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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방송인: 전쟁이 일어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죠. 종교 영토 돈 그리고 무기와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전쟁이 그렇습니다. 1592년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조선을 공격해 옵니다. 인진왜란이 발발한 겁니다. 전쟁의 비극을 이끈 것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작고 쎈 무기 조총이었습니다. 적이 쏘는 조총 앞에 조선군은 추풍낙엽 처럼 쓰러질 수 밖에 없었죠.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이런 신무기를 들여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를 열면서 아시아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바닷길을 통해 조총을 비롯한 여러가지 신문물이 유입이 된 것이죠.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웃나라 스페인은 너무 배가 아팠죠. 그래서 인도로 떠납니다. 콜럼버스가 먼저 아메리카에 깃발을 꽂고 이어서 마젤란이 유럽 최초로 태평양을 건너게 됩니다. (스페인 세비야-남아메리카 남단-태평양 횡단- 필리핀). 괌 찍고 필리핀에 깃발을 꽂게 되는 돼요 (필리핀에 마젤란 기념비). 필리핀에 깃발을 꽂은 스페인, 이는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37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대항해 시대,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시아로 향합니다.
이시원/배우: 내 운명 한번 바닷길에 걸어 보겠어. 근데 완전 격동의 시대예요. 저는 이렇게 대항해 시대와 임진왜란이 관련이 되는지 몰랐어요. 어떻게 보면은 조총으로 엮인 악연이네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진짜 재밋는 장면이 나오는 거예요. 오늘 대항해 시대와 도대체 임진왜란과는 무슨 관계인지는 잠시 후에 공개합니다.
최원정: 그래서 드디어 마젤란 얘기가 나오네요.
김대륜/대구경북 과학기술원 기초학부 교수: 마젤란의 탐험하면은 지구가 둥굴다 라는 것을 증명한 것으로 중요하죠. 스페인에서 출발을 해서 스페인까지 돌아오는 이 여정이 어떻게 보면 세계사에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스페인 세비야-남아메리카 남단-태평양 횡단-필리핀-인도양 횡단-아프리카 남단 통과-스페인). 세계일주를 했다라는 데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김동환/대안금융경제연구소 소장: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갔던 그 항로를 개척한 건 포르투갈입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로개척). 저기 인도에서 향신료를 무역해서 엄청나게 큰 돈을 벌고 있었는데 사실 스페인의 무역항로는 아메리카 쪽으로 항해했지만 큰 수입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보면서 굉장히 배가 아팠죠.
최원정: 신항로 개척만 하면 뭐해요, 돈이 돼야지~
최태성: 누가 주식을 같이 했는데 같이 돈을 투자했는데 한 사람은 빨간 불 한 사람은 파란 불, (김동환씨에게) 어떤게 이득이에요?
김동환: 한국은 빨간불, 미국은 파란불~ (깨알정보-나라마다 주식 차트 색깔이 다름, 한국에서 빨강은 상승, 파랑은 하락, 미국은 반대!!).
최태성: 친구는 색깔이 다르다고 너무 속상해 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마 이런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우리도 향신료를 찾아 떠나야 할 것 아녜요. 그런데 스페인을 떠나서 서쪽 서쪽으로 항해해서 향신료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 말주쿠 제도까지 가는데 포르투갈과 정반대의 노선으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스페인 세비야-남아메리카 남단-태평양 통과-필리핀-인도네시아 말주쿠 제도로).
김대륜: 남아메리카 대륙의 끝자락에 좁은 해협이 하나 보이거든요. 마젤란 일행이 이 해협을 지나가는데 무려 38일이 걸립니다. 그래서 이 해협을 마젤란 해협이라고 부르죠 (마젤란 해협-남아메리카 남단의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해협). 이 해협을 어떻게든지 돌아나가게 되면 이제까지 유럽 사람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뱃길을 만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태평양이죠 (마젤란 해협을 지나 유럽인의 눈 앞에 펼쳐진 태평양).
이시원: 재밋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태평양, 퍼시픽 오선 이게 마젤란이 붙인 이름이잖아요. 전엔 바다가 혹독했다가 태평양을 보는 순간 너무 바다가 평화로웠데요. 그래서 Mare Pacificum 마레 파시피쿰(평화로운 바다) 이라고 했는데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인데 그것 때문에 퍼시픽 오션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최원정: Pacific 의 peace~
김대륜: 네, 맞습니다.
허준: 그림으로만 보면 약간 느낌이 포르투갈은 여기(왼쪽뽈) 밥풀이 있으면 오른손으로 바로 입으로 가져다 먹는 느낌인데 스페인은 왼손이 머리 뒤쪽으로 가서 밥풀을 떼어다 입으로 넣는 고생을 하는 항해를 해요.
김대륜: 태평양을 가로질러서 서쪽 서쪽으로 가죠. 그렇게 가서 결국에 1521년 고생 끝에 필리핀에 도착합니다.
이시원: 그 필리핀 세부에 갔었을 때에 필리핀 하면 꼭 가야 하는 여행필수코스가 있었거든요 (마젤란 십자가-1521년 필리핀 세부의 추장의 세례를 기념해 마젤란이 세운 십자가). Magellan’s Cross-This Cross of Tindalo Wood En cases the Original Cross Planted By Ferdinand Magellan on This Very site April 21 1521. 어떻게 보면 마젤란은 필리핀에도 남미 극단에도 태평양에도 이름을 남겼네요.
김대륜: 더 중요한 의미는 필리핀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라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준: 필리핀 발견이 제가 아까 소개 해드리기는 했습니다만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필리핀에는 후추가 많은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은데~ 왜 그러지요?
이시원: 혹시 필리핀의 맛있는 과일을 처음 접해봐서~
허준: 바나나, 파인애플?
최원정: 두리안?
김대륜: 필리핀의 마닐라는 당시에도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시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여기에는 중국과 인도 상인들이 건너왔고 동남아 현지 상인들이 모여서 국제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이 여기에 갔다라는 것은 여기서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인 중국 문명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라는 것이죠.
최원정: 필리핀이 유라시아 무역의 전초기지가 되는 거잖아요.
최태성: 그렇죠
최원정: 그렇다면 스페인과 중국은 무엇을 사고 팔았을까요? 이광용 아나운서~
----------이광용 아나운서 등장: 이것은 구짜, 요것은 얼마니, 요것은 팔에감어, 그리고 요것은 노비통, 요것은 바로사채, 제가 누구냐? 바로 바로 반짝 반짝 빛나는 럭셔리광입니다----------
일동: 박수
이광용: 우리 현빈씨도 열광했던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 한땀 공들여 만든 명품, 우리는 지금 우리는 유럽의 명품에 열광하고 있죠. 지금 눈이 반짝 반짝 빛나는데?
최태성: 맞습니다.
최원정: 탐나
이시원: 하나 들고 가도 돼요?
이광용: 그런데 대항해 시대, 16~17세기에는 정반대였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유럽의 귀족가문에서는 아시아의 이것들에 열광했습니다. (비단) 이 보드라운 감촉에 ~ 비단, 청와~ 정말 맑은 도자기~ 그리고 향긋한 차~음식에 풍미를 더욱 살려주는 향신료까지~ 바로 유럽 귀족들의 콧대를 더욱 더욱~ 높여줄 사치품들이었죠.
이시원: 요즘하고 반대네요. 요즘은 유럽 명품 사려고 오프런 하는데~
허준: 옛날에는 저런게 없었잖아요. 가방 같은거 여행제품인데 그걸 뭘 하러 바꿔요?
이광용: 그게 바로 문제였습니다. 유럽이 자랑하는 상품이 마땅치가 않았어요. 유럽이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게 모직물이었는데 중국이 그걸 어디에다 써요. 더 좋은 비단이 있는데~그 쓰잘데 없는 거~ 중국은 유럽의 모직물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럽은 중국과 무역을 하면 할수록 계속 적자만 보는 상황이었던 거죠.
최원정: 뉴스 보면 무역수지 적자 이런 게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건가요?
