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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아! 스무살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영우의 스무살 시절은 봄 햇살에 피어나는 작은 들꽃처럼 여리고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의 마지막 자락에 결혼하고 분가해서 수원에 살고 있는 작은 오빠네 집에 다니러 가는 길이다. 언제나 영우를 애정과 보살핌으로 아껴주는 작은오빠를 어려서부터 믿고 의지했었기 때문에 처음
작은오빠가 결혼을 했을 때는 잠시 서운하고 속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언니도 영우를 예뻐해 주시고 편하게 해 주셔서 무언가 고민이 있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는 오빠네 집에를 간다.
오빠네 집은 가구부터가 고급스럽고 집안 분위기가 시골스럽지 않을뿐더러 어딘지 모르게 세련돼 보이고 새언니도 신여성의 향기가 풍겨서 갈 때마다 그 느낌이
좋았다. 한번 가면 며칠씩 묶었다 오기도 하는데, 그래도 공부할 책 한두 권은 챙겨 가야 마음이 편했다. 어찌 됐든 오빠네 집에 놀러가는 것은 즐겁다.
수원 가는 버스에 평소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오늘은 유독 사람이 없다. 영우가
내릴 곳에 거의 다 왔을 무렵에는 영우하고 보따리를 들고 타신 할머니 한분 그리고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 한 명이 전부다. 그렇게 달랑 세 명밖에 않남았을
때 짧은 머리의 남자가 영우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살짝 당황한 영우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고는 얼른 반대로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짧은
순간 호감을 느꼈다.
“저기 모자 쓴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러는데 저하고 커피 한잔 할 수 있을까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러는 거 실례 아닌가요”
“실례라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눈에 너무 맘에 들어서 그만 실례를 했습니다”
“오늘은 친척집에 가는 길이라서 안 돼요”
“그럼 다음에도 상관없어요. 언제든지 시간만 내주시면 저는 좋습니다. 연락처라도 주시면,,,”
영우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시큰둥하게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럼 외우세요. 0000000번, 외우셨어요?”
“아! 네 이름은,,,?”
“나 영우예요”
“성은요?”
“나요”
“아니 영우 씨 성 말이에요”
“나, 라구요.”
“??? 아! 미안합니다 나영우 씨요”
“그래요 호호호”
영우가 재미있다는 듯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웃어 보였다.
“이름도 예쁘시네요”
“저는 남자이름 같아서 싫은데,,,”
“무슨 말씀을요. 이름도 얼굴만큼이나 귀여우신데요.”
“그쪽은 이름이,,,”
“병휘라고 합니다. 조병휘”
“우리 엄마 성씨 하고 똑같네요”
“아! 그러세요, 반갑네요,”
그렇게 이름과 나이 직업정도만 서로 밝히고 영우는 버스에서 내렸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남자는 영우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망설이다가 자신이 내려야 할 장소에서 한참을 더 지나왔다고 한다).
오빠네서 며칠을 지내다 집으로 돌아온 영우에게 전화가 왔다. 버스에서 만났던 머리 짧은 남자다.
‘정말 전화가 왔네,,,’
영우는 잠시 잊고 있던 일이 현실이 돼서 살짝 놀랐다. 그 남자는 조병휘라고 이름을 밝히며 한번 만나서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영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 못 이기는 척 응낙을 했다. 들뜬 목소리의 남자가 이번 토요일 수원역 시계탑 건너
역전다방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내가 수원에 살고 있는 줄 알고 있구나’
영우는 자기네 집이 부천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우는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고 못 이기는 척
그 남자가 하자는 대로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남자와 만나기로 한 토요일 그녀가 졸업 후 처음 남자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억지로 감추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셀렘과 기대감을 억누르며 언니가 쓰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사실 그녀는 오늘 화장을 처음 해보는 거다. 스킨로션은 언제 바르는 건지 립스틱은 입술에 얼마만큼 크기로 바르는지 아이라인은 또 어떻게 하는지 마스카라는 어느 정도 바르면 되는지 정말 어렵고 서툴렀다. 몇 번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포기하고 그냥 맨얼굴에 로션만 바르기로 했다.
