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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교회의 타락(중세교회의 타락)
1. 개요
기독교는 초기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놀랍게 성장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를 통하여 기독교는 주후 200년경에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큰 세력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후 50년간에 복음은 더 급속히 전파되었다. 기독교는 250년경에 로마 제국의 전역에 전파되었으며 제국의 경계를 넘어 멀리 확산되어 갔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및 동 시리아에서는 도시나 농촌을 불문하고 기독교 신자들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는 방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국 내의 모든 민족들이 신앙할 수 있는 범세계적인 종교를 필요로 했으나 기독교 이외의 이방 종교들은 이에 부응할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넓은 층의 대중들은 매일의 생활에서 경제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3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대중들은 그럴수록 저 세상의 복된 삶을 희구하게 되는 법인데 교회는 인권을 존중하고 구제함으로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개인이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설교하였다. 지식을 제일로 치던 사회 풍조가 종교를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는 풍조로 바뀌게 되어 철학은 계시와 기적을 믿는 신비주의 신앙과 결합하여 변질되고 마침내는 열광주의로 퇴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신앙을 지적으로 변증하며 건전한 삶을 가르쳤다. 주후 300년경에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이방 종교나 사이비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종교로 간주하게 되었다. 즉, 유일신 사상은 다신론이나 신화 등의 잡동사니와는 다른 계몽된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는 귀신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해방을 안겨 주는 복음이었다. 기독교는 고대의 신화나 신비 종교와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세계관과 신학을 가졌음을 사람들은 인정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가 계심을 말하고 만물의 시작과 종말이 있다고 하며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한 구원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그래서 기독교의 성경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비밀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의 교리와 성례는 저 세상과 교통하는 통로요, 접촉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는 모든 사람에게 자제하도록 촉구하고 남을 구제할 것을 가르치는 등 윤리적인 교훈을 말하고 금욕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통일적인 조직으로서 지체인 교인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할 뿐 아니라 재래 종교가 가진 요소들 가운데 당시의 사람들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들을 수용하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인정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았다. 기독교의 우월한 교리와 윤리적인 교훈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훈대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신빙할 만한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교회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병약자 가난한 자와 장애인을 도우며 옥에 갇힌 자와 납치되어 강제 노동을 당하는 자 노예와 실직자를 돌보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신속한 구조 활동을 벌였다.
숙박업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손님을 친절하게 맞이하며 숙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지체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도왔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윤리적인 미덕의 생활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의 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들에게서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원인이 되고 원동력이 되어 기독교는 마침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교회가 이와 같이 긍정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부터 부정적인 요소들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고 있었다. 기독교 세계는 넓고 교회는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2, 3세기에 순교자와 영웅들을 기념하는 제의가 시작되었다. 소아시아의 교회는 190년경에 초대 교회의 선지자, 요한, 빌립과 그의 세 딸의 묘소가 있음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로마 교회는 주후 200년 이후 바티칸에 베드로의 묘소를 둔 것과 로마 근교의 해변 도시 오스티아로 가는 거리에 바울의 묘소를 둔 것을 자랑하였다. 3세기 이전에 교회는 이미 백성들의 이방적인 종교심에 의도적으로 부응하려는 대책을 강구하였다. 2세기에 성자숭배가 종교 의식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성물 숭배, 부적, 기적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행들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더 심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들은 4세기에 기독교가 이방 종교를 끌어안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으나 초기의 순수한 신앙을 점차 상실하게 만든 요소이기도 하였다. 2세기부터 초기 기독교인들의 엄격한 도덕성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였다. 기독신자들은 수적으로 불어났으나 세상과 접하면서 초기의 열정은 식어져 갔다. 교회 지도자들, 감독들은 이단적인 사상과 운동에 대항하여 기독교 진리를 보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한편 이방 세계에서 들어오는 교인들을 상대로 교회를 어떻게 보존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접촉하는 것을 어느 정도로 허용해야 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도 하였다. 8세기에 동방교회 지도자들은 성상 숭배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다가 마침내 그것을 허용하기로 하였다. 처음에 반대하던 서방교회 지도자들도 성상 숭배를 허용하였다.
중세 교회를 부패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는 9세기에 도입된 평신도 서임권이었다. 즉, 제왕이 성직자를 임면하는 권한을 갖게 되면서부터 성직매매가 성행하게 되었으며 자격 없는 왕족과 귀족들이 대거 고위 성직을 맡음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 부패하게 되었다. 제왕들은 교회를 왕실의 재원을 충당하는 기관으로 이용했다. 뜻 있는 교황(11세기 중엽의 그레고리 7세)은 이런 관행과 제도를 개혁해 보려고 했으나 개혁의 대상인 고위 성직자들과 군왕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황청도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데 점점 혈안이 되었다. 교황은 주교나 대주교를 이동시킴으로써 수입을 올렸다. 주교와 대주교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혹은 보다 나은 자리로 옮기기 위하여 상부에 거금을 헌납해야 했다. 교황청은 이런 재미를 보느라고 고위 성직자의 전임 발령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내렸다. 1365년의 3개 문서에 보면 7명의 대주교, 49명의 주교, 123명의 수도원장을 거짓 맹세한 자로 선포하고 출교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참 하나님을 믿는 종교도 세월이 흘러 교권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물욕과 정욕에 탐닉하는 성직자들이 많아져 부패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제사장들도 역시 그랬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와 장사하는 자들을 보시고 분노하시며 그들을 내쫓으셨다.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해야 하는 제사장들이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만들어 환전하여 헌금하게 하였다. 제물도 성전에서 사도록 하였다. 장사치들에게 상권을 부여하여 그들로 하여금 3, 4배의 폭리를 남기게 하고는 부정한 상납금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함축하듯이 사람에게 돈은 하나님과 버금가는 아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타락한 종교나 사이비 종교는 돈을 축적하고 섬기는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거의 공식처럼 되어 있음을 우리는 교회 역사와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된다.
