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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임-호기심의 시작
지은이:벌마로(김윤식)
화창한 초여름의 토요일,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의숙이가 귓속말을 전했다. 오늘
학교수업 끝나고 흥사단에서 자주 보는 경기고에 다니는 용주하고 진영이와 미팅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이미 약속 장소하고 하루의 계획도 다 짜놓은 상태에서
영우에게는 거의 통보만 하는 수준이다.
지난번 운옥이와 함께 서울공고 남학생들과 딸기 먹으러 안양 갔었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그때보다는 많이 부드러울 것 같은 상상을 했다. 용주하고 진영이는
흥사단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의숙이의 제안을 편한 마음으로 받아 들였다. 어찌 보면 영우도 은근히 용주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지 모른다.
영우는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남학생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덕수상고 다니는 류우용이라는 남학생이고 한 명이 용주였다. 그중에 덕수상고 류우용이라는 남학생은 영우보다 1년 선배오빠였기 때문에 편하게 접근하는 게 어려워서 혼자 짝사랑에 그쳐야 하는 처지였다. 솔직한 심정은 용주보다 우용 선배가 훨씬 맘에 들었었는데 언젠가 우용 선배하고 마주 보고 말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영우는 너무 수줍고 떨려서 얼굴만 빨개진 채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우용 선배만 보면 창피해서 눈길을 피하고 의도적으로 멀리 했다. 그런 이유 말고도 우용 선배를 멀리하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그것은 다른 여자애들한테도 인기가 많기 때문이다. 그중에 한 명이 서울에서도 유명한 3대 발광 중에 한 곳인 염광여상 고적대 악단장하는 여학생이다. 그 여학생은 흥사단 모임에 어쩌다 한 번씩 얼굴을 비치는데, 그때 영우도 얼굴을
본적이 있다. 그런데, 하필 그 여학생이 우용 선배를 찍어 놨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소문이 퍼진 이후론 아무도 우용 선배한테 접근하는 여자애는 없었고 영우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우용 선배가 그 여학생 하고 사귄다는 말을 어디에서도 들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뭔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우용 선배와 사귀어 보려던 마음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용주하고는 흥사단 모임에서 조별토론회 시간에 자주 접촉하게 됬었는데 그때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다가 눈이 마주친적이 있었다.
그때 영우는 처음으로 호감을 갖게 되었는데, 용주도 영우에게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어도 용기가 없어서 망설이던 중에 생각지 않게 의숙이가 다리를 놓아준 셈이 된 거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바로 종로 5가의 평소 학교 친구들과 자주 가던 디즈니 빵집 앞에서 의숙이와 만났다. 곳이어 용주와 진영이가 도착했다. 네 사람은 빵집 앞 길가에 서서 어디로 갈 것인지 의논했다. 그들이 빵집을 들어가지 않고 빵집 앞에서 만나기로 한 이유는 오늘 하루의 시간을 아끼려는
의도도 있지만 용돈을 절약하기 위한 전략도 숨어 있었다.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써야 하는 학생들 주머니는 언제나 가벼웠다. 더구나 오늘은 시외버스를 타고 교외로 나가기로 계획을 세운 터라 비용이 많이 들것을 감안하면 조금이라도 용돈을 절약해야 비용 걱정없이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동유원지를 오늘의 여행 목적지로 정하고 바로 양주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버스는 시골길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렸고 영우 일행은 수동유원지
앞에서 내렸다.
6월의 싱그러움과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은 여고생들의 얼굴을 더욱 반짝이게 했고, 유원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학생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계곡에는 아직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니라서 그런지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수동유원지 계곡의 폭포수 물속에 발을 담근 채 물장구를 치고 마음껏 소리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옆에 앉은 용주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폭포소리에 묻혀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마 영우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을거라 상상했다. 아니 그렇게 들렸다.
종아리까지 올려 접은 바지는 벌써부터 물에 젖어서 물기가 허벅지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엉덩이 아래로는 이미 물에 젖어서 서서히 발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초여름이라서 그런 것 같다.
용주도 발이 차가웠는지 먼저 일어나며 다들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변 뚝을 걸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뚝길에는 씨앗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레국화 한 송이가 외롭게 피어 있었다. ‘너는 어쩌다 외롭게 혼자 피어 있는 거니,,,’ 영우가 수레국화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지나쳤다. 다행히 주변에 엉겅퀴가 보라색 꽃을 활짝 피어 수레국화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엉겅퀴는 지천에 깔려 보라색 꽃으로 강변을 장식하고 있었고,
그 길을 영우와 친구들은 재잘거리며 걷고 있다.
