이 지상이 아니라 천국이 아니겠는가?
죽기 전에 남북통일이 되거나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때가 온다면 몰라도 당분간 나는 뿌리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거룩하게 포기할 것이다. 나의 선조가 남방 출신이건 북방 출신이건 더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이제는 나의 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삶을 잘 정리하고 싶다. 기독교인인 나의 본향은 이 지상 어딘가가 아니고 궁극적으로 천국이다. 내가 영생을 누린다면 그곳 천국 시민권자로서일 것이다. 영원한 나그네, 이방인, 순례자로서 이 지상은 결국 내 고향이 아니다. 아니 나는 과감하게 이 땅에서 고향을 소멸시키고 살아가고 싶다.
추기
원고 파일을 출판사에 넘기고 나서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전주 정씨(全州鄭氏)의 형성 과정을 알게 되었다. 내가 속한 전주 정씨의 시조는 정원흥이었다. 원래 연일 정씨로 고려 예 종(1105~1122년 재위) 때 장례원 판결사로 있다가 견책을 받아 전주로 유배당해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원흥의 후손들이 연일 정씨에서 떨어져 나와 본관을 전주로 하는 새로 운 계보를 시작하였다. 그의 16대손인 정원지는 조선 단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세조 10년(1465) 함경북도 성진으로 집단 이주했다. 그래서 오늘날 전주 정씨는 그 발원지인 전주보다 함경북도 일대에 많이 분포되었다. 이로써 나의 조상에 대한 큰 의문은 일부나마 풀렸고 나의 뿌리 찾기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나의 뿌리 찾기는 결코 무익한 것만은 아 니라 믿는다. 나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한 소중한 성찰의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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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교맙숩니다. 고 이사님^^*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상냥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다. 상냥한 사람은 이 세상의 한 곳에만 애정을 고정했고, 강한 사람은 모든 장소에 애정을 확장했고, 완벽한 사람은 자신의 고향을 소멸시켰다."
— 위그 드 생빅토르, 『디다스칼리톤』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김성곤·정정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