2. 로마의 역사
정치사적으로 고대는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끝이 나며 근대는 1453년 동로마(비잔틴)제국이 멸망하고 시작된다. 그러니까 476년부터 1453년까지 약 1,000년의 시대를 중세라고 말한다. 로마에 대한 역사적 지식은 중세기독교시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유럽의 역사는 로마제국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럽은 로마를 중심으로 편성되었었다. 로마는 B.C 8세기 경 조그만 도시 국가로 출발했지만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시기에는 서로는 스페인, 동으로는 인도국경, 남으로는 아프리카 북부까지 이어지는 거대 제국으로 성장하며 1세기 중반에는 영국까지도 로마의 속국이 된다. 독일의 중서부에 쾰른(Koeln)이라는 큰 도시가 있는데, 그 말뜻은 식민지라는 뜻으로, 로마에 의해 건설된 이래 2,000년이나 되는 도시역사를 가지고 있다.
B.C.510년부터 로마는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공화정의 시기가 되었다. 공화정(Republic)은 어원적으로 res(사물, 부)와 publica(공동의)의 합성어로 ‘공동의 것’, ‘공동의 재산’(commonwealth)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국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에 의해 운영되고 관리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오늘날 공화정은 국가가 국민의 것이라는 민주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었지만 당시의 공화정은 원로원 중심의 귀족들이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과두정치를 의미했다. 로마는 자신의 나라가 공화정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중세시대에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사, BC.100–B.C.44)가 전쟁으로 국가의 영웅이 되어 황제와 같은 권한을 행사했을 때 그의 심복인 브루투스가 그를 암살하는데 암살의 동기는 공화정을 지키고 싶었다는데 있었다. 그때 카이사르가 쓰러지며 했다는 유명한 말 “브루투스 너마저도”는 인생의 덧없음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위대한 영웅이 황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끊을 수 없었다.
예수그리스도가 활동하던 시기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칭호를 듣는다. 이때부터 로마는 공화정을 폐하고 제정 시대로, 황제시대로 돌입한다(B.C.27–A.D.476).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 즉 ‘존엄한 자’라는 이름의 황제가 되는데, 그 후 200년은 여러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다.
하지만 거대한 로마를 영구히 지탱하기는 쉽지 않았으며 그것도 한명의 황제가 통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395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이후 로마는 동과 서로 나뉜다. 처음에는 단순히 분할통치를 목적으로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된 국가로 성장해간다. 300년경에는 로마의 국경에 점차 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특히 아시아 쪽에서 중국 한나라에 쫓긴 흉노(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게르만인 들을 압박하고 이들은 다시 로마 안으로 쫓겨 들어와 국경에서 전쟁을 일삼게 되었다. 4세기에 게르만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깨지고 이제부터 지난한 고난의 시기가 시작되는데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결국 서로마는 망한다.
로마가 그 방대한 국토와 이민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잡음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로마가 정복지의 문화와 종교 등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로마 스스로 다신교를 인정하고 있었고 그들의 정복지에서 숭배되는 신들을 용인하였다. 기독교 역시 그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에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가 일신교였다는 사실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여타의 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종교였으며 이는 모든 이민족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네로의 박해 등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진다. 그런 박해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4세기 로마에서 국교가 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3. 중세의 기독교
392년 기독교는 유럽 유일의 대국인 로마에서 국교로 승인되었다. 로마에서의 기독교 박해는 이제 더 이상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서로마는 그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민족들의 침략에 무너진다. 로마황제의 강력한 힘으로 지탱되던 유럽의 정치공동체는 무너지고 각 지역은 자신들만의 정치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 지역마다 제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프랑크왕국은 그 중 하나다.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전신이 되는 프랑크왕국은 더 이상 로마의 간섭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다.
로마제국이 멸망했다고 해서 로마의 국교였던 기독교가 쇠퇴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그 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유럽이 각 나라들로 쪼개지기는 했지만 그런 쪼개진 나라를 기독교는 하나로 통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없어진다고 종교가 쉽게 없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나라는 인간의 외면을 지배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각 나라 제후들은 로마교황과의 관계에서 경쟁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로마교황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로마교황은 안정적 지배를 위해 세속 군주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카알대제(샤를마뉴, 800년경)이다. 그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대부분을 이방인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기 나라를 ‘신성로마제국’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로마제국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통치가 교회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카알 대제 사후 국가는 동서로 나뉘는데, 서쪽은 프랑스가, 동쪽은 게르만이 지배하게 된다. 동 프랑크, 즉 독일은 오토황제가 즉위한 변경의 헝가리를 물리치면서 교회와 국토를 안전하게 보호한다(962). 교황은 이를 인정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칭호를 동 프랑크, 즉 독일에 선사한다. 이 시기를 독일 제1제국시대(962-1806)라고 한다(제2제국: 1871-1918, 제3제국: 1933-945).
