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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골이어(成骨移御)와 쟁탈사건(爭奪事件)
이해(辛酉 1921) 8월 중순에 정산은 통사동 공부방에서 110일 공부를 마치고
9월 5일 선돌부인과 강순임(姜舜任), 이상우(李商雨), 권태로(權泰替), 권영문(權寧文), 이정두(李正斗) 등을 데리고 금산면(金山面) 청도리(淸道里) 뒷산 장탯날 증산대성(甑山大聖)의 초빈(草複)에 이르러 주과포(酒果偏)를 올려 고천(告天)하고 초빈을 헤쳐 성골(聖骨)을 직접 칠성팬(七星板)에 옮기고 비단으로-싸서 통사동으로 모셔 갔다.
그는 성골을 깨끗하게 다시 닦아 백지(白紙)로 감고 비단으로 싸서 공부방 상좌(上座)에 안치한 다음 치성을 올렸다. 이로부터 매일 목욕재계하고 권씨 성모와 선돌부인을 비롯하여 대성(大聖)의 온 가족과 임원들이 함께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삭망절사(湖望節祀)를 상례절차(喪禮節次)에 맞춰 받들며 말하기를 ‘내가 상제(上帝)님 재세시(在世時)에 옥체(玉體)를 봉성(奉省)치 못하였으므로 이제 이와 같이 모심으로써 천의(天意)를 받드는 것이니라.
이는 상제(上帝)님께서 도수(度數)로써 정하신 일로서 염습(檢賣)과 매장(理非)을 절차대로 하지 못하게 하심도 이에 연유함이니라·하고 19일 공부를 이해 12월 중순에 끝마치고 임원들에게 머지않아 현무 음해도수가 돌아오니 모두 조심하라고 하였다.(眞經全書 283~284쪽)(태극도사 4:2)
황새마을!이곳은 도주님께서 1918년 10월 안면도에서 이사 오신 후부터 1925년 4월 무극도를 창도하기 전까지 포덕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던 도본부(道本部)가 있던 곳이다.
황새 마을에 자리했던 무극대도는 이곳에서 약 2km 떨어진 태인쪽 통사등 이씨 제각을 빌어 본부를 옮기고 증산의 재림을 선포, 그에 따른 엄청난 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1923년 계해년에 원평 구리골(동곡)에 있는 증산의 묘를 파 유골을 비단보에 곱게 싸서 모셔 놓고, 소와 돼지 등을 잡아 날마다 치성을 올리면서 이듬해인 1924년 갑자년 정월 초하룻날에 증산이 다시 오시어 도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계해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 동안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돈을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종교의 본래 면목이 무엇인지 모르는 대중들은 막연한 이들의 포교 술에 녹아 있는대로를ㄹ 다 바쳤고, 갑자년 1월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이 때 거둬들인 돈과 물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여자들의 은가락지만도 서 말이 넘었다.
이렇게 하여 증산의 환생과 동시에 도통을 바라던 갑자년 1월이 다가왔다. 그러나 아무런 이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 조철제씨는 대중들에게 3월이라고 연기함으로써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기다리게 했으나 역시 3월이 다 가도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속은 줄을 깨닫게 되었고, 드디어 그 허망함에 분노의 함성을 터트렸던 것이다. 이들은 눈만 나오는 가면 모자를 둘러쓰고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어느 날 밤을 기해 본부를 향해 쳐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조철제씨는 이 현장을 피해서 무사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몽둥이에 맞아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나 역시 무극대도의 간부였기 때문에 그 날 밤 그곳에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맞았을 것이다. 그 당시 비밀문서나 돈 보따리는 나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다.
조철재씨를 잡지 못한 그들은 대신 증산의 유골을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모두 다 얼굴에 가면을 섰기 때문에, 더구나 어두운 밤이라서 누가 누구인 줄을 몰랐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중 대담한 사람들 몇 명은 그 날 밤 난리를 내고서도 다음날부터 낮이면 위문 한다는 핑계로 동정을 살피며 드나들었다.
나는 이 와중에서 얼마가 들어있는 지도 모르는 돈 가방 3개를 나락 섬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조철제씨가 숨어 있다는 산(상두산으로 기억됨)으로 가지고 가서 인계를 하고 돌아왔다.
이토록 나를 믿어주었던 조철제씨는 나에게 전 재정을 맡길 정도였고, 또한 나 자신도 거기에 호리도 틀림없이 수행했던 것이다. 이렇데 돈을 옮긴 후 나는 바로 사건 당일 부상당했던 조철제씨 부친(조태규)을 모시고 대구 동산기독병원으로 간호 하느라고 몇 달 동안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증산의 유골 행방에 대해 수사를 하던 정읍 경찰서는 범인을 잡아 유골을 보관했으나, 이 때 차경석씨가 이 유골을 다시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후 증산 딸에게 넘어가 지금의 원평 오리알 터에 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무극대도의 갑자년 사건은 무모한 가운데 끝났지만 갑자년을 택하게 된 것은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증산 생존 시 『나는 삼계대권을 주재하여 선천 운도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운수를 열어 선경을 세우려 함이라. 선천에는 상극이 인간 만들어 사배(司配)함으로 세세의 원(寃)이 쌓이고 맺혀 삼계에 충일(充溢)하여 천지가 상도(常度)를 잃고, 세인의 모든 참화가 생기나니, 그러므로 내가 천지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반고의 원(寃)을 풀고, 상생의 도로써 후천 선경을 열고 조화정부를 세워 세계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것이 후일 증산 천사 공사기에 수록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선후천이 바뀌는 기점을 갑자년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앞서 갑자년 사건 전인 어느 날, 조철제씨는 힘 좋은 장정 10여 명을 사 가지고 왔다. 조철제씨는 증산이 아껴 썼던 약장과 둔궤(遁?)만을 가져오는데 성공했다.