김동환: 무역적자라는 게 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거니까 그러면 돈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게 돼죠. 당시에도 유럽이 아시아에 대해서 많은 만성 무역수지 적자였던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국내에 대한 소비가 위축이 돼잖아요. 소비가 위축이 되면 경제가 굉장히 쇠약해지는 단초가 돼죠.
이광용: 당시 유럽은 중국의 사치품을 정말 살고 싶은데 값을 제대로 치를 물건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스페인이 어마어마한 걸 발견합니다. 드디어 중국에 자랑스럽게 가져다 줄 물건이 생겼는데요. 그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해설: 1545년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의 포토시에서 은광이 발견된다. 안데스 산맥에 자리한 광산은 은광석을 가득 품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이후 식민지에서 큰 부를 창출하지 못하던 스페인은 원주민을 동원해 대대적인 은광개발에 착수한다. 포토시 은광은 1581년부터 1600년까지 매년 평균 254톤의 은을 생산해 낸다. 특히 1572년 수은아말감법 도입은 은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는데 기여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온 은은 바닷길을 타고 대륙을 이동하며 세계무역의 판도를 뒤흔든다.
최원정: 드디어 유럽이 아메리카에서 은을 발견하는군요.
최태성: 정확히 말씀을 드리면 유럽이 발견한 게 아니라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발견한 건데 이게 참 우연에 의해서 시작이 돼요. 한 목동이 라마 떼를 끌고 올라간 거예요.
허준: 화 나면 침 뱉는 동물요?
최태성: 올라가니까 추웠나봐요. 그래서 불을 피운 거죠. 불을 피웠는데 불 빛 주위에 뭔가 반짝 반짝한 게 있는 거예요. 예쁘잖아요. 이게 뭐지하고 집어갖고 내려 왔는데 그게 바로 은광석인 거예요. 여기에 엄청난 은광지대가 있었던 거예요. 이걸 스페인이 알면서 대규모 광산개발에 들어간 겁니다.
최원정: 대규모 였어요?
최태성: 그렇죠
김대륜: 원주민들도 처음엔 굉장히 두려웠던 가봐요. 이걸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해서 처음에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 은광이 있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그걸 알아내게 되고 그러면서 은광개발의 역사가 시작이 돼죠. 15세기말부터 18세기말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은이 볼리비아에 있는 포토시라는 데와 멕시코에 있는 은광에서 은이 나오게 됩니다. 16세기에 1만 5천톤, 17세기에 3만톤, 18세기에는 5만톤 정도를 채굴했다고 얘기하죠.
이시원: 아무리 그래도 우리 메달 순서는 금 은 동이죠. 도끼도 금도끼 은도끼 동도끼~
최원정: 동도끼도 있어요?
이시원: 금도끼 은도끼 철도끼 이런데~ 이렇게 우리가 순서를 알잖아요. 그럼 금 한 돈=약30만원 하는데~ 은 한 돈=약4천원 밖에 안 하거든요. 무역의 판도를 바꾸었다고 하려면 금광 정도는 발견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김대륜: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에 은을 많이 필요로 했던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명나라로 은이 한번 들어가면 은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고 해가지고 명나라를 은의 무덤이라고 불렀죠.
허준: 독살 같은거 많이 하니까 독 탔나 안탔나 확인하느라고 그랬나?
최원정: 전 세계 은의 3분의 2가 중국으로 들어갔다고 그러더라구요.
허준: 은을 먹나요?
김대환: 은단?
최태성: 당시 명나라 상황을 보면은 은이 굉장히 많이 필요한 시기였어요. 이유는 뭐냐면 한 마디로 얘기하면 북로남왜 이게 뭐냐면 북쪽에는 로(虜) 오랑캐 몽골이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오는 거예요. 남쪽에는 왜구(倭寇) 들이 많이 밀고 들어 오니까 북남(北南) 위 아래로 방어를 위해서 돈이 엄청 많이 필요했던 거예요. 명 나라 때 완성되었던 만리장성에 은이 엄청나게 들어갑니다. 여기에 필요했던 게 바로 은이었습니다.
최원정: 신대륙의 은이 아니었다면 만리장성이 완공되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도~
김동환: 사실 명 나라는 그 어느 문명권 보다도 지폐, 종이로 돼있는 화폐를 굉장히 많이 발행했어요. 말씀 하신 것처럼 북로남왜의 침략을 받다 보니까 성도 만들어야 되고 그러니까 그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 지폐를 발행한 것이거든요. 지폐를 많이 발행하면 화폐가치가 떨어지겠죠. 우리가 금융위기 때 달러를 많이 발행하니까 금 가격이 많이 오른 거나 똑 같은 건데~ 그때도 상대적으로 은의 가치가 많이 올랐던거구요. 1560년대 되면 명나라 조정에서 1조편법이라는 것을 제정해서 (일조편법(一條鞭法)-명나라 후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각종 세금을 은으로 내게 한 제도) 시행을 하거든요. 이게 뭐냐하면 모든 국민들이 세금을 낼 때 은으로 납부를 하겠끔 했거든요. 그래서 이게 명 경제가 본격적으로 은본위 경제 시스템으로 가게 되는 계기가 돼죠.
최원정: 지난 시간에 소장님께서 뱅크의 어원이 벤치에서~ 은행이 이 시기에 명 나라에서 나온 말이래요. 은(銀)을 취급하는 상인조합(行)이죠.
이시원: 만약에 그 당시에 금으로 세금을 걷었다면 금행이 됐을 수도 있네요.
김동환: 네
김대륜: 유럽과 중국의 교환비율을 비교해 보면 왜 중국으로 은이 몰려들어가는 지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 16세기 유럽은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12 정도 되거든요. 중국은 이게 1:6입니다. 그러니까 은을 여섯개만 주면 금 한 개를 얻을 수 있는 거죠.
이시원: 그러면 은을 갖고 가야죠.
최태성: 이런 걸 뭐냐 그러는데, 환차익이라고 하던데~
최원정: 환치기
일동: 웃음 (환치기는 불법외환거래수법!)
김동환: 경제용어로 차액거래라고 하죠 (차액거래-저렴한 곳에서 사고, 비싼 곳에서 팔아 이익을 얻는 거래).
이시원: 환차익~
허준: 이건 환차익이라기 보다는 그냥 무역!
최원정: 만약에 타임 머신이 있다면 우리 그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S전자 주식을 사러가겠다. 이때가 16세기로 가는데 더 남는 장사인데~
김동환: 그러니까 대항해 시대에 이런 국제질서 하에서 금과 은의 가격차이를 이용했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죠. 중국에 가서 향신료다 도자기 비단을 살려면 뭘 갖고 가야 되겠습니까? 금을 갖고 가야 되겠습니까 은을 갖고 가야 되겠습니까?
일동: 은을 갖고 가야죠!
김동환: 은을 갖고 가는게 결정적으로 유리하죠
김대륜: 멕시코(아카폴코)에서 은을 싣고 마닐라로 갑니다. 마닐라의 은은 중국으로 가죠. 중국에서 비단이나 도자기 같은 값진 물건을 사죠. 이렇게 구입한 사치품은 스페인 세비야 항구로 들어가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죠. 이렇게 완결된 남아메리카, 아시아 그리고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거죠.
이시원: 어떻게 보면 세계무역의 판도가 확 바꿔버렸네요.
최원정: 그런데 중국으로 들어온 은이 조선에 비극을 몰고 옵니다.
해설: 1591년 일본의 도요토시 히데요시가 조선에 국서를 보내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신사를 보낸다는 얘기도 없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제대로 된 답서를 받아 왔겠지 아니면~
해설: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하니 앞장서 길을 안내하라는 내용이었다.
선조: 풍신수길(도요토시 히데요시), 이 자가 오만방자 하다 못해 이제 과인을 조롱한단 말인가
해설: 조선은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1년 후인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다. 임진왜란의 발발이었다.