4.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즈음의 유럽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프랑크왕국이 분열되어 서 프랑크에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었고, 영국도 자기만의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통일왕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수많은 영주들이 지배하는 소규모 국가들이 느슨한 형태의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이름으로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질에 있어서 황제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지역 제후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한편으로는 로마의 교황을 의식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의 영주들을 의식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 금인헌장(1356): 교황의 승인 없이도 독일황제를 승인할 수 있다는 규정 이 규정에 근거하여 독일의 황제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독일 각 지역의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합스부르크왕가가 세습적으로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형식적이나마 제후들의 승인을 얻어야 했으며 또 중요한 결정사항은 제후와 도시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제국의회에서 수행되었다. 물론 모든 제후나 영주들이 황제를 선출하는데 참여한 것은 아니다. 일곱 명의 제후가 황제를 선출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래서 이들을 ‘선제후’라고 하여 좀 더 많은 명망과 권한을 가졌다.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선제후는 대주교였으며, 이들이 로마교회를 대리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속군주로는 보헤마아(체코), 팔츠, 작센 그리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영주들이었다. 이 일곱 선제후를 ‘제국의 7기둥’이라 불렀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서 황제를 선출하고 거기서 대관식을 가졌다.
㉡ 제국의 도시들: 제국 내에는 점차 현대적 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도시들은 황제의 직접적 통치를 받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자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도시는 상업과 무역이 중심을 이룬다. 이 말은 중세사회를 지탱하던 봉건제도로는 유지될 수 없는 새로운 요소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의 봉건제는 영주가 사는 성을 중심으로 광활한 농업지대로 이뤄져 있었다. 주민의 대다수는 농업을 주로 하는 농노였으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도시기능을 하는 성안에 거주했다(10%이하).
하지만 상업의 발달은 독자적인 도시의 발달을 가져왔다. 도시에는 아랍, 아시아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품을 수입하거나 수출해서 부를 챙긴 사람들이 자리 잡았다. 이들은 인근의 영주들이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체적인 법체계와 세금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또 도시들 간에 협정을 맺어 영주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힘들을 강화했다, 예컨대 한자동맹(브레멘, 뤼벡, 함부르크, 전성기 때 100여개, 1300년 경 성립)과 슈바벤 동맹(울름, 아우구스부르크 등, 전성기 때 32개 도시, 1331)은 대표적인데, 이들은 점차로 황제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치도시로 발전해 가고자 했다.
제국의 도시를 지배하던 시의회는 교회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확산될 때를 제외하고는 종교적인 문제에 가능하면 관여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세속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수 있는 지반이 조성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와는 다른 인간상을 만들어 냈다. 중세는 교회와 국가공동체에 철저히 귀속되는 인간상을 설파했다고 한다면, 도시의 시민들은 점차 모든 공동체 보다 앞서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습득해 나간다. (부르주아의 탄생, 근대 개인의 탄생을 알림)
5. 16세기 초 교회의 부패와 신학
㉠ 교회: 독일제국의 개혁의 목소리는 교회개혁의 목소리로도 나타났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16세기 문턱에 교황이 된 알렉산더6세(1492-1503), 율리우스2세(1503-1513), 레오10세(1513-1521) 등은 그 부패의 끝을 보여준다. 알렉산더6세는 교황에 선출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돈을 뿌려 추기경들의 표를 샀으며 교황이 된 후 그 돈을 회수하기 위해 자기 부하들도 독살하고 성직을 매매하며 사형수를 돈을 받고 풀어주고 근친상간을 눈감아주었으며 발렌시아의 추기경인 ‘피터 멘도자’에게는 돈을 받고 ‘미소년’을 입양할 수 있게 허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부패는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위성직자들도 그런 부패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사제의 혼외관계는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사제의 자녀’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았으며 신학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들이 돈으로 성직을 받았으며 이들은 죽은 자의 영혼구원을 위해 기부를 종용하고 또 그를 위해 침묵미사를 드려 부를 축척하였다. 특히 16세기 초에는 교회의 목회 직임의 의식이 더 약화되고 교황청의 세금수납은 더 노골화 되었다.
“심사숙고해서 고안해낸 요금제도, 즉 세금, 기부금 그리고 면죄부로 교회금고를 채우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로마교황청은 새로 확정된 감독 혹은 수도원장에게서 소위 초년도 성직 상납금을 징수했다. 이것은 새로 받은 성직록 중에서 첫 일년 수입의 절반을 교황청에 내어 놓는 것이다. 비어 있는 자리에 대한 성직록은 교황이 관여하여 1년 치 중 6개월간의 수입을 로마가 차지했다. 감독들은 교황이 그들에게 수여한 권위를 상징하는 대주교용 후두비용, 어깨띠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최고위성직의 위임은 교황에게 허용된 소위 ‘목자적 유보’(reservatio pectorals: 진실을 말할 의무를 피하기 위해 속으로는 신에게 진실을 말하고 겉으로는 모르겠다고 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경우 한 후보에게 약속된 성직은 교황의 은밀한 지시 하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한 다른 후보에게 주어지게 된다. 로마에는 은전과 성직록을 관장하는 교황청의 한 부서(Datarhaus)가 있었다. 이곳은 교황의 사면, 은총의 서신, 특별법 그리고 특혜를 승인하고 판매하도록 설치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참회부와 면죄부도 교황의 금고를 채웠다.”
