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伯多祿 楊根人也 其父鰥居窮因 力農資生 而伯多祿年近三十 不冠不聚 疾癃孱弱
조백다록 양근인야 기부환거궁인 역농자생 이백다록연근삼십 불관부취 질륭잔약
外貌無足可觀 更兼昏於俗事
외모무족가관 경겸혼어속사
71. 人皆嘲笑之 不數之 遊學於丁奧斯定之門 奧斯定 獨稱其大熱心
인개조실지 불수지 유학어정오사정지문 오사정 독칭기대열심
조용삼 베드로는 양근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홀아비로 곤궁하여 농사를 지어 겨우 살아갔으므
로 베드로는 나이가 30이 가깝도록 관례도 못하고 장가도 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병들고 쇠약하고
외모도 보잘 것이 없었거니와 세상일에도 어두워 사람 들이 그를 비웃고 사람 축에 넣지도 않았습니
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아우구스티노만이 그가 대단히 열심하다고 칭찬
하였습니다.
庚申四月 與其父偕往驪州李瑪爾定村 瑪爾定被捕時 父子同參 到官不屈 官欲曰 汝不從命
경신사월 여기부해왕여주이마이정촌 마이정피포시 부자동참 도관불굴 관욕왈 여불종명
當搏殺汝父 取其父 當面毒打 伯多祿不得已 說出背敎言語 蒙放出門 瑪爾定等提醒勸勉
당박살여부 취기부 당면독타 백다록부득이 설출배교언어 몽방출문 마이정등 제성권면
백多祿回心悔罪 復入官說明 官大怒 嚴因不放
백다록회심회죄 복입관설명 관대노 엄인불방
72. 每經刑訊 他人或受例杖 惟伯多祿最多最酷 盖本官見其爲人 心甚經之 以爲如此人
매경형신 타인혹수예장 유백다록최다최혹 개본관견기위인 심심경지 이위여차인
容易受降 而不意反甚堅固 故憎恨特深 必欲殺之
용이수항 이불의반심견고 고증한특심 필욕살지
경신년(1800년) 4월에 자기 아버지와 함께 여주 이중배 마르티노의 마을에 갔다가 마르티노가 체포
될 때 부자가 함께 붙들려 관청으로 끌려갔으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관리가 노하여 “네가 명령을
듣지 않으면 네 아버지를 당장에 죽이겠다” 하고 아버지 를 끌어내어 그가 보는 앞에서 혹독한 매질
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는 수 없이 배교하는 말을 했습니다. 석방되어 문을 나올 때 마르
티노 등이 깨우치고 권면하자 베드로는 마음을 돌이켜 참회하고 다시 들어가 설명하였습니다. 고문
을 당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예사로운 매를 맞았지만 베드로만은 가장 혹독한 매를 많이 맞았습니
다. 그것은 관리가 그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속으로 업신여겨 “이런 자는 쉽사리 항복을 받을 수 있으
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 오히려 몹시 견고하므로 미움이 특별히 심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在獄十一朔 嘉言善行甚多 忘不能細述 後當査實 獄中受代洗 辛酉二月 官復嚴刑拷訊
재옥십일삭 가언선행심다 망불능세술 후당사실 옥중수대세 신유이월 관복엄형고시
迫令背敎 答曰 天無二主
박령배교 답왈 천무이주
73. 人無二心 一死之外 無辭可告 官復命下獄 數日 後絶命於獄中 時二月十四日也
인무이심 일사지외 무사가고 관복명하옥 수일 후절명어옥중 시이월십사일야
감옥 생활 11개월 동안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매우 많았습니다만 잊어버려 다 자세히 기록되지
못합니다. 후에 마땅히 사실을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옥 중에서 대세를 받았고 신유년(1
801년) 2월에 관리가 다시 엄한 형벌로 고문하면서 억지로 배교하기를 명령하니 “하늘에는 두 천주
가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없소. 그러니 한 번 죽는 것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소” 라고 대답했습니
다. 그러자 관리가 다시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는데 며칠 후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는 2월
14일이 었습니다.