잠시 뒤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장마철
날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서 언제든 비를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아니면 항상 우산을 들고 다니든가,,,
그들은 소나기를 피하려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집이 한 채
보였다. 슬레이트 지붕의 창고처럼 보였는데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친구들은 처마 밑에 몸을 피했다.
초 여름날의 오후 슬레이트 지붕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향연
처럼 들렸다. 일행은 한동안 빗소리를 감상하며 무념에 빠졌다. 이럴 때는 아무런
생각없이 대지를 적시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디선가 개구리 한 마리가 ‘개굴’ 하고 울었다. 그 소리를 신호로 여기저기서 개구리들이 울기 시작했다. ‘개굴개굴,,,’ 빗소리에 개구리들 울음소리가 어우러지며
오케스트라 향연은 더욱 웅장하게 퍼졌다.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하기는 했어도 이미 바지가 젖어 있는 상태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빗방울에 그들은 금세 몸이 젖었다. 그리고 조금은 춥다고 느꼈다.
자신의 손으로 비에 젖은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영우를 용주가 뒤에서 살짝 끌어당겨 몸을 밀착시켰다. 아마 추워하는 영우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영우는 용주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긴 채 등으로부터 전해오는 따뜻함을 느끼며 신경을 자신의 등 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영우의 등과 용주의 가슴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비가 그치고 영우일행은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큰길가 옆 작은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아주머니는 친절했다. 젖어있는 영우일행을 위해서 수건도 가져다주시고
식당이 아닌데도 그들이 부탁하자 라면도 끓여서 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라면이 눈앞에 차려 지자 한창 먹성 좋은 학생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릇을 비웠다. 비에 젖어 추위에 떨었던 학생들에게 따끈한 라면 한 그릇은 허기진 배를
채우고 덮여주기에 더 없이 충분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라면 값보다 좀 더 많은 돈을 지불하려 했으나 친절한 아주머니는 라면 값만 받는다고 했다. 아주머니의 눈에 자식 같은 학생들이 예쁘게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서울로 돌아온 영우일행은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집에 도착한 영우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옷을 갈아입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용주를 생각한다. 자신의 등 뒤로 전해지는 용주의 가슴이 따뜻했었고 심장 뛰는 박동이 크게 느껴졌었다. 영우는 지금 그 느낌을 되살리고 있다.
월요일, 다른 친구들은 학교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는데 영우와 의숙이는 교실건물 뒤편의 등나무 아래에 마주 앉았다. 의숙이가 먼저 영우에게 수업 끝나면 집에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의숙이가 물었다.
“너 용주 어떻게 생각하니,,,?”
서론도 없이 느닷없는 질문에 영우가 당황했다. 의숙이는 늘 이런 식이다.
“그냥 좋았어, 나 사실 용주한테 관심 있었어”
“기집애 어쩐지, 너 용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
“눈치 채고 있었어?”
“그럼! 내가 누구냐? 사실은 용주가 너하고 다리 놓아달라고 해서 주선한 거 였어”
“그랬구나,,, 어쨌든 고마워”
용주가 먼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용주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었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의숙이는 모든 면에서 영우보다 앞섰고 주변을 챙길 줄 아는 재주가 있었다. 어쩌면 그런 의숙이가 있어서 학창생활이 더 즐거웠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흥사단 모임이 있을 때마다 만났고, 종로 5가의 디즈니 빵집을 주로
만남의 장소로 정해서 모였다. 만나면 즐거웠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은 고교생만이 느낄 수 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이 순간
싱그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1학기 수업을 모두 마치며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영우는
여름방학을 부족했던 영어 과목을 보충하는 기간으로 정하고 방학기간 내내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미국에 학생과 펜팔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도 영어공부는 제1
과제가 되었다. 다른 잡념 없이 오직 책 속에 파묻혀 지내다 어느덧 여름방학도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됐다.