교회의 뜻 있는 인사들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교회의 개혁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교회의 개혁은 개인차원에사만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도 제기되었다. 예컨대 교회의 2대 권력기관으로서 교황권을 견제해왔던 공의회가 교황권에 대항하여 교회개혁을 소리 높였다.
특히 콘스탄츠(1414-1418)와 바젤(1431-1449)에서 개최된 공의회가 중요하다. 콘스탄츠공의회에서는 위클리프를 단죄하고 요한 후스를 화형에 처하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끝내기 위해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더 크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그리고 바젤공의회에서는 온건한 후스주의를 용인하였다. 자유로운 설교, 평신도에게의 배잔 허용, 교회의 세속적 부의 철폐 등을 요구하였고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가 더 우선적 권위를 갖는다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교황 역시 공의회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반격했다. 교황 피우스 2세는 1492년 공의회주의와 콘스탄츠공의회를 “저주받아 마땅하며 과거에 없던 악행”이라고 선언하며, 그 이전에 교황 니콜라우스 5세(1447-1455)는 오스트리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와 빈 협약을 체결하여 바젤공의회를 약화시킨다.
하지만 교황의 이런 반격이 거대한 물결을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돈을 모으기 위한 교황과 교회의 집요한 요구는 이 시기 반발의 주요인이었다. 면죄부는 그 중심에 있었다. 13세기 이후 다양한 면죄부가 발행되었는데 그 기본적 의미는 죄인이 참회를 할 경우 사제를 통해 자유롭게 되지만 본인은 그에 합당한 참회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면죄부를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이러한 참회행위는 살아생전에 다 완결할 수 없었고, 죽어서 연옥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보수를 지불하고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 놓은 잉여의 보화창고에서 특별히 조제된 참회행위를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6. 16세기 유럽사회의 위기
종교개혁 직전 유럽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인 위기들이 한꺼번에 분출되어 암울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특히 종교화된 사회에서 종교의 타락은 곧바로 나라와 민족의 위기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16세기 유럽 종교의 타락상은 곧바로 유럽 사회의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16세기가 위기라 함은 이제 기존의 질서로는 개혁과 변화를 바라는 민심을 수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요, 기회라 함은 새로운 교회 질서를 탄생시킨 계기였다는 점이다.
종교적 위기의 직접적인 발단은 일명 면죄부 판매였다. 면죄부는 고해성사 제도로부터 유래하여 중세시대에 보다 정교하게 발전하였다. 원래 면죄부란 죄를 지은 사람의 보속(satisfactio)이나 죄인의 죄를 경감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뜻이다. 처음에 면죄부를 부여할 수 있는 권리는 교회 회중에게 주어졌다. 회중이 책벌한 죄인이 참회하려면 먼저 자신이 지은 죄(contritio cordis)에 대한 깊은 슬픔을 표시하고 구두로 그 죄를 고백하며(confessio oris) 교회법이 제정한 규정이나 참회에 관한 교회법에 따라 회중이 결정한 참회 행동(satisfactio operis)을 수행한다. 그 과정을 거친 후 용서(absolutio)를 받고 회중으로 다시 복귀한다.
사제 앞에 행해진 비밀 고해성사는 점차 공적인 참회로 대체되었고 교회의 성례전적 제도의 한 부분이 되었다. 비밀 고해성사는 여러 면에서 많은 문제를 양산해 내었다. 특히 고해자가 자신의 죄 값을 치르기 전에 미리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교회는 성례전 제도를 통해 주지시켰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의 실제적인 영향은 고해자로 하여금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가 용서되고 영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면서도 지상에서 세속의 형벌이나 연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따라서 고해자는 지상이나 연옥에서 자신의 죄 값을 여전히 치러야만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스콜라신학자들은 공로 보속 교리를 창안하여 교황이 어떻게 죄인의 죄를 경감시켜 줄 수 있는지에 관해 설명하려 노력했다. 결국 루터 시대 고해성사 제도는 죄인의 형벌을 ‘돈’을 통해 보속하는 일을 허용하였다.
루터가 직접 접했던 면죄부는 1510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공표하였던 희년 면죄부였다. 교황이 그 면죄부를 공표하게 된 계기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 때문이었다. 151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자 이후 교황 레오 10세가 이 희년 면죄부를 재 발행하였다. 1515년 3월 교황 레오 10세는 마인츠와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요 할버슈타트의 감독이었던 호헨졸렌(Hohenzollern)의 알브레히트(Albrecht)에게 브란덴부르크의 일부 지역에서 이 면죄부를 판매하도록 위탁하였다. 알브레히트는 세 개의 교구를 할당받은 대가로, 그리고 마인츠의 감독권 확보를 위해 교황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자로 도미니크 수도승 요한 테첼(Johann Tetzel)을 임명하였다. 테첼의 탁월한 웅변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면죄부가 이제 “죄의 결과로 부과된 일시적인 형벌에 대한 교회의 경감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테첼의 저 유명한 “동전이 연보 궤에 떨어져 동전소리가 울리는 그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당시 면죄부 판매가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되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면죄부 판매로 어지럽혀진 사회 질서는 대중들을 심각한 심리적 불안과 공포로 몰아갔다. 면죄부 판매상들은 대개 마을 광장에서 요란한 나팔 소리와 북을 치며 지옥과 심판,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에 대해서 요란하게 설교한 후,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당으로 들어가 연옥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고통 받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설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무서움과 공포심을 갖게 하였다.