註
- 대세(代洗): 사제를 대신하여 평신도들이 세례를 주는 의식
李類斯以湖中傳敎之罪 斬於工州 而此人尙在背敎中 未知臨死之如何 或傳其善死
이유사이호중전교지죄 참어공주 이차인상재배교중 미지임사지여하 혹전기선사
而未敢遽信 定山及禮山 各有致命者一人云 而亦不知爲誰某
이미감거신 정산급예산 각유치명자일인운 이역부지위수모
이존창 루도비코는 충청도에 전교했다는 죄로 공주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때에 이 사람은 아
직 배교 중이었는데 죽을 때는 어떠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산과 예산에도 순교자가 한
사람씩 있다하는데 역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全羅道辛亥以後 十年無窘 敎友頗多 四月初 全州柳奧斯定
전라도신해이후 십년무군 교우파다 사월초 전주유오사정
74. 高山尹方濟各等二百餘人被捕 惟金堤貧士姓韓的 及全州常人姓崔字汝兼者
고산윤방제각등이백여인피포 유김제빈사성한적 급전주상인성최자여겸자
兩人剛毅 斬首致命 餘皆被屈 京鄕背敎人 皆竄流遠方 厥數甚多 而柳奧斯定兄弟
양인강의 참수치명 여개피굴 경향배교인 개찬류원방 궐수심다 이유오사정형제
及尹方濟各 以領袖之故 不卽定配 移人上京 金多黙被捕時 自說往來之事 因此亦移囚上京
급윤방제각 이영수지고 불즉정배 이인상경 김다묵피포시 자설왕래지사 인차역이수상경
尙未知或死或竄 外敎傳言 正刑及獄中致斃者
상미지혹사혹찬 외교전언 정형급옥중치폐자
75. 合三百餘人 外鄕不與焉 朝鮮開國後 殺人之數 未有甚於今歲 未之其信否
합삼백여인 외향불여언 조선개국후 살인지수 미유심어금세 미지기신부
又未知浪死者爲誰 致命者幾人 朝廷之必欲盡殺者 地位高 能文字之人 愚鹵賤人
우미지랑사자위수 치명자기인 조정지필욕진살자 지위고 능문자지인 우로천인
或知而故貴 或治而不嚴 都下常人 頗有存者
혹지이고귀 혹치이불엄 도하상인 파유존자
전라도는 신해년(1791년) 이후 10년 동안 박해가 없어서 교우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4월 초 전주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고산의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 200여명이 체포 되었는데 오직 김제의 가난한
선비 한씨와 전주의 상사람 최여겸만이 의지가 굳어 참수형으로 순교하니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굴
복하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배교한 사람들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냈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았
습니다. 유 아우구스티노 형제와 윤 프란치스코는 지도자였기에 바로 귀양 보내지 아니하고 서울로
옮겨 가두었 습니다. 김유산 토마스는 체포되었을 때 자기가 그들과 내왕한 일이 있다고 실토하였 으
므로 그 역시 서울로 옮겨다가 가두었는데 죽였는지 아니면 귀양을 보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외교
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 이 300여 명인데 지방의 숫자
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 건국이래 사람을 죽인 수가 올해처럼 만은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만 그것을 믿을 만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헛되이 죽은자가 누구이며 순교한 사
람이 몇인지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 기어코 죽여 없애려 하는 자는 지위가 높고 글을 잘하
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평민들은 혹 알아도 모르는체 내버려 두고 취조도 혹독하게 아 니
하여 서울 시내의 상사람들은 목숨을 보전한 이가 많습니다.
註
- 유항검(1756-1801): 전주 초남리 출신으로 윤지충과 이종사촌,권상연과는 내외종간.가성직제의
신부였으며 성직자 영입 운도에 앞장서 주문모 신부의 임국을 성공시킴.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大
舶請來”사건 때문에 1801.9.17일 전주에서 순교
二月望前事 皆罪人親見者 頗爲詳悉 以後事 但憑傳說得聞
이월망전사 개죄인친견자 파위상실 이후사 단빙전설득문
76. 故甚爲踈畧 致命人事蹟 傳聞的實者 及平昔稔知者 畧爲記述 而不過梗槩而已
고심위소략 치명인사적 전무적실자 급평석임지자 략위기술 이불과경개이이
其餘不敢妄錄 然其中尙恐有未實者 更當詳査
기여불감망록 연기중상공유미실자 경당상사
2월 보름 전의 일은 죄인이 친히 목격하였으므로 상당히 자세히 압니다만 그 이후의 일은 전하는 말
을 얻어들은 것이기에 메우 소홀하고 간략합니다. 순교자들의 사적은 문명히 들은 것과 평소에 전부
터 잘 아는 것을 추려서 적은 것이라 대강에 지나지 않지만 그 나머지는 감히 함부로 기록하지 못하
였습니다. 그러나 기록한것 가운데도 오 히려 진실되지 못한데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다시 자
세히 알아보아야 하겠습니 다.