이시원: 조총만 임진왜란과 관계가 있는게 아니라 은도 임진왜란과 관계가 있다구요?
김대륜: 명나라에서 은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이 은광을 발견하기 전부터 였거든요. 그러면 은이 어디선가에서 와야 은이 유통될 수 있겠죠. 그 은이 주로 오던 곳이 어디냐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당시에 거의 세계 최대 은생산국이었거든요. 그래서 일본의 은이 명 나라로 들어가는데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원래 명 나라는 외국과의 무역을 엄격하게 금지했던 나라입니다. 조공을 통해서 물건을 받고 거기에 대해서 하사품을 내리는 형식의 무역이 아니면 무역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민간인들도 무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빈 틈을 치고 왜구라는 집단이 들어와서 밀무역을 굉장히 활발하게 합니다.
최태성: 일반적으로 우리가 왜구하면 일본인들만 구성된 집단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런 건 아니구요. 왜구라는 집단 속에는 일본인 중국인 심지어는 조선인도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해적집단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8년에 바로 이 왜구 단속령을 내리죠. 그리고 명 나라한테 우리 공무역 하자고 제시를 해요.
허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봤을 때 명 나라와 무역이 짭짤한 장사인데 이걸 왜구들이 장악을 하고 있으니까 국가 대 국가로 가자~
최태성: 지금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명나라는 기본적으로 조공무역체제거든요. 그러니까 명나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거부를 하는 거에요. 이러니까 이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열 받는 거지요. 어~ 나의 제안을 거부해~ 그러면서 그 유명한 征明嚮導(명 나라를 정벌하려하니 길을 안내하라) 라고 하는 국서를 보내게 되는 거죠.
허준: 길이 없어~ 남쪽으로 배타고 직접 가면 되지~왜 우리나라 삥 돌아가려고 그래?
최원정: 그래서 임진왜란을 국제전쟁이라고 하는 거죠.
최태성: 그게 참 재밋는 포인트예요. 우리가 지금 대항해 시대를 배우면서 마젤란의 항로를 배우고 있는 과정에서 일본이 연결되었고 그것이 조선으로 연결되었고 그것이 임진왜란으로~ 우리가 늘 임진왜란만 배우잖아요. 그게 아니고 전 세계적인 무역구조 속에서 임진왜란이 지금 나오고 있는 거지요.
최원정: 그러니까요.
이시원: 지금 이렇게 무역의 판도를 보면서 이 노래가 막 떠올라요 ~은 때문이야 ~은 때문이야~
김대륜: 남아메리카 혹은 멕시코에서 생산된 은이 흘러가는 통로는 하나는 아시아를 향해서 마닐라를 거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채널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유럽으로 직접 넘어가는 겁니다. 이렇게 은이 많이 유입이 된다는 얘기는 유럽의 풍부한 자금이 생긴다는 것이고 그 자금은 유럽의 세력판도를 바꾸는데 활용이 돼죠. 왜냐면 16세기의 유럽은 굉장히 치열하게 서로 권력투쟁을 하던 시기거든요. 가장 많은 곳에서 많은 전쟁을 치렀던 나라가 바로 스페인 제국이고 스페인 제국과 전쟁을 치렀던 나라가 프랑스나 오스만 제국이고, 나중에는 영국과 다툼을 벌이게 돼죠.
이시원: 그런데 전쟁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전쟁할려면 일단 돈 그리고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최태성: 뭐니 뭐니 해도 Money 가 있어야 그런 걸 할 수 있겠죠
허준: 은이 그렇게 많이 몰려 들어갔다는 거는 돈이 풍부하다는 거고 또 하나는 무역을 많이 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니까 사람을 너 돈 줄 테니까 우리 군대 들어와 모병할 수 있는 능력도 뛰어날 테고~ 이러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되기가 너무 좋았겠는데요.
김동환: 근데 이 돈을 어떻게 국가가 조달했는가 이게 문제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두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세금 걷는 것 하고요 두번째는 해외에서 빌려오는 건데~ 그래서 당시에 정부들이 은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리게 되는데~ 이게 신용도에 따라서 40%까지 이자를 내기도 하고~
일동: 40% 이자요?
최원정: 고리사채네~
김대륜: 이게 스페인 제국이 전쟁을 하면서 푸거가문 은행가에게 돈을 빌릴 때 40% 이자를 약속을 한거예요. 그래서 스페인은 참 아이러니 하게도 은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오는 나라였는데도 실제로 스페인이 16세기 중반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불정지를 선언합니다. 지불정지를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는 돈이 없으니까(디폴트) 너희한테 이제 한 푼도 줄 수 없다(모라토리움). 이렇게 되는 거죠.
김동환: BGR이라고 하죠. 배째라.
최원정: BGR이 뭔가 했네!
김대륜: 스페인의 모라토리움이 푸거가문이 몰락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해요. 그런데 이런 것 처럼 대략 넓게 보면 1815년까지, 1815년은 어떤 해냐 하면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는 시기입니다. 이때까지 유럽에 흔히 말하는 열강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모두 골몰했던 문제는 어떻게 돈을 싼 이자로 빌릴 것이냐가 문제였습니다.
이시원: 이자율이 진짜 40% 까지 갔다고 하는데 만약에 전쟁에 지면 나라가 파산하는 거잖아요.
최원정: 지면 큰일이네~
김대륜: 성공을 하면 나라의 지위가 올라갈 수 있는 것이고 패배하게 되면 나라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거죠. 이를 테면 스페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스페인 제국실패) 여기서 제일 먼저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스페인에 맞서서 독립을 쟁취했던 네델란드 사람들입니다.
김동환: 우리가 어떤 나라가 우수하고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냐 판정할 때 여러가지 기준이 있잖아요. 국력이라든지 군사력도 될 수 있고 그런데 신용등급이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척도가 돼죠. 예를 들면 스페인은 이자율 40%에 빌리면 네델란드는 10% 이자율로 빌린다. 그러면 네델란드가 궁극적으로 굉장히 건전하고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죠.
김대륜: 영국 같은 나라는 18세기 초가 되면 이자율이 3.5%까지 떨어집니다. 3.5%의 이자만 치르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돈을 빌릴 수 있는 나라가 쓸 수 있는 인력의 규모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는 굉장히 다르겠죠. 그러니까 유럽의 국가들이 그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유럽은 많은 여러나라로 쪼개져 있었고 끊임없이 전쟁을 했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단련이 될 수 밖에 없다 라는 것이죠. 전쟁을 하는 밑거름이 뭐냐 하면 돈이고 돈이 바로 은이었던 거죠.
이시원: 결론적으로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은광을 발견한 게 나비효과가 되어서 유럽에 파워게임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는 거네요.
최원정: 은을 잡음으로서 유라시아의 권력구조를 확 바꾼건데~이번에 달콤한 맛이 세계를 유혹합니다. 뭘까요?
------이광용: 게임에 참여하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다음 라운드는 달고나 뽑기입니다--------
최태성: 진짜네 냄새 봐~
-----------스튜디오에 가득한 달달한 냄새, 과연 뽑기의 운명은? 저는 비록 달고나를 망쳤지만 여러분께는 달고나가 가 있을 겁니다. 달고나가 깨지지 않게 뽑아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바로 도전해 보시죠?-------------------
이광용: 허준 탈락~
최원정: 아~ 나~ 우선 됐어~ 저 여기서 유일한 생존자에요 하면 뭐 줘요?
이광용: 지금부터 제가 유용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 잡은 달고나~ 보신 것처럼 설탕과 베이킹 소다로 만들어집니다. 핵심 재료는 뭐다?
허준: 설탕~
이광용: 설탕이죠. 대항해 시대 전세계가 이 설탕에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이런 취미 가지고 계시죠? 홍차에 각설탕, 달콤 쌉싸름한 조합~
최원정: 보통 두 개 넣는데~
이광용: 스멜~ 중국에서 건너온 향긋한 차에 각설탕 하나 그리고 향을 음미하면서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 유럽인들이 이 맛에 당시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최원정: 향긋한 홍차 맛~
허준: 이 맛에 나중에 히틀러가 벙커에 숨어서도 차를 즐기고~
이광용: 17세기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1668년 이었습니다. 교황 클레멘트 8세가 스웨덴 여왕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서 연회장을 설탕으로 만든 조각상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회 마지막 날 그 조각상을 다 깨서 참석자들과 나누어서 즐겼다고 합니다.
