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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영반월」 황진이
[ 詠半月 黃眞伊 ]
誰斲崑山玉(수착곤산옥) 누가 곤륜산(崑崙山)의 옥을 깎아다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직녀의 빗을 만들었는가?
牽牛離別後(견우이별후) 견우와 이별하고 난 뒤로
謾擲碧空虛(만척벽공허) 부질없이 푸른 하늘에 던져두었네
〈감상〉
이 시는 허공에 떠 있는 반달을 보면서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며 쓴 시로, 반달을 직녀(織女)의 빗에 비유하여 해학적(諧謔的)으로 노래하고 있다.
누가 옥이 유명한 곤륜산의 옥을 깎아서 직녀의 빗, 즉 달을 만들었을까? 견우와 이별한 뒤로 부질없이 푸른 하늘에 던져 놓았다.
홍만종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기녀(妓女)의 시와 위의 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실어 놓았다.
“옛날 재주 있고 시에 능한 기생으로 설도(당(唐)나라의 여류시인)·취교 같은 무리가 상당히 많았다. 우리나라의 여자들은 비록 글을 배우지 않았으나, 기생들 중에 자질이 영특하고 빼어난 자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시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전혀 없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를 살펴보니, ‘우리나라 여자들의 시는 삼국시대에는 알려진 것이 없고, 고려 오백 년 동안 용성의 창기인 우돌과 팽원의 창기인 동인홍만이 시를 지을 줄 안다.’고 하였는데, 이들 시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보한집』에는 실려 있다). 근자에 송도의 진낭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겨룰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 진랑의 「영반월」은 다음과 같다. ······ 계생의 호는 매창으로 「증취객(贈醉客)」 시가 있다. ······ 시어가 모두 공교하고 곱다.
아! 승려와 기녀는 사람들이 매우 천하게 여기어 함께 나란히 서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작품이 이와 같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뛰어난 재주를 볼 수가 있다(古之才妓能詩者(고지재기능시자) 如薛濤翠翹之輩頗多(여설도취교지배파다) 我東方女子(아동방여자) 雖不學書(수불학서) 妓流中英資秀出之徒(기류중영자수출지도) 不無其人(불무기인) 而以詩傳於世者絶無(이이시전어세자절무) 何哉(하재) 按魚叔權稗官雜記(안어숙권패관잡기) 東方女子之詩(동방여자지시) 三國時則無聞焉(삼국시칙무문언) 高麗五百年(고려오백년) 只有龍城娼于咄彭原娼動人紅(지유룡성창우돌팽원창동인홍) 解賦詩云(해부시운) 而亦無傳焉(이역무전언) 頃世松都眞娘扶安桂生(경세송도진낭부안계생)
其詞藻與文士相頡頏(기사조여문사상힐항) 誠可奇也(성가기야) 眞娘詠半月詩(진낭영반월시) ······ 桂生號梅窓(계생호매창) 其詩云(기시운) ······ 語皆工麗(어개공려) 噫(희) 緇髡娼妓(치곤창기) 人之所甚賤(인지소심천) 羞與爲齒者也(수여위치자야) 而今其所作如此(이금기소작여차) 則可見我東人才之盛也(칙가견아동인재지성야)).”
〈주석〉
〖斲〗 깎다 착(일본(一本)에서는 단(斷)으로 되어 있음), 〖梳〗 빗 소, 〖謾〗 부질없이 만(일본(一本)에서는 수(愁)로 되어 있음), 〖擲〗 던지다 척
각주
1 황진이(黃眞伊, ?~?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庶女)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官妓)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靈柩)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 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소세양(蘇世讓)이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을 지어 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30일만 산다는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
「절명시」 조광조
[ 絶命詩 趙光祖 ]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고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白日臨下土(백일림하토) 밝은 해가 아래 땅을 내려다보니
昭昭照丹衷(소소종단충) 충심(忠心)을 환히 비춰 주겠지
〈감상〉
이 시는 사약을 받고 절명(絶命)할 때 지은 시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중종 3년(1544) 3월조에,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송세형(宋世珩)이 아뢰기를, ‘기묘년의 인사가 과격하여 일을 그르쳤으나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조광조 또한 당시의 무리들이 과격한 것을 우려하여 대부분 억제하였다가 도리어 좋지 않게 여겨졌으니, 이를 보면 조광조가 가장 훌륭합니다. 그가 죽음을 앞에 두고 지은 시에, ······라고 하였으니, 평생 지켜 온 바를 이것으로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모두 복관(復官)된 마당에 조광조만은 아직도 복관되지 않고 있으니, 그 때문에 사림이 통탄하고 애석해합니다.
