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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획자들
-불가능한 시장을 만들어낸 사람들
서영교 지음, 2014 글항아리
머리말
왜 전쟁과 시장인가
-시장은 전쟁을 배태하는 자궁이다
그는 가장 위대한 고구려인이었다. 정복 군주였던 그는 391년 18세에 왕위에 올라 413년 40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쟁을 지속했다. 내몽골에서 낙동강까지 그 먼 거리를 오가며 그러했다는 것은 해골의 입이 벌어질 만한 이야기다.
한국의 어두운 근·현대 역사는 고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 우리의 좁은 영토는 과거 넓은 영토를 바라보게 했고, 나약한 근현대의 한국인들은 강력한 고대의 군주를 회상하게 했다. 필자의 뇌리에서 위대한 정복 군주 광개토왕을 떠올리게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결국 과로사 했다. 현재 필자의 관심은 그의 위대한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22년 동안 전쟁을 지속하려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재화와 돈이 소모된다. 광개토왕은 그 많은 전비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고구려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는 것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무장들이 순전히 그것 때문에 거의 한 세대 동안이나 대왕을 묵묵히 따라주었을까? 결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는 수지맞는 전쟁을 했고, 지나친 출혈을 피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까지 냉전의 관점으로 고대를 이해한 것 같다. 냉전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특수한 시기였을 뿐이다. 그것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한반도에서 터진 6·25 전쟁은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를 받아 수행되었다. 재정적으로 한정해보았을 때 우리는 공짜 전쟁을 했다.
이로부터 14년 후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은 우방인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한국은 기꺼이 전쟁에 참여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참전 연인원 32만5517명 중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232명에 이르렀다(1965~73년). 미국은 그 대가를 돈으로 우리에게 지불했다. 1966년 파월 장병이 국내로 송금한 직접 수입액은 1억7830만 달러였다. 월남 파병 동안 베트남에 수출과 군납, 용역 및 건설로 민간 파월 기술자가 국내로 송금한 수입액은 6억9420만 달러였다. 당시 국내 총 외화 획득의 80퍼센트가 되는 큰 돈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우리는 전비를 투입한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참전의 대가를 받아냈다.
현대사에서 한국은 돈을 지불하고 전쟁을 수행한 경험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광개토왕이 넓혀놓은 땅의 규모에만 주목했고, 그가 22년간 쏟아 부었던 막대한 전쟁 비용에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이 광개토왕의 전쟁을 주제로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준다. 고대에도 전쟁은 소모적이었지만 승리는 그 이상의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 그런 것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 그의 전쟁이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은 정부군과 당당히 전쟁을 수행했고, 현재도 지속하고 있다. 마약 카르텔은 너무나 거대한 규모여서 국가의 면모를 보일 때도 있다. 정부의 집요한 공격으로 지배적인 마약 조직이 전복되었다고 해도 반드시 새로운 조직이 등장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미국 정부는 콜롬비아를 포함한 남미 마약 조직의 근절에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남미 각국의 중앙정부에 원조를 하고 나아가 사설 용병회사들에게도 돈을 대고 있다. 하지만 마약 조직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마약 조직의 불가사의한 영속성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의 거대한 마약 시장에서 기원한 것이다. 남미의 마약 조직은 미국에 마약을 판매하고 그 수익으로 무장을 하고 조직을 정비·확장하고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에서 마약에 대한 수요가 있는 한 그들은 계속 자신을 보호하고 조직을 팽창시키기 위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마약 전쟁은 마약 시장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수 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영국 등과 전쟁을 하고 있는 탈레반도 마찬가지이다. 탈레반은 전쟁 비용을 외부의 어떠한 세력에게도 원조받기 힘들다. 하지만 아프간은 세계 아편의 90퍼센트를 생산하고 있다. 아프간의 많은 농민들이 아편을 재배하고 있는 이유는 곡물보다 4배의 수익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탈레반은 아편을 헤로인으로 정제해 세계 마약 조직을 통해 미국과 유럽에 판매하여 전비를 마련하고, 마약을 구입해준 그 나라와 전쟁을 한다. 전쟁이 시장이란 자궁에서 배태되었을 때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않는 괴물이 된다. 또한 그 전쟁을 이끄는 ‘전쟁 두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민활하고 창조적이다. 그들은 불가능한 시장을 만들어 시장의 주인이 된 자들이다. 시장의 판을 교체해서 승리하는 사람들의 사유방식이 궁금한 분들은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이라는 자궁에서 전쟁이 태어나는 모습을 동서양의 전쟁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끝난 이후 지속되는 현재의 전쟁이 과거의 전쟁과 어떤 메커니즘을 공유하는지 살펴보고자 했다.