이시원: 그래서 그 당시에 귀족들이 설탕을 하도 많이 먹어서 이가 새까맣게 상했었데요.
이광용: 당시 유럽인들의 입맛을 녹였던 그 설탕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캐나다의 단풍나무 아프리카의 야자나무 포도 등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설탕은 주로 사탕수수에서 추출합니다.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사탕수수는 지중해 일부 지역으로 전해졌고 유럽인들은 지중해의 사탕수수를 다시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 등으로 이식했습니다.
이시원: 거의 지구 한 바퀴를 돌았네요.
이광용: 문제는 유럽인들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탕수수 재배에 엄청난 노동력을 갈아넣어야 했다는 거죠. 이른바 플랜테이션 농장이 등장한 겁니다. 유럽인의 설탕시장, 설탕에 푹빠진 유럽인들 때문에 세계사는 또 한번 요동치게 됩니다.
김동환: 유럽에 엄청난 거대자본과 신대륙의 값싼 노동력이 결합을 해서 티브이에 보면 엄청나게 큰 농장이 있잖아요. 그걸 우리가 플랜테이션이라고 하죠.
최태성: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나라들이 남아메리카에다 무역기지를 만들어놓는다는 말에요. 여기 보니까 땅도 엄청 넓고 햇빛 쨍쨍 내리쬐고 이거는 사탕수수가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인 거예요. 그런데 부족한 게 하나 있었어요.
이시원: 사람?
최태성: 사람이 부족했던 거예요.
김대륜: 왜 사람이 없는가 하면 처음에 원주민을 노동력으로 좋겠다 당연히 생각했죠 원주민이 보이니까 그런데 원주민이 천연두 질병에 속절없이 쓰러져 나가고 약탈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남아 있는 원주민들은 노예가 되는 일에 저항을 하니까 일을 시키기가 녹녹하지가 않은 거죠. 답을 주는 것이 바로 아프리카 노예였습니다. 이들은 원주민들처럼 저항력이 부족한 일도 없고 농업기술도 뛰어나고 목축 경험도 있고 유순하게 보이고 노동력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라고 생각을 해서 대규모로 수입을 시작하게 되죠.
허준: 어떻게 보면 본인들의 입맛에 딱 맞는 준비된 사람들이다.
이시원: 준비된 인재가 아니라 준비된 인력~
최원정: 사실 준비된 인력이라면 정당한 돈을 주고 데려와야 되는 거 아네요?
최태성; 그렇죠
김동환: 지도를 한번 볼까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남아메리카 등지 사탕수수 목화 커피 경작지 즉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데려가죠 (노예: 아프리카-아메리카). 이제 여기서 생산한 사탕수수 목화 커피 같은 작물을 다시 유럽으로 가져가게 되는 겁니다(아메리카-유럽). 본격적인 삼각무역이 발생하게 되는 거죠(총/면직물/럼주: 유럽-아프리카).
허준: 들를 때마다 돈이 들어오네~
이시원: 아까는 은의 삼각무역 지대가 생겼잖아요. 이번에도 어떻게 보면 설탕의 삼각무역 지대가 생겼는데 여기서 다른 것은 아까는 다 물건이었는데 여기에서는 갑자기 사람 노예가 끼었어요.
허준: 마음에 안 좋은게 설탕 담배 딱 써있잖아요. 근데 흔히 알기로는 쿠바의 설탕이 엄청 유명하잖아요. 당연히 우리가 특산물로 생각하는데~ 유럽인들이 갔다가 심어서 노예를 이용한 장소였다는 게 잘못 알고 있었구나.
최원정: 이때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노예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거예요?
허준: 예전에 미드 많이 봤었거든요. 거기 보면 뿌리 라는 미드가 있었어요 (뿌리-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왔지만 고통 속에서도 생존했던 흑인노예들의 이야기).
최원정: 허준씨, 그걸 봤어요?
허준: 저는 미드 굉장히 좋아했어요.
김동환: 거기 주인공이 쿤타 킨테~ 뿌리를 찾아가는 건데 정말 감동적이었죠.
최태성: 영화로도 본 거 같은데~
최원정: 영화도 있었나?
이시원: 근데 그 영화 얘기가 왜 나와요?
허준: 왜냐면 노예를 마치 고기 잡듯이 그물을 확 던져서 잡아가지고 사람들을 끌고 가고 그런 포획장면에 충격적인 장면들이 나와서~
이시원: 노예화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인 거예요?
최원정: 그물로 사람을 잡고~
김대륜: 노예화 되는 과정은 어느 정도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한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일 중의 하나가 말씀하신대로 백인이 서아프리카로 가서 이를 테면 그물 같은 것을 가지고 들어가서 흑인을 포획해 오는 것 같은 그런 생각들을 하시는데 이건 사실하고는 다릅니다.
최원정: 아~ 그래요.
김대륜: 아프리카 문명도 고도로 발전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정치체계 라는 게 있었고 물론 부족간에 다툼이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게다가 노예무역이라는 것이 아프리카에서는 오랫동안 진행되어오고 있던 습속이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까지 유럽 사람들은 풍토병 때문에 특히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 때문에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뭘 하느냐 하면 서아프리카의 해안 몇몇 중요한 지점에 상관이나 요새 같은 것을 짓기 시작하죠. 그걸 팩토리 라고 부르는데 그걸 지어놓고 아프리카 노예상들과 거래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포획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매매의 개념이 맞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거죠.
이시원: 백인이 직접 포획한 건 아니지만 일단 아프리카 내에서 노예상들이 포획도 하고 매매도 해서 데리고 간거니까 어떻게 보면 백인들은 아무 것도 안하고 손 안대고 코 푼 격이네요.
최태성: 노예제도 라고 하는 것이 아프리카 내부에서 이미 있었어요. 왜냐하면 전쟁에서 졌다거나 빚을 졌다거나 그러면 노예가 되는 것이죠. 사실 노예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노비가 있었잖아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말하는 도구로 인식되어지는 제도적인 것이 있었다는 것이죠.
최원정: 노비나 노예란 제도는 어느 나라나 있었는데 대륙간 무역의 대상이 되었다는 게 이게 시초인 거죠.
김대륜: 그러니까 일단은 대항해 시대에 이르게 되면은 훨씬 더 무자비하게 노예들을 다루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 대규모의 폭력이 개입하기 시작하고 대규모의 자본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한 인종 전체를 어떻게 보면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게 되고 그들을 노예화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최원정: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라고 불리는 노예무역의 실체를 지금부터 이광용 아나운서가 밝혀 드립니다.
---------------이광용: 흑인노예들이 아프리카 해안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험난했습니다.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6개월이 걸리는 기나긴 항해였죠 (영국의 노예무역 선박 브룩스 호의 내부 도면). 지금 보고 계시는 이 그림은 18세기에 건조된 영국의 노예선, 브룩스 호의 내부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최태성: 저게 유명한 샅바죠.
이광용: (로드 브라운(Rod Brown)의 <Sheol(지옥)>, 1996년) 그리고 이 그림은 브룩스호의 내부모습으로 많이 인용되는 그림인데요. 하지만 이 그림은 노예무역의 참상을 표현하기 위해 1969년 그려진 그림입니다. 브룩스호의 실제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브룩스호 실제 그 안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역사저널 그날에서 그 참상을 재현해 봤습니다.