77. 本神父自乙卯後 常住葛隆巴家 聞或巡歷別所 而獨葛隆巴知之 他無與知者 及窘難起
본신부자을묘후 상주갈륭파가 문혹순력별소 이독갈륭파지지 타무여지자 급군난기
有一男敎友 見事勢危急 恐難保全 徑往外鄕 尋見隱居之敎友 預備兩處妥當之所 再上京
유일남교우 견사세위급 공난보전 경왕외향 심견은거지교우 예비양처타당지소 재상경
見葛隆巴 懇請一喝神父 欲爲保護躱避之計 葛隆巴曰
견갈륭파 간청일갈신부 욕위보호타피지계 갈륭파왈
78. 已得安身之所 不必更爲遷動 此友屢請不得 沒奈何空還 五六日後 禍機越大
이득안신지소 불필경위천동 차우누청부득 몰내하공환 오육일후 화기월대
此友恐波及 挈家遠避
차우공파급 설가원피
주문모 신부님은 을묘년(1795년) 이래 늘 골롬바의 집에 살면서 간혹 딴 곳에 돌아다녔는데 오직 골
롬바만이 이 사실을 알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한 남자 교우
가 사태가 위급함을 보고 신부님이 몸을 온전히 보존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바로 지방으로 내려와 숨
어 사는 교우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적당한 곳 두 군데를 마련해 놓고 서울로 돌아와 골롬바를 만나
신부님을 보호하여 몸을 피하게 할 계획으로 한 번 만나 뵙게 해 달라고 했으나 골롬바는 이미 안전
한 곳이 마련되었으니 구태여 다시 옮겨 갈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교우는 여러 번 간청했으
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갔습니다. 5, 6일 후 화가 일어날 기미가 점차 커지자
이 교우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서 온 가족과 함께 멀리 피하였습니다.
丁奧斯定到官不招 官又捕葛隆巴母子 嚴刑鞫問 亦皆抵死不招 官取其婢子 周紐詰問
정오사정도관불초 관우포갈륭파모자 엄형국문 역개저사불초 관취기비자 주뉴힐문
婢子不耐刑 從實直招 幷告年甲相貌 官謂葛隆巴曰 爾婢已招 爾不得終諱 須告此人所往處
비자불내형 종실직초 병고년갑상모 관위갈륭파왈 이비이초 이불득종휘 수고차인소왕처
79. 答曰 此人先時果在我家 離居已久 今不知其處矣 於是出榜懸賞 摹寫容貌 遍求於外鄕
답왈 차인선시과재아가 이거이구 금불지기처의 어시출방현상 모사용모 편구어외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관청에 잡혀가 (주문모 신부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아니하자 관리는 골롬바
모자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로 고문하였으나 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골롬바의 여종을 데려다가 주리를 틀어 문초하니 여종이 혹형을 이기지 못하여 사실대로 진술하고
아울러(주 신부의) 나이와 얼굴 모습을 알려 주었습니다. 관원이 골롬바를 보고 “너희 이미 여종이
다 불었으니 너도 끝내 숨길 수 가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그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골
롬바는 “그 사람이 전에는 우리 집에 있었지만 떠나간 지가 오래 되어서 지금은 그가 있는 곳을 모른
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부님의 얼굴 모양을 그려서 게시하여 상금을 걸고 각 지방으로 널리 탐문
하였습니다.
三月中神父自首 (未知往於誰家因何自首 幷未詳自首日字) 直入禁府衙門 吏卒驚問何人
삼월중신부자수 (미지왕어수가인하자수 병미상자수일자) 직입금부아문 이졸경문하인
答曰 我亦奉主敎之人 今聞朝廷嚴禁 多殺不辜 生旣無益 故自來求死 擁入官前 知係神父
답왈 아역봉주교지인 금문조정엄금 다살부고 생기무익 고자래구사 옹입관전 지계신부
遂下獄拘囚 只鎖兩足 不可刑訊 在獄之時 文字問答甚多云
수하옥구수 지쇄양족 불가형신 재옥지시 문자문답심다운
80. 而皆不得見 但聞外敎傳言 自首者 自稱西洋人
이개불득견 단문외교전언 자수자 자칭서양인
신부님은 3월께 자수하였습니다. (어디의 누구 집에 있었는지, 어찌하여 자수하였는지, 자수한 날짜
가 언제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의금부로 들어가니까 낮은 벼슬아치들이 놀라 어떤 사람
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나도 역시 천주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으로 조정에서 이것을 엄중히 금하
고 무죄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다고 하니 살아 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 스스로 죽기를 구하
러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졸들이 그를 붙들어 관리 앞에 데려가니 그가 신부임을 알고 옥에 가두
었는데 다만 양쪽 발에 족쇄만을 하고 형벌과 문초는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이 옥에 갇혔을 때 글
자로 문답한 것이 매우 많다고들 하는데 얻어 볼 수가 없고 다만 외교인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수
한 사람이 자기가 서양 사람이라 했다고 합니다.
先此六人之死 論以逆律 神父自現之後 都民相傳 西士在獄 辨明天主敎人之非逆賊
선차육인지사 논이역률 신부자현지후 도민상전 서사재옥 변명천주교인지비역적
又傳 西士不肯就死 盡說自己所欲言者 然後方請受死 此等傳說 以不虛矣
우전 서사불긍취사 진설자기소욕언자 연후방청수사 차등전설 이불허의
이에 앞서 여섯 사람이 반역죄로 처형되었는데 신부님이 자수하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서양 사람이
옥중에서 천주교인은 역적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다”고 말하고 또 “서 양 사람이 그냥 죽음을 당하
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야 죽기를 청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소문은
거짓이 아닌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