여고 졸업 후 처음 해보는 화장이고 여고시절 화장은 금기사항이었고 관심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영우의 얼굴은 화장을 안해도 예쁘다. 영우자신만
본인이 예쁘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 검고 커다란 눈동자, 발그레하고 볼록한 양쪽뺨, 그리 크지 않으면서 반듯한 콧날, 그리고 붉고 도톰한 입술, 가지런한 치아, 야무지고 귀여운 얼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까르르 소리 내어 웃는 모습, 맑고 청량한 목소리, 생기발랄하고 상냥한 미소, 또각또각 걷는 걸음걸이, 균형 잡힌 몸매, 거기에 이제 막 스무 살 넘은 앳 때고 청순한
이미지는 아름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그녀가 까만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누군가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예뻐서 누구라도 정신이 혼미해지고 만다. 단지 또래보다 조금 작은 키는 오히려 더 귀엽고 예쁜데 영우자신만 그것이 불만이다. 영우는 그렇게 예뻤다.
오늘 영우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영우보다 3살 위의 남자다. 그리고 오산 비행장에서 근무하는 직업군인이다. 영우의 고교친구들은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 미팅이다, 엠티다, 하며 한껏 대학생활의 기대감에 부풀어서 하루하루를 풍요롭게 장식하고 있겠지만, 영우는 그들과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영우가 대학입시의 실패를 맛보던 그 순간 견디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참으며 마음을 다잡고 내년 입시를 위해서 공부를 시작하려는 시점에 뜻하지 않게 이성의
인연이 다가온 거다. 그리고 지친 심신을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참이라 잠시 책을 덮기로 하고 그 남자와 데이트 약속을 하게 되었다.
화장을 마친 영우는 허벅지가 꽉 끼고 짝 달라붙는 청바지에 상의는 노란 스웨터를 입었다. 거울에 비치는 영우의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 모습이
마치 봄 햇살에 활짝 핀 개나리꽃과도 같이 화사했다.
영우가 평소 오빠네 갈 때 하고 다른 느낌으로 버스에 올랐다. 조금은 설레이고
조금은 걱정됐다. 딱히 무엇이 설레이고 무엇이 걱정인지는 영우 자신도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영우의 마음은 종잡을 수없이 어수선하다. 옆모습만 살짝 보았던 남자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어느덧 버스는 영우가 내려야 할 터미널에 도착했고 버스에서 내린 영우가 수원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큰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자 수원역 시계탑이 크게 보였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 약속한 다방 간판이 보였다. 2층 계단을 또각또각 올라가 다방에 들어선 순간, 창가 쪽에 앉아있는 그 남자가 금방 눈에 띄었다. 다른 남자들은 전부 장발인데, 그 남자만 짧은 머리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영우가 본 남자의 첫 인상은 한눈에 반할만큼 강렬한 느낌은 아니었다. 평범했지만 콧날 끝에서 윗입술에 이르는 인중선이 깎은 듯 단정해 보였고 무엇이든 허술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군인이기 때문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간단한 인사를 하고 커피를 주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남자는 마른침만 삼키고 있다. 영우도 긴장되고 어색 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눈은 어디다 둬야 할지 커피는 한 손으로 마셔야 하는지 두 손으로 마셔야 하는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던 행동들이 왜 이리도 어려울까.’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 집이 이,,, 근처인가 봐요. 저는 오,,, 산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 말을 하는데 왜 이리 더듬을까?’ ‘지난번 말을 걸던 용기는 다 어디 가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거지? 나보다 더 쑥맥이네,,,’ 커피를 다 마신 영우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의도로 말을 꺼냈다.
“우리 어디라도 가요.”
“네 그럼 영화 보러 갈까요?”
다방에서 나온 병휘가 가까운 경양식 집으로 영우를 안내했다. 이미 영화를 보러 가기로 정 했으니 그전에 뭔가 한 가지 정도는 다른 시간을 보내도 될거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모양이다. 영우는 남자가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는 의사표현을
말없이 몸짓으로 보여줬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웨이터의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았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병휘는 물만 계속해서 마신다. 병휘의 물 잔이 금세 비워지자 영우가 자신의 물을 병휘의 물 잔에 따른다.
“저는 아직 한 모금도 안 마신 거예요”
병휘가 황망하게 괜찮다며 물 잔을 들어 영우가 따라주는 물을 받는다. 주문한
돈까스가 나오자 영우가 먼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썰어서 한입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병휘도 따라서 한다. ‘이 사람 경양식 처음 먹어 보는구나’ 영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영우는 어려서부터 오빠들을 따라서 경양식집을 여러 번 출입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낯설거나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오빠가 썰어주는 고기를 집어 먹기만 했었는데 오늘은 영우도 처음으로 고기를 썰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계획대로 영화관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처분만 기다리는 영우에게 병휘가 무슨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영우가 대답을 못하자 병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인영화 보려 갈까요?”