일동: 재현? 재현을 했다구~
이광용: 당시 노예선들은 100~300톤의 소형 선박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물건처럼 배 밑바닥에 빼곡히 실려서 갔습니다. 배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왼쪽부터 여자아이-성인여성-남자아이-성인남성 이렇게 자리배치가 이루어졌구요. 어린이와 여성 남성에 따라 할당된 공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이 나무판 전체 크기가 성인 남자가 자리하는 공간입니다. 세로 183cm 가로가 43cm, 여자아이의 경우는 세로 122cm 가로 36cm의 좁은 공간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보시는 것처럼 도주를 막기 위해서 대여섯 명씩 쇠사슬로 묶었구요. 다시 두 명씩 족쇄까지 채웠습니다.
이시원: 끔찍하네요. 무슨 짐짝도 아니고
최태성: 사람을 어떻게 저런 공간에 집어 넣어~
이광용: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들이 자리하는 배 아래 쪽은 산소가 부족해서 촛불이 저절로 꺼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두 번 옥수수 죽을 겨우 먹었구요. 용변도 그냥 그대로 누운 채로 봤다고 합니다. 용변통이 따로 있긴 했는데 거기까지 가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허준: 다리를 묶어 놓았으니까
이시원: 그러니까
이광용: 이질과 티푸스, 홍역, 천연두 등 질병이 확산되는 게 시간문제였고 항해 중 사망률이 무려 14.5%, 최대 33%에 달했다고 합니다. 브룩스 호 3차 항해 항해 80665, 브룩스(1785)
아프리카 출발 1785년 11월 16일
자메이카 도착 1785년 12월 29일
항해일 수 43일
승선 노예 수 740명
도착 노예 수 635명
항해 중 사망 105명
사망률 14%
그런데 이게 심각하다는 걸 노예상들도 인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시원: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광용: 과연 다행일까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보험회사가 이것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노예무역선에서의 손실을 보상해 주는 보험등장). 그러니까 노예무역 과정에서 흑인노예가 사망하거나 실종되면 그 손실을 보상해 주는 상품이 생겨난 거죠.
이시원: 환경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그냥 완전한 상품취급을 했던 거네요.
이광용: 실제로 그 보험이 적용된 끔찍한 사례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781년 영국 리버풀에서 출항한 노예선 종 호, 자메이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예를 잔뜩 싣고 항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항로를 착각해서 자메이카를 지나쳤습니다. 항해가 길어지면 보급품은 물론이고 먹을 물까지 부족해지지 않습니까. 게다가 배에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합니다. 선장과 선원 이를 타개할 방법을 고민합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을 선택했느냐 노예 133명을 산 채로 바다에 던져 버렸어요.
이시원: 말도 안돼. 근데 아까 백인 유럽 사람들이 흑인을 상품 취급했잖아요. 그렇게 바다로 버린다는 건 돈을 잃는다는 건데 왜 그런 짓까지 취했죠?
이광용: 당시 보험계약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노예선에서 노예가 사망하면 선주에게 책임을 물어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데요 노예가 실종될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받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동: 그러면 보험금을 타려고~ 살인을 저지르다니~
이광용: 돈을 향한 탐욕 앞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은 인간 이하의 짐짝 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겁니다.
이시원: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이게 불과 200년도 안된 일이잖아요.
허준: 요즘에 유럽의 무슨 보험회사들이 유서 깊은 보험회사 200년 된 보험회사들이 다 이때 생긴 거예요.
이광용: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도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설: 흑인노예들이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은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연안의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었다. 노예들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최고 4m가 넘는 사탕수수를 베어야 했고 밤에는 사탕수수 압착기로 즙을 짜냈다. 그 후엔 60도에 달하는 솥에 즙을 끓이고 불순물을 제거한 후 설탕결정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루 18시간이 넘는 밤낮 없는 고된 노동과 폭력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최원정: 낮에는 농장에서 밤에는 공장에서 등골 휘는 소리가 정말 들리네요.
허준: 한참 뜨거울 때 나가서 사탕수수를 베고 밤에는 즙을 짜고 끓이고~ 잠도 못 잤겠어요.
김대륜: 노동강도가 올라가는 때는 수확철이에요. 수확철에 사탕수수에서 즙을 짜내고 하는 과정을 다 마쳐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노동강도가 올라가는 거죠.
이시원: 설탕 추출하는 게 굉장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노동강도가 세고 말 그대로 설탕을 얻기 위해서 사람의 노동력을 갈아 넣은 거잖아요.
김동환: 그렇죠, 사실 사탕수수 재배로만 보면 이건 농업이죠. 그걸 우리가 그냥 운반해서 먹었으면 거기서 멈추었을텐데 설탕을 뽑아내기 위해서 사실은 공업이 되는 거거든요. 사실 설탕 제조업이 어떻게 보면 근대적 공장의 시초가 되는 듯한 상황이 벌어진 거죠. 설탕산업이 된 거죠. 그래서 산업혁명의 어떤 전초기지 단계가 설탕 산업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시원: 어떻게 보면 배로 나를 때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는데 플랜테이션 농장에서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네요.
최원정: 그 얘기도 들었어요. 압착기 분쇄기에 팔이 끌려들어가니까 옆에 도끼를 두고 짤라 냈다고도~
김대륜: 도끼를 옆에 두고 노예의 손이 빨려 들어가면 기계를 멈출 수 없으니까 팔을 잘라 버리는 거죠. 팔을 잘라 버리면 노예의 생명도 구하고 그러면 그만큼 재산보장이 되니까 나름대로 공정을 계속 돌아가고 이런 일들 때문에 손도끼를 둔다는 이야기를 하죠.
최원정: 사람이 아니라 아주 기계네요.
이시원: 부속품 같은 거죠.
허준: 기계 중에서도 메인 기계가 있고 소모품이 있잖아요. 사람은 그냥 소모품이에요.
김대륜: 사탕수수가 주로 재배되죠. 서인도제도나 브라질 같은 경우에는 노동강도가 워낙에 높고 굉장히 열악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노예가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낳거나 하는 재생산이 불가능해요. 노예의 수명도 굉장히 짧아요. 짧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공급 받을 수 밖에 없어요. 끊임없이 노예를 공급해 주어야 하는 시스템이죠. 그런데 지금의 미국을 이루는 북아메리카 남부 같은 경우는 담배농사를 짓거나 쌀농사를 짓거나 하는데 여기는 기후가 좀 나아서 노예 가족이 만들어지고 자체적으로 재생산이 돼요.
이시원: 설탕 한 알을 만드는데 이렇게 희생이 필요했다니 아까 부를 많이 쌓았다고 하는데 결국은 다 흑인들의 피와 눈물을 밤낮으로 짜내서 만든 단맛이잖아요.
최원정: 설탕이 결국 산업혁명의 시초가 되었다고 그러는데 이게 정말 그 말씀대로 흑인들을 쥐어짜서 이룬 어떤 인류사네요, 비극이네요.
이시원: 이 얘기를 듣고 나니까 설탕 먹을 때 쓴맛이 날 것 같애.
김대륜: 그래서 18세기 후반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제일 먼저 했던 운동이 설탕을 안먹는 운동이었습니다.
최태성: 영국이 설탕을 얻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노예를 운반해 와요. 17세기 후반 150년 동안 무려 340만 명의 노예를 가지고 와요. 연간 4만 7천 명 정도~이게 어마 어마한 거죠.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많이 들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깜짝 놀래요. 당시 영국의 상위소득 1% 안에 설탕업자, 노예무역상들이 들어갈 정도니까 이걸로 엄청 떼돈을 벌었죠.
김동환: 말씀을 하셨지만 배들이 필요했으니까 조선업 게다가 보험업 설탕산업에 연관된 모든 산업이 다 돈을 많이 벌고 좋았는데 흑인 노예들만 희생을 했던 거죠.
김대륜: 얘기를 조금 돌려가지고 문제를 하나 드릴게요. 교수님의 문제: 맨체스터 리버풀 버밍엄 셰필드의 공통점은?
허준: 맨체스터 리버풀은 워낙 유명해서 알겠는데 셰필드 버밍엄은 잘 모르겠는데요.
