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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능력이다
2017. 3. 5.(주일낮예배) 말라기 1:6-14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난 닉 부이치치는 이 사회에 낙심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희망전도사로 유명해 졌다. 이 닉 부이치치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기자들이 달려가서 인터뷰를 하였다. 그때 한 기자가 당신은 당신 아기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질문에 닉 부이치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자기 스스로 침대를 정리하고, 자기 책상을 치우고,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방법을 가리켜 주고 싶다. 저도 제 아버지로부터 침대를 정리하고, 책상을 치우고, 또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 말에 기자들은 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팔과 다리가 없는 닉이 자기 침대와 책상을 정리한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깜짝 놀라는 기자들을 향하여 닉은 계속해서 말했다.
제 아버지는 침대정리는 입으로 물어서 이불 개는 연습을 하고, 방청소를 할 때는 진공청소기를 턱으로 끼고 하고, 책상은 팔에 붙어 있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웠다.
장애를 가진 닉이 자기 방을 청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닉은 5살부터 15살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 방을 청소하였다. 이렇게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감당하였던 닉은 장애인으로 남의 도움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전도사로서 많은 사람을 세우는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일상의 중요함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뭔가 새롭고 다른 것을 하면 내 인생이 큰 의미와 보람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삶에 의미와 보람을 느끼고 살려면 일상 속에서 성실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이찬수목사님이 이 시대의 사역자와 리더들에게 고함이라는 주제의 설교를 했다. 목사님은 그 설교에서 다윗의 물맷돌 이야기를 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갈 때 주 무기는 물맷돌이었다. 칼과 단창을 가지고 있고, 또 앞에 많은 병사들이 항오를 벌이고 있는 그 골리앗 앞에 다윗은 고작 막대기와 초라한 물맷돌을 가지고 나아갔다. 그런데 다윗이 그 물맷돌을 던졌을 때 골리앗이 무너져서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찬수목사님은 이 설교에서 우리의 손에 물맷돌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 물맷돌은 다윗이 40일 금식하여 얻은 것이 아니다. 다윗이 이 물맷돌을 가지게 된 것은 양을 사랑하여서 그 양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걸고 싸웠을 때 가지게 된 것이다. 다윗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과 정직으로 열심을 다했을 때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물맷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말씀을 제 삶에 적용하면 목사인 제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여서 날마다 기도하고,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가 아픔을 가진 성도를 만나면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함께 고통하는 삶을 통하여 생겨난 것이 물맷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제 손에 물맷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의 손에는 물맷돌이 있는가? 제가 풍성한교회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김성곤목사님께서 아주 재미나지만 가슴아픈 이야기를 주었다. 교회 청년 중에 한명이 집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청년은 목사님께 와서 주를 위하여 목숨바쳐 충성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은혜를 받은 청년은 가슴이 뜨거워서 진심으로 목사님께 가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다고 말하면 목사님은 격려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김성곤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를 위하여 목숨은 다음에 바치고, 청년은 내일부터 새벽기도나 나오게
그런데 주를 위하여 목숨은 바칠 수 있는 청년은 그 다음날 새벽기도는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그 청년은 목사님이 새벽기도 나오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물맷돌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대단한 결단은 할 수 있지만, 주를 위하여 매순간을 바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미라는 소설로 유명한 프랑스의 천재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우리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대단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상력사전을 읽으면 이 사람의 상상력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할 정도이다. 그렇게 상상력이 뛰어난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당신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을 하였다. 그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저는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카페에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글을 씁니다. 그때 저는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내용을 다 기록합니다. 그 후 공원에서 운동하고, 저녁을 먹은 후 10시 전에는 반드시 잡니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상력이 풍족하려면 뭔가 특별한 것을 보고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아이에게 상상력을 길러주기 위하여 많은 것을 경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에 의하면 상상력을 키우는 것은 삶의 터전을 벗어나서 뭔가 독특한 것을 경험해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삶의 터전 안에서 규칙적인 삶을 살 때 자라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일상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오늘 본문인 말라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였습니까? 하는 유다민족의 불만으로 시작하고 있다. 유다백성이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불만하는 토로하는 이유가 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성전을 건축하였다. 지난 주 설교했던 것처럼 성전건축에 지친 사람들은 성전을 위하여 산에서 나무를 했지만, 그것으로 자기 집을 짓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성전건축을 하다 지친 사람들이 살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기근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고통하고 있던 이 사람들에게 학개는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학개의 설교를 들었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저는이 말씀을 제가 회사에서 설교하였다. 그리고 회사직원들에게 기근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학개는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고 외쳤다. 만약 여러분이 학개의 이 외침을 들었다면 뭐라고 말하겠는가? 하고 질문했다. 그때 회사직원들은 차마 제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같아 제가 광신도, 미친 짓이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사직원 생각에 사람이 있고, 종교가 있는 것인데, 사람이 먹고 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광신도가 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개는 성전건축을 호소하였고, 유다백성들은 다시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래서 유다백성들은 성전을 완공한 후에 그들은 기쁨과 감격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가?