2학기 첫날 수업시작 전부터 여름방학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은 서로 반가움에
환한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방학동안 있었던 각자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친구들 이야기 소리에 교실은 시끌시끌했고, 영우와 사군자 친구들도 빙 둘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시작된 학교생활도 8월이 금세가고 9월도 반이 흘렀다. 뜨겁던 여름도 다 지나고 어느덧 가을이 저만치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의 화창한 날씨는 영우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용주의 소식이 궁금했던 영우는 의숙이에게 시원한 가을공기 마시러 어디든 가자고 제안을 했다. 영우의 제안에 반색하며 신바람이 난 의숙이가 곧바로 용주와
진영에게 연락을 했다.
맑고 푸른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보게 된 친구들은 서로 그동안의 소식을 물었다. 남자애들은 영우처럼 똑같이 부족한 공부를 하면서 여름방학을 보냈다고 했다. 가을공기를 마시기로 계획했던 터라 그들은 버스를 타고 양주에 동구릉으로
출발했다.
한참을 달려온 버스는 동구릉 입구 버스 정거장에 멈췄고 버스에서 내린 영우일행은 코스모스 길게 피어있는 길가를 걸었다. 의숙이는 변함없이 노래를 흥얼거렸고 때론 서로의 장래희망을 이야기했다. 진영이는 이상형의 결혼상대로 임예진
닮은 귀여운 여자랑 결혼 하고 싶다고 했다.
용주가 영우에게 물었다.
“영우야 너는 이담에 어떤 남자하고 결혼할 거니?”
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장서 걷던 의숙이가 끼어들었다.
“야! 어린것들 말하는 거 좀 보래. 무슨 결혼상대가 어쩌고 어째?”
의숙이의 한마디에 모두들 크게 웃었다. 영우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남자상이 있었기에 친구들한테 말하려다 의숙이의 기가 차다는 반응에 잠시 멈칫했다.
용주가 재차 물었다.
“영우야 너는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야”
영우가 이내 자신의 속마음을 꺼냈다. 자신보다 나이가 서너 살 많고 키가 크며
다정다감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서너 살 많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영우의 말에 같은 학년인 용주가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영우가 눈치 채지 못했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는 동안 어느새 동구릉 입구에 도착했다. 동구릉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에 엄청난 규모의 왕릉이 눈에 보였다. 조선을 건국하신 태조이성계의 건원릉을 비롯해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묻힌 곳이 이곳 동구릉이다.
조선역사에 관심이 많은 용주가 이곳에 묻힌 왕족들에 관해서 역사 가이드라도
된 양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가라사데, 조선을 건국하신 태조이성계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힘도 장사이신데,,,”
나무사이로 뛰어가는 다람쥐에 시선을 팔려서 잠시 멈추었던 용주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성계의 젊은 시절, 어느 날 동료들과 커다란 바위아래서 풍류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그들 앞에 집채만한 호랑이가 나타났다. 일행은 한 명만 호랑이 밥이 되면 나머지는 살 수 있을 테니 한 명이 희생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각자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서 호랑이 앞에 던졌다. 그중에 이성계의 옷을 호랑이가 물었고 이성계는 ‘이대로 내 목숨은 여기서 끝나는구나’ 하는 심정으로 호랑이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뒤쪽에 있던 바위가 무너져 내렸다. 호랑이한테 목숨을 내주고 동료들을
구하려고 앞으로 나섰던 이성계만 살았고 나머지 일행은 모두 바위에 깔려 죽었다는 전설을 시작으로 이성계가 활을 잘 쏘는 신궁이신데, 평소에 사냥을 나설 때면 소금을 챙겨 다니셨다고 한다.
영우가 궁금해서 중간에 용주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사냥을 하는데 활과 화살만 있으면 되지, 뭐하러 소금을 가지고 다녀?”
용주가 신이 나서 설명을 해주었다.
“아! 소금이 왜 필요했냐면은 먼 산 너머에 있는 사슴을 활로 쏘아서 맞추면 사슴을 찾으러 가는 동안에 사슴이 부패할 수 있어서 화살 끝에 소금을 묻혀서 쏴야 하는 거야 그만큼 이성계는 멀리 있는 목표물도 맞출 수 있는 명궁이라는 말이야!”
“말도 안 돼 그런 사람이 어딨어”
영우가 어이없어 했지만 용주는 사실인양 떠벌리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용주의
말솜씨는 청산유수다. 말솜씨가 부족한 영우는 용주의 그런 점이 좋았고 언제나
부러웠다.
