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항목명 | 경서 |
한자항목명 | 經書 |
유형 | 개념/문헌 |
<요약>
유교(儒敎)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성현(聖賢)이 지은 문헌의 총칭.
<설명문>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경(經)은 직물(織物)의 세로 실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경(經)이란 원래 포백(布帛)의 세로 실(緯는 가로 실)을 의미한다. 경서라는 말은 세로 실이 직포(織布)의 본말(本末)을 관통하여 근간이 되는 것처럼 성현이 지은 전적(典籍)도 고금(古今)을 일관하여 변하지 않는 천지(天地)의 대경(大經)과 인류의 상도(常道)를 나타내 주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와는 달리 경(經)을 경(徑)과 같은 뜻으로 보고 도로가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어디에도 통할 수 있는 것처럼 성현의 저작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타당하기 때문에 경서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後漢, 劉熙 『釋名』). 『시(詩)』『서(書)』『춘추(春秋)』를 경으로 보았고, 순자(荀子)는 여기에 『예(禮)』와 『악(樂)』을 추가하였으며, 장자(莊子)는 다시 『역(易)』을 추가하였다. 이후에 그 하나하나에 경(經)자를 붙여 『시경(詩經)』『역경(易經)』등이라 하게 되었다.
이들 육서(六書)를 육경(六經)이라 하며, 한(漢)나라 때에는 육예(六藝)라고도 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경서의 수가 증가하여 남송(南宋)시대에 이르러서는 『주역』『서경』『시경』과 『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등 삼례(三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등 삼전(三傳) 및 『논어(論語)』『효경(孝經)』『맹자(孟子)』『이아(爾雅)』를 합하여 십삼경(十三經)이 되었다. 그러나 정호(程顥)‧정이(程頤)와 주희(朱熹)는 『예기』속의 『대학(大學)』『중용(中庸)』두 편과 『논어』및 『맹자』를 합하여 ‘사서(四書)’라고 따로 분류하고 『역경』『서경』『시경』『예기』『춘추』의 오경(五經)과 합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 하고 유교의 가장 기본적인 전적으로 삼았다. 이외에도 학자들에 따라 경서를 칠경(七經)‧구경(九經)‧십이경(十二經)‧십사경(十四經)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경세사상(經世思想)
한글항목명 | 경세사상 |
한자항목명 | 經世思想 |
유형 | 개념/학설‧논변 |
<요약>
국가나 사회를 올바르게 경영하기 위해 제시된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제방면(諸方面)에 걸친 논리적인 사유나 의식.
<설명문>
일반적으로 유가의 경세사상은 백성의 이용(利用)‧후생(厚生)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아울러 윤리도덕적 견해도 그 주요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 사상은 특정한 시대의 사회 상황과 밀접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시대의 특성에 따라 변화되었다. 예를 들면 선진(先進)시대의 유가의 경세사상은 당시의 사회적 혼란상을 배경으로 하여 ‘인의(仁義)’를 근간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 혹은 덕정(德政)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의 목적은 당연히 사회의 혼란을 진정시키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공자는 정명론(正名論)을 통하여 사회질서의 확립과 인정(仁政)을 구현하려고 하였으며, 맹자는 정전법(井田法)을 통하여 민생(民生)의 안정을 급선무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송명대(宋明代)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실천적 방법론보다도 그 실천행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경세책(經世策)보다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의 탐구에 몰두하였다.
이 때문에 실천적‧현실적 측면이 소홀히 취급되었으며 그에 따라 왕안석(王安石)은 신법(新法)을 주장하여 사회적 개혁을 도모하였으며, 왕수인(王守仁)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다. 청말(淸末) 강유위(康有爲)가 주장한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은 논리적 탐구 일면에서 탈피하여 경세사상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의 실학자(實學者)들은 대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실사구시(實事求是) 등은 자연히 이들 경세사상의 중심 내용이 되었다.
경세제민(經世濟民)
한글항목명 | 경세제민 |
한자항목명 | 經世濟民 |
유형 | 개념 |
출전 | 『서경(書經)』, 『논어(論語)』「안연(顔淵)」, 『맹자(孟子)』「진심 하(盡心下)」 |
<요약>
유교(儒敎)에 있어서 정치적‧사회적 실천의 궁극적 목표.