이 문패는 신묘한 천지 도수를 재는 공부를 하는데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되며, 약장은 증산이 평소 병겁(病劫)을 예언한 일이 있었으며, 의통(醫通)을 알아 두라고 했다 한다. 즉 의통이라 함은 미래 운을 조정함에 있어 앞으로 개벽운도 상 괴이한 병겁(病劫)이 다가와 인류는 순식간에 멸망하게 되는데 이 병마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비전(秘傳)을 완전히 전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이런 증산의 사상이 약장을 만들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실제로 그 약장은 본 일이 없다. 다만 옮겨온 둔궤는 보았다.
조철제씨는 둔궤를 앞에 놓고 공부를 하였다. 때로 경상도 낙동강 가정자에 들어가서도 이 둔궤를 놓고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이 둔궤가 어느 날 하수인에게 도둑맞고 말았다.
사실 둔궤를 열어 보면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상자였지만 행여 별스런 신통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결국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철제씨는 다시 그 모양 그 크기대로 둔궤를 짜서 가지고 다니면서 공부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조철재씨와 인연하여 덧없이 3년이 흐르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점점 어떻게 하면 이곳을 벗어나 정도(正道)를 찾아갈 수 있을까 고심하기 시작했다.
이러던 차 나는 「불법연구회」라는 새로운 신앙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갑자년 사건 이후 종교적 갈등으로 방황하고 있을 때, 원평에 사는 교단 초창기 교화자 역할을 했던 이만갑씨를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생불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후 만갑씨는 장적조씨를 나의 어머님(손학경)과 형수님(조창환)에게 소개하여 더욱 새 회상에 대한 면모를 알려주었다. 이런 일들은 처음에는 나는 몰랐다. 어머님과 형수님만이 몰래 밭을 매러 다니시면서 법문을 전해 들었고, 후일 나의 어머님은 뜻을 굳혀 개종의 결단을 내리고 원기 9년 12월 드디어 총부로 가시게 되었다. 나 역시 두 번의 만남 속에 신념이 서져 어머님이 떠나신 후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나의 안사람과 형수님만이 남게 되었는데, 이런 우리 가족의 변동 때문에 형수님은 그곳에서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 원불교신문
▣ (증산교사) 제10장 신기도난사건(神器盜難事件)
조철제(趙喆濟)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안군(咸安郡)사람이라 어려서 부친(父親) 용모(鑛謀)를 따라서 만주(滿洲) 유하현(柳河蘇)에 이주(移住)하였다가 신도(信徒)를 만나서 태을주(太乙呪)의 수련(修鍊)을 받았었다。 병진년(丙辰年)에 귀국(歸國)하여 충청 남도(忠淸南道) 안민도(安眠島)에 거주(居住)하다가 마침 그 지방(地方)을 순회(巡懇)하던 이치복(李致福)을 만나서 천사(天師)의 행적(行績)에 관(關)한 강화(講話)를 듣고 정읍군(井邑郡) 우순면(雨順面) 마동(馬洞)으로 이주(移住)한 뒤에 친자종도(親炎從徒)들을 찾아서 천사(天師)의 행적(行績)올 연구(硏究)하기에 노력(勞力)하였다。 천사(天師)의 누이 선돌부인(夫人)을 방문(訪問)하니 부인(夫人)이 마침 장기수련(長期修鍊)을 행하다가 철제(喆濟)를 보고 자기(自己)와 인연(炎緣)이 있음을 말하고 본부(本夫) 박창국(朴昌國)과 인연(因緣)을 끊은 뒤에 드디어 철제(喆濟)와 동거(同居)하였다。 무오년(戊午年)에 김형렬(金亨烈)이 전주(全州)에서 교단(敎團)올 재건(再建)함에 철제(苗濟)가 그 교단(敎團)에 가입(加入)하여 형렬(亨烈)에게 상종(相從)하였다。