용주의 이야기는 대부분 야사이거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정통역사지식도 많이 알고 있어서 어느 면에서는 학교의 국사 선생님보다도 지식이 풍부해 보였다.
영우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여러 능을 둘러보고 신정왕후께서 잠들어 계신 수릉
너머의 뒤쪽 언덕뒤로 돌아서서 조금은 구릉지처럼 보이는 곳의 가지런하게 깔려 있는 풀밭에 이르렀다. 이곳은 다른 관람객들이 다니는 관람 코스하고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지형이라는 것을 친구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주변을 세심히 살피던 의숙이가 말을 꺼냈다.
“여기 자리가 좋아 보인다, 우리 좀 앉자,”
일행은 의숙이 말에 따르기로 하고 영우와 용주, 의숙이와 진영, 이렇게 짝을 지어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능 아래로 곱게 다듬어진 잔디가
깔려 있었고 눈이 부시게 따사로운 햇살이 넓게 펼쳐진 잔디 위에 비추고 있었다.
영우는 이곳에서 저녁노을을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노을이 지려면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 활달하고 말을 잘하는 의숙이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재잘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영우와 용주는 의숙이와 진영의 대화 내용을 엿들으며 함께 웃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말솜씨가 서투른 영우와 다르게 말을 맛있게 잘하는 용주가 언제나 대화를 주도했다. 난센스 퀴즈를 내서 영우를 당황하게 하거나 재미난 유머로 웃겨 주기도 했다. 어쩌다 인생을 논할라치면 무슨 세상의 짐을 전부
짊어진 양 심오한 철학을 설파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마치 선생님한테 공부
배우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용주는 어떨 때는 듬직한 오빠 같기도 했다가 어떨 때는 개구쟁이 어린애 같기도 하고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면을 보여주었다. 레퍼토리가 바닥이 났는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용주가 뒤로 누웠다.
“영우야 너도 누워, 편하고 좋아”
“응 나는 괜찮아”
“한번 누워 보라니까”
용주의 채근에 그렇게 할까 하다가 의숙이가 신경이 쓰여서 의숙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앉아 있을 줄 알았던 의숙이는 방금 전까지 재잘거리더니 어느새
진영이와 함께 하늘을 보고 누워서 나직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영우는 용주의 옆에 소리 없이 누웠고 둘은 하늘을 보며 고요한 생각에 잠겼다.
잉크를 뿌려 놓은 것처럼 새파란 하늘에는 고요하고 의연한 구름 한 점이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고, 눈이 부시게 맑고 깨끗한 태양은 금빛쟁반을 매달아 놓은
듯 반짝이며 세상의 모든 사물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이내 숲 속에선 바람소리 새소리 높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게 들려 왔다. 주변의 모든 환경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은 누운 채로 한참을 미동도 없이 각자의 상념에 잠긴다. 어쩐지 숨쉬는
소리도 용주에게 들키면 창피해 질까봐 숨소리도 크게 못 내고 영우는 그렇게 똑바로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용주 쪽에서 조금이라도 부스럭 소리가 나면 영우의 신경은 온통 용주 쪽으로 쏠렸다. ‘용주가 뭐를 하길래 부스럭 소리가 났을까?’ 궁금함이 지나쳐 답답할 정도가 되어도 영우는 고개를 돌려 용주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동안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가 영우의 귓불을 자극했다. 몇 번을 귀 기울여 들었지만 그 소리의 진원지를 알아채지 못했다. ‘하늘이 참 맑구나, 용주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됐을 텐데,,, 이제 그만 가자고 할까,’
혼자 망설이며 생각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용주를 보았다.
용주와 눈이 마주쳤다. 용주는 아까부터 영우를 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향했고 햇빛에 눈이 부시다고 생각한 영우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소리 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 쉬었다. 그때 용주가 몸을 일으켜 영우위에 가볍게 겹쳤다. 눈을 가린 손수건이 자리를 못 잡고 흘러내렸다.
영우는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주고 기다렸다. 용주의 숨결이 다가왔다. 이내 심장이 멈췄고, 용주의 입술을 느끼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온몸을 휘감았고, 벅찬 감정에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입맞춤은 짧았고 여운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누운 채로 하늘을 보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맑고 깨끗한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멀리까지 날아가 아주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보았다.