지금까지 하이틴 영화만 봤었던 영우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제 성인이 됐으니 성인영화를 봐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영우도 그게 좋겠다는
생각에 그러자고 대답했다.
사실 처음 만나서 어색할 때는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좋은 게 없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수원의 거리를 잘 알고 있었는지 병휘는
씩씩하게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었다. 영우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병휘를 한걸음 반 정도 뒤에서 따라 걸었다. 큰길을 한참 걸었고 작은 골목도 여러 번 지난 다음 다시 큰길로 나오자 건너편에 중앙극장 간판이 보였다. 극장 앞에는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우네도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차례를 기다리며 병휘가 앞에 서 있는 영우에게 말을 걸었다.
“영우 씨는 경양식을 자주 먹어 봤나 봐요, 사실 저는 오늘 처음입니다.”
“그런 줄 알았어요, 저도 자주는 아니고 몇 번 우리 오빠들하고,,,”
“오빠가 계신가요”
“네! 오빠들도 있고 언니도 둘 있어요. 제가 막내라서 저를 예뻐해 주세요”
말을 마치고 영우가 고개를 들어 영화관 전면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올려다 보았다. 병휘도 따라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제목보다 정윤희 얼굴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정윤희 얼굴은 그림으로만 봐도 너무 아름답다. 오늘 영화는 정윤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건가보다. 영우는 정윤희 미모를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로 혹시 남녀
주인공이 옷을 벗는 야한 장면이 나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했다.
어두운 극장 안을 더듬더듬 어렵사리 자리를 찾아서 앉은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 상황이 한결 편안하고 여유롭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정윤희의 예쁜 모습을 감상하며 스토리에 빠져 들 때쯤 아니나 다를까 장면이 바뀌면서 남녀 주인공들의 애정행위 장면이 스크린을 꽉 채웠고
극장 안을 깊은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다. 조용한 극장 안에는 마른침 넘기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영우는 이 장면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당황스럽긴 병휘도 마찬 가지다. 영우의 앳 때고 청순한 모습에 반해서 어렵사리 데이트를 하게 된 첫날 영화관에서 야한 장면을 같이 보고 있는 이 상황이 자연스러울 리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부끄러운 장면이 불편할 만큼 여러 번 보이지 않았어서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데이트를 했다고 생각하며 영화관을 나섰다.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다음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오늘 병휘가 느낀
영우의 절제된 행동과 단정한 자세는 남다르게 좋아 보였다. 빈 물잔을 채워주던
세심함은 병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영우와 병휘의 첫 만남은 로맨스도 설렘도 없이 살짝 긴장된 데이트를 하고 헤어졌다. 부득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영우가 성인이 되고 난 후 처음으로 남자와 테이트를 했다는 거였고 실망스러운 만남은 아니었다는 거다.
영우는 토요일 오후에 다른 사정이 없을 땐 병휘와 만남을 이어갔고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몇 번의 만남이 있었어도 짜릿한 감정이 느껴지거나 설레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가 없었다. 병휘와의 데이트는 처음 기대와 달리
밋밋한 느낌만 남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영우가 아직 어린 나이에 쑥맥이라서 그럴 수 있고 병휘의 조심스럽고 묵뚝뚝한 성격이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병휘와의 데이트는 고작해야 커피 마시고 식사하고 영화 보는 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데이트를 이어갔다. 어쩌다 수원화성 성벽길을 걷기도 하는데, 그나마 수원화성은 역사가 서린 곳이라 이곳에서의 데이트는 의미도 있고 기억에도 남아서 색다른 데이트 코스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자주 보면 없던 정도 쌓인다 했던가, 만남이 이어질수록 병휘에게서 무언지
알 수 없는 믿음과 야릇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 했고 언제부터인가 영우는
그 느낌을 즐기게 되었다. 며칠 못 보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집에 있을 때는 전화벨 소리에 혹시 병휘의 전화는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수화기를 들었고 다른 사람이면 실망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병휘를 만나는 약속장소로 정한 수원 중앙극장 앞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창밖에 비치는 모든 풍경이 아름답게 보였다. 마치 이 세상 모든 사물이 영우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밖을 감상하며 상념에 젖는 동안 버스는 극장 앞 정거장에 멈췄고 버스에서 내린 영우의 눈에 만남을 하기위해 서성이는 여러 남녀들이 보였고 그중에 병휘오빠의 모습도 보였다. 병휘오빠는 꽉 끼지는 않아도 적당하게 헐렁하지 않은 청바지를 입고 상의는 은회색의 얇은 쉐이타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주위에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멋있어 보였다. 오늘따라 병휘오빠가 잘 생겨 보였다. 어쩌면 병휘의 잘생긴 외모를 영우는 그동안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영우의 가슴속에서 서서히 자라고 있는 사랑의 감정이 병휘를 멋있게 보이도록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영우를 보며 병휘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별안간 병휘오
빠가 은근히 자랑스럽게 느껴지며 자신과 병휘오빠가 마주 서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서 부러워 할 거라고 생각 했다.