2008년 10월
개정판 머리말
『전쟁기획자들』 초판을 낸 지 6년이 흘렀다. 필자는 그동안 미 제국이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여러 각도로 더 생각했다. 미국은 달러를 전 세계에 통용시키면서 먹고 사는 나라다. 발행한 달러의 75퍼센트는 미국에 들어오지 않고, 해외에서 순환한다. 미국은 달러를 찍어낼 때마다 그 75퍼센트 만큼 해외에서 공짜 쇼핑을 하는 셈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미국은 이렇게 달러라는 화폐를 통해 세계를 착취한다. 대한민국은 미국에게 착취당하는 존재인가? 확실히 한국의 공업 생산력과 달러 보유고 그리고 여기에 발을 딛고 선 원화는 미국의 달러화를 받쳐주는 강력한 기둥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번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 달러화의 붕괴가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해줄까? 필자는 감히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미 달러의 우위를 지켜낸 것은 미 항공모함과 F21 전투기였다. 이는 도박하우스에서 가장 주먹이 센 조폭이 발행한 칩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과 다르지 않다. 미국은 석유 대금으로 유로화를 받겠다고 선언한 사담 후세인을 잡아서 기어코 사형에 처했다. 다른 곳에서 발행한 칩을 사용하면 죽이겠다고, 전 세계에 경고 했던 것이다.
미 제국을 도박하우스의 주인으로 비유하면 우리와 그들의 입장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하우스 주인인 미국은 도박장 내부에 소란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도록 경비들을 대기시켜두었다. 물론 하우스 외부도 철저히 경계하고 있다. 또한 그 내부에는 ‘쩐주’도 있다. 도박에서 진 사람들이 재기하고자 할 때에 이들은 담보를 잡고 고리로 돈을 빌려주면서 여러 가지 요구를 한다. IMF와 같은 세계은행이 그들이다. 모든 사람은 도박을 할 때 자신의 현금을 달러, 즉 주인이 발행한 칩으로 바꾸어야 한다. 도박판이 바뀔 때마다 주인은 세금(데라)을 뗀다. 때문에 주인은 도박판이 멈추지 않고 계속 잘 돌아가기를 원하며, 평화를 갈망한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하우스에 와서 도박을 하고 주인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다. 도박장 내부를 지킬 주먹들과 외부의 경비를 계속 보충해가면서 이런 상황을 지속시키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세계무역을 도박으로 비유했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화폐와 상품은 달러를 기준으로 교환되거나 달러로 거래된다. 특히 모든 나라가 소비하는 석유 거래는 철저히 달러로만 이루어진다. 미국은 이러한 ‘룰’을 위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알카에다와 전쟁하는 데 수조 달러를 쏟아 부었고, 지금 시리아 IS와도 같은 일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해외에 파병할 때마다 미국은 그것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치르는 희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자유를 인간의 자유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달러를 기축으로 하는 자본 이동의 자유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은 도박하우스에서 유능한 도박사 가운데 하나다. 주인에게 세금을 내고도 돈을 많이 따서, 먹고살고 번영을 누린다. 세계 최대의 무역대국인 독일과 견줄 수준은 되지 못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중국과의 무역으로 한 해에 1000억 달러 정도를 벌고 있다. 그 돈으로 석유를 구입하고 식량을 산다.
우리는 한때 일본이라는 도박사에게 다른 곳에서 번 돈을 다 주다시피 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해 미국과 유럽에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을 해야 했던 무역 구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여전히 일본에 의존하는 분야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늘어나고 있으며, 이제 세계 최대 무역국 가운데 하나인 중국이 미국과 유럽에 완제품을 수출하기 위해 한국에서 부품을 수입해야 하는 무역 구조가 만들어졌다.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아직까지 미국 달러화 체제의 최대 수혜국 가운데 하나는 한국이다.
2014년 9월
자본은 정치를 움직이고, 이권은 반란을 획책한다
-자본가의 국제정치
서울의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었다(1979년 10월 26일). 그의 죽음에는 유가의 국제정치가 반영되어 있다. 그해 이란은 회교혁명으로 팔레비 독재정권이 무너졌고 원유 수출을 중단했다. 유가가 치솟았다. 제2차 오일쇼크였다.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물가가 상승했고, 경상수지가 악화되었다. 경제적 불안은 정치적 불만과 결합했고, 부산과 마산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저격자 김재규는 여기서 용기를 얻었다. 그해 12월 12일 쿠데타가 일어나 신군부가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이란 사태는 신군부에게도 행운이었다. 미국은 이란에 자국의 인질이 잡혀 있어 한국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란인들은 미국을 석유 도둑으로 알았고, 그 도둑이 국왕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증오는 57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란 수상 라즈마라가 저격으로 사망했다. 그는 이란 석유의 국유화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었다. 국왕 팔레비는 당시 이란의 석유를 독점한 영국의 허수아비였다.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
오랜 세월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이란에는 한 사람의 선동가가 있었다. 민족전선을 이끌고 있던 모사데크는 의회 석유위원회 의장이었다. 석유만 국유화되면 이란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의 주장은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1951년 4월 의회에서 석유 국유화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2년 후 국왕이 서명했다. 동시에 모사데크가 수상에 임명되었다.