지금 만약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신다면 선비들의 습속이 애쓰지 않더라도 저절로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오랫동안 머리를 끄덕였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석담일기』에는, “임금께서는 또 정광필도 정승직에서 해임시키니, 조정 신하 중 다시는 광조를 변호하는 사람이 없어서, 광조는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으니,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上亦免光弼相(상역면광필상) 朝臣更無言者(조신갱무언자) 光祖竟不免死(광조경불면사) 臨死仰天吟詩曰(임사앙천음시왈)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天日照丹衷(천일조단충) 國人悲之(국인비지)).”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홍만종은 이 시에 대해 『소화시평』에서, “(유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사당할 때 ······는 시구를 읊조리고, 마침내 짐독을 마시고 운명하였다. 사림이 이 시를 전하여 외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尋賜死(심사사) 吟句曰(음구왈)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憂國如憂家(우국여우가) 遂飮鴆卒(수음짐졸) 士林傳誦(사림전송) 莫不流涕(막불류체)).”라 말하고 있다.
각주
1 조광조(趙光祖, 1482, 성종 13~1519, 중종 1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처형되면서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당하게 되자, 조광조도 유배당하는 몸이 되었다. 정계의 현실을 몸소 겪은 그는 유배지에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했다.
「보천탄즉사」 김종직
[ 寶泉灘卽事 金宗直 ]
桃花浪高幾尺許(도화랑고기척허) 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銀石沒頂不知處(은석몰정부지처) 하얀 돌은 머리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兩兩鸕鶿失舊磯(양량로자실구기) 쌍쌍의 가마우지 옛 돌을 잃고
銜魚却入菰蒲去(함어각입고포거) 물고기 물고는 곧 부들로 들어가네
〈감상〉
이 시는 보천탄에서 지은 것이다.
보천탄에 한 겨울이 지나 봄이 되자 눈이 녹아 물이 불어 겨울 내 하얗던 돌을 잠기게 했고, 그 물결 위에 복사꽃이 흘러가고 있다. 그 위로 쌍쌍의 가마우지들이 예전에 앉아서 고기를 잡던 돌을 잃고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자 둥지가 있는 부들 숲으로 들어간다.
『성소부부고』에는, “그 「보천탄즉사」에서는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항고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其寶泉灘卽事曰(기보천탄즉사왈) 桃花浪高幾尺許(도화랑고기척허) 銀石沒頂不知處(은석몰정부지처) 兩兩鸕鶿失舊磯(양량로자실구기) 銜魚却入菰蒲去(함어각입고포거) 此最伉高(차최항고) 東京樂府(동경악부) 篇篇皆古(편편개고)).”라 평하고 있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에서 김종직의 문장에 대한 평과 함께 간략한 생평(生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계온(季昷)이요, 김숙자(金叔滋)의 아들로, 스스로 호를 점필재(佔畢齋)라 하였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高古)하여 당대 유종(儒宗)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전후의 명사들이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성종이 중히 여겨 발탁하여 경연에 두었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벼슬에 있게 하면서 쌀과 곡식을 특사하였으며, 죽으니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구천에까지 미쳐 유문(遺文)을 불태워 없앴는데, 뒤에 잿더미에서 주워 모아 세상에 간행하였다(善山人(선산인) 字季昷(자계온) 淑滋之子(숙자지자) 自號佔畢齋(자호점필재) 我光廟朝登第(아광묘조등제) 操履端愨(조리단각) 學問精深(학문정심) 文章高古(문장고고) 爲一世儒宗(위일세유종) 誨人不倦(화인불권) 前後名士(전후명사) 多出其門(다출기문) 成廟重之(성묘중지) 擢置經筵(탁치경연) 以至刑曹判書(이지형조판서) 使所在官特賜米穀(사소재관특사미곡) 卒謚文簡(졸익문간) 燕士戊午禍及泉壤(연사무오화급천양) 焚滅遺文(분멸유문) 後收拾灰燼(후수습회신) 刊行于世(간행우세)).”