<여러분들은 죽은 부모들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괴롭게 한다(욥19:21). 네가 조금만이라도 기부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무거운 형벌과 고통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단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까? 여러분의 귀를 열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달에게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이처럼 두려움에 근거한 종교적 불안 심리는 또 다른 미신적인 행위를 양산하였다. 그 미신적인 행위란 성물숭배와 순례 행렬이었다.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혹은 병을 치유하거나 보다 경건한 신앙을 얻기 위해 순례자들은 무리를 지어 유명한 곳으로 알려진 성물이나 성지로 순례하는 행렬들이 곳곳에 등장하였다. 루터의 집이 있었던 만스펠트나 그가 활동했던 비텐베르크 시는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로 유명하였다. 지옥과 심판의 공포, 그리고 신앙의 맹목성과 불안감은 대중들에게 순례의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점성술은 마치 새로운 것인 양 제자리를 찾고서 큰 힘을 행사하였다. 어린이 순례단이 또다시 길을 메우면서 어머니들은 애들을 내버려 두고 시골의 장정들과 처녀들은 들판에 일을 벌려둔 채 순례단의 행렬에 끼어들었다. 이러한 순례의 병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까지 전염되어 확산되자 그들 나라들로부터 온 대규모의 어린 순례자들이 눈에 보이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숫자는 말도 할 수 없었으며 모두 다 울면서 그리고 통곡하면서 걸었는데 학질이 발작한 것처럼 덜덜 떨었다.
순례의 행렬은 각양각색이었다.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며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금식으로 초췌한 몰골과 의상을 걸치고 나무 십자가를 손에 쥐고 거리를 활보한 사람들도 있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걸식수도승들이 각 도시마다 급증하여 사회 문제가 될 정도였다. 농촌지역 일수록 자연재해와 관련된 일화들이 많았다. 일례로 농민들은 성직자들이 농사에 해를 끼치는 메뚜기 떼나 해충들을 몰아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떤 수도원의 예배자료(이 자료는 1526-1531년의 예배의식을 담고 있다)를 보면 트루아 교구에서 있었던 일인데 농민들이 십일조를 내겠다고 약속하자 쐐기벌레와 ‘종려나무 벌레들’을 추방하기 위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동물이나 곤충들의 행동을 종종 반사회적 범죄로 간주하여 그들을 파문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이니 당시 대중들의 종교심을 교회가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실로 당대 신자들의 눈에 비친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인지 미신인지 그 구분이 애매모호하였다.
한편 종교개혁직전 유럽의 성당들은 추도미사 붐이 일어날 정도로 바빴다. 특히 대성당은 부유한 귀족층 사람들의 위령 미사로 날마다 분주하였다. 13세기 초 잉글랜드 더르햄 대성당에서는 일 년에 7천 번 정도 드리던 미사가 그 이후에 수만 번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교회들은 이 같은 미사를 통해 상당한 정도의 자금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중세 후기 교회들은 성당의 규모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확장하였고, 건축물 또한 시각적으로 웅장하게 짓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유럽 교회의 이 같은 종교적 위기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새로운 이익경제를 기초로 한 신흥자본가 계층의 등장이라는 사회 현상과 맞물려 유럽의 정치뿐만 아니라 기독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우선 지성 집단들의 성직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여과 없이 표출되었다. 이른바 반 성직주의(anti-clericalism)가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사제계급은 우월한 지식과 정교하게 발전한 교회법, 강력한 행정력을 기반으로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린드버그가 지적한 것처럼 대중들이 보기에 “성직자들은 전체 사회의 모든 억압적인 요소들을 대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세 후반 교황청의 분열, 교권과 속권의 대결에서 황제권의 강화, 교권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 등이 맞물려 성직 계층의 우월적 지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반 성직주의는 십일조 거부, 교황청의 성직임명권 및 성직 수임세 거부, 만인사제론, 그리스도인의 자유 및 평등의 가치 등이 확산되며 더욱 고조되었다. 종교의 권위는 실추되고 교회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종교개혁이 대중 운동으로 확산되었던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성직 계급에 대한 불만과 적대감이었다.
종교개혁시대 반 성직주의는 단순히 종교적인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던 성직 계급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격렬한 공격이었다. 이러한 공격의 맨 앞줄에 바로 마르틴 루터가 자리하고 있다. 루터를 필두로 츠빙글리,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우선적으로 관심했던 영역은 성직 계급의 특권과 부패를 비판하고 건강하고 올바른 성직 직분과 목회 윤리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7. 성직매매
종교개혁 직전 유럽의 주요 주교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다. 당시 주교들을 선출할 때 후보자의 교육 수준이나 자질, 성품, 신앙 등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주교가 되려면 출신 성분, 재력 등이 더 중요시 되었고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할 경우 즉 신학적이고 교회법상의 문제들은 자문관을 두어 처리하였다. 따라서 성직자의 자질이나 품성 등은 전적으로 주교의 손에 달려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교육 수준이나 신앙심과 별개로 주교의 이해관계를 잘 충족시켜 주는 사람들이 대거 성직자의 신분을 취득하게 되었다.