“석유 도둑 영국(앵글로 이라니언)을 몰아내자.”
하지만 석유 시장에서 유통권은 엑슨모빌, 텍사코, 쉘 등 메이저 회사들이 가지고 있었다. 서로 경쟁적인 그들도 단합을 했다.
“석유는 피보다 진하다. 이란 산 석유는 사지도 팔지도 말자!”
이란의 석유는 시장에서 거래가 중지되었다.
모사데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국고가 바닥을 드러냈고,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란은 무질서 상태에 빠졌다.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쯔데당(공산당)이 정부를 탈취하고 이란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되면 중동 전체가 위험해진다. 그들은 미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미국의 CIA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란에 잠입한 요원들이 공작을 시작했다. 이란의 국왕 팔레비에 접근한 CIA 요원 슈파츠코프는 모사데크의 파면을 선언하게 했다. 새로운 수상으로 자헤디 장군을 임명했다. 하지만 모사데크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라디오를 통해 반反팔레비 운동을 선언했다. 하룻밤 사이에 반팔레비 구호를 부르짖는 군중들로 테헤란 거리는 가득찼다(1953년 8월)
CIA의 쿠데타와 석유 재벌들
팔레비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로마로 피신했다. CIA는 2단계 ‘아작스’ 작전에 들어갔다. 군대와 경찰 조직 내 인맥을 끌어 모았고, 사람을 시켜 이슬람 성직자 집을 폭파시켜, 그 일을 모사데크가 했다고 누명을 씌웠다. 그리고 테헤란 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돈을 살포했다. 친親국왕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간 군중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넘쳤다.
모사데크는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CIA의 조정을 받고 있었다. 군부의 탱크가 모사데크와 그를 따르던 자들을 포위했다. 미국이 획책한 쿠데타가 성공했다. 귀국한 팔레비는 영국의 허수아비에서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석유의 이권은 엑슨, 걸프 등 미국의 5대 메이저와 영국(BP), 네덜란드(쉘), 프랑스(CEP) 등에게 분할되었고(1954년 7월), 이란 공작을 지휘한 CIA 요원 루즈벨트는 걸프의 부사장이 되었다. 최대의 수혜자는 미국 석유회사들이었다. 이후 그들은 이란뿐만 아니라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유전지대에 손을 뻗치게 되었다. CIA가 획책한 쿠데타는 외세의 개입 사실을 부각시켰고, 이란 국민들에게 반미국적인 정서가 자리 잡게 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왕은 정적들을 처단하고 완벽한 경찰국가를 만들었다.(82~85)
석유 재벌들은 이란의 위기를 이용해 영국이 독점한 석유를 나누어 가졌다. 말갈 상인들은 고구려의 곡물에 의존적인 설연타의 왕위 계승에 개입해 자신의 말을 듣는 자를 등극시켜 당을 공격하게 했고, 이권을 지켜냈다. 양자는 시공간의 차이만큼 입장이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시장을 장악한 현대 자본가들과 고대 상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제정치에 개입하거나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석유 재벌들은 중동의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의회와 행정부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했고, CIA를 움직였다. 몽골고원과 고구려 사이의 교역에 거대한 이권이 걸린 말갈 상인들도 연개소문이 사주한 이상의 것을 해냈다.(92)
비단은 ‘사용가치’라도 있지만 달러는?
-중국의 비단과 미국의 달러
“자유시장이 부와 번영으로 이르는 길임을 확신합니다.”
1990년대 미국은 자유시장 개혁, 사유화, 달러 민주화라는 ‘복음’으로 무장하고 자본 이동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배후에는 월스트리트의 금융기업들이 있었다. 비판자들은 그것을 제국이라 불렀고, 미국은 자유와 인권의 확대라고 주장했다. 확실한 것은 여기서 자유란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자유였고, 그 자본은 달러였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말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자 자본주의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도 약화될 터였다. 일본과 한국 등 동아시아와 유럽연합이 미국의 지배권에 대한 경제적 주요 경쟁자가 되었다. 미 행정부는 ‘글로벌화’라는 덫을 개발했다. 눈치를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외 단기 자본의 유입
일본 은행들이 자국의 증권 및 부동산 시장 폭락에 맞서 고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1993년 아·태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동아시아 경제권에 대해 금융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동안 동아시아 나라들은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제외하고는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을 피해왔다.