기미년(己未年) 여름에 철제(喆濟)가 따로 교단(敎團)을 창설(創設)하려고 획책(劃策)할 새 유의경(柳宣鄕)이 철제(喆濟)에게 일러 가로대 「천사(天師)께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行)하사 운수(運致)를 뭉쳐서 약장(藥藏)과 궤(槪)에다 감아두셨으므로 차경석(車京石)도 이 신기(神器)를 얻은 연후(連後)에야 운수(運数)가 열려서 교단 창설(敎團創設)에 성공(成功)하였나니 그대도 교단(敎團)을 창설(創設)코저하면 먼저 계획(計劃)을 세워 이 신기(神器)를 도취(圖取)하도록 하라』하니 철제(喆濟)가 이 말을 옳게 생각하였다。
철제(喆濟)는 심복부하(心腹部下) 권태로(權泰魯)•성정오(成丁五)•이정두(李正斗)•조용서(趙鑛端)•권영문(權事文)등 장정(壯丁) 여덟 사람을 순사(巡査)로 가장(假裝)하여 하여금 밤중에 본소를 습격(襲擊)하여 경석(京石)을 체포(逮捕)하려는 태세(態勢)를 보이며 가택수색(家宅搜索)을 행(行)하니 차윤칠(第輪七)이 나서서 사유(事由)를 묻거늘 방망이로 머리를 쳐서 대번에 혼도(背倒)케 하고 온집안이 소란(驗亂)한 틈을 타서 치성실문(致誠室門)을 열고 약장(藥藏)과 궤(體)를 도적(盜賊)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윤칠(輪七)이 정신(精神)을 차린 뒤에 치성실문(致誠室門)이 열렸음을 보고 들어가보니 약장(藥藏)과 궤(値)가 보이지 아니한지라 이에 순사(巡査)가 아니고 강도단(强盜團)임을 깨닫고 마을 사람들을 일으켜서 함께 뒤를 밟아서 쫓으니 태로일행(泰魯一行)은 짐이 무거워서 빨리 걷지 못하여 붙잡히게 되겠으므로 약장(藥藏)은 길가에 버리고 궤(體)만 가지고 돌아왔었다。 철제(喆濟)는 이렇게 궤(櫃)를 도적(盜賊)하여다가 감추어두고 선돌부인(夫人)과 부친(夫親) 용모(鑛謀)와 삼촌(三寸) 용서(鑛端)와 심복부하(心 腹部下)권태로(權泰魯)등과 더불어 교단창설(敎團創設)의 준비(準備)를 진행(進行)하였다.
▣ 조철제의 상제님 성골 도굴 만행
1 신유(辛酉 : 道紀 51, 1921)년 삼월 삼짇날에 이르러 조철제가 ‘상제님의 성골(聖骨)을 모시고 수도하면 큰 기운이 붙어 도통하고 교단이 크게 번창한다.’는 소문에 현혹되어
2 그의 심복 권태로(權泰魯), 손진방(孫進邦) 등 장정 여덟 사람을 시켜 밤을 타서 구릿골 장탯날에 모신 상제님 성골을 도굴하니라.
3 이 때 형렬은 서울에 가고 그 아내 김호연이 딸을 출산한 지 갓 사흘이 되어 사랑방에 누워 있는데
4 고요한 밤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번갯불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몸을 휘감는지라
5 호연이 놀라 일어나 정신을 차리니 “내 몸을 도둑질해 가고 있는데 뭣들 하고 자빠졌느냐!” 하는 상제님 성령의 불호령이 떨어지거늘
6 방문을 열고 형렬의 큰아들 찬문을 불러 이르기를 “불칼이 방안으로 들어와 대니 어쩐 일인지 선생님의 묘소에 좀 가 보고 오소.” 하므로
7 찬문이 서둘러 장탯날에 가 보니 과연 묘소가 다 파헤쳐져 있고 도굴범들은 횃불을 들고 멀리 도망하는 중이라 쫓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니라.
이는 조철제의 짓이라
8 이 때 서울에 있는 형렬에게도 “내 몸이 이렇게 흔들리는데 너희들은 잠만 자고 있느냐!” 하시는 상제님의 호령이 들리거늘
9 형렬이 즉시 김덕찬(金德燦)과 몇 명을 데리고 출발하여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집에 당도하니라.
10 형렬이 대문에 들어서며 다급한 목소리로 “어젯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니
11 호연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말하매 형렬이 곧장 묘소로 달려가 구덩이를 보더니 “이는 조철제의 짓이라.” 하니라.(증산도 道典 10:138)
조철제의 사기 행각과 영모재 점거
1 김형렬이 조철제의 성골 도굴 만행을 김제 경찰서에 고발하니
2 경찰은 전라북도 각 경찰서에 통지하여 수사를 진행하되 이 사건을 계기로 증산계(甑山系) 교단이 와해되기를 바라며 소극적으로 수사를 진행할 뿐이더라.
3 한편 철제는 기미년 여름에 대흥리 도장에서 훔쳐 온 궤(櫃)를 숨겨 두고 상제님의 친동생 선돌부인을 이용하여 ‘상제님의 의자(義子)로 유명(遺命)을 얻어 교통(敎統)을 받았다.’며 교단 창립을 꾀하더니
4 이어 성골을 도굴하여 통사동 영모재 골방에 감춰 두고 ‘모월 모일에 상제님의 뼈에 살이 붙어 나와 상제님이 다시 출세하신다.’고 하며 신도들의 금전을 갈취하니라.
5 그러나 약속한 날이 되어도 상제님께서 오시지 않으매 다시 상제님 성탄절인 9월 19일로 연기하였으나 역시 허사가 되니라.(증산도 道典 1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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