수원팔달산에 오르자 길가에 활짝 핀 벚꽃이 그들을 반겨 주었다. 몽실몽실 꽃송
이 보란 듯이 봄볕에 노닐고 언덕을 타고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가벼이 떨어지는
꽃잎은 마치 한겨울 함박눈을 연상시키며 황홀감에 젖게 만들었으며, 수줍은 듯
실바람 간질일 때 꽃향기는 콧속을 지나 온몸을 자극했다. 꽃 속에 묻혀 존재감
없이 달려있는 푸른 잎새도 봄을 아우르며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우성이
다. 떨어져 길가에 흩뿌려진 꽃잎은 사람들 발길에 치이며 이리저리 뒹굴었는데,
그것도 보기 좋았다.
봄 향기에 취한 상춘객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젊은이들
은 밝고 환한 미소를 띤 채 은빛 반짝이는 벚꽃길을 거닐며 마냥 즐거워했다.
봄 향기에 취한 남녀 쌍쌍이 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 마주 보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었고 간혹 올림포스 카메라를 들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커플들도 눈에 띄었
다. 카메라가 없는 연인들에게는 자신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는데, 나
중에 인화를 하면 사진을 보내주려고 서로 주소를 주고받는 이들도 보였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분위기에 동화된 탓일까? 영우가 자기도 모르게 병휘의 팔짱을 끼고 몸을 밀착했다. 살짝 부끄러운 생각에 멈칫하다가 그대로 병휘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병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병휘의 갈색 볼이 벚꽃에 반사된 빛을 받아서 밝게 빛났다. 바람에 나부끼며 하얀 꽃잎이 영우의 머리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병휘가 손으로 떼어 주려다가 말았다. 검은 머리에 하얀
꽃잎이 어우러져 오히려 보기에 좋아서다. 병휘가 한 손을 뻗어 벚꽃 나뭇가지를
잡아서 영우의 코에 가까이 대 주었다. 병휘의 시선을 느끼며 꽃향기를 맡고 있는 지금 영우는 행복했다. 두 사람은 벚꽃길을 걸으며 처음으로 연애감정을 느꼈고 늦은밤이 돼서야 헤어졌다. 영우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달콤한 행복감에 미소 짓는다.
따스한 봄날에 부는 바람은 영우에게 이유 없이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평일의 어느 날 아침 일찍 병휘에게서 부천역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평일인데 무슨 일이지,,,? 그리고 부천역은 어떻게,,,?’전화를 받은 영우는 병휘오빠가 부천역에 와 있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전화수화기를 바꿔 잡으며 다시 물었다.
“오빠 진짜 부천에 온 거야?”
“응 나 오늘부터 삼 일간 휴가야”
병휘가 신나는 목소리로 영우에게 알렸다. 부대에서 뭔가를 열심히 잘해서 포상으로 삼 일간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 군인 신분인 병휘가 영우를 만나기 위해 부천까지 나서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동안 병휘의 숙소가 있는 수원에서 데이트를
즐기곤 했는데, 오늘 병휘가 부천으로 영우를 보러 왔다. 영우도 아침부터 봄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 들떠있을 시점에 잘 됐다고 생각하며 봄 날씨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고 급하게 부천역으로 향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영우를 발견한 병휘가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병휘의 밝은 표정이 영우의 마음도 경쾌하게 만들었다. 서로의 안부만 짤막하게 확인하고 두 사람은 갯벌을 보기 위해서 인천의 송도유원지로 갔다. 영우에게 묻지도
않고 곧바로 송도유원지로 가자고 한 것이, 아마도 병휘가 여기 오면서 미리 계획을 짜놓은 모양이다. 영우의 눈에 그런 병휘오빠가 믿음직스럽게 비쳤다.
송도유원지는 둑을 쌓고 바닷물을 막아서 물놀이장으로 만들었는데 위락시설을
갖추고 호텔도 세우고 해서 과거에는 수도권 유일의 해수욕장이었다고 한다.