김대륜: 축구팀은 있지만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죠. 축구팀 때문에 제가 말씀 드린 건 아니고~ 이 모든 도시들이 18세기에 갑자기 떠오르는 도시들이에요. 리버풀은 아시다시피 노예무역으로 성공한 도시입니다. 리버풀은 대서양과 가장 가까웠던 항구였기 때문에 노예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항구였고 작은 어촌이었던 리버풀이 노예무역 덕분에 큰 지방도시로 성장을 하죠. 버밍엄이나 셰필드나 아니면 맨체스터 같은 도시들은 노예무역 덕분에 수출에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철물 제품들 아니면 총, 아니면 면직물 모직물 그 다음에 렌즈 셰필드 같은 경우는 칼 이런 제품들을 생산하면서 아프리카로 수출을 해가지고 엄청난 이익을 거두었고 공교롭게도 이 도시들이 전부 산업혁명의 모태가 되는 도시들입니다.
최원정: 리버풀하면 축구도 있지만 비틀즈의 고향, 사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유럽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환상이 있잖아요. 그런데 오늘 얘기를 들으니까 유럽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지는 데요? 그 富가 다 어떻게 축적된 거예요.
허준: 혁명이라는 단어는 보통은 칭송하거나 긍정적으로 사용하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카툰이나 만평 같은 걸 보면 앞에서는 막 혁명이라고 좋아하는 사람 뒤에는 석탄을 태우듯이 사람을 태워가지고 만들어내는 富라는 거죠. 너무 끔찍스러워요~
이시원: 산업혁명의 기차가 간다면 마치 석탄 연료를 인간으로 땐 것 같애요.
김동환: 플랜테이션으로 굉장히 큰 富를 만든 사람들이 또 다른 한편으로 굉장히 이중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요. 그러니까 노예를 써서 돈을 벌기 위해 냉혈한 같은 그런 모습이 묘사되는가 하면 그들은 돈을 벌어서 귀족들의 과시형 자선가가 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이시원: 졸부같이 보이기 싫어서요?
최원정: 그렇게 벌었는데~ 이제 세상에 다 드러났구만~
김동환: 어찌보면 새로운 부자가 탄생한 거죠. 플랜테이션이란 체제 하에서 이 사람들이 귀족처럼 보이기 위해서 굉장한 소비를 하기도 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중국에서 갔고 온 도자기를 비롯한 사치품 설탕 이런 것들을 더 많이 소비하는데 혈안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번만큼 더 많이 써서 파산을 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도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시원: 왜 과시는 열등감에서 나온다고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깨끗한 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더 과시적인 행동을 했을 것 같애요.
최원정: 그야말로 대항해의 시대는 인간의 탐욕으로 뒤범벅이 됐던 그런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저는 대항해 시대에 대한 평가도 뒤범벅이 되는 것 같은데~어땠나요, 이시원씨는? 저는 솔직히 아까 흑인 노예선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동물도 그렇게 다루지 않는데 뜰창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게 불과 200년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솔직히 믿기지가 않아요. 우리도 계속 여러가지 산업에 부를 쫓기 위해서 노력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 안에서 우리가 제대로 인권이나 지키고 있나 이런 걸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애요.
최태성: 전 진짜 대항해 시대를 보면서 야~ 이게 돈을 벌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겼구나 후추 은 노예 설탕 그 당시 사람들한테는 정말 욕망의 대상이었구나.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니까 그런 모습들 속에서 돈을 벌다 보니까 돈을 지켜야 되겠고 돈을 투자해야 되겠고 보험 주식 은행이 붙기 시작하면서 우리 자본주의 사회의 출발의 씨앗들이 이때 척척 뿌리고 있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출발선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시작되었는지 아는 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동환: 지금 우리는 노예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정말 그런가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거죠. 제도로서의 노예는 없어졌지만 자본주의의 어떤 피해자로서의 경제적 노예들은 여전히 있는데 저는 2006년 부터 2008년 사이에 뉴욕의 흑인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한 경험을 갖고 있거든요. 제가 흑인지역에 가기 전에 가졌던 흑인에 대한 인상은 위험하고 미래기준도 백인 중심으로 갖고 있었는데 일주일 동안 비즈니스 하는 장소에는 상점 주인을 빼고서는 거의 백인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상점에 백인이 들어왔는데 그렇게 어색하고 아름답지 않았어요. 옆에서 같이 지냈던 흑인들이 외모가 준수하게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흑인 또 인종간의 편견을 가지고 오랫동안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경제적인 거 아직도 세계적으로 보면 흑인들의 나라가 열악한 나라가 되어 있는데 조금씩이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 그들을 대해야 하고 관계를 맺는 미래를 기대해 봅니다.
이시원: 김 소장님, 아름답다의 어원이 뭔지 아세요? 한국말로 알다래요. 알기 때문에 익숙해지고 아름답다래요. 아름답다의 반대 말은 밉다가 아니라 낯설다 래요. 낯선 것에서 알아갈 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거죠. 김 소장님께서 그런 경험을 하신 거 같애요.
허준: 저도 최 아나운서 처음 봤을 때 아름다우셨는데?
최원정: 거기서 그 말이 왜 나와요? 난 님이 낯설다 아직도
김대륜: 노예무역을 이야기 하거나 아니면 노예제를 이야기 하거나 하면 끔찍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죠.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모든 일들이 철저하게 계산된 일들이잖아요. 계산이라는 것은 이성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인데 이성과 합리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결국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공감의 능력이 떨어지게 돼죠. 근데 그 공감의 능력이 발휘될 때 백인들 사이에서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피부색이 다른 인종에게서는 전혀 그런 공감능력이 발휘가 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근대가 일종의 괴물 같은 그 존재가 바로 인종주의 라는 것인데 대항해 시대가 낳은 인종주의의 참혹한 비극을 우리가 대면하게 된다라는 점에서 우리가 인종주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생각합니다.
최원정: 말씀하신대로 야만의 유산들이 여전히 남아있지 않나 둘러보는 계기도 되는 것 같네요. 다음 시간에는 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시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37회 대항해 시대 [제4편] 유럽의 탐욕, 아프리카의 눈물에서 정리).
① 1592년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조선을 공격해 온다. 인진왜란의 발발이다. 전쟁의 비극을 이끈 것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작고 쎈 무기 조총이었다. 적이 쏘는 조총 앞에 조선군은 추풍낙엽 처럼 쓰러졌다. 일본은 어떻게 조총을 가질 수 있었나.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를 열면서 아시아에 눈을 떴다. 바닷길을 통해 조총을 비롯한 여러가지 신문물이 유입되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이웃나라 스페인은 배가 아팠다. 그래서 인도로 떠났다. 콜럼버스가 먼저 아메리카에 깃발을 꽂고 이어서 마젤란이 유럽 최초로 태평양을 건넜다. 마젤란의 필리핀 발견은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대항해 시대와 임진왜란은 관계가 있다. 마젤란은 지구가 둥굴다 라는 것을 증명한 탐험가이다. 마젤란은 스페인에서 출발을 해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세계일주를 했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갔던 그 항로를 개척한 건 포르투갈이다. 포르투갈은 인도에서 향신료 무역으로 큰 돈을 벌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무역항로는 아메리카 쪽으로 항해했지만 큰 수입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마젤란은 스페인을 떠나서 서쪽 서쪽으로 포르투갈과 정반대의 노선으로 갔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끝자락에 좁은 해협이 있다. 마젤란 일행이 이 해협을 지나가는데 38일이 걸렸다. 이 를 마젤란 해협이라고 부른다. 이 해협을 돌아나가게 되면 유럽 사람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뱃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태평양이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가로질러서 결국에 1521년 고생 끝에 필리핀에 도착하였다.
