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아吾喪我
백활영
아, 저런 광경이라니!
나는 내 눈을 의심한다. 헐떡이며 숨소리만큼 짓눌린 무게로 겨우 산마루에 섰다. 땀방울이 시야를 가린다. 나는 주먹손으로 얼굴을 훔친다. 그러자 저 아래 계곡에서 부산스레 움직이는 무언가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숨을 멈추고 자세히 내려다보니 새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산 까치 두 마리였다. 한마리가 계곡에 고인 귀하디귀한 물방울에 날개를 퍼덕여 더위를 식히고 옆가지에 올라앉는다, 그러자 또 다른 놈이 내려와 같은 방법으로 날개 짓을 하고, 그 사이 하나는 옆의 나뭇가지에 앉아 사주경계로 상대를 보호한다. 한참동안 계속되는 그들의 역할극, 민첩하고 기특한 그 움직임에 놀라 내 몸에선 땀방울도 사라져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제 몸에서는 한기마저 서린다. 퍼덕거리는 물방울 목욕으로라도 열기를 식혔던지 그놈들은 다정히 나뭇가지에 앉더니 입맞춤과 목 비비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나란히, 너무도 나란히 건너 편 산봉우리를 향해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산뜻한 한 편의 드라마를 감상하고 있는 나,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 이 찌는 삼복더위의 정오쯤에 산등성이로 올라와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지혜라도 터득하려 했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두 시간 전 나는 집 마루에 누워 있었다. 선풍기의 힘을 빌려 무더위를 이기려 애쓰며 말이다. 허나 34도가 넘는 열기에 익숙하지 못한 선풍기는 시원한 부채역할은커녕 온풍기로 돌변하여 내 몸에 뜨거운 바람을 사뭇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아뿔사!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랄까?
글쎄 ‘눈 위에 서리를 더 한다’면이야 얼마나 좋겠는가. 이 경우는 서상가열(暑上可熱)이라 만들어 써야하나, 아무튼 그때 아내의 가벼운 열(熱) 잽이 내 코앞으로 다가 왔다. 하찮은 가정사문제로 나의 약점을 파고드는 그 정교함, 처음에 미약하게 시작된 다툼이 늘 그렇듯 한 옥타브를 뛰어넘어 급기야 불가음역까지 창대해진다. 그리고는 항상 내게 후회를 남길 만신창이로 끝나는 다툼인데도, 양보를 모르는 내 아집과 편협하고 못된 성질머리는 화근이 되어 급기야 폭파 직전의 다이너마이트로 변한다.
나는 무작정 대문을 박차고 나온다. 얼마쯤 걷다가 이 열기를 식힐 좋은 장소는 어디일까 생각해본다. ‘커피숍이 좋겠지.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마시고 나면 열기가 가시리라.’ 그러나 성질로 망가진 내 추한 꼴을 누군가에게 내 뵐 수도 없는 일, 결국 내 발걸음은 인적이 드문 산으로 향한다. 산길을 오르며 더위에 늘어 처진 풀들이 내 옷자락 스치는 소리라도 붙들려는 듯 서로 동병상련하며 정상에 다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새들의 애정행각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불현 듯 떠오른 한문 한 구절이 있다.
吾喪我 ! ‘ 내가 나를 장사 지낸다’ 내가 나를 잃어버린다‘
잘못된 허상의 나를 버리고 본래의 진정한 나로 돌아간다’는 장자의 제물론 편에 있는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옳다고 살고 있는 허상인 나를 죽이고 참된 나로 돌아가자는 본래의 나를 찾으라는 얘기이다.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다.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에덴동산에서 죄 짖기 전의 아담처럼 그렇게 죄 없이 살아가라한다. 허나 이미 죄를 안고 태어나 어찌 보면 사는 일이 잘못을 더하고 있는 매일의 일이고 보면 세상 일이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울 수야 있겠는가. 살아오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허상에 둘러 쌓여있는 변질된 나를 버리고, 단 번에 선한 무아(無我)의 내가 된다는 일이 어찌 호락호락한 일이겠는가 말이다. 我執, 我欲, 我利, 我慢에 눌려 사는 우리이다. 이것을 버리면 저것이 남고, 저것을 버리면 또 새로운 이것이 생기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아무튼 그 글의 참 의미야 어떻든 내가 잘못된 나를 버리려는 노력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一日三省이며 日日新, 又日新(날마다 새로워지고, 다시 새로워진다)는 말도 떠오른다. 그리고 감긴 태엽이 풀려나듯 떠오른 또 하나의 성경구절이 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고린도 전서 15장 31절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31절 전체를 요약해보면 ‘형제 여러분, 내가 우리주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께 자랑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의 의미이다. 사도 바울은 제자들에게 단언하고 있다. 죽는 일이 자랑거리라고, 그가 죽는 일이 자랑스러운 것은 왜일까. 그것은 늘 회개와 자기 성찰로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는 어엿한 자기 모습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죽는 일, 그리고 날마다 죽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나를 죽이는 일이 바로 사는 일이며, 더욱 더 승화되고 향상된 삶으로 사는 일이 될 것이니 말이다.
孔子行年 六十而 六十化라는 말도 있다. 장자 잡편에 나온 글이란다. 공자는 60의 나이를 살아오면서 60번 바뀌었다는 얘기인데, 이 말은 공자가 60 번 가운데 59 번은 잘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60년을 살면서 시기와 환경이나 여건에 맞추어 매 번 자기를 죽여 새롭고 더 나은 자기로 변해왔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 오늘부터 나는 죽어야 한다. 8760일을 날마다 열심히 나를 죽여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미물에 지나지 않는 산새에게 일격을 당한 나는 이제 더위를 까마득 잊어버렸다. 그리고 어디서 오는지 알 수도 없는 시원한 바람에 머리마저 청량해진다.
자. 죽으러 가자!
첫댓글 참 좋은 글입니다.자기를 버리면 모든 사물이 바로보이지요.남과 자기를 비교하기 때문에 남의 칭찬에 인색하고 이기려하는 마음이 생겨 잘투와 시기심이 생기는 것같아요.자존심을 버리면 자유스러워지는 원리같아요.
섬기는 마음은 섬김을 받는 마음보다 더 높은 것같아요이런 마음갖고 살면 모든 것이 평화스럽고 다툼과 시기심에서 해방이 되지요.코린도 전서 안에 어릴 때는 어린애의 마음으로 세상의 진리에.익숙치 못했지만 나이가 들어 깨달음이 생기면 달라지지요.나를 낮추고 나를 버리면 적이 없어지는 것같아요.나를 죽이면 최고선의 경지가 되겠지요
마음안에 예수님과 부처님을 모시고 살면 아주 좋은 것같아요. 하옥님이 이런 좋은 글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나를 낮추는 겸손 그것이 바로 오상아가 되겠지요 .아주 좋은 글입니다
하옥님 건강하세요
참으로 오랜만에 좋은 글 보았습니다.
좋아요,
원고와 씨름하다가 좀이 쑤시면
뭐 읽을 거리 없나 하고 찾기 마련인데,
와우! 느긋하게 이 글을 읽고는 새삼 죽습니다.
잠시 뒤에 부활하려고!
두 분의 댓글이 작품입니다
한 말씀도 그냥 스치듯 지날 칠 수 없는
귀한 글입니다
두 분은 문인으로서
부끄럼 없는 귀한 분이십니다
두 분 글을 읽으면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