유원지 안에는 아직 휴가철이 아니라서 그런지 사람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모래사장을 걷고 있는 남녀 쌍쌍이들은 곳곳에 눈에 띄었다.
영우와 병휘도 다른 커플처럼 해수욕장 모래밭을 거닐었다. 모래가 미끄러워서
걷기가 자유롭지 않았는데 영우가 몸의 중심을 잡으려다 얼떨결에 병휘의 손을
잡았다. 순간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데이트를 하면서 팔짱은 끼어봤지만 손은 아직 잡아보지 않았던 거 같다. 놓으려던
영우의 손을 병휘가 살며시 잡았다. 영우도 싫지 않았다. 어쩌면 영우도 얼떨결에
잡은 손이지만 이런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제 누가 보더라도 연인의 모습이 분명해 보였다. 영우가 신발을 벗어서 한 손에 집으려고 잠깐 손을 놓았고 병휘도 신발을 벗어서 한 손에 들었다. 두 사람은 바닷모래를 맨발로 걸어보는 것이 처음이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모래의 간지러움에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어느새 다시 잡은 두 사람의 손은 해수욕장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자석처럼 붙은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송도해수욕장에 놀이시설이 있었다. 두 사람은 대관람차를 경험하기로 하고 표를
샀다. 같은 타임에 영우커플 말고도 몇몇 커플이 함께 탔다. 단둘이 좁은 공간에
있어보기는 처음이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천천히 회전하면서 높이 올라가는 스릴에 어느새 정신이 팔렸다. 점점 높이 올라갈수록 야릇한 전율이 목뒤로 흘렀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때 영우가 무섭다고 했고 병휘가 영우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병휘에게 몸을 맡긴 영우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병휘의 뺨에 닿았다. 영우는 대관람차에서 병휘와 첫 키스를 했다. 두 사람의 키스는 병휘의 입술이 먼저
다가왔는지 영우가 먼저 입을 갔다 댔는지 분명하지 않았는데, 여고시절 용주와
입을 맞췄던 기억하고는 뭔가 달랐다. 그때는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지금은 진한 키스가 확실했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몽글몽글 한 것이 이건 분명히 뽀뽀가
아닌 키스라고 생각했고 사랑이라고 느꼈다.
영우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인천 앞바다가 보였고 더 멀리 옹기종기 섬들이 이웃처럼 모여 있었다. 가까이에는 어두운 색의 갯벌이 보였고 몇
마리의 갈매기가 그 위를 날았다. 고개를 뒤로 돌려 산을 보았다. 청량산의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산중턱에 붉게 물든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풍경을 감상하는 사이 어느덧 대관람차는 한 바퀴를 돌아서 원래 위치로 내려왔다. 대관람차에서 내리자 바람 한줄기가 영우의 어깨를 스치며 검은 머릿결을 살그머니 날려주고 가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 어느덧 해가 기울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다. 즐거운 송도유원지에서의 느낌을 뒤로한 채 병휘는 다시 오산으로 부대복귀를 했고 영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영우에게 송도유원지의 기억은 처음으로 설레는 테이트였다. 그동안 있었던 시간들보다,,,,
병휘에게 특별한 휴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송도유원지 데이트처럼 먼 곳까지 가기는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아무런 시간제약이 없는 영우가 수원으로 가는 것이 둘 다 마음이 편했고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많았다. 병휘의 퇴근시간에 맞춰 수원으로 가면 병휘가 약속장소로 오는데, 차 마시고 저녁 먹고 나면
늦은 밤이 되었고 영우는 늘 통금시간에 쫓겨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만남을 이어오던 어느 해맑은 토요일 병휘가 원천유원지를 가자고 하였다. 송도유원지 여행 이후에 수원에서의 만남은 아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밋밋한
데이트라고 느꼈나 보다.
원천유원지는 농업용으로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저수지물을
필요로 하는 논들이 사라지고 저수지로서 수명을 다했다고 여긴 정부에서 주변을
예쁘게 단장을 하고 물 위에 오리배를 띄워서 사람들이 유희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포장마차에서 간식으로 배를 채운 두 사람은 오리배를 탔다. 늦은 시간이라 다른
사람은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이 호수전체를 전세 낸 기분으로 넓은 호수 위를 맘
껏 돌았다. 힘 좋은 병휘가 힘껏 페달을 밟았고 영우는 발만 올려놓았다. 두 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리배의 페달을 밟으며 뱃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느덧 예정된 시간이 다 되었다. 오리배를 뱃나루에 대고 배에서 내리려는 순간 사고가 나고 말았다. 오리배가 기우뚱하면서 영우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일이 벌어진거다. 화들짝 놀란 병휘가 영우를 물에서 끌어올려
주었다. 하지만 영우는 이미 온몸이 물에 젖었고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찌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직은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말리기에 날씨가 추웠다.
