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여행 (6) 신해품 제4 (下)
법화경을 함께 배우는 ‘법화경 여행’ 제7회는 ‘<신해품> 제4’(下)입니다.
‘신(信)’의 힘으로 묘법(妙法)의 궤도에!
‘신해(信解)’의 본의는 무한히 향상하는 것
■ 신해(信解)란
<신해품> 제4(下)에서는 품의 이름이기도 한 ‘신해’에 관해 배웁니다. 여기서는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어의구전>을 배독하면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요(樂)는 해(解)에 미치지 못하고
‘신해’는 산스크리트어(범어)로 ‘아디무쿠티’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본디 ‘…에 마음이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뜻’을 가리킨다고 해도 좋습니다.
구마라습은 ‘묘법연화경’에서 ‘아디무쿠티’를 ‘신해품’이라고 한역했습니다.
축법호는 ‘정법화경’에서 ‘신요품(信樂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신해’와 ‘신요’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니치렌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묘락대사의 ‘법화문구기’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법화에는 신요품이라 이름하는데 그 뜻이 통한다 해도 요(樂)는 해(解)에 미치지 않는다. 지금은 영해(領解)를 밝히는데 무엇을 가지고 요라 하리요.”(어서 725쪽)
‘요는 해에 미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해’에 ‘영해’의 뜻이 담겨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해’에는 단순히 ‘이해’ ‘안다’라는 표면적인 의미뿐 아니라 부처가 깨달은 지혜를 체득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신해’가 법화경의 진의를 더욱 깊이 해석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아디무쿠티
먼저 ‘신(信)’에 관해 생각해 봅시다.
<신해품> 제4에는 법화경 28품 중 유일하게 품의 이름에 ‘신’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신’은 ‘아디무쿠티’ 또는 ‘슈라다’ ‘프라사다’라고 합니다.
각각 ‘신해(아디무쿠티)’ ‘신을 일으키다 또는 신을 두다(슈라다)’ ‘정신(淨信, 프라사다)’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미혹이 없어지고 마음이 깨끗해진 맑은 상태를 ‘프라사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법화경에 씌어진 ‘신’에도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법화경에서 ‘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방편품> 제2’ ‘<비유품> 제3’에서 배웠듯, 지혜 제일이라고 칭송받은 사리불 조차 부처의 경애를 얻으려면 ‘신’이 반드시 필요 불가결하다고 씌어 있습니다.
법화경 설법은 ‘신’을 전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우주를 자유롭게 유희하는 묘법(妙法)이라는 비술은 범부의 사의(思議)를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강한 ‘신’의 힘으로 묘법의 궤도를 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신’은 맹목적인 것이 아닌, 문증(文證), 이증(理證), 현증(現證)에 근거한 ‘신’입니다.”(보급판 ‘법화경의 지혜’(상) <신해품>)
● 생명을 여는 열쇠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신’에 관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일념삼천(一念三千)도 신의 일자(一字)에서 일어나며 삼세의 제불의 성도(成道)도 신의 일자에서 일어나느니라.”(어서 725쪽)
일념삼천의 법리가 성불의 법문인 것도, 삼세제불이 성불하는 것도 ‘신의 일자’를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신의 자(字)는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을 자르는 이검이로다. 그 까닭은 신은 무의왈신(無疑曰信)이라 해서 의혹을 단파하는 이검이고”(어서 725쪽)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성불을 막는 ‘원품의 무명(생명의 근본적인 무지)’을 잘라내는 것이 ‘신’이라는 검입니다.
무명을 신으로 타파하면 ‘원품의 법성(法性)’ 다시 말해 불성(佛性)을 용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세의 제불의 지혜를 사는 것은 신의 일자이며” “신은 지혜의 인(因)으로서 명자즉(名字卽)이며”(어서 725쪽)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신’은 지혜의 원인이고 가치창조의 원천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생명에는 어디까지라도 가능성을 열고, 향상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 특성을 최대로 발휘시키는 것이 묘법이고, 참된 종교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열고 지혜를 여는 열쇠’가 ‘신’이라는 한 글자에 있습니다.”(보급판 ‘법화경의 지혜’(상) <신해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극한까지 이성적
이어서 ‘해(解)’입니다.