한국에도 해외 투자가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가도록 허용되었다. 한국의 고금리에 현혹된 외국 투자가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해외에서 6~7퍼센트의 저금리로 자금을 빌려 원화로 환전하여 12~13퍼센트의 고금리로 운용했다. 재미를 본 그들은 우리의 주가가 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많은 주식을 매입하였다. 외국인 증권 투자가 61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1991~1996년). 해외자본 유입에 따른 통화 증발과 인플레 압력을 상쇄하기 위하여 정부와 한국은행은 유입된 외화를 외국으로 다시 내보내는 정책을 시도했다(불태화不胎化 정책). 해외 여행자들의 환전 한도를 1만 달러로 상향 조정하는가 하면, 외환 보유고 일부를 은행을 통해 종금사에 예탁해 그들이 해외 증권에 투자하는 길을 텄다.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1996년 적자 237억 달러) 단기 자본 유입으로 환율이 안정되었다. 분명히 왜곡된 현상이었지만 세계화 시대에는 국제수지 적자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착각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달러의 유입에 휩쓸리고 있었다. 호화 부동산, 주식 등에 투기적인 거품이 일어났다.
울퉁불퉁한 자본 흐름의 홈을 대패질한 IMF
국제 은행으로부터 받은 비밀 여신한도로 무장한 투기꾼들은 가장 취약한 태국을 골랐다. 1997년 4월 태국 바트화에 대한 투기 공격이 감행되었다. 6월 태국은 달러화에 대한 바트화의 고정 환율을 폐기했고, IMF에 구제 요청을 했다. 헤지펀드와 은행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강타했고, 곧바로 한국에 상륙했다.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외환위기에 봉착하고 일본에서도 잇따른 은행 파탄이 일어났다. 서방의 투자자들은 과연 한국이 예외가 될 수 있느냐고 의심했고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주식을 투매하자 주가가 폭락하고, 일시에 자금을 회수하니 환율이 폭등했다.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 났다.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IMF로부터 구제금융 580억 달러를 차입하는 약정서에 서명했다. 경제 운영은 IMF체제로 넘어갔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IMF는 고환율, 고금리 정책을 썼다. 이듬해 5월 1만5000개 이상의 기업이 부도를 냈고, 정상 기업의 조업률도 6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구제금융과 외환 사정 호전의 대가로서는 너무나 가혹했다. 고금리는 기업들에게 노동자의 임금 삭감, 정리해고 등을 강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빠져들었고, 한국의 알짜배기 기업과 부동산이 헐값에 매각되었다. 서방의 투기꾼들과 금융자본들은 천문학적 이익을 챙겼다.
IMF는 아시아에서 자본의 흐름에 걸리는 울퉁불퉁한 홈들을 매끈하게 대패질했다. 1998~1999년 국제경제은행BIS이 870억 달러, 2002년에 2000억 달러로 흑자의 정점을 기록하는 동안 아시아 국가들은 천문학적 적자를 기록했다. 흑자의 대부분은 미 재무부 채권을 구입하는 형태로 미국으로 흘러갔다. 이것이 미국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듯이, 유일 강대국의 지위를 지탱하는 구조는 그러했다.(93~96)
석유 거래를 오로지 달러화로만 결제하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 석유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들이 달러화를 필요로 하는 한 미국의 무역 위상이 약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적자를 달러화 발행으로 보충해온 미국에게 후세인이 도전했다. 그는 “앞으로 이라크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2000년). 이란과 인도네시아 등이 동조할 움직임을 보였다.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석유수출 결제 대금의 달러화 환원이었다.(103)
달러화에 대한 반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란이 석유수출 대금을 유로화로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007년). 시리아가 그 뒤를 이었고, 베네수엘라도 호응하고 있다. 중국·러시아도 자국 통화로 달러를 대체하려고 한다. 달러화 약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의 중앙은행들이 유로화 매입에 적극 나섰다. 돈놀이꾼 미국의 주먹이 약해진 것을 직감한 것이다. 미국은 순조롭게 이라크를 접수했지만 게릴라들의 저항으로 전쟁은 끝없는 늪에 빠졌다. 미국의 군사력이 한계를 드러냈고, 부동산 시장에 위기가 닥쳐와 미국 금융기업에 치명타를 날렸다.
중국의 비단과 미국의 달러는 성격이 다르다. 비단은 사용가치가 있지만 달러는 교환의 종이 증서일 뿐이다. 하지만 유통과 그 가치에 있어 유사한 점도 있다. 중국 비단의 원활한 유통은 실크로드를 장악할 수 있는 수나라의 무력을 필요로 했고, 1971년 금본위제가 종식된 후 달러화의 가치는 아브람스 탱크, F16 전투기와 핵무기로 뒷받침되었다. 유로를 통한 원유 거래가 늘어나면 달러는 폭락할 것이고 미국의 지배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 변화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 두렵다.(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