「본전(本傳)」에는 유문(遺文)이 불탄 것과 관련하여 유자광과의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유자광(柳子光)이 함양(咸陽)에 노닐면서 시를 지어 그 고을 원에게 현판에 새겨 붙이게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작자인데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 하고, 떼어서 불사르게 하였다. 무오년의 화가 일어나매 선생이 무덤 속에서 극형을 받고 아울러 「환취정기(環翠亭記)」도 철거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함양에서 현판의 원한을 보복한 것이라 하였다(柳子光遊咸陽作詩(유자광유함양작시) 屬郡宰鏤版而懸之(속군재루판이현지) 佔畢齋守是郡曰(점필재수시군왈) 何物子光(하물자광) 乃敢爲懸板(내감위현판) 命撤而焚之(명철이분지) 及戊午禍起(급무오화기) 先生追被極刑(선생추피극형) 並撤去環翠亭記(병철거환취정기) 世以爲報咸陽之怨也(세이위보함양지원야)).”
〈주석〉
〖卽事(즉사)〗 앞에 있는 사물을 제재로 삼은 시. 〖許〗 쯤 허, 〖頂〗 머리 정, 〖鸕鶿(로자)〗 가마우지.
〖磯〗 수면에 드러난 돌 기, 〖銜〗 물다 함, 〖却〗 곧, 마침내, 도리어 각, 〖菰〗 풀이름 고, 〖蒲〗 부들 포
각주
1 김종직(金宗直, 1431, 세종 13~1492, 성종 23):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는 고려 말·조선 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김종직의 학문은 무오사화 때 그의 많은 글이 불살라진 관계로 전체적인 모습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정몽주와 길재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이어받아 절의(節義)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또한 『소학』과 사서(四書) 및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오륜(五倫)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仁政)의 실시가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향교 교육과 인재의 등용을 매우 중시했다. 한편으로는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당시 대명사대외교(對明事大外交)에서 꼭 필요하였던 사장(詞章)의 학문을 겸비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문학세계는 명분·절의·수기(修己)에 근간을 두는 여말선초의 처사문학(處士文學)과 송시(宋詩)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채(文彩)를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경(經)과 문(文)을 다 같이 중시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복령사」 박은
[ 福靈寺 朴誾 ]
伽藍却是新羅舊(가람각시신라구) 절은 도리어 옛날 신라 때 것이고
千佛皆從西竺來(천불개종서축래) 천 개의 불상은 모두 인도에서 온 것이다
終古神人迷大隗(종고신인미대외) 옛날에 신인도 대외에서 길을 잃었나니
至今福地似天台(지금복지사천태) 지금의 복스러운 땅은 천태산과 흡사하여라
春陰欲雨鳥相語(춘음욕우조상어) 스산한 봄기운에 비 내릴 듯 새가 우는데
老樹無情風自哀(노수무정풍자애) 늙은 나무 정이 없어 바람이 절로 슬프다
萬事不堪供一笑(만사불감공일소) 만사는 한 번 웃음거리도 못 되나니
靑山閱世只浮埃(청산열세지부애) 푸른 산에서 세상을 보니 먼지만 떠 있구나
〈감상〉
이 시는 박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개성 천마산에 있는 복령사에 들러 지은 시이다.