② April 21 1521. 마젤란은 필리핀에도 남미 극단에도 태평양에도 이름을 남겼다. 마젤란의 필리핀 발견은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필리핀에는 후추는 없었지만 필리핀 마닐라는 당시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과 인도 동남아 현지 상인들이 모이는 국제적인 시장이어서 가장 선진적인 중국 문명을 만날 수 있었다. 필리핀이 유라시아 무역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스페인과 중국은 무엇을 사고 팔았을까. 대항해 시대, 16~17세기에 유럽의 귀족가문들은 아시아의 유럽은 중국과 무역을 하면 할수록 계속 적자만 보는 상황이었다. 당시 유럽은 중국의 사치품을 정말 살고 싶은데 값을 제대로 치를 물건이 없었다. 그때 스페인이 1545년 남아메리카 볼리비아의 포토시에서 은광이 발견된다. 안데스 산맥에 자리한 광산은 은광석을 가득 품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이후 식민지에서 큰 부를 창출하지 못하던 스페인은 원주민을 동원해 대대적인 은광개발에 착수한다. 포토시 은광은 1581년부터 1600년까지 매년 평균 254톤의 은을 생산해 낸다. 특히 1572년 수은아말감법 도입은 은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는데 기여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온 은은 바닷길을 타고 대륙을 이동하며 세계무역의 판도를 뒤흔든다.
③ 15세기말부터 18세기말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은이 볼리비아와 멕시코에서 나온다. 16세기에 1만 5천톤, 17세기에 3만톤, 18세기에는 5만톤 정도를 채굴했다. 금 한 돈=약30만원 하고 은 한 돈=약4천원 인데 무역의 판도를 바꾸었다. 중국이 많은 은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은의 3분의 2가 중국으로 들어갔다, 당시 중국(明)은 북로남왜 만리장성을 완공하는데 많은 은이 들어갔다. 신대륙의 은이 아니었다면 만리장성이 완공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1560년대 명나라 조정은 1조편법을 제정해서 모든 국민들이 세금을 은으로 납부토록 했다. 명경제가 은본위 경제 시스템으로 가게 되었다. 銀行은 명 나라에서 나온 말이다. 16세기 유럽은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12 정도인데 중국은 이게 1:6이다. 은을 여섯개만 주면 금 한 개를 얻을 수 있다. 중국과 무역을 하는데 은을 갖고 가야 하는 이유다.
④ 멕시코에서 은을 싣고 마닐라로 간다. 마닐라의 은은 중국으로 가서 비단이나 도자기 같은 값진 물건을 산다. 이렇게 구입한 사치품은 스페인으로 가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이렇게 완결된 남아메리카, 아시아 그리고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세계무역의 판도가 확 바꿔버렸다. 그런데 중국으로 들어온 은이 조선에 비극을 몰고 온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시 히데요시가 조선에 국서를 보내온다. 명나라를 정복하고자 하니 앞장서 길을 안내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은 단호히 거부한다. 1년 후인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다. 임진왜란의 발발이었다. 중국은 스페인이 은광을 발견하기 전부터 은을 일본에서 들여왔다. 일본은 당시 세계 최대 은생산국이었다. 일본의 은이 명 나라로 들어가는데는 조공을 통해서였다. 물건을 받고 거기에 대해서 하사품을 내리는 무역이었다. 민간인들도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이 빈 틈을 왜구집단이 밀무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왜구는 해적집단이다.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로 왜구 단속령을 내린다. 명과 국가대 국가 공무역을 제안한다. 중국이 거절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征明嚮導 국서를 조선에 보낸다. 조선은 당연히 거부한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국제전쟁이라고 부른다. 세계적인 무역구조 속에서 임진왜란이 나오고 있다. 남아메리카 혹은 멕시코에서 생산된 은이 흘러가는 통로는 하나는 필리핀을 거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채널이 있고 다른 하나는 유럽으로 직접 넘어간다. 은이 유럽의 세력판도를 바꾸는데 활용되었다. 16세기의 유럽은 치열하게 서로 권력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스페인 제국은 프랑스, 오스만 제국, 나중에는 영국과 다툼을 벌였다.
⑤ 전쟁할려면 일단 돈이 필요하다. 은이 많다는 거는 돈이 풍부하다는 거다. 국가가 돈을 조달하는 것도 문제다.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세금 걷는 것, 두번째는 해외에서 은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리게 된다. 이게 신용도에 따라서 40%까지 이자를 내기도 한다. 스페인 제국이 전쟁을 하면서 푸거 가문 은행가에게 돈을 빌릴 때 40% 이자를 약속하였다. 스페인은 아이러니 하게 은이 많이 들어오는데 16세기 중반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불정지를 선언한다. 지불정지는 우리는 돈이 없으니까(디폴트) 너희한테 한 푼도 줄 수 없다(모라토리움). 유럽은 대략 1815년까지 전쟁이 끝나는 시기 이때까지 유럽 열강들은 돈을 싼 이자로 빌리는 게 문제였다.
성공을 하면 나라의 지위가 올라갈 수 있는 것이고 패배하게 되면 나라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거다. 스페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제일 먼저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스페인에 맞서서 독립을 쟁취했던 네델란드인들이다. 어떤 나라가 우수하고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냐 판정은 국력이나 군사력도 될 수 있는데 국가 신용등급이 중요한 척도가 됐다. 예를 들면 스페인은 이자율 40%에 돈을 빌리면 네델란드는 10% 이자율로 빌린다. 네델란드가 건전하고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영국 같은 나라는 18세기 초가 되면 이자율이 3.5%까지 떨어진다. 3.5%의 이자만 치르고 규모의 돈을 빌릴 수 있는 나라는 인력과 자원의 규모는 다르다. 유럽 국가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여러나라로 쪼개져 있었고 끊임없이 전쟁을 했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단련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의 밑거름은 돈이고 돈이 바로 은이었다. 결론적으로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은광을 발견한 게 나비효과가 되어서 유럽에 파워게임을 결정했다. 은 다음에 대항해 시대 전세계가 설탕에 열광하고 있었다.
⑥ 당시 유럽인들의 입맛을 녹였던 설탕은 캐나다의 단풍나무 아프리카의 야자나무 포도 등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주로 사탕수수에서 추출한다. 사탕수수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데 지중해 지역으로 전해졌고 유럽인들은 지중해의 사탕수수를 다시 남아메리카와 카리브해로 이식했다. 지구를 돌았다. 문제는 유럽인들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탕수수 재배에 엄청난 노동력을 갈아넣어야 했다. 이른바 플랜테이션 농장이다. 유럽인의 설탕시장, 설탕에 푹빠진 유럽인들 때문에 세계사는 또 한번 요동친다. 유럽에 거대자본과 신대륙의 값싼 노동력이 결합해서 플랜테이션 만들어졌다.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나라들이 남아메리카에다 무역기지를 만들었다. 땅도 넓고 햇빛 쨍쨍 내리쬐고 사탕수수가 자라기에 최적 조건이다. 부족한 게 하나 있었다, 사람이다.
처음에 원주민을 노동력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원주민이 천연두 질병에 속절없이 쓰러져 나가고 약탈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남아 있는 원주민들은 노예가 되는 일에 저항을 하였다. 답은 바로 아프리카 노예였다. 이들은 저항력이 없고 농업기술도 뛰어나고 목축 경험도 있고 유순하게 보이고 노동력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라고 생각을 해서 대규모로 수입을 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남아메리카 사탕수수 목화 커피 경작지 즉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생산한 작물을 다시 유럽으로 가져간다. 본격적인 삼각무역이다. 여기에 갑자기 사람 노예가 끼었다. 쿠바의 설탕이 유명하다. 유럽인들이 사탕수수를 쿠바에 갔다가 심어서 노예를 이용하였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에 의한 노예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⑦ 노예화 되는 과정은 어느 정도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지만 흔히 오해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백인이 서아프리카로 가서 흑인을 포획해 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프리카도 고도로 발전되어 있었고 나름대로 정치체계 라는 게 있었고 부족간에 다툼이 많지만 노예무역이라는 것이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어오고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유럽 사람들은 풍토병 때문에 특히 말라리아 때문에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대신에 서아프리카 해안 몇몇 중요한 지점에 상관이나 요새를 지었다. 그걸 팩토리 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아프리카 노예상들과 거래를 하였다. 기본적으로 매매의 개념이다. 아프리카 내부에서도 전쟁에 졌다거나 빚을 졌다거나 그러면 노예가 된다. 조선시대에도 노비가 있었다. 노비나 노예란 제도는 어느 나라나 있었는데 대륙간 무역의 대상이 되었다는 게 이게 시초였다.
