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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의 진실 - 제1부
1. 아버님의 이북 노정
3) 예수님의 사명 인수
-예수님의 고난노정을 총탕감하신 흥남 감옥 2년 8개월
③ 김인호(金仁鎬) 씨의 증언
김인호 씨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물인데, 자기 반생(半生)에 관하여 『서울로 오는 길』(도서출판 민중, 1985년 출판)이란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 속에는 자기가 흥남 특별노무자수용소에서 강제 노동형에 복역하였던 체험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책 제1장에 「감옥 속의 성자(聖者) 문선명 씨(文鮮明 氏)」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에 김씨가 옥중에서 본 아버님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씨는 기독교 신도도 아니고 통일교회 신도도 아니다. 다음은 김인호 씨가 이 책에서 아버님에 관하여 쓴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그(문 선생)는 공산당원인 간수들도 인정하는 모범수였다. 그 이유는 작은 반칙(反則)도 범한 일이 없었고, 체격은 장건(壯健)하여서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일하면 동료들 모두가 그만큼 고생하지 않아도 되지요.” 주위 사람으로부터 자기 몸을 좀 더 위하면 어떠냐는 말을 들으면 문 선생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면서 일하는 손을 쉬지 않으려고 하였다.
문씨는 말수는 적었지만, 언제나 편안한 얼굴로 일관하여 있었고 일하는 면에서는 누구도 그의 힘과 열심에는 따를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문씨는 한 번도 목욕탕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하루 동안 바쁘게 일을 하면 눈이나 코에까지도 비료의 가루가 붙고 거기에 땀과 먼지가 섞여서 끈적거려 목욕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령 깨끗하지 않은 폐수와 같은 공장 용수를 써서라도 목욕을 하는 것이다. 후일에 문선명 씨에 관하여 마음에 걸렸던 수수께끼가 풀렸다.
어느 날 나는 용변을 보려고 생각해서 보통 때보다도 두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났다. 아직도 날이 밝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 안은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눈이 보이기를 기다리면서 조용히 앉아있는데 방 한쪽 구석에 어둠가운데 앉아있는 문선명 씨의 모습이 보였다.
“김군인가? 일찍 일어나셨구만!”
기도를 하고 있던 것일까? 문씨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말을 걸어 왔다.
“매일 이와 같이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 계시는 겁니까? 피곤하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일찍 일어나는 데 몸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더 쉬려고 하면 몸이 근질근질해져요.”
용변을 마치고 돌아오니까 문선명 씨는 윗도리를 벗고 수건에 물을 묻혀서 냉수욕을 하고 있었다.
“문 선생, 춥지 않습니까, 감기라도…”
“공장에서 몸을 씻지 않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서 몸을 닦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는 공장 폐수와 같은 물에서는 결코 몸을 씻지 않고 마시는 물을 귀하게 수건에 머금게 하여 놓고 매일 새벽에 전신을 닦아 깨끗이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어나서 기도를 마친 후에 냉수욕을 하고 다시 한 번 기도를 한 후에 식사를 하고 작업에 나가는 것이었으니까 그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죽음과 이웃하고 있는 환경에서 자기의 체력을 관리하는 것만 해도 보통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데도 자기의 종교의식을 지켜가기 위해서 황금과도 같이 값지고 중요한 수면 시간을 매일 두 시간씩 줄여 버틴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기도 했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었다. 이 소문은 수용소 내에 널리 퍼져있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문선명 씨는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간수가 이유 없이 문선명 씨를 학대하면 그 밤 산신(山神)과 같은 노인이 나타나서 간수에게 무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문선명 씨 자신이 먼저 알고 있어서 전날 자기를 괴롭혔던 간수에게 전날 밤에 본 꿈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본 것 같이 상세히 이야기하여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옛날도 지금도 기독교도도 아니고 통일교회 신도도 아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가 있다. 문씨가 흥남 감옥에서 보여준 변하지 않는 언행(言行)과 인격은 길이 잊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 문씨와 재미있는 생각이 나는 일이 있다. 당시의 수용소에서는 먹을거리가 정말로 부족하였기 때문에 차입에 의해서 받는 음식을 이웃의 동료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씨는 자기가 먹어야 할 식사를 배고파서 참을 수 없는 이웃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먹을 것에 굶주려 중노동에 고통을 받고 있던 수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던 이야기가 있었다. 감옥 속에서 얻어먹은 콩 한 알은 일반 세상에서는 돼지 한 마리에 필적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듯이 수용소에서 아버님과 같이 지내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인호 씨가 평양형무소에서 흥남수용소로 온 것은 1948년 11월이었다. 아버님이 흥남에 온 후의 일이다. 김씨가 수용소에서 해방된 것은 아버님과 같은 1950년 10월 14일이다. 그는 감방 내에서 이동이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 될 정도로 아버님과 같은 곳으로 옮겨졌다. 아버님과 같은 감방에서 1년 정도 그는 침식을 함께 하였다.