복령사는 신라 때 지은 절이요, 천 개의 불상(佛像)은 모두 인도에서 왔다. 황제도 길을 잃을 정도로 복령사를 찾아가는 길이 험하고, 유신과 완조가 천태산에서 선계(仙界)의 여인들과 좋은 경치를 즐겼듯 복령사는 그와 버금가는 별천지(別天地)이다. 복령사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니, 봄기운이 청명(淸明)한 것이 아니라 스산하여 비가 올 것 같은지 새도 울어 대는데, 오래된 나무는 무정하여 부는 바람이 절로 슬프다(이 3연은 젊은 나이에 지은 것인데, 죽음의 느낌을 준다. 그래서 후대 시화(詩話)에서 이 구절을 예로 들어 박은이 26세에 죽은 것을 예견했다는 시참(詩讖)이 되었다). 인간 만사란 한바탕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는데, 복령사가 있는 천마산에 올라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니, 진세(塵世)의 상징인 진애(塵埃)로 가득 차 있다.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에서 박은(朴誾)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시는, 근고(近古)에는 이러한 품격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명가(名家) 속에 섞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석주(石洲) 권필(權韠), 눌재(訥齋) 박상(朴祥),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등 여러 문집만은 못하다. 동악(東岳)의 시(詩)는 언뜻 보면 맛이 없지만 다시 보면 좋다. 비유하자면 샘물이 졸졸 솟아 천 리에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스스로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읍취헌(挹翠軒)은 정신과 의경(意境)이 깊은 경지에 도달하여 음운(音韻)이 청아한 격조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산수 간에 노니는 것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에서는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을 배웠다고 하나 대개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아 당(唐)·송(宋)의 격조를 논할 것 없이 시가(詩家)의 절품(絶品)이라 할 만하다.
눌재(訥齋)는 고상하고 담백하여 스스로 무한한 취미(趣味)가 있으니, 비록 읍취헌과 겨룰 만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석주(石洲)는 비록 웅장함은 부족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있는데 가끔은 깨우침을 주는 곳이 있다. 성당(盛唐)의 수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당(唐)의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면 너무 폄하한 것이다. 소재(蘇齋)는 19년간을 귀양살이하면서 노장(老莊)의 서적을 많이 읽어서 상당히 깨우친 곳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음운이 뛰어나게 웅장하다. 옛사람이 이른바 ‘황야(荒野)가 천 리에 펼쳐진 형세’라고 한 것이 참으로 잘 평가한 말이다.
그러나 그 대체는 염락(濂洛)의 기미(氣味)를 잃지 않았으니, 평생 한 학문의 힘은 역시 속일 수 없는 것이다(三淵之詩(삼연지시) 不但近古無此格(부단근고무차격) 雖廁中國名家(수측중국명가) 想或無媿(상혹무괴) 而猶遜於東岳挹翠石洲訥齋蘇齋諸集(이유손어동악읍취석주눌재소재제집) 東岳詩(동악시) 驟看無味(취간무미) 再看却好(재간각호) 譬如源泉渾渾(비여원천혼혼) 一瀉千里(일사천리) 橫看竪看(횡간수간) 自能成章(자능성장) 挹翠神與境造(읍취신여경조) 格以韻淸(격이운청) 令人有登臨送歸之意(영인유등림송귀지의) 世以爲學蘇黃而蓋多自得(세이위학소황이개다자득) 毋論唐調宋格(무론당조송격) 可謂詩家絶品(가위시가절품) 訥齋淸高淡泊(눌재청고담박) 自有無限趣味(자유무한취미)
雖謂之頡頏挹翠(수위지힐항읍취) 未爲過也(미위과야) 石洲雖欠雄渾(석주수흠웅혼) 一味裊娜(일미뇨나) 往往有警絶處(왕왕유경절처) 謂之盛唐則未也(위지성당칙미야) 而謂之非唐則太貶也(이위지비당칙태폄야) 蘇齋居謫十九年(소재거적십구년) 多讀老莊書(다독로장서) 頗有頓悟處(파유돈오처) 故其韻遠(고기운원) 其格雄(기격웅) 古人所謂荒野千里之勢(고인소위황야천리지세) 眞善評矣(진선평의) 然其大體(연기대체) 則自不失濂洛氣味(칙자불실렴락기미) 平生學力(평생학력) 亦不可誣也(역불가무야)).”
