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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5일 기독교복음을 들고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딘 아펜젤러는 그해 7월 6일 우리 나라 최초의 오르간예배를 드렸다.
오르간 소리가 울려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 초가집에 몰려들었고 아름다운 소리에 반해 버렸다.
그때 아펜젤러가 머물던 초가는 남한 최초의 교회인 인천 내리교회가 됐다.
찬송가가 우리말로 처음 발행된 것은 1892년이었다.
존스와 로드와일러가 27곡을 우리말로 번역, 악보없는 [찬미가] 수형본를 만들었고, 다음해인 1893년에 언더우드가 사성부 악보를 집성해 1백 17곡이 수록된 [찬양가]를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 발행했다.
그러나 찬양가는 감리교에서 사용을 거절, 1896년 아펜젤러와 존스가 공동편집하여 새로운 [찬미가]를 발행했고, 1895년에 장로교는 [찬셩시]를 발행했다
십자가 예배당 초기 교인들
1901년 내리교회의 성탄절 모습
인천 우각동교회(내리교회)도 예배당 안과 밖을 찬란하게 장식하고 성찬절 예식을 행하였다.
2백명의 교인들이 모였는데 서양인 손님 4명과 청국 영사 부부가 참여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밤이 되자 화려한 각종 색깔의 등불을 든 교인들이 예배당을 도니 깜깜한 밤에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또 딱총을 쏘아 이 날을 경축하니 아이들의 탄성이 밤하늘에 가득찼다.
죤스 선교사가 설교한 후 김경선 씨의 부인인 이에리사벳씨가 수건을 싼 항아리를 들고 나와 죤스에게 바쳤다.
죤스가 조선 떡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무거우니 이것을 다 먹으면 배가 터지겠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수건을 걷어보니 그 안에는 금 5백 돈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교인들은 깜짝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 돈으로 남녀 사역자와 형편이 어려운 교인들을 도왔다.
3백명 가량 되는 구경꾼들이 교인들의 사랑의 헌신에 적잖게 감동을 받았다.
금광회사 사장이 각종 실과와 과자 한 짐을 선물하여 구경꾼들과 나누어 먹었고, 김경선씨가 동화(銅貨) 18원을 기부하였다. (출처- 기독교타임즈)
십자가 예배당 초기 교인들
1905년 김기범 목사와 내리교인들
1955.10.19 더 큰 성전을 건축하기위해 역사적인 건물을 허물고 새 교회를 건축 하였다.
불타기전 새 성전 내부
1964년 불탄 예배당, 새로지은 교회는 안타깝게도 10년이 채 못되 전소되었다
1964년 불탄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66년 새 성전 봉헌
미 감리교회의 한국 최초 선교사. 드루신학교를 졸업한 아펜젤러는 1885년 2월에 목사안수 받고 그 이튿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을 경유해서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입항했다
. 아펜젤러 목사는 서울에 들어가기까지 제물포에 머물면서 내리교회를 세웠고 이후 배재학당, 정동교회를 창립했으며 1902년 6월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해상 사고로 순교하기까지 17년을 한국 백성을 위해 선교사로서, 교육자로서 헌신했다
한국 감리교 첫 예배당세운 아펜젤러 목사
“가마 하나에는 8명의 가마꾼이 따랐습니다.
4명이 한 조가 되어 가마를 나릅니다. 가마꾼들은 평균 1시간에 4마일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달립니다.
교대할 때는 교대할 팀이 같은 속도로 옆에서 걸어가면서 가마의 손잡이를 잡고 멜빵을 한 쪽 어깨에 걸치면서 들어오면 다른 편은 물러가는 식으로 상당히 민첩하게 교대하는데 걸음이 멈춰지거나 늦어지지 않습니다.”
1890년 인천에서 가마를 타고 서울에 들어온 셔우드 홀이 기록한 가마꾼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처음 복음이 전해질 무렵 가깝고도 먼 인천의 모습을 어림풋이 떠올릴 수 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된 인천은 외국문물의 집산지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개항 후 일본지계가 설정되고 후에 청국지계 그리고 서구열강의 공동지계가 설정되어 인천은 그야말로 서양문물의 전시장이 되어갔다.
지계(地界)란 외국인 거주지역으로 치외법권이 인정된 우리 나라 속의 외국이었다.
인천의 외국지계는 제물포를 중심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갔다.
개항이후 인천에는 외국의 물건을 하역하는 일에서부터 도로작업 그리고 가옥건축에 이르기까지 장정들의 일손이 많이 필요해 졌다.
이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장정들로 인천은 거대한 노동시장으로 변모해 갔다.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매력적인 인천선교에 착수하여 1889년 청국지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책방을 열었다.
그리고 노병일을 이곳에 파송하여 책을 팔면서 전도를 하게 했다.
그러나 청국지계에서는 선교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아펜젤러는 선교의 근거지를 내동 언덕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 후 노병일은 2년여 동안 인천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으나 선교의 결실이 거의 없었다.