성직 매매와 세습의 대표적인 실례는 교황 이노센트 8세(1484-1492)였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 두 명의 부인을 두고 세 명의 자녀를 둔 사람이었다. 그는 세속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 정치 자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직매매를 공공연히 하여 자금을 끌어 모았다. 그가 임명한 추기경들 중에는 그의 형의 서자 출신도 있었고 플로렌스 왕 로렌조 데 메디치 아들도 있었는데 그는 아직 13세도 채 되지 않은 어린나이였다. 이노센트 8세가 교황으로 재직하는 동안 로마 사제계급은 그야말로 부패의 온상으로 지탄 받았다. 사제 자리를 얻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사제들은 출발부터 빚을 안고 교구를 담당하였다. 말하자면 사제가 되려면 경제적인 부담을 감수해야 했다. 따라서 사제들은 사제가 된 이후 이 빚을 갚기 위해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금을 끌어 모았다.
루터 시대 브란덴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또한 성직 매매자의 표상이었다.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 대주교직을 얻기 전에 이미 마인츠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교구였던 마인츠의 대교구는 1504년에서 1514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교구 책임자를 세 차례나 바꾸었다. 그 세 차례 동안 새 대주교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증을 받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금액은 14,000 굴덴이었다. 마인츠 교구는 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 빚을 변제할 방안으로 마인츠 교구는 1514년 새로운 대주교 후보를 찾았다. 그 때 브란덴부르크 제후의 동생 24살의 알브레히트가 마인츠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 마인츠, 그리고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라는 세 개의 노른자위 교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세 개의 교구를 얻기 위해 교황청과 협상을 하여 29,000 굴덴을 지불하기로 하고 푸거가(Fuggers)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이 관할하는 교구에서 면죄부 판매를 단행하였다. 그 수익금 절반은 푸거가 은행 빚 갚는데 사용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교황청에 송금되었다.
성직매매의 폐해는 심각하였다. 무엇보다 성직자 수의 급증이다. 일례로 12세기 잉글랜드의 경우 인구 50명 당 한 사람 꼴로 성직자였다. 또한 법적으로만 성직자인 경우도 많았고 실생활은 일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엄격한 신앙 수련을 함양하는 일보다는 자신들의 권리와 특권을 확보하는 일에 더 관심했다. 성직자 수가 급증하다보니 자연히 이들이 일해야 하는 일터로써 종교기관 또한 급증하였다. 종교기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중세 후반 종교의 기복주의화가 심화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또 하나 제국 내의 주요 교구들은 세속 유력자 혹은 부호들과 결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성직자 선발 과정이나 주교 임명권이 지역 영주나 유력자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유명 교구나 주교직은 황제나 왕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일찍이 교황청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추기경 훔베르트는 『성직매매론 반박』(Adversus Simoniacas Libri Tres, 1057)을 지어 백성들이 주교를 선출해야 하며 성직자들은 주교에 의해 서품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부적격자나 자질이 의심 되는 사람들이 주요 교구의 장을 차지하게 되자 그러한 교구들은 복음 선포나 죄인의 회심보다 금고로 들어오는 돈의 액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루터는 사제직을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전하는 직분으로 정의하고 “아무도 공동체의 동의나 높으신 분의 부름 없이는 이 권세를 사용하지 못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교회의 사역 직분은 결코 인간 편의에 따라 주어지거나 취소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금전을 통해 이 직분을 사고파는 행위는 마귀의 소행으로 간주하였다. 성직매매 관행은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될 때에도 여전히 그 잔재가 남아있었다. 1524-25년 독일 농민 봉기 때 농민들이 내건 12개 조항 제1항은 교회 신자들이 직접 성직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를 갖게 해달라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만큼 당시 영주나 귀족, 교황청이 일방적으로 성직자를 지명했기 때문에 지역마다 적잖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농민들은 성직자를 직접 검증할 권한을 요구하였다. 또한 만약 성직자가 부적절하게 행동할 경우 면직시킬 수 있는 권리도 가져야 함을 요구하였다. 이렇듯 종교개혁시대 성직자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사제직의 정신에 따라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직제 등을 설명하고 성직매매의 관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8. 비밀결혼
중세 후기 사제들의 결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성직자들의 부도덕성은 1492년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1431-1503)와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의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면죄부 판매를 허락했던 인물이다. 알렉산더 6세는 자신의 삼촌인 교황 칼리스투스 3세를 통해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교황의 자리를 얻기 위하여 추기경들에게 뇌물을 주고 교황 자리를 얻었다. 그는 수많은 첩을 거느렸고 8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그는 성직록을 받아 돈을 증식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고 그가 나은 자녀들을 추기경, 대주교, 주교로 임명하였다. 알렉산더 6세는 실로 성직을 감당하기에 너무도 부도덕한 무자격자였다.