<설명문>
유교의 이념이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고 할 때 치인의 방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한다.”라는 뜻이다. 유교에 있어서 민(民)은 만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존재로서 ‘나’와 동류(同類)라는 의식을 기초로 하여 비록 정치의 주체는 아니지만 항상 정치적 실천을 통해 그 생존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은 민심(民心)의 향배가 정권의 영락(榮落)을 결정해 왔다고 보는 유교의 정치적 의식이나 ‘나라의 근본’으로서의 민을 기초로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정치적 권력도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그 형성기에서부터 제민(濟民)을 경세(經世)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해 왔는데, 유교의 가장 오래 된 경전인 『서경(書經)』에서는 이러한 의식이 보민(保民), 혹은 중민(重民)의 관념으로 나타난다. 공자(孔子) 역시 이러한 의식을 계승하여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라.”(『論語』「顔淵」)라고 민(民)의 보호를 역설하였으며, 박시제중(博施濟衆)을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이해하였다. 맹자(孟子)는 이러한 의식을 보다 발전시켜 그 구체적 실현 방법으로 항산론(恒産論)이나 정전론(井田論)을 제시하였으며, “민이 가장 귀하다.”(『孟子』「盡心下」)라는 민에 대한 파악에 입각한 정치질서의 재편을 위하여 혁명론(革命論)까지 주창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경세제민의 이념은 유교의 민본주의(民本主義)나 위민의식(爲民意識)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이며, 사실상 그것의 정치적 구호로서의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참조항목>
수기치인
경이원지(敬而遠之)
한글항목명 | 경이원지 |
한자항목명 | 敬而遠之 |
유형 | 개념 |
이칭 |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 |
출전 | 『논어(論語)』「옹야(雍也)」 |
<요약>
귀신(鬼神)의 실재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인간 생활에 있어 그것에 의존적인 태도를 배척하고 오직 인도(人道)의 마땅한 바에만 힘쓸 것을 촉구하는 말.
<설명문>
유학의 귀신관을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언급이다. 『논어(論語)』「옹야(雍也)」에 나오는 말로 원문에는 ‘경귀신이원지(敬鬼神而遠之 : 귀신을 공경하되 그것을 멀리한다)’라고 되어 있다.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의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인류의 인식 수준이 저급한 단계에 머물러 있던 고대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된 현상이었으며, 그러한 경향은 공자가 출현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자는 아직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면서 오직 현세에서의 도덕적 완성을 기하는 데 인간의 모든 노력을 투여할 것을 촉구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에서 스스로 탈피하는 동시에 인류의 인식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 구절은 공자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유학의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전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귀기를 꺼리고 멀리한다’는 뜻을 가진 ‘경원(敬遠)’이란 말은 이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와 유사한 언급으로 “아직 사람을 섬길 줄도 모르는데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기겠는가(未能事人焉能事鬼)?”(『論語』「先進」)라는 말도 있다.
경이직내의이방외(敬以直內義以方外)
한글항목명 | 경이직내의이방외 |
한자항목명 | 敬以直內義以方外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송원 시기 |
출전 | 『주역(周易)』곤괘(坤卦)「문언전(文言傳)」 |
<요약>
정주학(程朱學)에 있어서 도덕적 정신 수양 방법의 하나.
<설명문>
경(敬)을 통해 자기 내부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문언전(文言傳)」의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敬以直內義以方外)”라는 기록에 대하여 정이(程頤)는 “의(義)가 밖으로 나타난다고 함은 의가 밖에 있다는 말이 아니다. 경(敬)과 의가 연결되어야 비로소 그 덕(德)이 성하게 된다.”(『易傳』「坤卦」)고 하여 경(敬)과 의(義)의 불가분의 관계를 명시하고 그것을 ‘안과 밖을 합한 도(合內外之道)’(『二程全書』「遺書」)라고 하였다.
정이에 있어서 여기의 경(敬)이란 주일무적(主一無適 : 하나를 주로 해서 나아감이 없는 것)을 말하며, 경이직내란 한사(閑邪)‧존성(存誠)‧거경(居敬)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항상 이와같은 것을 함양(涵養)이라고 하는데, 함양을 오래하면 마음[心]은 항상 바르게 안정되고 이에 따라 천리(天理) 역시 밝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학자는 모름지기 경(敬)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 이 뜻을 함양해야 한다.”(『二程全書』「遺書」)고 한 것이다. 이러한 정이의 사상은 주희(朱熹)에 의해 강조되었고, 한국에 있어서도 이황(李滉)에 의해 학문의 요체로 받아들여졌다.