〈주석〉
〖福靈士(복령사)〗 개성 천마산에 있는 절. 〖伽藍(가람)〗 절. 〖西竺(서축)〗 인도. 〖終古(종고)〗 예부터.
〖神人米大隗(신인미대외)〗 황제(黃帝)가 대외(大隗)를 만나러 구자산(具茨山)으로 가는데, 방명(方明)이 수레를 몰고, 창우(昌)가 수레 우측에 타고, 장야(張若)과 습붕(謵朋)이 앞에서 말을 인도하고, 곤혼(昆閽)과 골계(滑稽)가 뒤에서 수레를 호위하여 가서 양성(襄城)의 들판에 이르자, 이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어 길을 물을 데가 없었다. 우연히 말을 먹이는 동자를 만나 물으니 길을 알려 주었다(『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 대외(大隗)는 신 이름으로, 대도(大道)를 가리킴). 여기서는 복령사를 찾기 어려움을 뜻함.
〖福地似天台(복지사천태)〗 천태는 중국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신선인 마고할미가 사는 곳이라 한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 사람인 유신(劉晨)이 완조(阮肇)와 함께 천태산에서 약을 캐다가 길을 잃고 선계(仙界)의 여인들을 만나 반년을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수백 년 세월이 흘러 자기 7대손(代孫)이 살고 있어 다시 천태산으로 갔다 한다(『태평어람(太平御覽)』 권(卷)41). 손작(孫綽)의 「천태산부(天台山賦)」에, “도사를 단구에서 방문하여, 불사의 복지를 찾노라(방우인어단구(訪羽人於丹丘) 심불사지복정(尋不死之福庭)).” 하였음.
〖供〗 베풀다 공, 〖閱〗 자세히 살피다 열, 〖埃〗 먼지 애
각주
1 박은(朴誾, 1479, 성종 10~1504, 연산군 10):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의 성취와 문장이 남달리 뛰어나 4살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8세에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15세가 되어서는 널리 명성을 얻어 당시 대제학이던 신용개(申用漑)의 사위가 되었다. 17세(1495년)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인 1496년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성품이 곧아 옳은 소리를 잘했다. 1501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연산군(燕山君)의 비호를 받던 유자광(柳子光)과 성준(成俊)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사사불실(詐似不實)’이라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이후 실의에 빠져 시와 술만을 즐기며 지냈다. 25세(1503년)에 동갑이던 아내를 잃었다. 이듬해 봄에 지제교로 복직되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음력 6월에 효수되었는데, 성격이 참으로 강직하여 죽음을 앞두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는 예전에 연산군이 밤늦게 사냥한 일을 여러 신하와 연명 상소한 일의 주동자였다는 것이었고, 죄명은 ‘사충자안 신진모장관(詐忠自安 新進侮長官, 거짓 충성으로 제 안일을 구하고 신진이 상관을 업신여김)’이었다. 연산군은 박은을 너무 미워하여 그가 죽은 지 4일 후에 의금부로 하여금 박은의 친구들을 색출하여 곤장을 치게 하고 그들을 유배 보냈으며, 음력 8월에는 전교를 내려 박은의 시체를 들판에 내버려 두게 한 다음, 봉분 없이 묻게 했다. 1505년에는 음사해인(陰邪害人)이라는 죄목을 추가하였다. 3년 뒤에 신원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송승지풍악」 성석린
[ 送僧之楓岳 成石璘 ]
一萬二千峯(일만이천봉) 일만 이천 봉우리는
高低自不同(고저자부동) 높고 낮음이 절로 다르네
君看日輪出(군간일륜출) 그대 보게나, 해 돋을 때에
高處最先紅(고처최선홍) 높은 곳이 가장 먼저 붉어진다네
〈감상〉
이 시는 금강산으로 가는 스님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로, 평이(平易)한 시어(詩語)로 금강산의 일출 장면을 회화적(繪畵的)으로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금강산을 가 본 적이 없는 성석린이 금강산에 사는 스님에게 산의 승경(勝景)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역설적(逆說的)이라 볼 수 있으며, 금강산의 모습에 자신의 원대한 기상(氣象)을 투영한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김종직(金宗直)은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 “도를 터득함에 선후와 심천이 있으니, 사람의 성품이 높고 낮음에 달려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유득도지유선후심천(喩得道之有先後深淺) 유인성지유고하(由人性之有高下)).”라 하여, 금강산으로 가는 승려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득도(得道)에 매진(邁進)하여 가장 먼저 햇살을 받는 봉우리가 되라고 당부한 것이라 간주(看做)할 수도 있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성석린에 관한 일화(逸話)가 실려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문경공 성석린은 젊어서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다. ······소년 시절 4~5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신돈(辛旽)이 뒷짐을 지고 곁에서 보다가 문경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끝내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 복덕은 제군들이 미칠 바 아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역적 신돈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하겠다.
