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연인, 우리의 연인 - 성녀 글라라 축일
성녀는 프란치스코를 사다리 삼아 예수 그리스도께 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다리 삼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에 안기고 잠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난 것 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역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현현(顯現; 눈으로 보이도록 드러난 모습)이며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고,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가 형제라 부른 모든 것들도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배로 사랑한 그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인 우리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 모두의 연인입니다.
- <클라라의 향기 2002> 제2호. (출처=마리아사랑넷)
8월 11일은 아씨시의 글라라 성녀의 축일입니다. 생애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자세히 나눔하겠지만, "아씨시"라는 출신지에서 알 수 있듯,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 활동하였던 이들 중 한 명으로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 글라라 수도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글라라 (Clara)는 라틴어로 '밝다, 맑다, 분명하다, 빛나다, 유명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큰 성인들이 그렇듯 글라라 성녀의 이름 또한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독일에서는 클라라 (Klara), 영어권에선 클레어 (Clare), 프랑스에서는 클레르 (Claire)라는 이름으로 변했습니다. 또 이탈리아에서는 "키아라" (Chiara, 끼아라)라는 표기도 사용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도 도미니코를 도밍고로 쓰는 분들이 있듯이 글라라를 끼아라, 클라라로 사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수 보아의 세례명 또한 "끼아라"입니다.
아래에서 설명할 성광의 기적에서 말미암아 성광이 성녀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또 주님 탄생 대축일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텔레비전 시청자의 수호 성인으로서도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또 다른 프란치스코
글라라 성녀는 1194년 아씨시에서 사소로소 백작 파보리노 스키피와 오르톨라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키아라 오프레두초 (Chiara Offreduccio)였습니다. 글라라 성녀의 어머니 오르톨라나는 기도 중에 온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았고, 그 후 아이가 태어나자 글라라로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오르톨라나는 깊은 신심을 갖고 있어서, 로마는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점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예루살렘 등 여러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글라라 성녀 또한 어린 시절부터 기도 생활에 열심이었다고 전해집니다.
12세가 되던 해, 글라라 성녀의 부모는 성녀를 젊고 부유한 남성과 혼인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부터 하느님과 함께 살겠다는 뜻을 두었는지, 성녀는 18세가 될 때까지만 결혼을 미루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18세가 되었을 때, 성녀의 운명을 바꾼 한 사람을 만납니다.
산타 키아라 대성당에 있는 성녀 클라라의 밀랍으로 덮인 유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 4일)는 당시 사순절을 맞아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글라라 성녀를 두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라고 이야기했고, 강론을 들으면서 감명을 받은 글라라 성녀는 수도 성소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 글라라 성녀는 집을 떠나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글라라 성녀의 긴 머리를 잘라주고, 검은색 튜닉과 베일로 된 수도복을 입도록 하였습니다. 아직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수녀를 위한 수도원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바스티아라는 고을 근방의 베네딕토 수도회 성 바오로 수녀원에 글라라 성녀가 머무를 수 있도록 배려해줍니다. 약속한 18세에 결혼을 시키고자 하였던 가족들은 성녀가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막고자 수차례 데려가고자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습니다. 글라라 성녀는 부모에게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성소에 대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고, 동생 아녜스 또한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녜스가 글라라 성녀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가자 가족들은 12명의 장정을 보내 아녜스라도 데려가고자 하였지만, 글라라 성녀가 간절한 기도를 바쳐 끝내 장정들로부터 아녜스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과의 우여곡절 끝에 글라라 성녀는 아녜스와 함께 성 다미아노 성당 근처의 작은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여기에 다른 여성들도 동참하여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매들" (혹은 "가난한 부인회", "성 다미아노 수도회")이라 불리운 이 모임이 오늘날의 글라라 수도회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많은 이들을 상대로 강론을 하며 전교하기 위해 여러 고을을 순회한 것과는 달리, 당시 사회상에서는 여성으로서 고을을 순회하는 전교 활동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손으로 하는 노동과 기도로 일과를 만들고 봉쇄 생활
1215년, 프란치스코 성인으로부터 "가난한 자매들" (성 다미아노 수도회)의 수도원장 (아빠스/여성형 '아빠티사') 자리를 넘겨받은 글라라 성녀는 인노첸시오 3세 교황으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허락받습니다. 이 특권은 성 다미아노 수도회가 전적으로 사람들의 자선을 통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후 글라라 성녀는 수도원의 봉쇄 수도 생활을 위해 이 권한을 유지하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만들어준 회칙을 바탕으로 더 엄격한 생활 양식을 담은 규율을 정하고자 하였지만, 이는 "너무 엄격하게 생활하는 것 아닌가?" 라는 교황과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그들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규칙서와 가까운 '덜 엄격한' 규칙서를 수도회에서 쓰기를 바랐고, 그레고리오 9세,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엄격하고 가난한 생활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수도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글라라 성녀가 엄격한 규율의 인준을 요청할 때마다 번번히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글라라 성녀가 선종하기 이틀 전에서야 교회의 승인을 받게 된 이 규율은, 오늘날 성 글라라 수도회의 규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광을 비추어 이슬람 군대를 몰아내는 글라라 성녀.(출처=마리아사랑넷)
프란치스코 성인이 선종한 이후, 글라라 성녀는 성 다미아노 수도회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군대가 아씨시를 침략하면서 수도회는 큰 위기를 맞습니다. 글라라 성녀는 수도회 성당 안에서 뜨거운 기도를 바친 뒤 성광을 모신 채 적군을 향해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러자 성광에서 기이한 빛이 일어났고, 빛에 눈을 쬐인 이슬람 군대는 겁을 먹고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뒤로 성 다미아노 수도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활동하던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 독일로 널리 퍼져나갔고, 성 다미아노 수도회와 글라라 성녀의 엄격하고 청빈한 생활을 존경한 교황과 추기경, 주교들이 글라라 성녀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영적 아버지로 공경하며 그의 삶을 본받으려 노력한 글라라 성녀는 "또 다른 프란치스코" (Alter Franciscus)라 불리우며 존경받기도 하였습니다.
성녀는 사람들의 구원과 수도원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기를 원했지만, 건강이 허약했던 것이 성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선종이 임박한 1252년, 글라라 성녀는 좋지 않았던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중병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중병과 싸우며 몸져 누워있던 순간에도, 하느님을 바라는 성녀의 믿음은 시들지 않았습니다. 그해 주님 탄생 대축일 밤에 성녀는 병이 깊어 미사를 함께하지 못했지만, 간절한 열망을 담아 기도드린 끝에 병실의 벽에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광경이 펼쳐져 미사를 함께 보고 들을 수 있게 되는 기적을 겪습니다. 이 기적으로 말미암아 훗날 교회에서는 텔레비전 시청자의 수호 성인으로서 공경받게 됩니다.
1253년 8월 9일, 오랜 기각과 재청 끝에 글라라 성녀가 쓴 성 다미아노 수도회의 규율이 교회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몸이 허약해져 있었던 글라라 성녀는, 이틀 뒤인 1253년 8월 11일에 아씨시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성녀는 선종을 앞두고서도 성 다미아노 수도회에서 함께한 동료 수녀들에게 사랑의 축복을 해주며 눈을 감았고, 2년 뒤에 알렉산데르 4세 교황에 의해 곧바로 시성되었습니다. 축일은 처음에 전례력 사정으로 8월 12일로 지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오늘날에는 선종한 날인 8월 11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선종한지 10년이 지난 1263년, 성 다미아노 수도회는 우르바노 4세 교황에 의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성 글라라 수도회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