일단은 대항해 시대에 이르게 되면은 무자비하게 노예들을 다루게 되고 거기에 대규모 폭력이 개입하기 시작하고 대규모 자본이 들어가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한 인종 전체를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게 되고 그들을 노예화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흑인노예들이 아프리카 해안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까지 가는 과정은 너무나 험난했다. 짧게는 2~3개월 길게는 6개월이 걸리는 기나긴 항해였다. 당시 노예선들은 100~300톤의 소형 선박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물건처럼 배 밑바닥에 빼곡히 실려서 갔다. 배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좁은 공간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만 했다. 도주를 막기 위해서 대여섯 명씩 쇠사슬로 묶었고 다시 두 명씩 족쇄까지 채웠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자리하는 배 아래 쪽은 산소가 부족해서 촛불이 저절로 꺼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루에 한 두 번 옥수수 죽을 겨우 먹었다. 용변도 그냥 그대로 누운 채로 봤다.
⑧ 이질과 티푸스, 홍역, 천연두 등 질병 확산이 시간문제였고 항해 중 사망률이 무려 14.5%, 최대 33%에 달했다. 브룩스 호 3차 항해 항해 80665, 브룩스(1785)
아프리카 출발 1785년 11월 16일
자메이카 도착 1785년 12월 29일
항해일 수 43일
승선 노예 수 740명
도착 노예 수 635명
항해 중 사망 105명
사망률 14%
이런 심각성을 노예상들도 인지를 하고 있었다. 이때 노예무역선에서의 손실을 보상해 주는 보험이 등장했다. 보험회사가 이것 때문에 생겨났다. 노예무역 과정에서 흑인노예가 사망하거나 실종되면 그 손실을 보상해 주는 상품이 생겨났다. 환경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그냥 완전한 상품취급이다. 실제로 그 보험이 적용된 끔찍한 사례 있었다. 1781년 영국 리버풀에서 출항한 노예선 종 호, 자메이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예를 잔뜩 싣고 항해에 나섰다. 그런데 항로를 착각해서 자메이카를 지나쳤다. 항해가 길어지면 보급품은 물론이고 먹을 물까지 부족해진다. 게다가 배에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한다. 선장과 선원이 타개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들은 노예 133명을 산 채로 바다에 던져 버렸다. 흑인 노예가 돈인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당시 보험계약 조건 때문이었다. 노예선에서 노예가 사망하면 선주에게 책임을 물어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대신 노예가 실종되면 보험금을 지급받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보험금을 타려고 살인을 저질렀다. 돈을 향한 탐욕 앞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은 인간 이하의 짐짝 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이게 불과 200년 전 일이다.
유럽의 유서 깊은 200년 전통의 보험회사들은 다 이때 생긴 거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도 비극은 기다리고 있었다. 흑인노예들이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은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연안의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었다. 노예들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최고 4m가 넘는 사탕수수를 베어야 했고 밤에는 사탕수수 압착기로 즙을 짜냈다. 그 후엔 60도 솥에 즙을 끓이고 불순물을 제거한 후 설탕결정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루 18시간이 넘는 밤낮 없는 고된 노동과 폭력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등골 휘는 죽음에 가까운 중노동이었다. 수확철에는 사탕수수에서 즙을 짜내고 하는 과정을 다 마쳐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노동강도가 올라갔다. 설탕 추출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말 그대로 설탕을 얻기 위해서 사람의 노동력을 갈아 넣는다. 사탕수수 재배로만 보면 농업인데 설탕을 뽑아내기 위해서 공업이 되는 거다. 설탕산업이 산업혁명의 전초기지 단계 역할을 했다.
⑨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의 손이 압착기 분쇄기에 팔이 끌려들어가면 옆에 도끼를 두고 짤라 냈다, 기계를 멈출 수 없으니까 팔을 잘라 버리면 노예의 생명도 구하고 그만큼 재산보장이 되니까 나름대로 공정은 계속 돌아가고 이런 일들 때문에 손도끼를 둔다. 사람이 아니라 아주 기계 소모품이다. 사탕수수가 주로 재배되는 서인도제도나 브라질은 노동강도가 워낙 높고 열악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노예가 가정을 이루기가 불가능했다. 노예의 수명도 짧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공급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노예를 공급해 주어야 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미국 남부는 담배농사나 쌀농사를 짓는데 여기는 기후가 나아서 노예 가족이 만들어지고 자체적으로 재생산이 되었다. 설탕으로 유럽인들은 부를 많이 쌓았다고 하는데 다 흑인들의 피와 눈물을 밤낮으로 짜내서 만든 것이었다. 정말 흑인들을 쥐어짜서 이룬 인류사이고 비극이다.
18세기 후반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제일 먼저 했던 운동이 설탕을 안먹는 운동이었다. 영국은 17세기 후반 150년 동안 무려 340만 명의 노예를 가지고 왔다. 연간 4만 7천 명 정도 어마 어마하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들었는데 이 모습에 깜짝 놀랜다. 당시 영국의 상위소득 1% 안에 설탕업자, 노예무역상들이 들어갔다. 배들이 필요했으니까 조선업 게다가 보험업 설탕산업에 연관된 모든 산업이 다 떼돈을 벌고 좋았는데 흑인 노예들만 희생을 했다. 맨체스터 리버풀 버밍엄 셰필드의 공통점은 18세기에 갑자기 떠오르는 도시들이다. 리버풀은 노예무역으로 성공한 도시다. 작은 어촌이었던 리버풀은 대서양과 가장 가까웠던 항구였기 때문에 노예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서 그 덕분에 큰 지방도시로 성장을 하였다. 버밍엄이나 셰필드나 맨체스터 도시들은 노예무역 덕분에 수출에 활기를 띠었다. 이를테면 철물 제품들 총, 면직물 모직물 렌즈 셰필드는 칼 제품을 생산하면서 아프리카로 수출을 해 엄청난 이익을 거두었고 공교롭게도 이 도시들이 전부 산업혁명의 모태도시가 되었다. 리버풀하면 축구도 있지만 비틀즈의 고향, 유럽의 많은 도시들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오늘 얘기를 들으니까 환상이 많이 깨졌다. 그 富가 다 노예산업에서 축적된 거였다. 산업혁명의 기차가 간다면 마치 석탄 연료를 인간으로 땐 것 같다. 플랜테이션으로 큰 富를 만든 사람들이 한편으로 이중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⑩ 대항해 시대는 인간의 탐욕으로 뒤범벅이 됐던 시대였다. 200년 전에 유럽인들의 욕망에 의해서 흑인 노예선에 흑인들은 동물처럼 취급 당했다. 지금은 인권이나 제대로 지키고 있나 한번 생각해 보게된다. 대항해 시대에 돈을 벌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겼다. 당시 사람들한테는 정말 욕망의 대상이었다.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 그런 모습들 속에서 돈을 벌다 보니까 돈을 지키고 투자하고 보험 주식 은행이 붙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출발의 씨앗들이 이때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제도로서의 노예는 없어졌지만 자본주의의 경제적 노예들은 여전히 있다. 흑인에 대한 인종 편견은 없어야 된다. 아직도 세계적으로 보면 흑인들의 나라가 경제적으로 열악한 나라가 있다. 노예무역이나 노예제를 이야기 하면 끔찍한 이야기들이 많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하는데 모든 일들이 철저하게 계산된 일들이다. 계산이라는 것은 이성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성과 합리성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결국 공감의 능력이 떨어진다. 대항해 시대가 낳은 참혹한 노예 비극을 통해서 인종주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야만의 유산들이 여전히 남아있지 않나 둘러보는 계기도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