옷을 말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가자는 병휘의 의견에 한참을 망설이던 영우가 병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처음으로 여관이란 곳을 들어간
영우는 야릇한 기분에 표정 관리가 어색했다. 그것은 병휘도 마찬가지다. 영우는
젖은 옷을 빨리 말리고 집에 가려고 했지만, 이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고 옷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통금시간을 넘길 것이 뻔했다. 여기서 나가봐야 갈 때도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이곳에서 함께
밤을 보내야 하는 난감한 지경에 직면했다.
예견에도 없이 처음으로 남자와 한방에 있게 된 영우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옷을 입고 그대로 있자니 춥기도 하고 방바닥으로 흐르는 물기도 걱정이 아닐 수
없어서 용감하게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샤워를 먼저 하고난 영우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다음에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감이 밀려왔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 건가?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야 되는 게 옳은 건 아닌가?’ 온갖 잡념이 그녀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론 ‘남자는 어떤 동물일까?’ 하는 호기심도 생기는 걸 숨길 수 없었다. 어쩌면 남자를 알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게 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우가 몸을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고 그사이 벽을 보고 서 있던 병휘가 욕실로 들어갔다. 전등은 껐지만 창문으로 비추는 달빛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방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30촉 전등 불빛보다 더 밝은 듯했다. 영우는 콩콩 당당 뛰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욕실문이 열리고 병휘가 씻은 몸을 수건으로 닦으며 욕실을 나왔다. 문 열리는
소리에 영우가 고개를 돌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어머나!’ 하마터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뻔했다. 남자의 벗은 모습을 처음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영우의 눈에 들어온 병휘의 모습은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달빛에 비치는 넓은 등은 근육으로 뭉쳐있고 굵고 단단해 보이는 두 다리는 가뜩이나 구리 빛인데 수북한 털로 덮여 있어서 더욱 검게 보였으며 튼튼한 나무기둥
두 개가 서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머뭇하던 병휘가 영우의 옆에 몸을 눕혔다. 잔뜩 긴장한 나머지 숨이 막힐 것 같은 중압감을 견디며 누워있는 영우의 살결에 병휘의 손길이 부드럽게 겹쳤고, 영우는 힘을 주어 눈을 감았다. 고요하게 흐르던 적막을 깨고 병휘의 숨결이
감미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꽈광! 번개가 치고 천둥이 심장을 때렸다.
반사적으로 병휘의 가슴을 밀치고 몸을 일으킨 영우가 잠시 앉은 채 그대로 있었다. 무언가 이물감에 벌떡 일어나 황급히 욕실로 들어갔다. 뒷정리를 끝내고 다시
병휘의 옆에 몸을 눕힌 영우는 고개를 돌려 창가의 달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녀가 20년 간직한 순결이 너무도 쉽게 무너진 거 같아서 허무하고 슬픈
생각에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쥐고 눈물을 흘린다.
영우의 가슴에 가볍게 손을 얹은 병휘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미안해”
“뭐가”
“사랑해”
“,,,,,,”
“행복하게 해 줄게”
“,,,,,,”
“왜 말이 없어”
“무슨 말을 해”
“아무 말이라도”
영우는 말없이 몸을 돌려 병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르는 눈물을 병휘의 가슴에 조용히 적시었다. 그리고 비로소 성인이 됐다는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병휘에게 더 많은 믿음을 갖기로 마음속에 다짐한다. 그 순간 무언지 모를 두려움 너머
저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환희를 보았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 다르게 발전을 했다. 시간이 허락 될 때면
수원과 부천을 오가며 수시로 만남을 이어갔고 그럴 때마다 헤어지기 싫었다.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다음날 아침이 돼서야 헤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서로의 믿음도 확실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첫댓글 연재소설의 긴 글이지만
인물 묘사와 스토리의 전개가 흥미진진합니다.
다만
인터넷과 연재소설의 특수성이 있어 긴 글은 독자가 집중하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 편으로 나누어 실으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문외한이지만 이 곳 문인들의 의견을 참고로 올려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영광스러운 나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겨 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