사제들의 내연 관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혼한 사제들은-1059년 라테란 시노드에서 로마가톨릭은 사제 결혼의 금지를 결의하였다-은 “속죄비”만 정규적으로 상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결혼한 사제들일지라도 각각의 죄에 대한 “공정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만약 내연 관계를 맺고 있는 여인으로부터 자녀가 태어나면 “면죄세”를 내야했다. 예를 들면 콘스탄스(Constance)의 교구 소속의 결혼한 사제들은 “성직자의 축첩을 ‘승인해 주는’ 대가로 주교에게 매년 4굴덴의 돈을 지불”하면 그만이었다. 이들은 아이가 생길 때마다 한 사람 당 4굴덴을 더 지불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매년 1,500명의 아이들이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지불기간을 지키지 못한 사제들은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가정을 지닌 사제들은 성직록 만으로 생활이 어려웠다. 따라서 사제들은 교회에서 개인미사나 고해성사, 성물숭배 등 음성적으로 돈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방도들을 고안해 내어 자금을 마련하곤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성직자들의 결혼을 허용하자 일부 주교들이 완강히 반대한 배면에는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이유 이외에도 “경제적인 요소”가 놓여 있었다. 말하자면 성직자들이 결혼하게 됨으로써 주교들의 수입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교구 소속 사제들의 부도덕성이나 비윤리적인 행태도 문제였지만 수도원 수도사나 수녀들의 문제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 때 중세 교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요 기독교문화의 새로운 전달자 구실을 하였던 수도원은 중세 후기 도덕적인 해이가 심각하였다. 수도원은 귀족들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자녀 중 한 명을 수도사로 등록시켜 재산 도피의 창구가 되었는가 하면 남녀 수도사들이 혼숙함으로 생긴 임신 중절, 유아살해 등 끔직한 일들도 일어났다. 왕들 중에는 자신이 내쳐버린 내연의 여인을 수도원장으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추기경들은 세속 군주들처럼 사치, 사냥, 도박, 오락을 즐겨했고 여성과 함께 노는 일에 몰두하였다. 성직자들의 위상은 추락할 대로 추락하여 신뢰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로마가톨릭의 개혁공의회로 알려진 트렌트공의회(1545-1563)는 사제들의 비밀결혼을 금지하는 결의를 하였다. 성직자들의 성적 일탈 행위와 부도덕성에 대한 공격과 비난은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조치들 가운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성직자들의 결혼 허용이다.
루터는 결혼이란 하나님의 명령으로 창조 질서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첫째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2)였다. 루터는 독신이 아닌 결혼이 “모든 것 중 가장 훌륭한 종교적 지위”요 “실제적인 종교적 질서”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결혼이란 순결 못지않은 하나님의 은사이고 선물이며 또한 순결은 소수에게만 약속된 매우 특별한 은사라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1522년 7월 2일 10여 명의 연대서명을 받아 사제들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주교에게 제출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사제들의 결혼 금지는 올바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직접 결혼을 함으로써 결혼한 개혁자로서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렇듯 종교개혁자들은 결혼을 성례전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사제들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의 결혼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교개혁자들의 결혼관은 결혼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었고, 성직자들이 건강한 가정생활을 통해 목회사역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실로 종교개혁을 통해 성직자의 결혼 허용은 새로운 사회제도 변화를 가져다 준 획기적인 계기였다.
9. 교회 재산 남용
한 때 서 유럽에서 교황청은 토지를 가장 많이 소유한 기관이었다. 교황청은 세상의 대부호들처럼 봉토를 갖고 많은 수익을 누리고 있었다. 교황들은 특권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물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물려받은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다. 교황청은 교리적으로나 교회법적으로 돈을 모금할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하였다. 예컨대 신자가 교회의 계명을 어겼거나 죄를 범했을 경우 우선적으로 돈을 지불하여 속죄할 것을 교회는 요구하였다. 정말 모든 과오나 범죄가 물질로 대체되었다. 면죄부 판매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일명 “베드로 헌금”도 있었다. 이것은 교황청의 재정 손실을 충당하기 위해 각 교구에서 자유롭게 바치는 헌금이었다.
성물 숭배나 순례 행사 또한 돈을 모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따라서 성당이나 수도원마다 유명하다는 성인들의 성물을 수집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유명 성인들의 성물을 보유한 성당이나 수도원은 순례자들의 행렬로 넘쳐났다. 유명 성물 일수록 수입과 관련이 깊었다. 성물을 전담하여 관리하는 전속 신부를 고용하는 곳도 있었다. 루터의 영주 프레데릭 현자는 성물 수집광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수집한 성물에는 “불타는 떨기나무 한 조각, 불타는 용광로에서 나온 숯, 마리아의 젖, 예수님이 어렸을 때 누우셨던 유아용 침대 한 부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텐베르크 성은 그야말로 그 지역에서 최고 많은 성물들이 있었는데 총 19,000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정도의 유물은 1,900,000일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면죄부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중세 후반 성직자들이 돈을 받고 기도해주고 미사를 집전해 주는 일은 일상이었다. 특히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향해 헌금을 강요하는 일 가운데 가장 큰 불만을 샀던 것은 영안실 사용료였다. “영안실 사용료는 죽은 자의 재산 중 두 번째로 값어치 있는 재산을 교회에 헌납해야 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유족들 입장에서 영안실 사용료 강요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예외 없이 이 사용료가 부과되었다는 사실이다. 영안실 사용료는 무보수로 직책이 없는 성직자들에게 주 수입원이었다. “보조 성직자들은 영안실 사용료를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다.” “성직자들은 유족들이 값비싼 보석이나 의복, 옷감 혹은 값진 것들을 주기 전까지 시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영안실 사용료에 관한 세간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수도원 또한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형 수도원들은 지역 경제의 중심지였고 그야말로 “봉건사회의 기둥”이었다. 수도원장은 대개 상류층 출신이었고 그 지역 권력자들과 밀착관계를 유지하였다. 수도원마다 학교, 병원, 영안실, 장례식장 등을 운영하여 돈을 벌어들였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교황청은 수도원으로부터 자금을 착취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부유한 수도원에 소속된 수도사들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별장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을 불러 휴가를 즐기며 살았다. 수도원은 영적 기관이라기보다는 세속 기관이었다. 기도와 묵상, 경건 생활은 죽었고 온갖 인간의 탐욕과 놀이, 방탕한 삶만이 넘쳐났다.