노병일의 지나친 열정과 지방정부의 선교탄압이 그 원인이었다.
노병일은 밤에 잠자리를 방해할 정도로 크게 외치고 다니는가 하면 행인들에게 격분한 표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유교문화에 젖어 있던 지방관리들은 이런 꼴을 가만 놔 둘 리 없었다.
그들은 서양종교를 외치고 다니는 노병일에게 전도를 금할 것과 만일 어길 시 퇴거를 명한다는 경고를 하였다.
관리들의 이런 서슬 시퍼런 태도를 보면서 서민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천은 여전히 매력적인 선교지였다.
이런 판단에 따라 1891년 6월 내한한 굿셀감독은 아펜젤러를 인천(제물포)지역의 선교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아펜젤러는 매주 말을 타고 인천에 와서 주일을 보낸 후 배재학당의 강의를 위해 월요일이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말을 타고 걸리는 시간은 7시간 정도였다.
이렇게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하면서 아펜젤러는 인천에 한국 최초의 예배당을 짓는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작지만 특이한 건물이 필요했다.
건물은 1891년에 짓기 시작하여 그 해 겨울 아직 완공되지 않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겉에는 하얀색 석회를 발랐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얹었다.
방은 두 개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는 아주 단순했다.
설교단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10평이 겨우 넘는 집에 방 두 개를 넣었으니 큰 방이 기껏해야 6평을 넘지 못했을 것이지만 바닥에 앉으면 설교자를 제외하고 성인 12명은 능히 예배드릴 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이 집은 한국에서 지은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이란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다.
아펜젤러는 이 예배당을 지은 후에도 말을 타고 내려와 예배를 인도했다.
제2대 조원시 목사 ((George Heber Jones, 존스, 1892-1903)
아펜젤러 목사를 이은 내리교회 초창기의 뛰어난 지도자가 바로 조원시 (존스) 목사이다.
그는 1888년 5월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선교사로 내한하여 약 5년간 배재학당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출판 사업도 하다가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내리의 아버지라 할만한 분이다.
그는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고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 봉헌했으며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여 이동신학교를 개설했고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지었고 교인 다수가 하와이로 이민함에 따라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 한국 교회 찬송가 보급에도 공한한 그는 그 후 서울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The Korea Review를 편집발간하였고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으며 1905년에는 초대 신학당 (현 감신대) 당장에 취임하였다.
조원시 목사는 1919년 5월 뉴욕에서 51세로 별세했다.
초기 감리교 대표 '학자 선교사' 조원시
“만일 딱 한 문장으로 선교사로서의 조원시 박사를 말한다면 이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깊은 동정심을 지닌 학자의 본능과 습관을 가진 분이었다.
” 인천내리교회 제2대 담임자 조원시(George Heber Jones, 1867~1919) 목사의 삶은 선교사 윌리엄 노블(William A, Noble)의 이같은 추모의 글로 압축된다.
조원시 목사는 '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교 초기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학자 선교사'다.
특히 선교활동은 물론 교육사업, 하와이 이민, 학술 연구 등 그가 인천에서 남긴 업적은 괄목할만하다. 1867년 8월14일 뉴욕 주 모호크(Mohawk)에서 태어난 조원시 목사는 20세 약관의 나이에 미북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서 1888년 5월14일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 배재학당에서 수학 등을 가르치면서 아펜젤러의 사역을 돕는 일로 한국생활을 시작한 그가 인천에 온 것은 1892년. 그가 내리교회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선교활동을 펼친 1903년까지는 인천 강화지역에 가장 왕성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강화 교항교회, 홍의교회, 고비교회, 담방리교회(현 만수교회), 부평 굴재교회, 하리교회, 연압읍교회 등 수많은 감리교회들이 이 당시에 설립됐다.
선교활동 외에 조원시목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교육사업이다.
그가 인천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 또한 교육사업으로 배재학당 시절, 자신의 한국어 선생 부부를 인천으로 이주시켜 '소년 소녀 매일학교'(영화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조원시 목사는 한국 역사와 문화, 전통 종교에 대한 학술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특히 한국어 사전을 직접 편찬해 한국어에 서툰 선교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문서 선교를 통해 인쇄 출판 분야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892년 루이스 로쓰와일러(Louis C. Rothweiler)와 공동으로 한국 최초의 찬송가를 편찬했으며 1892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잡지 'The Korean Repository'의 발간과 편집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0년 12월에는 제물포 우각현(현 영화학교 자리)에서 최초의 우리말 신학연구지인 '신학월보'를 창간, 사장 겸 주필로서 깊이 있는 논설들을 많이 남겼다.
