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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2 주일설교
즉시 낙원에 들어갑니다
(눅 23:39~43)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이 싫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생각하기도 싫어하고, 말하기도 싫어하고, 듣기도 싫어합니다. 오죽하면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은 숫자 사(四)도 싫어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음이 더디게 오거나 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준비한다고 해서 죽음이 더 빨리 오는 것도 아닙니다. 옛 어른들이 수의(壽衣)를 미리 준비하면 더 오래 산다는 덕담을 한 것은 죽음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겪게 될 죽음에 대해 모르고 무방비로 당하기보다는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잘 맞이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을 Well Dying이라고 합니다. 한때는 잘 먹고 잘살자는 의미로 Well-being을 외쳤으나 이제 “웰빙을 넘어 웰다잉을” 준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죽음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유튜브에서 한 번 더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죽음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것은 알겠는데 죽음 직후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오늘은 성경을 통해 그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실 때 그 행렬 가운데는 예수님과 함께 처형당할 두 명의 사형수도 끌려갔습니다. 예수님과 두 사형수는 해골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예수님이 못 박힌 장소를 마태와 마가는 Γολγοθᾶ라고 표현했는데 골고다는 예수님 시대에 사용되던 아람어입니다. 누가는 헬라어로 κρανίο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골고다나 크라니온이나 모두 해골이라는 뜻입니다. 해골은 라틴어 성경에서 갈보리로 표현되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을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이처럼 찬송가에서 골고다를 갈보리라고 표현했는데 ‘갈보리’는 라틴어라서 복음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갈보리’를 검색하지 마세요.
우리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모두 일곱 종류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든지 네 글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해서 심지어 한글, 한자, 영어를 섞어 ‘내로남불’이라고 합니다.
가상칠언 가운데 첫 번째 말씀은 34절에 나오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은 43절에 나오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입니다. 오늘은 이 두 번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욕했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조롱했고 군인들은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난하면서 네가 구원자이면 너 자신을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조롱했습니다. 너는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운다더니 이렇게 죽어가느냐? 네 이름이 예수, 구원인데 온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너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느냐?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너는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아무도 너를 돕지 않느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조차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런데 양쪽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예수님에게 한 말은 뜻밖에도 굉장히 신학적인 표현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비방한 강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는 예수님에게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다른 유대인처럼 그도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아이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닌 것에 화가 났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 다윗같은 위대한 왕을 기다리고 있으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다른 강도는 그 사람과 전혀 다른 고백을 했습니다. 그도 예수님에 대해 소문은 들었는데 지금 자기와 나란히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며 방금 예수님이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 죄수를 향해 하나님이 두렵지 않으냐고 꾸짖었습니다(40절). 그리고 이 사람은 세 가지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41~42절에서 그는 중요한 세 가지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 강도가 믿었던 세 가지는 우리가 모두 믿어야 할 교리입니다. 이 강도는 오늘 우리의 스승입니다. 그는 무엇을 믿었을까요?
1.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믿었습니다.
(눅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말은 한 편으로는 십자가에 처형될 사형수라는 뜻이며 나아가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합니다. 만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 싫으면 안 죽으면 되지만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에 반드시 죽을 운명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반드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구원받기 위해서 모두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죽을 죄를 지은 사형수입니다.”
2. 그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믿었습니다.
(눅 23:41)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동료 죄수를 꾸짖고 너와 나는 죽을 죄인이라고 말한 후에 그는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죽을죄가 없는데 죽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유대인 관리들과 로마 군병들까지 예수님을 향해 네가 구원자이면 먼저 너 자신을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강도 살인죄로 사형당하는 죄수까지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좀 구원해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난과 조롱에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오히려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는 죽을죄가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죽을죄가 없는데 죽는 것은 바로 인류의 죄,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는 것을 그는 알고 믿었습니다.
그 강도와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죽을 죄인임을 믿는다면 또한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죽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내 지은 죄 흉악하나 주 예수 믿으면
용서받은 강도 같이 곧 구원받으리.
3.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와 자신의 죄를 위해 대신 죽는 것을 믿은 그 강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는 것과 예수님이 자기를 그 나라에 데려갈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죄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지만 그는 특히 강도, 살인, 흉악범으로 처형당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감히 자신을 천국에 데려가 달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실 때 자기를 좀 기억해 달라고만 부탁했습니다. 이 말은 소극적인 것 같지만 간곡한 부탁입니다.
이 강도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마지막은 흉악한 강도이며 사형수입니다. 그는 결코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 강도는 예수님에 관하여 매일 성전에서 제사하던 대제사장도 몰랐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는 율법학자도 몰랐던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 해답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려고 죽는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15:10)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이 강도의 부탁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가상칠언 두 번째 말씀입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언젠가 한 번은 다 죽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으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어서 죽으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죽는 즉시 낙원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죽음만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 너머의 천국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위대한 스승 John Calvin은 자기와 죽음은 10시간 거리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Calvin이 항상 죽음을 기억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Calvi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죽음을 소망하기는커녕 죽음이라는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재앙으로 여기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천국은 믿는 성도 여러분은 죽음이 재앙이 아니라 죽음이 천국의 관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끝이고 죽음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데 어떻게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청교도 신학자 리처드 백스터 목사는 말하기를 죽음은 모든 복의 온전함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알면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고 기다림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죽은 후에는 즉시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 나라는 낙원입니다. 그 나라에는 질병, 고통, 눈물, 실패, 그리고 사망이 없습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낙원은 헬라어로 파라데이소스(παράδεισος), 영어로 파라다이스(paradise)입니다. 성도는 죽는 즉시 이 낙원에 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낙원에 가는 것은 영혼뿐입니다. 천국은 영혼만 들어가도 즐거운 낙원이지만 몸과 영혼이 함께 가야 완전히 즐겁습니다. 이는 마치 신데렐라가 재투성이 옷을 입었어도 왕자님의 파티에 가기만 하면 좋겠지만 멋진 드레스를 갖춰 입고 가야 완전히 행복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 우리는 모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여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한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 완전한 나라에서 우리는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과 소망으로 사는 여러분은 세상의 유혹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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