<어의구전>에는 “해란 지혜의 이명(異名)이며”(어서 725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신해의 ‘해’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성 자체는 아니지만, 이성과 합치하여 이성이 그 일부인 듯한 ‘지혜’입니다. 극한까지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전 인격적인 ‘지혜’ ― 그것을 ‘신’으로써 얻은 것이 ‘신해’입니다”(보급판 ‘법화경의 지혜’(상) <신해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해’는 ‘지혜’이고 그 지혜는 ‘신’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 신과 해는 일체
대성인은 <어의구전>에서 ‘신해’를 더욱 깊이 배독하셨습니다.
“신 외에 해가 없고 해 외에 신이 없으며”(어서 725쪽)
신 없이 해는 없다, 마찬가지로 해로 나타나지 않는 신도 없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신은 불변진여(不變眞如)의 이(理)로다” “해는 수연진여(隨緣眞如)이며 자수용지(自受用智)를 말하느니라”(어서 725쪽) 하고 신을 ‘불변진여의 이’로, 해를 ‘수연진여의 지’로 나열하셨습니다.
묘법을 믿으면 부처의 융통무애(融通無碍)한 지혜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과 해는 대립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 ‘신은 해를 뒷받침할 뿐’이라는 정지적(靜止的)인 것도 아닙니다. 본래 일체의 것이지만 굳이 나누면 ‘신에서 해로’ 그리고 해에 의해 더욱 신을 강하게 하는 ‘해에서 신으로’ ― 이 양방향의 역동적인 반복으로써 무한하게 향상하는 것이 ‘신해’의 본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의왈신(無疑曰信)
분동하지 않는 확신을!
‘무의왈신’은 ‘법화문구’에 있는 말로 ‘의심이 없음을 신이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분동하지 않고 묘법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신심을 말합니다.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면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치렌불법(日蓮佛法)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성인은 <개목초>에서 ‘왜 난을 만나는가’라는 의문과 비난에 “이 의문은 이 서(書)의 간심이요, 일기의 대사이므로 곳곳에 이것을 쓰고 그 위에 의문을 강하게 해서 답을 마련하리라”(어서 203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문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문증, 이증, 현증을 들어 말법의 어본불이라는 결론을 밝히셨습니다.
의심을 오히려 깊이 확신하는 계기로 삼은 것입니다.
모든 의심을 타파하면 신은 더욱 깊어지고 의심이 없는 신이 됩니다.
<‘법화경의 지혜’에서>
진정한 자신을 확립
부처는 일체중생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일체중생의 행복을 열기 위해 투쟁합니다. 일체중생의 아버지입니다. 그 부처의 마음을 ‘믿으면’ 자기자신의 ‘지혜’가 열립니다. 그것이 법화경의 ‘신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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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신은 참된 자신의 확립입니다. 그리고 우주대의 무한한 지평이 자신의 생명에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우주에 생명을 열고, 우주에 감싸인 자기가 우주를 다시 감싸는 것입니다. 대우주와 교류하고, 서로 어우러져 울리는 일입니다.
◇
법화경이 ‘신’을 강조하는 까닭을 생명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법화경의 목적은 생명의 근본적인 무지 다시 말해 ‘원품의 무명’을 끊고, ‘원품의 법성(法性)’ 다시 말해 ‘본래의 자기자신을 아는 지혜’에 눈뜨는 것입니다. 이 법성을 ‘불성’ ‘불계(佛界)’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법성은 생명의 가장 깊은 심층에 있으므로, 더욱 표층에 있는 이성 등으로는 개시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포함한 생명 전체를 묘법을 향해 열고, 맡김으로써 비로소 ‘불성’과 ‘불계’는 자신의 생명에 현현하게 됩니다.
보급판 ‘법화경의 지혜’(상) <신해품>
법화경여행(6) 신해품(하).hwp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