1994년 11월 16일에 서울의 이태원에 있는 한 호텔에서 일본인 기자 다케다 요시로(竹田吉郞) 씨가 김인호 씨를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먼저 수용소에서 본 문 선생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내(김인호)가 흥남수용소에 있을 때는 23~25세였습니다. 문 선생은 연상이고 고귀한 분이었습니다. 인생의 문제에 관해서도 상담할 수가 있었고, 마음으로부터 존경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 문 선생은 정말로 자는 시간이 적은 분이었습니다. 하루의 수면 시간은 세 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까요. 불언실행(不言實行)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만 행동으로 우리에게 본(本)을 보여주셨습니다.”
김씨에 의하면, 흥남수용소의 감방은 좁았다. 한 방에 약 25인(때로는 30~40인)이 짐짝 같이 집어넣어져 있었다. 너무나 좁기 때문에 몸을 옆으로 세우지 않으면 쉴 수가 없었다. 밤중에 변기 쪽으로 가기 위하여 일어나면 다시 자기 잠자리를 확보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방 안에서 어떻게 자고 있었는가를 김씨는 필자에게 그려주었다. 김씨로부터 들은 하루의 스케줄은 다음과 같다.(같은 수용소에 있던 사람에 따라서 시간 등은 약간 다르게 되어있다.)
[하루의 스케줄]
▪ 조조(早朝) 4시 반경에 사이렌이 울리고 간수들이 ‘기상!’이라고 외치며 돌아다닌다.
▪ 조식 시간은 30분이었지만, 조식은 2~3분이면 다 끝나는 분량이었다.
▪ 오전 5시경 운동장에 집합해 점호(點呼)를 한다.
▪ 오전 6시경 수용소로부터 6km 떨어진 흥남비료공장으로 출발한다. 탈주를 방지하기 위하여 서로 손을 잡고 아래를 보면서 4열로 걸어간다. 일요일을 빼고는 얼마나 비가 세게 오든지, 눈이 많이 쌓이든지 수용소와 공장 사이를 왕복한다.
▪ 오전 7시 반경에 공장에 도착, 그날의 작업 배치를 결정한다.
▪ 오전 8시경에 작업 개시
▪ 정오로부터 주식, 조식과 같이 2~3분이면 다 먹어치우는 분량이다. 주식 시간의 나머지 시간에는 오락회가 열린다. 이것은 수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고 간수들이 즐기기 위해서 수인들에게 유행가 같은 것을 노래하게 한다. 노래하는 사람은 매일 거의 결정되어 있었다. 오락회 때에 졸기라도 하면 뒤로부터 얻어맞게 된다. 수인끼리 잡담은 할 수 없다.
▪ 오후 1시경부터 6시까지 작업(휴게 시간이 있다.) 그 후에 다시 수용소로 돌아간다. 그곳에 돌아가면 다시 간수들로부터 체크를 받는다. 작업장으로부터 유리조각, 담배꽁초, 끈, 성냥 같은 것을 숨겨가지고 오지 않았는가를 조사 받는다.
▪ 오후 8시경에 석식(夕食)
▪ 오후 9시경부터 독보회(讀報會)가 약 30분, 조선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의 사설을 읽고 토론한다. 또, 그날의 작업에 관한 자기비판 등 감상문(感想文)은 마크된 사람이 1주간이나 10일간에 한 번 쓴다.
▪ 오후 10시경 취침
물은 하루 아침과 저녁에 2회 받는다. 낮에는 개인별로는 받을 수 없지만, 물이 저장되어 있는 곳으로부터 한 컵 양만큼 받을 수 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
일요일은 작업이 없기 때문에 ‘독보회’는 길어서 약 2시간, 1시간은 일광욕(日光浴), 세탁 등을 한다. 목욕은 1주간에 2회 정도 있었다. 편지는 1~2개월에 1회 쓸 수가 있었다.