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순간에 성전을 건축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기근의 고통에서 해방하여 부요함을 주셔야 하고, 또 정치와 군사적으로 유다가 굉장히 연약한 상태에서 성전을 지었으니 이제 하나님이 복을 주어서 유다가 세계 열방중에서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개 성전 건축 후 100년이 흘렀는데, 유다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강국이 되지 못하였다. 여전히 가난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어야 했던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왜 유다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겠는가?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다. 그런데 개와 고양이가 앙숙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표현하는 방법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두렵고 긴장을 하면 꼬리를 위로 치켜세운다. 그런데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쳐들고 흔들지만, 긴장하고 두려우면 꼬리를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가 기분이 좋아서 꼬리를 높이 들고 고양이에게 가면 고양이는 개가 두렵고 긴장하여 싸우러 오는지 알고 꼬리를 높이 쳐드는 것이다. 이렇게 의사표현이 다른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유다의 생각이 달랐다. 하나님은 유다가 성전을 건축한 후에 이제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예배하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성전을 짓는 것이 지상명령이었고, 그 성전만 지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유다는 성전을 다 건축한 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서 하나님이 복을 주는지 시험해 보라(말 3:10)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이 말씀의 의미는 레위인이 생계를 유지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십일조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십일조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도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공경하지 않고, 멸시하였다고 하였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제사장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냐?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말씀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특히 13절을 읽어보기 바란다.
(말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식탁을 이미 더럽혀 버린 제사장들은 이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게 되었다. 여기서 번거롭게 여긴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굉장히 피곤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은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하는데,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강압적으로 그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제물에 훔친 물건이 있었고, 심지어 병든 제물이 있어도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냥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제사장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였고, 그랬던 제사장들은 자기 일상의 삶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제사장의 이 모습이 안타깝지 않은가? 청소년강사로 사역하는 강은도목사님에게는 아주 재미난 간증이 있다. 그 목사님은 믿는 집안의 아들이어다. 그런데 아버지는 매일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면 목사님을 깨워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일어나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무서워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어느날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천국은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마다 예배하는 것도 괴로운 일인데, 하루 24시간 예배만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것이 어릴 때 목사님의 마음이었다.
그러면 지금도 목사님이 예배하는 것이 고통이겠는가? 만약 예배하는 일이 고통이었다면 목사님은 지금 가장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또 은혜를 받은 목사님은 기쁨으로 예배하고, 또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말라기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매 제사를 드릴 때마다 감격과 기쁨으로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또 멸시하였던 제사장은 바른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말라기시대의 유다의 제사장이고, 또 그 백성들이었다. 말라기 시대 제사장은 자신의 일상에서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였고, 또 유다백성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행해야 할 모습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일상에서 성실과 정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제사장과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그 사랑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은 느낄 수 있는 자리에 있는가? 제가 강도사시절에 섬겼던 교회 장로님 중에 밍크담요를 공장을 경영하는 분이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에 담요가 잘 팔리지 않았는지, 장로님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장로님은 밍크담요가 원래 두 겹으로 되어져 있는데, 한겹짜리를 만들어 가격단가를 낮추었지만, 그 담요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어렵고 힘들게 사업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IMF가 터졌다. 국가경제위기 상황이 되었을 때 아마 장로님은 이제 사업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반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IMF가 발생하자 사람들이 그동안에 덮던 비싼 이불이 아니라, 밍크담요를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장로님 공장에는 두겹짜리가 아니라, 한겹짜리로 단가가 싼 담요가 생산되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담요를 동남아에서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로님의 사업이 얼마나 잘되었던지 제가 공장에 방문했을 때 저에게 한겹짜리 담요를 선물로 2장 주었다. 그런데 제가 밍크담요를 덮지 않아서 옷장 안에 그대로 놓아 두었는 데, 지금 담요 수요를 맞추지 못한다고 장로님이 그 담요를 다시 돌려주면 안되겠느냐?고 말씀할 정도였다.
그렇게 IMF때 사업하는 사람들이 다 힘들다고 할 때 장로님은 오히려 밍크담요가 너무 잘 팔려서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빚다 청산하고, 또 고급차도 사고, 아파트도 사고 한 순간에 장로님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었다. 저는 그 장로님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왜 사업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 중에 아주 많은 분들이 그 장로님이 받은 복을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한순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며 부러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 장로님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 맞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복이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성실과 정직으로 내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최고의 복을 받은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 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고 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