경전(經傳)
한글항목명 | 경전 |
한자항목명 | 經傳 |
유형 | 개념/문헌 |
출전 | 『박물지(博物志)』, 『일아(逸雅)』 |
<요약>
경(經)과 전(傳).
<설명문>
『박물지(博物志)』에 의하면 “성인(聖人)이 저술한 것을 경이라 하고 현인(賢人)의 저술을 전이라 한다. (聖人制作曰經, 賢人著述曰傳.)”고 하여, 그로부터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는 말이 생겼다. 『낭야대취(琅琊代醉)』의 경전입명(經傳立名) 조에도 경전을 같은 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능서(凌曙)가 주(注)한 『일아(逸雅)』에서는 “경은 경(徑)이니 길이 여러 군데로 통해 항상 쓰일 수 있음과 같다. 전은 전한다는 것이니 후인(後人)에게 전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전은 경을 주해 해석한 것을 말하기도 한다. 『춘추(春秋)』에 대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같은 것이 그것으로 구양수(歐陽脩)는 “전은 경을 서술하는 방법이다.”(「春秋論」)라고 하였다.
<참조항목>
경
경전(經典)
한글항목명 | 경전 |
한자항목명 | 經典 |
유형 | 개념/문헌 |
<요약>
유교의 전적(典籍)을 최고의 사상적 표준이라는 의미로 높여 부르는 말.
<설명문>
『장자(莊子)』「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경(樂經)』‧『주역(周易)』‧『춘추(春秋)』등 육경(六經)을 익혔다고 한 이래로 경전은 유가의 전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위에 든 육경은 공자에 의해 산정(刪定)된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당대(唐代)에 『주례(周禮)』‧『의례(儀禮)』‧『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효경(孝經)』‧『논어(論語)』등이 추가되어 십이경(十二經)이라고 하였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다시 『맹자(孟子)』가 추가되어 십삼경(十三經)이 되었다.
<참조항목>
십삼경, 오경, 육경
경천사상(敬天思想)
한글항목명 | 경천사상 |
한자항목명 | 敬天思想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 |
<요약>
천(天)을 외경(畏敬)의 대상으로 파악하여 전개된 유교의 종교적‧윤리적 사상.
<설명문>
유교에 있어서 천의 의미는 인류나 만물을 창조하고 발전하게 하는 근본일 뿐만 아니라 만물이나 인간이 생육화성(生育化成)하는 자연법칙과 인류사회의 도덕윤리의 규범이나 기준이 된다. 따라서 경천사상은 천을 두려워하고 천리(天理), 천도(天道)를 지키고 실천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천을 외경(畏敬)의 대상으로 파악한 것은 주(周)나라 초기에서부터이다. 은(殷)나라는 제(帝)‧상제(上帝)를 숭배하였으나, 주나라의 통일과 함께 이것이 경천사상으로 대체되었고 유교의 종교적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 유교에서는 천에 대하여 운명적인‧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윤리적인 성격이 가미되어 있다. “천이 만민을 낳음에 사물마다 법칙이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천리를 따라 도덕을 좋아하게 되었다.”(『詩經』「大雅」 烝民)라고 하여 법칙적인 천을 따르는 사람의 도덕적 의식을 중요시하였다. 또 『중용(中庸)』에서는 인간의 본성[性]이 천명(天命)에 근거한다고 규정함에 따라 종교적인 차원에서 머물던 천에 대한 관념이 점차 인성(人性)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되었고, 경천사상은 유교의 종교성을 설명함과 동시에 윤리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인간의 존재 근원이 천에 있다는 의식은 자연히 경천의식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에 유교의 수양론(修養論)의 근거가 되었다. 맹자(孟子)의 성선론(性善論)이나 존양성찰(存養省察)하는 유교의 수양론은 인간에 품부된 천성(天性)을 회복하기 위해서 천을 외경하고 수양해야 한다는 의식을 표출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용』에서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 하고 수양의 궁극적 경지인 성인(聖人)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경천의 태도가 요청되었다.
<참조항목>
천, 천명
경학(經學)
한글항목명 | 경학 |
한자항목명 | 經學 |
유형 | 개념/학풍‧학파 |
중국 시대 | 진한 시기/전한 |
<요약>
유교 경서(經書)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학문.