정신을 가다듬은 영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무슨 말을 하지,,, 용주가 먼저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 용주도 아무 말이 없네,,, 그냥 이대로
더 누워 있어야 하나,,,’
난처한 순간을 해결해 준 사람은 공교롭게도 진영이와 함께 있던 의숙이었다.
“얘들아. 이제 일어나 더 늦으면 버스 끊길지 몰라”
구세주를 만난 듯 영우와 용주가 동시에 “응!” 하고 대답을 하며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영우가 옷매를 가지런히 하는 동안 엉클어진 뒷 머리카락을 용주가
손으로 가볍게 정리해 주었다. 가만히 용주에게 머리를 맡긴 영우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많이 엉클어졌어?”
“아니 조금”
“머리가 왜 엉클어졌지?”
단발머리를 한 다른 학생들과 달리 영우는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머리를 길게 기르는 대신 양 갈래로 땋았기 때문에 머리가 풀어지면 쉽게 엉클어질 수 있다. 영우가 그걸 잊고 있었다.
네 사람은 버스정거장까지 가는 동안 말없이 걸었다. 무언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것 같기도 해서 부끄러움과 어색함이 종잡을 수 없이
뒤죽박죽 뒤엉켜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조차 민망 할 것 같았는지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친구들은
가볍게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정거장에 혼자 남은 영우는 부천 집으로 가기 위해서 몇 번의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이럴 때 마다 집이 부천이란 게 불만이고, 한참을 더 버스 안에서 시달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난 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서 부천 집에 안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 더욱 걱정스러웠다. 평소 같으면 신나고 들뜬 마음이겠지만 오늘은 왜 그런지 엄마를 보면 눈을 마주
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늦은 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마루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나왔어”
안방에 계신 엄마에게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영우야 너 용주하고 키스했지”
다짜고짜 수화기 너머로 의숙이의 심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당황한 영우가 안방을 쳐다봤다. 안방에 계신 엄마가 수화기 너머 의숙이 말소리를 들었을 것만 같아 불안했다. 한번 더 안방쪽을 쳐다보고 수화기를 잔뜩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정말 안 했다고?”
“그래”
“거짓말”
“진짜야”
영우가 알고 있는 지식 중에 키스와 뽀뽀의 개념은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었다. 영우의 생각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키스는 어른들의 행위고 자신이 했던 입맞춤은 뽀뽀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우는 자신이 정말 키스는 안 했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거라고 스스로 합리화시켰다. 의숙이가 조금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너 키스하는 거. 내가 다 봤어”
“너 봤어?”
“그래 이것아”
“그거는 뽀뽀야 ”
“뽀뽀나 키스나 뭐가 달라. 너 계속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봐”
“뭐를”
“어땠어? 느낌! 좋았어?”
“몰라! 뭐가 뭔지 모르겠어”
“좋았겠지 나도 좋았거든”
“무슨 말이야”
“나도 뽀뽀했어! 진영이가 마른침만 꿀떡꿀떡 넘기길래, 내가 먼저 입술을 갔다 댔어”
“뭐라고? 너 웃긴다, 정말”
이제야 아까 용주 쪽에서 나던 작은 소리가 뭐였는지 알았다. 마른침 넘기는 소리라는 걸,,, 의숙이와 통화하면서 잠깐 딴 생각을 했다.
“그래! 지금도 몽롱해, 나 어떡하면 좋니 진영이 좋아 할거 같아”
“사귀면 되지”
“너는 용주랑 사귈 거야?”
“난 아직 모르겠어”
이때 방문이 열리고 엄마가 나오셨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오래 하는 거야”
“아니! 엄마,,, 의숙아 끊을게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
영우는 당황하며 빨개진 얼굴을 들킬까 봐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았다. 오늘의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이상하네, 왜 이러지 참’ 영우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용주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용주에게!
집에는 잘 들어갔겠지, 나도 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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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오늘 즐거웠어 우리 잘 지내보자.
!!!!!!!!!!!!!!!!!!!!!!!!!!!!!!!!!!!!!!!!!!!!!
너 뽀뽀 처음이지, 나도 처음인데,,,
잘 자 안녕!
영우로부터,,,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막상 편지를 쓰려니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했고 창피함이 밀려 왔다. 용주에게 쓴 편지를 곱게 접어 봉투에 담으며 오늘 일을 떠올려본다. 두근두근 설레었고 야릇했다. 처음 느껴봤던 기분이다.