공의 나이가 60이었을 적에 그 어머니는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을 못 한 지가 며칠이 되었고, 약도 효험이 없어서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며 슬피 부르짖다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조금 뒤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니, 모시고 있던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기도하는 소립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하늘이 사람을 보내어 안석과 지팡이를 주며 말하기를, 〈아들의 지극한 정성이 이와 같으니, 이것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 하고는 병이 곧 나으니, 사람들이 문경공의 효성이 지극함을 감탄하였다(成文景公石磷(성문경공석린) 少有倜儻奇節(소유척당기절) ······早年與四五同僚(조년여사오동료) 在政房(재정방) 辛旽負手傍觀(신돈부수방관)
指文景曰(지문경왈) 終必大顯(종필대현) 福德非諸君所及(복덕비제군소급) 卒如其言(졸여기언) 老賊亦復具眼(노적역부구안) 公年六十(공년륙십) 慈氏亦年踰七十(자씨역년유칠십) 病革(병혁) 瞑目不言者數日(명목불언자수일) 藥餌無效(약이무효) 公焚香祈禱(공분향기도) 哀號幾絶(애호기절) 俄而慈氏曰(아이자씨왈) 是何聲也(시하성야) 侍者驚喜曰(시자경희왈) 祈禱聲也(기도성야) 慈氏曰(자씨왈) 天遣人賜几杖曰(천견사궤장왈) 有子至誠如此(유자지성여차) 可扶而起(가부이기) 病尋愈(병심유) 人皆嘆文景孝誠之篤(인개탄문경효성지독)).”
〈주석〉
〖楓岳(풍악)〗 금강산의 가을 명칭(봄은 금강산(金剛山), 여름은 봉래산(蓬萊山), 겨울은 개골산(皆骨山)).
〖日輪(일륜)〗 해
각주
1 성석린(成石璘, 1338, 충숙왕 복위 7~1423, 세종 5): 본관은 창녕.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한 뒤 국자학유(國子學諭)·사관(史官) 등을 역임했으나,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 해주목사로 나갔다. 다시 성균사성(成均司成) 등을 지내고, 1380년(우왕 6)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을 때 승천부(昇天府)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되어 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싸워 이긴 공으로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되었다.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안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양광도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흉년이 들자, 주·군에 의창(義倉)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실행하게 했다. 1389년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데 협력한 9공신의 한 사람으로서 태조가 즉위한 뒤 문하시랑찬성사·개성부판사·한성부판사 등을 지내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정종 때 좌정승을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 1403년 우의정, 1407년 좌의정, 1415년 영의정을 지냈지만, 생활이 검소하였다. 시를 잘 짓고, 초서를 잘 썼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위인송원」 이옥봉
[ 爲人訟寃 李玉峯 ]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얼굴을 씻는 동이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머리를 빗는 물로 기름 삼아도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이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郎豈是牽牛(낭기시견우)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오리까?