그가 창간한 'The Korea Methodist'는 1905년 장로교에서 발간한 'The Korea Field'와 함께 'The Korea Mission Field'로 통합됐는데, 이 통합잡지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 교회사를 서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원시 목사가 인천에 끼친 영향과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 그가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02년 12월22일 한국 최초로 하와이 이민을 떠났던 121명 가운데에는 내리교회 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바로 이 하와이 이민을 실질적으로 주선하고 지원했던 주인공이 조원시 목사였다.
이어 조원시 목사는 1903년 미주 최초의 한인 교회인 오늘의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가 태동되도록 하기도 했다.
김진형 목사(죽림교회 담임목사)는 '하와이 이민과 조원시'란 세미나 발표자료를 통해 조원시 목사가 하와이 이민에 적극적이었던 데 대해 “당시 극심한 가뭄이 중부지방을 휩쓰는 등 한국에서의 삶이 힘든 상황에서 하와이에서의 생활이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낫고 신앙의 자유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조원시 목사는 1909년 5월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다가 1919년 5월11일 52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별세했다. ⓒ 경인일보
1901년 안수받은 한국의 첫 목사 김기범(좌), 김창식(우) 목사
귀츨라프 선교사 도래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있던 때는 구한말 약소민족의 어두운 국내외 정세였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미수호조약의 기반이 되었다.
고종황제의 ‘의료와 교육 사업’ 윤허로, 공식적인 기독교복음 전파를 위하여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내한한다.
인천내리교회 선교 관내인 제물포 우각리에서 열린 한국기독교 최초 신학회 교역자 과정을 졸업한 한국인 4명 중 2명 김창식 김기범 전도사가 1901년 5월 14일 제17회 조선선교회에서(상동교회) 한국기독교 사상 최초목사(집사 목사, 준회원) 안수를 받게 된다
. 평양 남산현교회의 김창식목사는 48개 교회를 개척, 건축하는 열정으로 핍박과 고난 가운데 조선의 바울이라 불리었고, 김기범 목사는 교회의 부흥과 교단발전은 물론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 충정의 목회를 하였다.
제3대 김기범 목사 (1903-1905, 1907-1910) 김기범 목사는 내리의 초대교인으로서 노병일의 전도를 받아 교인이 되었다. 김 목사는 한국인으로서는 김창식 목사와 더불어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감리교회는 물론 한국 개신교 전체를 통틀어서 최초로 목사가 된 분이며 또한 내리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신 분이다. 그는 내리교회의 전도사를 거쳐 신학회 전도사과정을 이수하고 원산으로 파송되었다가 1901년 5월 14일에 서울 상동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같은 해에 내리교회의 초대 한국인 목사로 파송되었다. 김기범 목사는 신병으로 1905년에 휴직하였다가 1907년에 다시 복직하여 1910년까지 시무하였다. 김기범 목사가 시무하던 해에 을사조약이 있었고 당시 교회의 엡�청년회가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하여 해체당한 일도 있었다 . 일찍이 교육에 관심을 두었던 김 목사는 존스 선교사를 도와 영화학교를 창립하는데도 공헌했다.
<인천내리교회>
내리교회 연혁 (1885.7- 1964.2. )
1885.7.29 아펜젤라 선교사에 의해 내리교회 시작 - "한국의 어머니교회 출범"
1890 한국 최초의 교회당 건축 "노병일씨 6간 회당 건축"
1891.8. 제물포웨슬리 기념교회 건축
1892.3.12 영화학교 설립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설립"
1893 한국 최초의 여선교회 조직 "보호여회: 존슨부인과 백헬렌 전도부인"
1894 한국 최초의 자비교회당 건축 "여자 예배당 6간을 26원으로 건축"
1895 한국 최초의 자비 개척교회 설립 "담방리 교회(현 만수교회)를 10원으로 개척"
1897 내리 엡�청년회 조직 "한국 최초의 기독청년회 조직"
1899.12.12 한국 최초의 신학회 조직 개강 "감리교신학대학 전신"
1901.5.4 본 교회 초대교인 김기범목사 안수 받음 "한국 최초의 목사안수"
1901.11.1 한국 최초의 지방회 조직 "한국 서지방"
1901.12.25 내리교회 예배당 신축봉헌 "십자가형 교회"
1902.3 본 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남북 감리교회 합동신학회 개최
1902.11 한국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제1호선에 내리교인 50명이 이민감
1902.12.22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로 파송
1903.11.3 한국 최초의 해외 개척교회 설립 "현 호놀루루 미연합감리교회"
1904 연회에서 한국 감리교회중 최우수 교회로 표창받음
1906. 6.13 엡�청년회 해산당함
1907.10 한국최초 예배당 남녀 칸막이 철폐
1908.4 엡웟청년회 독자부활조직
1919 여자청년회 조직
1923 소년회 조직
1925 내리 조선 소년 척후대 조직
1954.12 한국 최초의 메시아 전곡 발표
1958.12.22 교회당 완공봉헌"건평 323평 2층"
1961.4 내리유치원 설립
1964.2.26 교회당 완전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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