며칠 뒤 용주에게서 단둘이 보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장소는 종로 디즈니빵집이다. 용주와 만나는 날 버스시간을 놓쳐버린 영우가 조금 늦게 도착했고, 용주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책이 한 권 놓여 있었고 용주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살짝 긴장한
얼굴이다. 짐작컨대 아무래도 용주는 오늘 마음에 숨겨둔 고백을 하려는 표정 같았다. 영우가 의자에 앉으면서 용주의 얼굴 표정을 못 읽은 척, 테이블 위에 책을
주시하면서 먼저 말을 했다.
“이게 무슨 책이야? 시집인가 보네, 입시공부 해야지 시집 읽을 시간이 있어?”
“어,,, 공부하면서 답답할 때마다 읽으면 머리가 맑아져,,, 영우야 근데 여기 빵집에서 우리한테 상 줘야 되는 거 아니니? 아마 그동안 우리가 팔아준 빵 값만 해도 제과점 한 개는 더 차렸을 거다.”
“우리가 얼마나 사 먹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방금 전까지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던 용주가 너스레를 떨면서 웃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주문한 빵이 나오고 영우는 소보로 빵을 한 개 집어서 먹는다. 그 모습을 보며
용주가 말했다.
“영우야 너 빵 먹을 때 제일 먼저 무슨 빵부터 먹는지 알아?”
“글쎄 맛있는 거?”
“소보로야 너는 빵 먹을 때 소보로빵부터 먹는다”
“내가 그랬나? 내가 소보로빵을 유난히 맛있어 했던 거는 맞아, 근데 너는 내가
무슨 빵부터 먼저 먹는지 그거만 관찰하고 있었냐? 빵은 안 먹고,,,”
“으 응,,, 나도 먹었지 너만 보고 있지는 않지,,,”
용주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리고 만다.
“영우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잠시 머뭇하던 용주가 입을 열었다.
“나! 너 좋아해, 그리고 이거 너 주려고 산거야”
용주는 용기를 내어 고백을 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시집을 영우에게 건넸다.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고백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어서 당황한 듯 놀라며 시집을 건네받았다.
“너! 그 말하려고 아까부터 불량감자처럼 어색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어? 아무튼
고마워 잘 읽을게”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용주가 기대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바보! 나는 벌써부터 너 좋아 했었어”
영우도 용주와 함께 있는 시간은 마냥 좋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조금씩 조금씩 영우의 마음속에 용주가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영우의 고백에 한층 신이난 용주가 싱글벙글 어쩔줄을 몰라 하며 빵 한 바구니를 더 주문을 하고 영우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내가 돼지야? 왜 이렇게 많이 시켜”
“나는 네가 빵 먹고 있는 모습, 보기만 해도 좋아”
용주는 정말로 영우를 좋아했다. 영우도 용주를 좋아했다. 그들은 고교시절의 한 페이지를 풍성하게 채우고 있었다. 영우가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용주가 함께 걸었다. 영우가 앞만 보고 걷는 동안 용주는 싱글벙글 영우의 얼굴을 마주보며 거의 뒷걸음으로 걸었다. 용주는 영우가 타고 가야
할 버스가 조금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영우도 용주와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도 공부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온통 용주 생각만 떠올랐다.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은 떠들고 웃으며 시끌시끌하는데 영우는 그들과 섞이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영우야’ 하고 불렀다. 깜짝
놀란 영우는 마치 시험시간에 커닝하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해하며 빨개진 얼굴을
책으로 가렸다. 남학생과 사귀고 있는 자신이 다른 친구들한테 들킬까 봐 불안하면서 한편으론 은근히 뽐내고 싶은 충동이 뒤죽박죽 오락가락했다.
용주와는 서로의 감정을 편지로 확인했고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대학입시라는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인생최대의 장벽이 있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똥은 아닐지라도 항상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를 감당해야 했고 심적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다. 학업을 게을리 할 수 없는 현실에 서로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공부에 열중해야 했다. 그것이 지금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의 본분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당분간 자주 못 보더라도 서로를 잊지말고 대학에 진학하면 더 친하게 지내자는 약속을 했다. 어쩌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 테니까. 영우와 용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만남의 횟수도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