면회는 기본적으로 1개월에 1회였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면회 시간은 약 30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면회 장소도 정해 있지 않았고, 비교적 자유롭게 면회할 수가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부터는 면회를 위한 특별한 장소가 만들어지고, 면회 때에는 간수가 반드시 입회(立會)하였다. 면회는 지시한 대로 하지 않으면 그 후에는 면회할 수 없게 되었다. 면회 때 가져오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이 미숫가루(쌀, 보리를 볶아서 가루로 만든 것), 옷, 내의였다.
수인복(囚人服)은 최초로 지급된 것을 계절과 관계없이 계속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의 같은 것의 지급은 없다. 옷이 해지면 자기가 꿰매야 한다. 영양실조가 되면 1개월쯤 지나면 죽어갔다. 피부를 눌러서 들어간 것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죽는 것은 시간문제다. 밥이나 죽은 사람의 입에 넣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국은 바닷물을 끓인 탓인지 쓰고, 식기의 바닥에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해서 찬찬히 보면 작은 돌 같은 것이 깔려 있기도 한다.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이 9월 9일이 오면 김일성 주석의 배려로 소 한 마리가 선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날 소장의 긴 김일성 주석 찬양의 연설이 끝나고 기다리고 기다린 식사가 나왔다. 그런데 소고기 국이라고 하지만, 소기름 한 방울도 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생활이 계속되면 수인들 사이에는 살벌한 분위기가 생긴다. 또, 감방 속에는 간수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게 된다. 스파이는 정보를 조금 제공하면 밥을 조금 더 받게 되기 때문에 수인은 쉽게 스파이 역을 맡아버리게 된다.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수인 이외에 일반 노동자도 있었다. 그들은 8시에 출근하여 오후 6시가 되면 일을 마친다. 노동량 같은 것은 특별히 없는 것 같았고, 작업 사이사이에 담배도 피우고 잡담도 자유롭게 하고 있었다. 점심에는 그들이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면 자연히 입에서 침이 흘러 내렸다.
겨울에 눈이 1m쯤 쌓인 때가 두 번 있었다. 눈이 쌓이건 비가 오건 일요일 이외에는 매일 왕복하였다. 10인 1조의 작업 내용은 비료를 가마니에 넣는 사람 2인, 무게를 재는 사람 1인, 가마니를 운반하는 사람 2인, 가마니의 입을 새끼로 매는 사람 2인, 그 가마니를 화차에 올리는 사람 2인, 화차 위에서 가마니를 받아 놓는 사람이 1인 합계 10인이다.
김인호 씨의 책에는 감옥 내에 있던 한 목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김씨에 의하면, 그 목사의 사위가 감방에서 말라리아에 걸렸는데, 말라리아 약을 그 목사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위가 목사에게 달라고 애원했지만, 받지 못하였다. 그 목사는 유명한 목사이고 출옥 후에도 많은 신도들로부터 존경과 명성을 얻고 있었다. 김인호 씨는 그 목사의 수용소에서의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목사에 대하여서는 복잡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최후로 김씨와의 잡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기자는 마지막으로 “문선명 선생은 어떠한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았다. 그때 김씨는 즉석에서 “산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순간 말하고 있는 것이 즉석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말을 계속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공자, 석가, 마호메트 등의 성인은 죽고 지금은 지상에 없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성인은 문 선생입니다.”
김씨는 이와 같은 말을 증언한 것이다. 이것이 지옥 중의 지옥이라고 하는 가혹한 수용소에서 약 1년간 아버님과 행동을 24시간 함께하면서 살아왔던 인물의 말이다. 더욱이 지옥과 같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은 더 어려운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야 말로 인간의 진실한 마음을 알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이다.” “감옥은 인간 사회의 축도이며, 인간의 본질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따르면, 김씨의 “문 선생은 성인”이라고 하는 증언은 아버님의 진실한 마음,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흥남수용소에 한(限)하지 않고 강제노동이나 수감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의 회고록을 읽으면 모두가 인간인 것을 잊어버리고 마는 상황 하에서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한 인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케다 기자가 보기에는, 김인호 씨는 농담 하나도 말하지 못할 것 같은 순진한 성격의 사람으로 보였다. 성실함이 전해져 왔다.