〈감상〉
이 시는 이웃집 여자의 원통한 소송(訴訟)을 풀어 주기 위해 지은 시이다.
어느 날 이웃집 여자가 자기 남편이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렸으니, 이옥봉에게 소장(訴狀)을 써 달라고 왔다. 그 남자는 논매기를 마치고 마침 칠석(七夕)날 장에서 한잔하고 밤늦게 귀가를 하는데, 소를 사 오던 어떤 사람이 영마루에서 소를 빼앗기고 말았는데, 그 소를 빼앗아 간 사람이 이웃집 여자의 남편과 체구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누명을 쓰게 된 것이었다. 이옥봉은 이 시를 지어 사또께 바치게 한 것이다. 칠석(七夕)날 일어난 사건이므로, 견우(牽牛)과 직녀(織女)를 활용해 견우(牽牛)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소를 끌고 갔겠는가라는 의미를 내포한 시이다.
이 시로 인해 이웃집 남편은 누명을 벗고 죽을 뻔한 목숨을 살리게 되었지만, 결국 이 시로 인해 이옥봉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 남편 조원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대노하여 소실 주제에 하찮은 재주 하나 믿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고 수치스럽고 창피하여 얼굴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다면서 다시는 이옥봉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
〈주석〉
〖洗〗 씻다 세, 〖梳〗 빗 소
각주
1 이옥봉(李玉峰, ?~?): 선조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조원(趙瑗)의 소실(小室)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만월대회고」 황진이
[ 滿月臺懷古 黃眞伊 ]
古寺蕭然傍御溝(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도랑 곁에 조용하고
夕陽喬木使人愁(석양교목사인수) 석양의 큰 나무 사람을 시름케 하네
煙霞冷落殘僧夢(연하랭락잔승몽) 연기와 놀은 스님의 남은 꿈에 차갑게 내리고
歲月崢嶸破塔頭(세월쟁영파탑두) 세월은 부서진 탑머리에 아득해라
黃鳳羽歸飛鳥雀(황봉우귀비조작) 누런 봉황새는 깃을 접고 새와 참새만 날며
杜鵑花落牧羊牛(두견화락목양우) 진달래꽃 떨어진 곳엔 양과 소가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신송억득번화일) 신성한 송악산이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기의여금춘사추) 어찌 이제 봄조차 가을일 줄을 생각이나 했으랴?
〈감상〉
이 시는 개성(開城) 송악산 기슭에 있던 고려시대 궁궐터인 만월대를 돌아보고 느낀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궁궐에서 흘러내리던 작은 도랑 옆에 오래된 절이 쓸쓸히 자리하고 있고, 만월대에서 석양이 지는 큰 나무를 보니 사람을 시름케 한다. 옛 절에 남은 스님의 꿈은 해질녘 차갑게 지는 연기와 놀과 같으며, 오랜 세월을 지난 탓으로 만월대에 서 있던 탑이 부서져 쓸쓸하다. 봉황새는 날지 않고 새와 참새만 날며, 진달래꽃이 진 자리에는 양과 소가 풀을 뜯고 있다(봉황새와 진달래꽃이 고려의 지조 있는 선비라면 새와 참새, 양과 소는 지조를 잃은 소인배(小人輩)를 상징함). 송악산이 번화했던 날을 생각하니(고려의 번성을 의미), 어찌 봄인데 가을이라 느낄 수 있는가(계절은 진달래가 지는 봄이지만, 옛 절의 쓸쓸함으로 볼 때 가을처럼 느껴짐)?
〈주석〉
〖蕭〗 쓸쓸하다 소, 〖御溝(어구)〗 집 정원을 지나는 도랑. 〖喬〗 높다 교, 〖崢嶸(쟁영)〗 산이 험준한 모양. 세월이 가는 모양. 〖杜鵑(두견)〗 진달래꽃.
각주
1 황진이(黃眞伊, ?~?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庶女)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官妓)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靈柩)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 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소세양(蘇世讓)이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을 지어 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30일만 산다는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 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길에 묻어 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