<설명문>
경서에 관한 학문적 작업의 전부를 포함하는 하나의 학문분야의 명칭이다. 경학의 ‘경(經)’은 유교의 경전을 말한다. 경전은 또한 경서(經書)라고도 한다. 하나하나의 경서에 ‘경’ 자를 붙인 것은 아니라도 경서를 ‘경’으로 통칭한 것은 『장자(莊子)』의 「천운(天運)」에서부터의 일이다. 유가 가운데서 ‘경’으로 부른 것은 역시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순자(荀子)가 처음으로 생각된다. 문헌 위에 ‘경학’이라는 두 글자가 나타난 것으로 오래된 것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이다.
구양생(歐陽生)으로부터 『서경(書經)』의 학을 받고, 또 공안국(孔安國)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한 예관(兒寬)이 “무제(武帝)를 처음 만났을 때 경학을 말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경학’이라는 일컬음이 문헌에 정착한 것은 전한 무제의 시대이다. 진화(秦火)로 『악경(樂經)』이 망실되어 전한 초에 오경(五經)의 일컬음이 있다가 후한(後漢) 이후로는 ‘경’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왔다. 진시황(秦始皇)은 사상 최초의 군현제 통일국가의 효과적인 지배를 위해 유능한 지식관료를 필요로 하는 데에 주목하여 ‘박사관(博士官)’이라고 일컫는 학술교육 담당기관을 중앙에 설치하는 한편, 유학을 포함한 백가(百家)의 문헌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다.
후한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에는 『역(易)』‧『서』‧『시』‧『예(禮)』‧『악(樂)』을 오경이라 일컫고 있으나, 당(唐)의 서견(徐堅) 등이 찬한 『초학기(初學記)』에는 진화 뒤로 『악경』은 없어져 『시』‧『서』‧『역』‧『춘추(春秋)』‧『예기(禮記)』의 5종을 총칭하여 오경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오경이라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이 가운데 『예』는 전한 무제 때에 와서는 『예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춘추』는 『공양전(公羊傳)』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뒤에 『좌씨전(左氏傳)』으로 바뀌었다. 오경은 『역』‧『서』‧『시』‧『예기』‧『춘추』 또는 『시』‧『서』‧『역』‧『예기』‧『춘추』의 순서로 일컬어지는 것이 상례지만, 우리나라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 「독서장(讀書章)」에는 『시경』‧『예기』‧『서경』‧『역경』‧『춘추』의 순으로 되어 있다.
<참조항목>
오경
경학시대(經學時代)
한글항목명 | 경학시대 |
한자항목명 | 經學時代 |
유형 | 개념/학풍‧학파 |
<요약>
경전(經典)에 대한 훈석(訓釋)의 작업이 가장 활발하였던 한대(漢代)로부터 당대(唐代)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말.
<설명문>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유가(儒家)는 인간의 사고나 행동의 당위성(當爲性)을 강조한 반면 그것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해명하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유가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유가의 각 경전에 대한 정확한 훈해(訓解)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과 더불어 한대(漢代)에 무제(武帝)가 백가사상(百家思想)을 배격하고 오로지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경학이 국가 학문의 정통(正統)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 경학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중서(董仲舒)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융합시켜 『춘추번로(春秋繁露)』를 저술하였다.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은 유흠(劉歆)이 제창한 『주례(周禮)』에 근거하여 제도(制度)를 고쳤으며, 특히 후한(後漢)시대에는 고문학(古文學)이 성행하여 문자(文字)‧훈고(訓詁) 방면을 연구하는 이른바 ‘소학(小學)’이 크게 유행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경학 융성의 결과였다. 이후 한대의 경학은 고문학과 금문학(今文學)을 융합한 정현(鄭玄)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의 경학은 현학(玄學)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주(注)보다도 더 상세한 의소(義疏)의 편찬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당대(唐代)의 공영달(孔穎達)은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칙찬(勅撰)하였는데, 그것은 과거(科擧)의 필독서가 되었다. 송명이학(宋明理學)은 이와 같은 경학의 발전 과정을 통하여 출현할 수 있었으나 그 후 송원명대(宋元明代)에는 신유학(新儒學)의 발흥으로 인하여 경학의 연구는 오히려 쇠진하였다. 그러나 청대(淸代) 건륭제(乾隆帝)대에는 다시 공양학파(公羊學派)가 발흥하여 고문학가(古文學家)의 훈고방법을 계승하고 고적(古籍)을 정리하여 청대 경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경학은 주공(周公) 이래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학술사상사의 줄기를 이루어 왔으며, 송명의 이학이나 조선조의 성리학도 경학과 표리 관계를 이루며 발전해 왔다.
<참조항목>
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