종교개혁자들이 수도원 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은 모두 다 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루터 자신도 수도원 출신이 아니었던가! 츠빙글리는 수도사들을 가리켜 “변장한 살찐 돼지”라고 불렀다. 그는 추기경 쉬너를 비판하면서 당시 사제들을 거칠고 날카로운 언어로 공격하였다. 추기경이나 사제들을 “잡아 흔들면 금화와 은화가 쏟아집니다. 그리고 이들을 비틀어 짜면 당신의 아들과 형제 그리고 아버지와 좋은 친구들의 피가 새나올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와 성직자들의 물욕과 탐욕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구조 개혁을 부르짖었다. 우선 교회와 세속 정부의 관계성을 각자 두 영역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또한 교회 내부의 여러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올바른 신앙교육과 설교를 통해 대중들을 일깨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성경 강해를 통해 신자들에게 올바른 성경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주력했고, 교회와 성직자 직분을 봉사와 섬김으로 정의하고 공공 영역에서 사회적 의무와 실천을 강조했다.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강조하고 예배의식을 개혁하며 성직자들의 청빈을 강조했던 내용들이 실제 사회생활에서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빈민구제 제도 개혁, 비텐베르크 교회 공동모금함 설치, 제네바 구빈원과 아카데미, 취리히의 빈민구제법 등은 모두 종교개혁자들의 사회윤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사회적 열매들이었다.
10. 성직자들의 낮은 교육수준
성직자들의 교육 수준은 편차가 심했다. 보통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대 교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특별 성직 훈련을 받은 후 임직 받았다. 제4차 라테란공의회(1215)는 대 교구마다 한 명의 신학자를 두도록 결정하였다. 대성당이나 수도원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신부가 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성직매매가 비일비재하다 보니 충분한 소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신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부들 가운데 미사 때 사용하는 라틴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거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사제들 중에는 교구의 주요 직무들을 자신의 수하에 있는 부제나 대리 사제들에게 맡기고 사치와 낭비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격이 부족한 사람들이 성직을 수행하다보니 미사나 신앙교육의 질적 저하는 불을 보듯 뻔하였다. 간혹 대학 출신 사제들이 배출되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교황청 고위직이나 대학에서 교수나 학자로 활동하기를 선호하였다. 루터 또한 신부 서품 후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신학 교육이 대학이나 수도원 등에서 체계화 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정 수준 정도의 교육과 소양을 갖춘 신부들을 찾아보기는 정말 드물었다. 수준 낮은 주교들이 많다보니 이들은 대개 직접 사목보다 간접방식을 선호하였다. 그들은 각 지역마다 ‘지역 책임자’를 두어 그 지역 현안들(간음, 살인, 십일조 불이행, 위증, 배교, 이단, 신성모독 등)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지역 책임자들은 거의 무보수였기 때문에 “전령관”을 고용하여 윗선의 지침을 전달하게 하였다. 이런 형태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구조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주교들의 지위 하락이나 성직권 남용은 성직자 사회 전체를 멍들게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무엇보다 교회 개혁의 핵심적인 영역으로 신학 교육의 체계화와 전문화를 시도하였다. 루터와 멜란히톤이 비텐베르크 신학부 교수로 취임한 이후 중세의 스콜라주의적인 교육 방법을 버리고 신학 교육 커리큘럼은 고전어(히브리어와 헬라어)와 성경 교육 중심으로 개편한 것도 바로 목사들이 성경을 원어로 직접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자 함이었다.
루터는 1524년부터 신생 개신교 지역 교회들을 시찰(visitation)하며 목회자들이 신도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있는지를 지도 감독하였다. 로마가톨릭에서 개신교 진영으로 이동한 사제들은 신도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지도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루터는 이 같은 상황을 분개하며 대 소 요리 문답서를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내가 시찰단의 일원이 되어 최근에 접했던 개탄할 만한 상황들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가르침에 관한 이러한 간단하면서도 단순한 요리문답이나 진술들을 준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대중들은 기독교 가르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으며 불행하게도 많은 목사들은 상당히 무능력하고 가르치기에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주의 기도나 사도 신조 혹은 십계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돼지나 정신 나간 짐승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루터는 목사들이 자신들이 맡고 있는 교인들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교리서, 설교집, 예배의식문 등 많은 지침서들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츠빙글리나 칼빈도 모두 성경 강해를 통해 신앙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였다. 아마 로마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설교와 교육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생 종교개혁 교회는 ‘설교하는 교회’(ecclesiae praedicens)요 ‘가르치는 교회’(ecclesiae docens)로 교회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교육하고 가르침으로써 교회는 온전해진다고 생각하였다.
칼빈은 교사의 직분을 아예 교회의 중요한 직제로 신설하여 교회법에 명문화시켰다. 그는 신앙교육서(카데키즘)를 작성하여 신앙교육을 정형화시켰다. 그가 시무했던 제네바교회는 가르치는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또한 칼빈은 제네바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신학생 교육을 보다 체계적으로 실시하였다. 실로 종교개혁은 교회 교육의 개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